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나와 나의 오늘을 위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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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도 모른 채 마음 아픈 해질녘이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이다. 내일 다시 해가 뜰 것임을 아는 게 조금의 도움도 되지 않는 불안한 밤, 빈틈없이 밝은 빛 속에서 홀로 그늘진 마음을 숨기느라 끊임없이 초라해지는 한낮 같은 것들이 종종 끼어드는 것이 삶이라서, 때론 그저 산다는 이유 하나면 격려나 보상을 받을 자격이 충분한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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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공간에 박힌 별만큼 삶은 많고, 그 많은 삶만큼 책 또한 많기도 많아서, 세상에는 오늘의 나에게 꼭 맞는 한 권의 책이 반드시 있을 거라고 단단히 믿게 된다. 단지 우리가 서로를 스쳐 지나쳤을 뿐. 생각한다. 내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어느 한 별을 손가락으로 가리킨 순간에서 몇 백만 광년이 지나 그 별에 사는 누군가가 역시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내 손가락 지문에서 태어나 어두운 우주를 헤엄쳐서 마침내 그 별까지 도달한 독특한 파장의 가녀린 빛을 포착하는 일에 대해서. 만났는지도 모르고 만나는 일에 대해서. 모든 결정적인 만남은 회상 속에서만 알아챌 수 있다는 신비한 법칙에 대해서.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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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책이 내 인생의 골목길에 모퉁이 하나를 점지하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시간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책이 나와 다른 장점과 단점과 관점을 가지고 그때와 다른 시점을 살고 있는 다른 이들에게는 어떤 의미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한낱 종이뭉치쯤으로 여겨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넉넉히 받아들이려면 공간의 도움조차 필요하다. 마음의 넉넉한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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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간 역시 사실은 시간이 열어젖힌다. 결국은 모두 시간이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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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시간과 공간의 도움으로 가끔은, 내게 꼭 필요한 순간에 꼭 필요한 책을 읽고 있다는 확신에 찬 손길로 책장을 넘기고, 자신감 있게 밑줄을 긋고, 여백에 짧은 글귀를 남기며 스스로 감탄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충만함, 지금 내가 내게 너무도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데서 오는 그 충만함에 듬뿍 젖어 있는 사람은 강하다. 깊게 읽고 빽빽하게 쓰며 넓게 생각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조금씩 삶이 단단해진다. 흔들리지만 흔들리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둘러가지만 둘러가는 일을 어려워하지 않게 된다. 축복처럼 쏟아지는 결맞음의 경험. 그래도 한 번은 겪어봤고, 그게 어떤 기분인지 잘 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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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필요한 책을 읽고 싶다.



푸슈킨 문학은 기본적으로 밝고 경쾌합니다. 슬픔에 빠져 있을 때 감정을 끌어올려 줍니다. 정신 건강에 좋다고 할까요. 레르몬토프나 고골 같은 작가로 가면 정신 건강에 조금 유해합니다. 독자에게도 체질에 따라서 맞는 작가들이 있어요. 평소에 기분이 너무 고양돼 있는 분들은 푸슈킨하고 잘 안 맞습니다. 같이 가벼우니까요. 그런 경우에는 끌어내려 줄 수 있는 좀 우울한 작가들이 좋습니다. 그 대신 평소에 좀 우울하다 싶으면 푸슈킨을 많이 읽으세요. 그러면 도움을 얻을 수가 있어요. 물론 푸슈킨의 모든 작품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유해한 작품도 몇 편 있어요. 『청동 기마상』이나 『스페이드 여왕』같은 작품에서는 주인공이 미치는 걸로 되어 있어요. 푸슈킨도 미칠 지경일 때 쓴 거라서 그렇습니다.
_ 이현우,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19세기』, 56쪽
책은 다방면으로 사용할 수 있다. 슬플 때 얼굴을 가릴 수 있다. 얼굴을 가리고 조금 울 수도 있다. 마음이 펄럭일 때 납작한 돌멩이처럼 배 위에 올려놓을 수도 있다. 잡생각이 가득할 때 같은 문장을 반복해 읽으며 생각의 둘레를 걷고, 걷고, 또 걸을 수 있다. 운이 좋으면 생각의 둘레에서 벗어나 책 속으로 걸어들어갈 수도 있다. 다정한 목소리를 듣고 싶을 때 펼치면 아늑해진다. 나는 운이 좋게도 다정한 목소리를 내는 작가를 여럿 알고 있다. 내 모습이 싫을 때 가장 먼 곳으로 재빨리 데려다주는 것은 책뿐이다. 어떤 비행기도 하지 못한다. 돌아오는 것도 쉽다. 음악이나 영화에서 빠져나오려면 버튼을 눌러야 하지만 책은 간단하다. 눈을 떼면 된다. 내 몸처럼 붙었다 다른 몸처럼 떨어진다. 혼자 행하지만 외롭지 않은 일이 독서다. 좋은 책을 읽고 난 뒤 책장을 덮는 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심심할 땐 책이 좋다. 내가 책을 읽는 첫번째 이유는 '재미'때문이다. 신기하게도 모든 재미있는 일은 나를 변하게 하고, 삶을 변하게 하고, 세상을 변하게 만든다.
그러니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작고 가벼운' 무기를 사야 한다면, 책을 사야 한다.
_ 장석주, 박연준, 『내 아침 인사 대신 읽어보오』, 399-401쪽
나는 어릴 적에 그림을 볼 때 거기에 묘사된 사물이 실제로 어디에 존재하는지를 알고 싶어했음을 다시 떠올렸다. 예를 들어 우리 집에는 빙하 풍경을 담은 유화가 한 점 있었는데, 그 그림의 아래 가장자리 부분에 알프스의 움막 농가가 그려져 있었다. 나는 이 풍경과 움막 농가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 화가가 서 있던 위치까지도 알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그림은 상상화일 뿐이라고 말해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림은 그냥 그림일 뿐, 그것에 관해서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하면 오랫동안 거의 질식할 것 같은 상태에 있곤 했다. 글자 읽는 법을 터득할 때도 상황은 흡사했다. 존재하지도 않은 것에 대해 무언가를 기술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독서교본에 나와 있는 장소는 분명히 존재했다. 비록 내 소유는 아니지만 근처 어딘가에 존재하는 장소로서 심지어 그곳이 어딘지도 알고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읽었던 책들은 항상 일인칭 시점의 이야기들이었으며, 일인칭 화자가 등장하지 않는 책을 접하면 끔찍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_ 페터 한트케,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122-1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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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규모 서클의 급성장에 경악한 경찰은 1898년에 트로츠키를 비롯한 회원들을 체포했다. 트로츠키는 감옥에 갇혀 있는 2년 동안 많은 책을 읽고 많은 글을 썼다. 그가 처음으로 레닌의 몇몇 저작을 읽고, 프리메이슨의 역사를 다룬 마르크스주의 저작을 처음 쓴 것도 이때였다. 그는 또, 동료 재소자들 사이에서 선동을 하기도 했다. 비록 효과는 없었지만 극적인 모자 착용 투쟁을 벌였다가 한동안 독방에 갇힌 적도 있었다.
_ 마이크 곤살레스 외, 『처음 만나는 혁명가들』, 216쪽
우스티카 섬의 교도소에서 다른 공산주의자들이나 반파시즘 투사들과 함께 즐겁게 지낸 몇 개월을 제외하면, 그람시는 형기 내내 사실상 격리돼 있었다. 정권의 의도대로 그의 건강은 나빠졌다. 특히 폐결핵, 동맥경화증, 척추카리에스(척추가 차츰 파괴돼 등의 근육을 따라 고름 종기가 생기는 병)가 그의 몸을 점차 망가뜨렸다. 그람시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몸이 너무 아파서 특별 대우를 해달라고 간청하며 정권에 굴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러지 않았다.
그람시는 믿기 힘든 강인한 의지력으로 역경을 헤쳐 나갔고,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929년부터 1935년까지 노트에 다양한 글을 썼다. 그 노트들은 천신만고 끝에 안전하게 밖으로 반출됐다. <옥중 수고>는 엄청나게 어려운 조건에서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고전을 전혀 열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쓰였다(그람시는 순전히 기억에 의지해서 마르크스주의 고전들을 인용했다). 그람시는 노트 33권의 2848쪽을 빽빽하게 채워 넣는 데 성공했다.
_ 같은 책, 318-319쪽
감옥에서 읽거나, 읽어서 감옥이거나. 감옥에서도 읽고 쓰는 이들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감옥에서도 밖에서처럼 읽고 쓸 수 있어서 감옥이 감옥이 아니었습니까, 아니면 감옥 밖에서도 감옥에서처럼 읽고 쓸 수 있어서 온 세상이 감옥이었습니까?
가끔은 읽는 일이 감옥에 스스로를 가두는 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읽는 일은, 생각보다 다양한 종류의 집착을 갖게 한다. 많이 읽어보면 안다. 그 집착은 양에 대한 집착, 질에 대한 집착 따위로 단순하고 추상적이면서 무신경하게 이름붙일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는 것을. 이를테면 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읽을 때 총론서와 각론서의 수적 비율과 읽는 순서에 대한 집착 같은 것. 총총각총각각총각총각과 총총각각총각총각각총 중에서 어느 쪽을 골라야 할지에 대한 벗어날 수 없는 고민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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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후안 외 / 티르소 데 몰리나 지음 / 전기순 옮김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19세기 / 이현우 지음
불교입문 /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지음
처음 만나는 혁명가들 / 마이크 곤살레스 외 지음 / 이수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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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 페터 한트케 지음 / 안장혁 옮김
슈퍼맨은 왜 미국으로 갔을까 / 한민 지음
전락 / 필립 로스 지음 / 박범수 옮김
물고기들의 기적 / 박희수 지음
하늘과 땅 / 산도르 마라이 지음 / 김인순 옮김
뻬쩨르부르그 이야기 / 니콜라이 고골 지음 / 조주관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