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 이건 분명히 하자, 꼭 네가 좋아서 창문을 닫은 건 아냐
1
늦은 밤, 잠 못 이룬 엄마가 시래기를 듬북 넣고 된장을 끓였다. 묵직한 된장 냄새가 거실을 휘감아 돌다가 살짝 열린 방문 틈새로 들어와, 내 침대에 함께 누웠다. 너희 집 된장은 냄새가 참 진하다는 말을, 동생의 남자친구가 했더란다. 도시 외곽에 있는 호수공원에 다녀온 날, 내가 차에 올라타자 여자친구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앗, 된장 먹었어. 동생의 남자친구도 내 여자친구도, 그래서 어쨌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동생과 나도 또한 그랬다. 그러나 이 밤만큼은 어쩐지 언짢아서, 나는 얼른 몸을 일으켜 방문을 닫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가을이 있어야 할 자리를 슬쩍 훔친 겨울이 열린 창을 타넘고 들어왔다. 전기장판을 켜고 두꺼운 이불 속으로 도망쳐 눈을 감았다. 이대로 잠이 들면 된장 냄새 없는 아침이 오겠지. 걸어 놓은 옷에 밸 새도 없이 찬바람에 휘말려 사라지겠지. 웅크릴수록 따뜻해졌다. 따뜻해지니 생각이 났다.
어릴 적부터, 우리 집 된장국은 맛이 참 좋았다. 엄마는 때에 따라 감자와 두부를 넣기도 했고, 이번처럼 시래기를 넣어 끓이기도 했다. 어느 날은 맑은 애가, 또 다른 날은 강된장에 가까운 진하고 걸쭉한 녀석이 상에 올라오기도 했다. 나는 애답지 않게 된장 맛을 안다는 말을 많이 들었고, 도리어 된장 맛을 모르는 애가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을 믿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그 냄새도. 어린 나는 된장 냄새도 참 좋아했던 것 같다.
내일의 시래기 된장국도 틀림없이 맛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시계바늘은 두 시에서 세 시 쪽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거실은 이미 잠잠하고, 낮게 TV소리,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엄마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슬쩍 일어나, 창문을 닫았다. 이렇게 창문 열어 놓고 전기장판 켜고 자는 건 지구 온난화를 가속화시키는 나쁜 짓이니까, 그래서 마지못해 닫고 자는 거라고 한 번 생각해 보았다.
나는 금방 잠이 들었다.



우리는 얼마간 모자란 존재들이다. 피하고 싶지만 별수 없이 부족한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지금의 나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느냐가 삶의 전망을 크게 바꾸는 듯하다. '그래, 무엇이 어찌 되었든 이게 나지' 하면서 자신을 베이스 삼아 스스로의 세계를 만들어가면 된다. 여행하는 기분으로. 그것이 '내게 없는 근사함'을 좇는 것보다 훨씬 홀가분하고 담대한 기운을 선물해준다.
_ 이아림, 『요가 매트만큼의 세계』
어렸을 적에는 구름이 아주 높이 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비행기를 처음 타보고 나서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륙하고 얼마 되지도 않아 구름층을 통과했다. 뭔가 예상했던 것과 달라 아래를 보니, 구름이라는 것들이 조금 높은 산봉우리 부근에 떠 있는 것이었다. 구름은 가도 가도 끝없는 저 위에 있지 않았다. 하늘에서 보면 구름은 오히려 지상에 붙어 있었다. 그걸 깨닫자 이상하게 슬펐다.
_ 박형서, 『당신의 노후』
우리에게는 무수한 삶의 순간들이 있다. 즐거운 순간, 슬픈 순간, 부끄러운 순간, 그 모든 순간들이 우리가 살아 숨 쉬는 순간들이지만, 우리는 아쉽게도 그 모든 순간들을 다 기억하면서 살아가지 못한다. 그것은 단순히 능력의 한계가 아니라 인간이 생각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 통합된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 치러야 하는 비용이다. 요컨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순간, 감당할 수 없는 순간, 삶의 불운이 예감되는 순간마다 우리는 마치 모래 속에 머리를 파묻는 타조처럼 그러한 순간들 속에서 눈을 감는다. 인간이 '나'가 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비용이 있는 것이다. '나'는 나를 위협하는 생각들, 상상들, 이미지들, 바람들을 희생한 결과물이다
_ 맹정현, 『프로이트 패러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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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기'야말로 1980년대식 책 읽기가 지닌 정치성의 핵심이며, '자유'의 다른 이름이다. 대통령과 교육부 장관, 그리고 학교 선생들과 부모들이 읽지 말라고 금지한 것을 꼭 읽는 것, 기실 그 어른들은 겁이 나서 읽어보지도 못한 것, 간혹 읽다가 잡혀가는 것, 숨기고 불태워야 하는 것, 그런 것을 길거리에서 어깨 겯듯, 함께 읽은 것 말이다.
_ 천정환, 정종현, 『대한민국 독서사』 196쪽
이 밤도 어딘가 각자의 자리에서 같은 책을 읽음으로써 마음의 어깨를 겯고 함께 나가는 분들이 있다. 얼굴도 모르는 그분들 각자의 책 읽는 밤을 한 번 상상해본다. 이 책을 함께 읽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눈이 되어 밤을 밝히고, 다리가 되어 멀고 높은 곳으로 그분들을 데려가주기를.
3
파묵은 언제나 작품을 통해 명확한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그 질문을 대단히 방대한 범위와 다양한 방향으로 풀어헤치기 때문에, 독특한 해석은 물론이거니와 새로운 질문들까지 태어나 중심 질문 근처에 포진한다. 그런 이유로 파묵의 작품 속에서 독자는 잠깐이라도 한눈을 팔았다가는 어어, 하는 사이에 길을 잃기 십상이다. 정신을 차려보면 갑자기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읽고 있지? 아까는 이게 아니었는데, 싶다. 그런데, 사실은 이게 아니었던 게 아니라 계속 이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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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핀카드의 헤겔과 찰스 테일러의 헤겔
요것들은 둘다 1000페이지 넘는 놈들인데, 앞의 녀석을 빌려왔다. 하루에 100페이지씩만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근데 그게 아마 안 될 것이다. 헤겔이잖아. 둘 중 한 권은 갖춰놔야겠다 싶어서 찾아봤더니 두 권 다 되게 괜찮다는 평만 가득하여 딱히 고르지를 못하고 직접 확인해야지 별 수 없다는 마음으로 한 권을 빌려왔다. 그나저나 무려 헤겔에 대해 읽는 건데, 마르크스 읽으려고 ‘읽어 두는’ 거라는 이따위 마음가짐으로 읽어낼수 있을까? 빅 배에 비거 배꼽 아닐지? 아차, 헤겔이면 더 비기스트..... 함량도 무거운 책이, 질량도 무겁다.
그나저나, 저게 제일 잘 나온 사진인가보다? 앞의 표지는 자비가 없군. 탈모 부분만 가려도 한결 젊어 뵈는데. 근데, 탈모 하니까 오늘 읽은 탈모에 관한 글(?)이 생각난다. 그 페이퍼 보고 울 뻔했다. 남일 같지도 않고. 시루스 박사님 힘내세요......
-- 읽은 --



곽재구, 최수연,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 참 좋았다』
오르한 파묵, 『빨강머리 여인』
콜린 베번, 『당신의 행복이 어떻게 세상을 구하냐고 물으신다면』
-- 읽는 --






테리 핀카드, 『헤겔』
천정환, 정종현, 『대한민국 독서사』
규리네, 『게임의 심리학』
남경태, 『종횡무진 서양사 2』
조한혜정, 『선망국의 시간』
알렉스 켈리니코스, 크리스 하먼, 『마르크스주의의 기초와 그 고전적 전통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