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야 비로소 시집은 끝난다

 

1


시 한 편 읽으면 일어나 도서관 주위를 빙빙 도는 사람이 되고 싶다. 시 한 편 들이면 꽉 차는 좁은 마음 무거워 다리를 질질 끌며 오래 도는 사람이 되고 싶다. 걸음이 큰 원을 그렸다가 작은 원을 그렸다가 시작과 시작이 다시 만나지 않는 나선을 그렸다가 하고 싶다. 우주의 중심이 없다는 말은 우주에는 중심이 없다는 뜻이지 모두가 각자 세상의 중심이라는 뜻은 아니라서, 모두의 중심을 그러모아 성대하게 소각하고 싶다. 중심과 중심이 맞부딪혀 이가 빠진 동그라미들의 윤곽선을 풀어 진동하는 끈으로 만들고 싶다. 끈은 무엇을 묶는다.



 

 모퉁이 안도현

 

 모퉁이가 없다면

 그리운 게 뭐가 있겠어

 비행기 활주로고속도로그리고 모든 막대기들과

 모퉁이 없는 남자들만 있다면

 뭐가 그립기나 하겠어

 

 모퉁이가 없다면

 계집애들의 고무줄 끊고 숨을 일도 없었겠지

 빨간 사과처럼 팔딱이는 심장을 쓸어내릴 일도 없었겠지

 하교 길에 그 계집애네 집을 힐끔거리며 바라볼 일도 없었겠지

 

 인생이 운동장처럼 막막했을 거야

 모퉁이가 없다면

 자전거 핸들을 어떻게 멋지게 꺾었겠어

 너하고 어떻게 담벼락에서 키스할 수 있었겠어

 예비군 훈련 가서 어떻게 맘대로 오줌을 내갈겼겠어

 먼 훗날내가 너를 배반해 볼 꿈을 꾸기나 하겠어

 모퉁이가 없다면 말이야

 

 골목이 아니야 그리움이 모퉁이를 만든 거야

 남자가 아니야 여자들이 모퉁이를 만든 거야

 


 

2


빗님 덕분에 한 며칠 시원했다고 나도 모르게 착각에 빠져 있었다. 여름이 끝났구나 하고. 여름한테 한두 번 당해본 것도 아니면서 아마추어 냄새 나게 이거 왜 이래. 위아래로 검은 옷 입고 걸었더니, 기름 없이 튀겨준다는 마법의 기계 속에 갇힌 오징어 튀김이라도 된 것 같았다. 확인해 봤는데, 꼴랑 32도였다. 뭘까. 38도인데도 견뎌지는 날이 있는가 하면, 32도만 돼도 햇님 눈알을 콱 찌르고 싶은 날도 있다. 날씨와 몸뚱이 중에 어느 놈이 이렇게도 일관성이 없는 건지 도대체 모르겠군.

 

그러나저러나 읽었다. 아직 비가 내리던 27일에는 그레이슨 페리의 남자는 불편해, 나쓰메 소세키의 태풍, 이기호의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진중권의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인상주의 편, 김혼비의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누치오 오르디네의 쓸모없는 것들의 쓸모 있음를 읽었다. 언제 비가 왔었냐는 듯이 쨍쨍한 28일 오늘은 김민철의 하루의 취향,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쓰고 박종대가 번역한 일러스트 공산당 선언·공산주의 원리, 박차민정의 조선의 퀴어, 홍성수의 말이 칼이 될 때를 읽었다. 뤼트허르 브레흐만의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과 이현우의 책에 빠져 죽지 않기는 이틀을 이어 읽었다. 언제나 그렇듯, 저 중에는 다 읽은 아이도 있고 아직 읽고 있는 아이도 있다. 하루 치 할당량 8x80쪽을 완수하려면, 오늘은 밤이 떠나기 전에 두 권의 책을 더 펼쳐야 한다.

 



남자는 불편해는 불편하지 않고 통쾌하다. 오히려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가 사람을 훨씬 더 불편하게 한다.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에 대해 다정한 서재친구 ㄷ님은 기절한다고, 역시 다정한 서재친구 j님은 100권을 사서 옥상에서 뿌리고 싶다고 평하셨다. 그 두 분을 굳게 믿고 책을 빌렸는데, 역시 믿음이란 이 사회를 지탱하는 거대한 기둥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기절을 경험한 ㄷ님의 건강에 이상이 없기를. j님의 지갑 사정에도 이상이 없기를.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의 경우, 오찬호의 기본소득이 세상을 바꾼다보다 8개월 뒤에 출간되었는데(번역이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오찬호의 책을 삼켜버렸다. 이 책을 읽으면 오찬호의 책도 읽은 것과 진배없게 되었다.

 



책에 빠져 죽지 않기가 배송되었다. 바로 띠지를 버리고(잠깐만, 띠지가 없었나, 띠지가 있는 애는 다른 애였나.....?) 침대에 몸을 던졌다. 발장구를 치면서, 우리 로쟈님이 알라딘 밖에서는 어떤 글을 쓰고 계시려나,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휘리릭 책을 펼쳤다. 그리고는 정신이 들었는데 여기가 지금 200쪽이라고 한다.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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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8-28 20: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렇지 않아도 아시안 게임 여자 축구가 쏙 들어갔어요. 끝났나?
책이 평점이 높네요.
울엄니는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고 굼뜨다고 그러던데
그렇지도 않나 봐요.
남자 축구는 과격하긴 하죠?ㅋ

syo 2018-08-28 20:09   좋아요 1 | URL
아..... 저는 야구파라서ㅎㅎㅎㅎㅎ
책은 되게 재미집니다. 기회 닿으시면 읽어보시길^-^

북다이제스터 2018-08-28 2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제가 젤 좋아하는 시인 안도현...
생활이 바로 시가 되는 시인...
모르던 시인데, 역시 좋네요. ^^

syo 2018-08-28 22:09   좋아요 2 | URL
안도현은 언제나 사랑입니다만,
이 시는 지금으로부터 8년 하고도 여섯 달 전, 저와 제 여자친구 사이 인연의 물길을 완전히 돌려버릴 뻔한 애증의 시랍니다......

목나무 2018-08-29 01: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에 빠져 죽지 않기> 띠지가 있던데요. ㅎㅎ
띠지에 로쟈님의 이런 다짐이 실려있네요.(근데 로쟈님의 다짐인지 인용문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
˝책읽기가 계속되는 한, 책의 바다에서 벌이는 고투에서 살아남는 한, 나는 계속 읽고 쓸 것이다.˝
이 문구를 옮기다보니 절로 syo님이 떠올랐습니다. ㅎㅎ


syo 2018-08-29 08:39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저는 계속 읽겠지만 계속 쓰지는 않을 듯합니다. 이미 세상에 잘 쓰는 분이 이렇게 많으니 저까지 뭘 더 쓸 필요가 있을까요.

사실은 저도 이 책 읽으면서 몇몇 이웃분들의 이름이 팍팍 떠올랐습니다^-^

독서괭 2018-08-29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제 건강은 무사합니다 ㅋ syo님에게 실망을 안겨드리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네요. 그외 저도 읽고 있는 건 리얼리스트- 밖에 없군요. 다른 책들 서평도 기대합니다^^

syo 2018-08-29 13:06   좋아요 0 | URL
독서괭님은 한 번도 저를 실망시키신 적이 없지요 ㅎㅎㅎㅎ

chaeg 2018-08-29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책에 빠져 죽지 마시옵소서^^

syo 2018-08-29 13:06   좋아요 0 | URL
으하하하 전 그 정도는 아니예요^-^

chaeg 2018-08-29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아시안게임 야구 때문에 속터져 죽을지도..

syo 2018-08-29 13:09   좋아요 0 | URL
하하하하하 전 엘지팬이기 때문에 겨우 이 정도로는 속이 터지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