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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빠져 죽지 않기 - 로쟈의 책읽기 2012-2018
이현우 지음 / 교유서가 / 2018년 8월
평점 :
1
고생대 데본기에 다양한 생선들이 어슬렁어슬렁 육상으로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는데, 그와 유사한 양태로 2015년 초의 서울에서는 그저 읽는 syo가 읽고 끄적거리는 syo로 진화의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 중이었다. 그해 이전의 syo는 서평 같은 게 왜 있는지, 서평과 독후감의 차이는 무엇인지, 뭐 이런 기초적인 것들을 1도 이해하지 못하는 한 마리 무지몽매한 척추동물일 따름이었다.
그리고 무덤이 있으면 반드시 핑계가 있는 법. 핑계 1. 아니, 지금 지구에 책이 몇 권이나 있는 줄 알아? 그리고 걔네가 앞으로도 태어나길 그만 둘 것 같아? 책 읽은 책 읽을 시간 있으면 책 읽어. 핑계 2. 네가 읽은 책은 네가 읽은 책이고 내가 읽은 책은 내가 읽은 책이다. 그러므로 내가 읽은 셰익스피어와 네가 읽은 셰익스피어는, 내가 읽은 셰익스피어와 내가 읽은 도스토예프스키만큼 다르지. 핑계 3. 너는 내가 네 반찬 다 씹어서 밥상 위에 뱉어놓으면 소화 잘 되겠다고 신나서 주워 먹겠다?
아 세상 깝깝한 2015년의 syo여. 나 이놈, 내 죄를 내가 알렷다......
그렇게 무식하면 용감한 법이라는 명제가 진리가 되는데 아낌없이 몸 바치던 syo에게 계몽의 빛, 진화의 구름판이 되어준 이가 있었으니, 이 책은 바로 그가 2018년에 쓴 책이다.
2
또 다른 책이 있었으니 그 이야기부터 하자면,
그 책의 표지는 차갑고 자비 따윈 모를 것 같은, 어쩐지 구치소 쇠창살을 떠올리게 하는 색깔이었다. 이걸로 사람 한번 툭 치면 그 구치소 쇠창살 안에서 내다보는 바깥 풍경이 어떤지 뼈저리게 알게 되지 않을까 싶을 만큼 두껍고 무거운 책이었다. 제목을 비롯하여 표지에 인쇄된 글귀들은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그 책으로 무고한 시민의 둔부를 가격, 현장에서 적발되어 구치소에 갇혀 살던 한 남자가, 임종 전날 바스러져가는 멘탈을 가까스로 부여잡고 손톱으로 시멘트벽을 긁어 남긴 유서 스타일’로 디자인되어있었다. 그 모든 시각적 정황증거와 전혀 합이 맞지 않는, 뻔뻔하다 싶을 정도로 역설적인 제목이 syo로 하여금 그 책을 펼칠 수밖에 없게 하였으니, 그 책의 제목은 『책을 읽을 자유』였다.
당시 벌써 나온 지 5년이 다 된 책이었지만 그런 건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감옥 같이 생긴 자유의 책을 통해 syo가 깨달은 것은, 서평이 되었건 독후감이 되었건, 책 읽은 글은 버젓한 하나의 장르라는 사실이었다. 인터넷 공간을 방황하다 가끔씩 마주친 서평이나 독후감으로부터 늘 실망만을 얻어왔다는 불행한 우연 때문에, 내가 이 어엿한 아이들을 근거 없이 괄시했구나. 문제는 질이구나. 그리고 양이구나. 우와, 이 양 좀 보소.
이런 사연이 있었으므로, ‘로쟈’라는 인물의 자취를 좇던 syo가 알라딘에 유입된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와서 보니, 이 인물은 구텐베르크 은하계에 존재하는 모든 책의 3/4 쯤을 읽고, 그 반절에 길고 짧은 코멘트를 다는 그야말로 탈 갤럭시 급 독서가였다. 이 책 재밌겠다 싶어 검색하면 ‘로쟈’의 코멘트가 있다. 저 책 재미없겠다 싶어 검색하면 거기도 있다. 도대체 어느 구석으로 드리블을 해야 저 거대한 관음보살의 물샐 틈 없는 손바닥 바깥으로 도망칠 수 있을까 잠깐 고민하다 관뒀다. 뭐하러 그래. 그럴 바엔 그냥 친구 추가나 하자. 딸깍.
3
그해 여름, syo와 syo의 친구 三은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로쟈님의 강의를 들으러 다녔다. 우리 두 백수는 교통비 말고는 지불여력이 없었으므로 강의료가 없는 강의 밖에는 선택지가 마땅치 않았다. 노원구에서 19세기 러시아 문학 강의를 들었고, 남산에서 노벨문학상 수상 작품 강의를 들었다. 노원구 강의는 평일 오전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시간에 참석한 젊은이는 우리 말고는 없었으므로, 맨 앞줄에 앉은 우리는 첫날부터 다른 분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에 등가죽이 뜨뜻했다. 짧은 자기소개의 시간이 있었는데, 三이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三입니다. 혜화동에 살구요, 저는 옆에 이 친구를 따라왔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박수 짝짝. syo의 차례였다. “안녕하세요, 제가 바로 옆에 이 친구 syo입니다. 저도 혜화 살구요, 저는 앞에 저 분 따라 왔습니다.” syo의 손끝이 강단 책상에 앉아 있는 로쟈님을 향했다. “저는 저 분 선생님 따라다닙니다. 감사합니다.” 박수 짝짝짝짝짜자자자짝짝. 웃음 하하하호호하하호호. 三아, 보았니, 이 해일 같은 박수와 웃음의 앙상블을? 이것이 너와 나의 눈높이다......
1시간 강의가 끝나고 잠깐 쉬는 시간, 강의실 뒤쪽에 비치된 녹차 티백을 가지러 나왔는데 50대쯤 되어 보이는 참가자 한 분이 syo를 보고 웃으며 물으신다. “선생님 매니저세요?” “네?” “아니, 선생님 따라 다닌다길래, 호호호.” syo가 웃으며 대답한다. “아, 아닙니다. 전 그냥, 사생팬인걸요.” 대답하고 아차 했다. 사생팬까지는 아닌데. 정정할까? 넌지시 그분의 표정을 살피고 syo는 안심하며 돌아섰다. 아무래도 사생팬이 뭔지 모르시는 눈치였으므로. 자리에 앉았는데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사생팬이 뭔지 아는 나이대의 사람이, 평일 이 시간에 구립도서관 강의실에 앉아 푸쉬킨, 고골, 레르몬토프 중에 누가 형인지 생각하고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런 전복적인 자기소개에도 로쟈님은 옅은 미소만 보일 뿐 미동조차 않으셨다. 며칠 뒤 그해 노벨상을 발표하는 날, 남산에서 강의 초입에 로쟈님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수상을 은근히 바라시는 투의 말씀을 하셨다. 네이버에 ‘노벨문학상’을 입력하고 5초 단위로 새로고침을 하고 있던 syo가,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그 우크라이나 작가가 수상을 한 것 같습니다.” 하고 말씀을 드렸을 때도, “그렇습니까? 우크라이나 태생이지만, 벨라루스 작가입니다.” 하시며 안경을 살짝 올리셨을 뿐, 안경 너머로 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 아주 잠깐 찾아들었을 뿐, 이내 더 이상의 언급 없이 다시 강의 주제로 돌아가셨다.
4
간결함, 정확함, 세세함. 개인적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강의를 수십 번 들은 것도 아니지만, syo가 눈으로 보고 느낀 로쟈님의 이미지는 그의 책에서, 특히 서평을 모은 책에서 읽고 느낀 것과 아찔할 정도로 비슷했다. 글과 말이 서로를 벗어나지 않는 사람은 매력적이다. 그리고 흔치 않다. 그놈들은 하루아침에 일치를 이룰 수 있는 성질 순한 아이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취향을 자극하지 않는 음식은 폭발적으로 팔려나가지 않는다. 누군가 눈물 나게 매운 치킨을 먹을 때, 다른 곳의 누군가는 단짠단짠이 절묘한 치킨을 먹고 있다. 치킨의 알파요 오메가는 후라이드임을 설파하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가장 맛있는 음식은 뭐냐고 물어보면, 시간을 많이 줄 테니 오래오래 생각해보라고 하면, 그들은 무취향한 음식들을 떠올릴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그걸 고르진 않더라도, 돈을 주고 사 먹을 수 없기에 팔지도 팔리지도 않는 어떤 기본적인 요리들을 생각해 볼 것이다.
물론 세상에서 제일 잘 팔리는 서평을 쓰는 로쟈님에게 딱 들어맞는 비유는 아니지만, 하여튼 그런 이유만으로, 양념 팍팍 친 맵고 짜고 달고 때로는 쓴 문장을 사랑하는 syo가 삼삼하고 때론 심심하기까지 한 그의 글을 좋아하는 것일까?
역설적일 수 있지만 좋은 서평은 서평에 대한 부담을 줄이는 데서 시작될 수 있다. 서평을 쓰는 일 자체에 대해 과도하게 흥분할 필요가 없으며 너무 많은 기대를 갖는 것도 조지 않다. 멋진 문장보다는 간결하고 명료한 문장이 바람직하며 화려한 수사에 대한 고민도 자제하는 것이 좋다. 예술적인 글을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읽을 만한 책을 감별하고 권장하는 일이 서평의 주된 역할이라면 그것은 한두 사람의 몫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독자라면 모두의 일이고 모두가 나서서 자기 몫을 거들어야 하는 일이다. 서평은 자발적인 품앗이에 가깝다. (94)
그의 글이 지닌 품성이 어디서 발원하는지 명확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한 편의 글을 읽을 때는 잘 눈에 들어오지 않는 어떤 강인한 마음 같은 것이, 책 전체를 이어 읽으면 느껴진다. 더 화려하고 멋스럽게 쓸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도록 자신을 붙잡는 마음. 더 세고 따가운 분노의 표현을 휘두를 수 있음에도 춤추는 손을 꼭 붙잡고 가라앉히는 힘. 있는 대로 수사를 갖다 붙이고, 10만큼 건드리면 12만큼 분노하는 syo는 하려해도 도저히 되지가 않는 절제와 자제......
그리고 그런 굳센 지지점을 건설해 두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스스로 자기 안에 세운 기준으로부터 뻗어 나온다는 점이 찬탄을 던져 넣을 바른 자리이다. 좋은 글의 기준이 내 안에 있다는 것, 타인의 평가나 유행에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글을 쌓아올린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쓰듯이 그렇게 말한다는 것. 내가 쓰는 글이 자꾸 내가 되는 것.
5
읽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읽기를 위해 쓰는 것은 배우고 싶지 않다. 나는 삶을 직조하는 쓰기가 부럽다.
읽기와 쓰기는 상호보완적인 동시에 독립적인 역할을 가진다. 읽기로 삶의 내용을 기르고 쓰기로 삶의 형태를 세워 올리는 것이 독서의 양 날개라면, 이 책을 비롯한 이현우의 모든 책이 그 날개를 펼쳐 흔드는 법을 보여준다.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 이 책 속의 수백 권 다른 책들이 다 낡아져 시간의 저쪽으로 치워지는 날이 와도, 이 책은 서가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