오늘의 나와 나의 오늘을 위한 책

 

 

1

 

영문도 모른 채 마음 아픈 해질녘이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이다. 내일 다시 해가 뜰 것임을 아는 게 조금의 도움도 되지 않는 불안한 밤, 빈틈없이 밝은 빛 속에서 홀로 그늘진 마음을 숨기느라 끊임없이 초라해지는 한낮 같은 것들이 종종 끼어드는 것이 삶이라서, 때론 그저 산다는 이유 하나면 격려나 보상을 받을 자격이 충분한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2

 

우주공간에 박힌 별만큼 삶은 많고, 그 많은 삶만큼 책 또한 많기도 많아서, 세상에는 오늘의 나에게 꼭 맞는 한 권의 책이 반드시 있을 거라고 단단히 믿게 된다. 단지 우리가 서로를 스쳐 지나쳤을 뿐. 생각한다. 내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어느 한 별을 손가락으로 가리킨 순간에서 몇 백만 광년이 지나 그 별에 사는 누군가가 역시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내 손가락 지문에서 태어나 어두운 우주를 헤엄쳐서 마침내 그 별까지 도달한 독특한 파장의 가녀린 빛을 포착하는 일에 대해서. 만났는지도 모르고 만나는 일에 대해서. 모든 결정적인 만남은 회상 속에서만 알아챌 수 있다는 신비한 법칙에 대해서. 그래서,

 

 

 

3


그때 그 책이 내 인생의 골목길에 모퉁이 하나를 점지하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시간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책이 나와 다른 장점과 단점과 관점을 가지고 그때와 다른 시점을 살고 있는 다른 이들에게는 어떤 의미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한낱 종이뭉치쯤으로 여겨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넉넉히 받아들이려면 공간의 도움조차 필요하다. 마음의 넉넉한 공간.

 

 

 

4

 

그 공간 역시 사실은 시간이 열어젖힌다. 결국은 모두 시간이 하는 일이다.

 

 

 

5

 

그러나 시간과 공간의 도움으로 가끔은, 내게 꼭 필요한 순간에 꼭 필요한 책을 읽고 있다는 확신에 찬 손길로 책장을 넘기고, 자신감 있게 밑줄을 긋고, 여백에 짧은 글귀를 남기며 스스로 감탄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충만함, 지금 내가 내게 너무도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데서 오는 그 충만함에 듬뿍 젖어 있는 사람은 강하다. 깊게 읽고 빽빽하게 쓰며 넓게 생각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조금씩 삶이 단단해진다. 흔들리지만 흔들리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둘러가지만 둘러가는 일을 어려워하지 않게 된다. 축복처럼 쏟아지는 결맞음의 경험. 그래도 한 번은 겪어봤고, 그게 어떤 기분인지 잘 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해야 할까?

 

 

 

6

 

내게 필요한 책을 읽고 싶다.

 

푸슈킨 문학은 기본적으로 밝고 경쾌합니다슬픔에 빠져 있을 때 감정을 끌어올려 줍니다정신 건강에 좋다고 할까요레르몬토프나 고골 같은 작가로 가면 정신 건강에 조금 유해합니다독자에게도 체질에 따라서 맞는 작가들이 있어요평소에 기분이 너무 고양돼 있는 분들은 푸슈킨하고 잘 안 맞습니다같이 가벼우니까요그런 경우에는 끌어내려 줄 수 있는 좀 우울한 작가들이 좋습니다그 대신 평소에 좀 우울하다 싶으면 푸슈킨을 많이 읽으세요그러면 도움을 얻을 수가 있어요물론 푸슈킨의 모든 작품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유해한 작품도 몇 편 있어요청동 기마상이나 스페이드 여왕같은 작품에서는 주인공이 미치는 걸로 되어 있어요푸슈킨도 미칠 지경일 때 쓴 거라서 그렇습니다.

이현우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19세기, 56



책은 다방면으로 사용할 수 있다슬플 때 얼굴을 가릴 수 있다얼굴을 가리고 조금 울 수도 있다마음이 펄럭일 때 납작한 돌멩이처럼 배 위에 올려놓을 수도 있다잡생각이 가득할 때 같은 문장을 반복해 읽으며 생각의 둘레를 걷고걷고또 걸을 수 있다운이 좋으면 생각의 둘레에서 벗어나 책 속으로 걸어들어갈 수도 있다다정한 목소리를 듣고 싶을 때 펼치면 아늑해진다나는 운이 좋게도 다정한 목소리를 내는 작가를 여럿 알고 있다내 모습이 싫을 때 가장 먼 곳으로 재빨리 데려다주는 것은 책뿐이다어떤 비행기도 하지 못한다돌아오는 것도 쉽다음악이나 영화에서 빠져나오려면 버튼을 눌러야 하지만 책은 간단하다눈을 떼면 된다내 몸처럼 붙었다 다른 몸처럼 떨어진다혼자 행하지만 외롭지 않은 일이 독서다좋은 책을 읽고 난 뒤 책장을 덮는 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심심할 땐 책이 좋다내가 책을 읽는 첫번째 이유는 '재미'때문이다신기하게도 모든 재미있는 일은 나를 변하게 하고삶을 변하게 하고세상을 변하게 만든다.

  그러니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작고 가벼운무기를 사야 한다면책을 사야 한다.

장석주박연준내 아침 인사 대신 읽어보오, 399-401 

 

나는 어릴 적에 그림을 볼 때 거기에 묘사된 사물이 실제로 어디에 존재하는지를 알고 싶어했음을 다시 떠올렸다예를 들어 우리 집에는 빙하 풍경을 담은 유화가 한 점 있었는데그 그림의 아래 가장자리 부분에 알프스의 움막 농가가 그려져 있었다나는 이 풍경과 움막 농가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심지어 화가가 서 있던 위치까지도 알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그래서 사람들이 이 그림은 상상화일 뿐이라고 말해도 믿을 수가 없었다그림은 그냥 그림일 뿐그것에 관해서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하면 오랫동안 거의 질식할 것 같은 상태에 있곤 했다글자 읽는 법을 터득할 때도 상황은 흡사했다존재하지도 않은 것에 대해 무언가를 기술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학교에서 배우는 독서교본에 나와 있는 장소는 분명히 존재했다비록 내 소유는 아니지만 근처 어딘가에 존재하는 장소로서 심지어 그곳이 어딘지도 알고 있었다내가 처음으로 읽었던 책들은 항상 일인칭 시점의 이야기들이었으며일인칭 화자가 등장하지 않는 책을 접하면 끔찍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페터 한트케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122-123 

 

 

7


 

이 소규모 서클의 급성장에 경악한 경찰은 1898년에 트로츠키를 비롯한 회원들을 체포했다트로츠키는 감옥에 갇혀 있는 2년 동안 많은 책을 읽고 많은 글을 썼다그가 처음으로 레닌의 몇몇 저작을 읽고프리메이슨의 역사를 다룬 마르크스주의 저작을 처음 쓴 것도 이때였다그는 또동료 재소자들 사이에서 선동을 하기도 했다비록 효과는 없었지만 극적인 모자 착용 투쟁을 벌였다가 한동안 독방에 갇힌 적도 있었다.

마이크 곤살레스 외처음 만나는 혁명가들, 216


우스티카 섬의 교도소에서 다른 공산주의자들이나 반파시즘 투사들과 함께 즐겁게 지낸 몇 개월을 제외하면그람시는 형기 내내 사실상 격리돼 있었다정권의 의도대로 그의 건강은 나빠졌다특히 폐결핵동맥경화증척추카리에스(척추가 차츰 파괴돼 등의 근육을 따라 고름 종기가 생기는 병)가 그의 몸을 점차 망가뜨렸다그람시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몸이 너무 아파서 특별 대우를 해달라고 간청하며 정권에 굴복하는 것이었다그러나 그는 결코 그러지 않았다.

  그람시는 믿기 힘든 강인한 의지력으로 역경을 헤쳐 나갔고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929년부터 1935년까지 노트에 다양한 글을 썼다그 노트들은 천신만고 끝에 안전하게 밖으로 반출됐다. <옥중 수고>는 엄청나게 어려운 조건에서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고전을 전혀 열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쓰였다(그람시는 순전히 기억에 의지해서 마르크스주의 고전들을 인용했다). 그람시는 노트 33권의 2848쪽을 빽빽하게 채워 넣는 데 성공했다.

같은 책, 318-319


감옥에서 읽거나, 읽어서 감옥이거나. 감옥에서도 읽고 쓰는 이들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감옥에서도 밖에서처럼 읽고 쓸 수 있어서 감옥이 감옥이 아니었습니까, 아니면 감옥 밖에서도 감옥에서처럼 읽고 쓸 수 있어서 온 세상이 감옥이었습니까?

 

가끔은 읽는 일이 감옥에 스스로를 가두는 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읽는 일은, 생각보다 다양한 종류의 집착을 갖게 한다. 많이 읽어보면 안다. 그 집착은 양에 대한 집착, 질에 대한 집착 따위로 단순하고 추상적이면서 무신경하게 이름붙일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는 것을. 이를테면 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읽을 때 총론서와 각론서의 수적 비율과 읽는 순서에 대한 집착 같은 것. 총총각총각각총각총각과 총총각각총각총각각총 중에서 어느 쪽을 골라야 할지에 대한 벗어날 수 없는 고민 같은......

 

 

 

 

 

--- 읽은 ---

돈 후안 외 / 티르소 데 몰리나 지음 / 전기순 옮김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19세기 / 이현우 지음

불교입문 /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지음

처음 만나는 혁명가들 / 마이크 곤살레스 외 지음 / 이수현 옮김

 


--- 읽는 ---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 페터 한트케 지음 / 안장혁 옮김

슈퍼맨은 왜 미국으로 갔을까 / 한민 지음

전락 / 필립 로스 지음 / 박범수 옮김

물고기들의 기적 / 박희수 지음

하늘과 땅 / 산도르 마라이 지음 / 김인순 옮김

뻬쩨르부르그 이야기 / 니콜라이 고골 지음 / 조주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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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9-02-07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중에 필립 로스의 <전락>만 읽은...;;;;

syo 2019-02-07 14:20   좋아요 0 | URL
<전락>을 2년쯤 전에 읽었다가 이번에 다시 읽었는데 거의 처음 읽는 거랑 진배 없더라구요..... 저기 나열되어 있는 다른 애들도 아마 비슷한 운명이겠지요ㅠㅠ

jeje 2019-02-07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요즘 읽고 있는 책을, 어제 급하게 만난이에게 선물했어요. 저에게 너무 좋은 책이었는데, 그 사람은 어떤 느낌으로 읽게 될지 정말 너무너무 궁금했어요. 언젠가 읽게 된다면 어땠는지 꼭 얘기해주기로 했습니다. 내가 좋아한 책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도 좋아하면 더 좋은 책이 될거같아요. 기대됩니다.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ㅎㅎ

syo 2019-02-07 23:56   좋아요 0 | URL
jeje님께서 선물하신 책이 선물 받은 분께서도 좋아할 만한 책이었으면 좋겠네요. 그렇지만 내가 좋아해서 권한 책이 다른 이에게 그만큼 좋은 책이 못 되는 경험도 생각해보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더라구요. ^-^

카알벨루치 2019-02-08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교입문>도 읽으심????? ㅋㅋ

syo 2019-02-08 09:20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 호기심천국ㅋㅋㅋ

카알벨루치 2019-02-08 10:30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AgalmA 2019-02-11 0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옥이라서 <주역> 같은 오래 읽을 수 있는 동양철학 책을 봤다는 신영복 선생님 얘기에 제가 감옥에 가면 뭘 읽을까 생각해보게 되더군요. 일단 감옥이나 병원에 들어가기 전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다 읽을 생각입니다. 그런 데에 곧 들어가진 않을 거 같아서 답답한 심정에ㅎ;

읽고 쓰는 게 감옥이라는 정서는 다들 공통적으로 느끼는 점인 듯요.

syo 2019-02-11 00:35   좋아요 2 | URL
읽고 쓰는 게 감옥이라서 감옥에서 읽고 쓰는 게 더 치열해지는 구조인가요......
오, 생각해보니 비슷한 경험 있다.

감옥은 아니지만, 논산에서 훈련받을 동안 정말 읽을 게 궁해지니까 교회에서 나눠준 포켓 사이즈 신약성경을 불침번 서면서 3회독을 하게 되더라구요ㅋㅋㅋㅋㅋㅋㅋ

무신론자 협회에서 배교자라고 잡으러 오는 거 아닌가 몰라....

AgalmA 2019-02-11 00:38   좋아요 0 | URL
군대가서 책 열심히 읽는 분 많더군요^^ 그래서 거기 책도 많이 비치하잖아요. 자기계발서 같은 거만 많이 읽지 않길 바랄 뿐ㅎ;

syo 2019-02-11 00:42   좋아요 0 | URL
제 때는 1Q84가 들어와 있었는데, 야한 장면 있는 부분만 손때가 타더니 결국 얼마 못가 소실되고 만 일이 있었지요...... 하루키를 그렇게 배운 아이들이 제대를 하였는데, 제대 후에도 꾸준히 하루키를 읽어주고 있는가 모르겠다.

무식쟁이 2019-02-11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님글 참 좋아요. (아이고 참. 이 답답한 표현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