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책을 읽는가 -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독서를 위하여
샤를 단치 지음, 임명주 옮김 / 이루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누가 뭐래도 노태우는 좋은 대통령이라고 말하는 아버지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나는 다섯 살이었고, 다섯 살은 노태우가 성군인 이유 따윈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 나이였다. 정작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사내놈이 분명한 내가 뽀미 '누나''뽀미 누나'라 부르지 못하고 '뽀미 언니'라 불러야 하는 까닭이었는데, 그 건에 대해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대신 노태우가 좋은 대통령인 이유를 알려 주었다. 길고 긴 설명이었지만 한 마디로 줄여보면 결국 노태우가 대구 출신이기 때문에 우린 이제 노났다는 이야기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고소한 콩고물이 하늘에서 비처럼 떨어질 예정인 축복받은 계시의 땅, 대구로 가야만 한다고 아버지가 강변했다. 우리 가족은 당시 대구가 아니라 청도의 작은 시골 마을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저놈의 대처 성애는 불치였고, 가족력이라 나도 물려받았다. 하여간,

 

인간이야 됐건 말건 동향이면 장땡이고 한 번 정해지면 군소리 없이 누나를 언니라 불러야만 하는 그런 맹목적인 시절이었다. 맹목적인 아버지였고, 수동적이었지만 역시 맹목적인 어머니였다. 나는 궁금한 것이 많아 귀찮은 아이였겠지만 아버지는 귀찮은 기색 없이 내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내가 궁금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말하고 싶었던 많은 것들을. 알고 싶은 것은 하나도 모르는 마당에 모르고 싶은 것들만 자꾸 알게 되다보니 나는 별수 없이, 다른 아이들에 비하면 사뭇 자발적으로 독서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노태우와 언니에게 이 영광을.

 

담이 없던 당시 우리 집의 양 옆과 후방으로는 어린 내 눈에 이런 걸 대초원이라 부르나 보다 싶을 정도로 광활한 밭이 펼쳐져 있었다. 5일장이 서는 읍내 쪽으로 뻗은 2차선 도로와 우리 집 마당이 그라데이션처럼 이어져 있다 보니 우리 집의 한계가 어디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명색이 도로라고는 하지만 그 위로 지나다니는 차는 놀랍도록 뜸했다. 엄마의 제보에 따르면, 어느 날 하루 종일 대청마루에 앉아 멍하니 도로 쪽을 보던 내가 저녁 식탁에서 그날 도로를 지나간 것들에 대한 통계자료를 발표했다는데, 정확한 수치는 이제 남아있지 않지만 어쨌든 그날 우리 집 앞을 지나간 교통수단 중 그 수에서 압도적인 1위는 바로 소였다. 어린 내가 살던 곳은 그런 곳이었다. 바람 좋고 물 맑고 산과 들에는 꽃이 지천이며 이웃 간에는 따뜻한 우리네 정이 넘치면서 책 구하기는 눈물 나게 어려운. 결국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집에 있는 책들만 읽고 또 읽을 밖에 뾰족한 수가 없었는데, 그게 무슨 책이었는지 다 잊고 말았지만 딱 하나, 삼국지를 30번 넘게 읽었던 것은 아직 기억한다. 삼국지의 수많은 영웅들 중 그 당시 내가 가장 좋아하던 이는 손권이었는데, 이유는 단순했다. 나와 같은 손 씨라서. 사실 이건 뭐, 아버지의 노태우 성군설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논리였지만, 이것을 굳이 부전자전이라기보다는 당시 내가 계몽에 필요한 만큼의 다양한 책을 읽을 수 없었다는 슬픈 사실의 방증이라 말하고 싶다.

 

 

 

이러구러 세월은 흐르고 우리 가족은 기어이 대구로 흘러들어왔지만 노태우를 향한 아버지의 순진한 기대와는 달리 우리 식구 살림은 여전히 고만고만했고, 노난 놈이라고는 지천에 서점이 깔려 있어 신이 난 나밖에 없었다. 그 시절 나의 독서 동력은 '지식 추구'에서 '칭찬 갈구'로 한두 단계 퇴보하는 양상을 보였는데, 그런 기조를 아직까지 채 다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는 게 슬픔 포인트다. 어쨌든, 대처에 나와 보니 책은 많은데 책 읽는 이는 적었다. 따라서 칭찬받는 것은 참 쉬웠다. 어른들은 "너는 책을 참 많이 읽는구나." 라는 다소 긴 찬사보다 "너는 책을 읽는구나."라는 축약된 버전을 선호했는데, 알고 보니 저것이 일 년에 10권이 채 안 된다는 대한민국 성인 평균독서량의 부끄러운 실태를 예언하는 징후였다니! 그때 그 아이들이 자라서 지금의 성인이 되었을 테니...... "도대체 너희 집에는 왜 책이 없니?" 나는 책이 없어서 어이도 없다는 말투로 친구 녀석을 힐난했다. 그러자 친구는 엄지손가락으로 책상 서랍중 제일 아래쪽 가장 큰 놈을 가리키며 "저기 다 있어, ." 이라고 대답했다. 놀람 반 기대 반으로 서랍을 열었는데, 맙소사, 그 안에 한가득 들어 있었던 은 바로 '구몬수학'이었다...... 어린 시절 기억 중 몇 안 되는 진심으로 소름끼치는 장면이다.

 

 

 

아무래도 인간은 환경의 동물이다. 양질이야 어찌됐건 읽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대접받는 지상낙원에 살다보니,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부끄러울 정도로 부족하게 읽은 주제에 마치 킹 오브 더 독서라도 된 것 마냥 행동했다. 책을 좋아하는 놈이라는 이미지가 내 머리 위에서 왕관처럼 빛나는 것이 너무도 좋아서, 그저 제목과 작가만 아는 책을 독파한 척 입에 올리고 다녔다. 허세 갑 똥멍청이였던 내게 치료약을 주입해 준 것은 대학이라는 좀 더 넓은 세상이었다. 나와 보니 세상은 정글이었고, 극악무도한 포식자들이 책이란 놈들 눈에 띄는 족족 몽창 다 씹어 먹어 주리라는 기세로 여기저기 어슬렁거리는 곳이었다. 나로서는 지금 같은 페이스로 읽어 간다면 1년 뒤쯤에야 띄엄띄엄 소화할 수 있을 만치 어려운 책을 탁 덮으며, ", 오늘로써 이 책은 12번 읽었군. 그리고 내일부터 나는 중학교 3학년이 되겠지." 라고 말했던 괴물 같은 남자가 실제로 있었다!

 

그때부터의 독서는 아마 못난 그간의 자신에 대한 질책과, 남들을 속이면서 스스로 머리에 얹은 짝퉁 왕관을 진짜로 만들기 위한 발버둥이라고 하면 적당할 듯하다. 그 과정이 꼭 지난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즐거울 때 즐거운 책을 읽고 더욱 즐거워하며 슬플 때 슬픈 책을 읽고 더욱 슬퍼하는 독서에서 시작하였고, 즐거울 때도 슬픈 책을 읽으면 금방 슬퍼할 줄 알고 슬플 때도 즐거운 책을 읽으면 쉬이 즐거워 할 줄 아는 독서로 나아갔다. 책이 일러주는 길을 따라가면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될 거라는 맹목에 가까운 확신을 장착하고. 여전히 노태우의 그림자가?

 

여차저차 서른 해 넘게 살아오면서 독서의 맛을 전부라고는 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는 알겠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대부분의, 정말 부분의 사람들보다 많은 책을 읽는다고 호언할 수 있는 스스로가 겸연쩍은 마음도 크지 않다. 물론 아직도 이놈의 독서 정글 피라미드에는 내가 올라갈 계단이 별처럼 많고, 층층마다 훌륭한 독서가들이 자리를 선점하여 빛내고 있는지라, 뭐 대단한 진리라도 내놓듯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썩 당당하지는 않지만 정리는 해야 하니까.

 

  

책을 읽는 우리는 우리가 왜 책을 읽는지 때때로 생각해야 한다. 엄밀하게는, '이 책'을 왜 읽는지 따져보자는 것이 아니라, 책을 '왜 읽는지'를 숙고하는 시간을 가지자고 말하고 싶다. 일천한 경험이지만, 전자의 의문은 보통 책을 읽지 않거나, 읽다가 내던지기에 좋은 핑계거리를 찾는 중에 따져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후자의 질문은 최소한 독서가들에게는 '나는 왜 사는가?'에 필적하는 의미를 지닐 수 있다. 독서는 어쩌면 끝이 보이지 않는 먼 여정이고, 여행자는 지도를 펼쳐들면 언제라도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의 좌표를 가리킬 줄 알아야 하니까. 백 명의 사람이 모인 자리에는 서로 다른 백 가지 삶의 의미가 있듯이, 천 명의 독서가가 있으면 독서의 의미도 천 개가 있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그 말은 곧, 내 인생의 의미는 남이 아닌 내 손으로 만들어가야 하듯이, 내가 책을 읽는 이유도 남이 알려주지 않을 거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당신도 오늘은 차 한 잔 내려, 딱 그 뜨거운 찻물이 선선하게 식을 만큼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시간동안만 느긋이 앉아, 당신이 당신에게 책 이야기 한 자락 들려주었으면 좋겠습니다.

 

 

 

※ 2년 전에 썼던 글인데 우연히 다시 읽게 되었다가 도저히 못 봐주겠다 싶어서 얼른 지우고 다다다닥 다시 고쳐 썼습니다. 기껏해야 2년 전인데, 뭐 저렇게 못 썼던지......


※ 이전의 글에는 각자의 뽀미 언니가 누구였는지에 대한 cyrus님과의 훈훈한 댓글대담이 있었습니다. syo의 마지막 뽀미 언니는 얼굴에 점찍고 돌아오는 걸로 이름을 드날린 무시무시한 언니였습니다. 왜 나는 너를 만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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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8-04-20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에 공감됩니다. ^^
제게 독서란... 글쎄요... 뭐랄까...

지금까지 속아 산 삶에 대한 반성...
세상에 눈뜨는 과정...
그렇게 됨으로써 세상에 더욱 무뎌지거나 지나친 현실 적응에서 멀어지는 과정...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

책 읽을수록 세상 살기 더 힘들고 어려워진단 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ㅠㅠ

syo 2018-04-20 21:51   좋아요 1 | URL
북다님은 알라딘의 글래디에이터 같습니다. 맹렬히 근육 만들며 세상을 뒤집어엎을 날만 노리는.....

북다이제스터 2018-04-20 22:09   좋아요 1 | URL
네, 그러기 위해선 더 빨갱이가 되어야겠죠... ㅎㅎ

몰리 2018-04-20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태우, 뽀미언니, 소.
대학과 대학에서 만난 괴물들.

기시감 밀려들던 차
2년 전 읽었던 글이었던 것이었구료. ㅋㅋㅋㅋㅋㅋ

syo 2018-04-20 21:52   좋아요 0 | URL
역시 몰리님. 명불허전....
이런 걸 누가 기억하고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ㅋㅋㅋㅋㅋㅋ
심지어 2년 전 것을 ㅋㅋ

cyrus 2018-04-21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재능교육을 했어요. 수학, 영어, 한문 학습지를 풀었어요. 한문 공부는 좋았어요. 그때 한문을 공부하지 않았으면 책 읽는 데 어려움을 겪었을 거예요. 정기적으로 재능교육 학습지를 다 풀면 스티커를 받아서 붙이는 보너스(?)가 있었어요. 정해진 스티커를 다 붙이면 재능교육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무료로 받곤 했어요. ^^

syo 2018-04-21 17:28   좋아요 0 | URL
추억의 이름이네요. 재능교육...... 그때부터 이미 독서킹의 떡잎을 내보이셨군요.

다락방 2018-04-23 11:01   좋아요 0 | URL
저는 에이플러스요..... (밀려서 처박아 숨겨두었지만...)

독서괭 2018-04-21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쵸?? 저도 읽으면서 응? 노태우 뽀미언니 집앞 도로 교통통계 발표 대학괴물 등 분명 봤었는데 syo님이 소재가 떨어지셔서 재탕을?? 하고 생각했는데요 ㅋㅋㅋ

syo 2018-04-21 21:09   좋아요 0 | URL
사실입니다..... 소재가 떨어져서 재탕.....
근데 이 탕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을 줄이야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