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난 아버지의 마음 비슷한 것
이렇게 잘 쓰는 사람이 많은 세상에서 나도 뭔가를 쓴다는 것이 의미가 있기는 한 건지 자주 생각한다. 언제부터 이랬는지는 모르겠지만, syo가, 너 잘 하는구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종목이라곤 이제 달랑 두 개 남았다. 첫째, 이야, 넌 참 치킨을 맛있게/많이/잘 먹는구나. 둘째, 이야, 넌 글을 잘 쓰는구나. 첫 번째 칭찬을 들으면 오히려 모자란 감이 있어서 종종 발끈한다. ‘맛있게/많이/잘’이라니. 틀렸어요. ‘맛있게+많이+잘’입니다. 아시겠어요? 그러나 두 번째 칭찬은 아무래도 머쓱하다. 심지어 두 번 들으면 한 번 쯤은 혹시 “이거 다 거짓말인거 아시죠?” 라는 추가멘트가 은닉되어 있지는 않은지, 눈알을 데구르르 굴려대며 열심히 문맥에다 곡괭이질을 하곤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치킨은 앉아 먹건 서서 먹건 온갖 기교를 동원해 천장에 거꾸로 붙어서 먹건 남는 거라곤 뼈 말고는 없지만, 쓰면 글이 남는다. 손으로 쓰면 손으로 쓴 글이, 발로 쓰면 발 냄새가 물씬 나는 글이 남는다. 온갖 기교를 동원해 천장에 거꾸로 붙어서 쓰면 그야말로 피가 거꾸로 솟는 몹쓸 녀석이 태어나는 것이다. 성실하지만 안타깝게도 건강하지는 못한 암탉마냥 꾸역꾸역 똥글을 낳다가도, 문득 잘 지내나 싶어서 1년쯤 전에 쓴 글을 다시 찾아가보면, 이제 월령이 겨우 12개월 된 그 글이란 놈이 담배를 꼬나물고 침을 찍 뱉으며 원망의 눈빛을 쏘아대는 것이다. 야, 아버지, 왜 나를 낳았어. 응? 당신도 이렇게 나를 부끄러워 할 것을, 이럴 거면 대체 왜 낳았냐고......
syo는 글 쓰는 일도, 그러니까 소설이나 시는 당연하겠지만 그런 거 말고 지금 이따위 글을 쓰는 일조차 예술의 영역에 발꿈치 정도는 슬쩍 밀어 넣은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예술은 누구나 할 수 있고 해도 되지만, 결국 오래 남고 널리 소비되는 것은 크건 작건 재능이 있는 사람들의 손에서 빚어진 것들뿐이라고도 믿는다. 결국 syo의 글은 낮은 확률로 syo를 만족시키고, 그보다 말도 못하게 더 낮은 확률로 극소수 이웃들의 고개를 가볍게 몇 번 끄덕거리게 만든 다음, 너무 오래 구운 0.5mm 대패삼겹살마냥 물기를 잃고 퍼석퍼석하게 퇴장한다. 의미 없고 독자 없는 글들이 가서 죽는다는 어느 활자의 공동묘지에서 묘비도 없이 하얀 뼛가루로 흩어질 나의 글들아...... 못난 글쓴이를 둔 글에게 정말 미안하돠아아아악!!
하고 보니 농업혁명 시절 패러디였네요. 하여간,
오늘 무지하게 공부가 안 되는 바람에 도림천을 45분간 달렸으나, 그래도 여전히 공부가 안 되는 바람에, 그 바람에 작년에 쓴 글들을 쭉 한 번 읽어보는 그리 탐탁지 않은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그 결과 생각하길, 아, 도대체가 나라는 인간은 왜 발전을 모르는가.
Q. 발전이 뭐예요?
A. 전기 만드는 거요.
Q. ...... 왜 당신은 발전이 없나요.
A. 뭐래, 이 양반아. 내가 무슨 피카츄도 아니고.

자가발전의 아이콘, 매일 발전하는 상남자의 상징 피카츄
요즘은 거의 읽지 못하고, 쓰는 것 역시 꾸준하지 못하다. 써놓은 글들을 하나씩 되짚으면서, 재능이 미미한 사람에게 글쓰기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런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 글을 단련해야 하는지 곰곰 생각해보았다. 생각건대, 많이 쓰면 글은 두 가지 양상으로 는다. 우선, 무슨 축복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글이 잘 되는 그런 날, 하늘의 도움을 받아 만들 수 있는 내 글 퀄리티의 천장이 높아진다. 또한, 전생에 내가 나라를 팔아먹었나 싶을 정도로 글이 안 되는 날, 내 최악의 글이 그래도 땅굴을 파고 파고 계속 파서 지옥 불구덩이에서 유황스멜 맡을 때까지 떨어지지는 않게끔 밑바닥을 단단히 받쳐준다. 아무래도 syo처럼 태어나길 먼지로 태어난 인간은, 죽는 날까지 천장을 높여 봐야 그럴싸한 것 하나 못 낳고 먼 길 떠날 공산이 크다. 그러니까 나는 꾸준히 밑바닥을 받쳐 올리는 글을 써야 하겠다. 오늘의 글이 내가 쓴 가장 훌륭한 글이 될 수는 없더라도, 내가 쓴 가장 거지같은 글은 되지 않도록 쓰는 일. 기복을 자꾸 줄여가는 일. 그 일들이 쌓이고 쌓여서 syo놈은 최소한 글을 발로 쓰지는 않더라는 이야기가 만인의 공감을 얻을 때쯤, 언제 다시 되돌아봐도 크게 부끄럽지 않은 글들을 쓸 수 있게 될 그 때쯤이면 스스로의 글쓰기에 만족할 수 있으리라 믿으면서.



어느 집단이든 1등이 있으면 꼴등도 있다. 정규분포는 상위 10%가 있으면 하위 10%도 있다는 것을 이야기해준다. 모든 것이 완벽히 효울적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잉여는 말 그대로 '남는다', '필요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잉여인 것과 잉여가 아닌 것을 나누려면 그 기준이 옳다는 전제 조건이 있어야 한다. 기준이 영원불멸한 것이 아니라면 오늘의 잉여가 내일의 필수가 될 수도 있고, 오늘의 필수가 내일의 잉여가 될 수도 있다. 사실 잉여를 판단하는 '가치'라는 것도 대개 근거 없는 경우가 많다. 특허청 직원 아인슈타인의 잉여 연구가 상대론을, 고장 난 기계를 고치던 스티브 잡스의 잉여짓이 애플을 낳지 않았는가.
_ 김상욱, 『김상욱의 과학공부』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수년간 영화를 한 편도 안 보는 사람은 없다. 글을 쓰고 싶은데 글을 수년간 한 편도 안 쓰는 사람은 주변에서 종종 본다. 글을 쓰고 싶은 것과 글을 쓰고 싶은 '기분'을 즐기는 것은 구분해야 한다.
_ 은유, 『글쓰기의 최전선』
생각하는 것이 즐겁고 그것을 말하는 것이, 노래하는 것이, 그리고 쓰는 것이 즐겁다. 그것이 고될 때 '아휴 죽고 싶다'라는 말을 습관처럼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게 '죽는 게 좋겠다' '살아서 뭐하나'라는 뜻은 아니었다. 최근엔 습관으로라도 그런 말을 했던 것이 부끄러웠다. 나는 살고 싶다. 그래서 침을 맞으면서 그렇게 외쳤던 거다. 살려주세요. 살고 싶습니다. 즐겁게 살고 싶습니다.
그 방법을 계속 찾으며 살아가겠습니다.
_ 이랑, 『대체 뭐하자는 인간이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