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피터 잭슨
주연 : 나오미 왓츠, 애드리안 브로디, 잭 블랙
개봉 : 2005년 12월 14일
관람 : 2005년 12월 16일
등급 : 15세 이상

다시한번 이야기하지만 제 인생에서 최고의 영화는 바로 [반지의 제왕]입니다. [반지의 제왕 : 반지 원정대]를 봤던 2001년 12월 31일을 시작으로 [반지의 제왕]은 기다림이라는 것이 얼마나 가슴설레이고 행복한 것인지 가르쳐준 소중한 영화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2003년 겨울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을 끝으로 [반지의 제왕]은 끝이 났습니다. 1년 간격으로 기다림의 소중함을 체험했던 저는 더이상 그러한 놀라운 경험을 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2005년 겨울, [반지의 제왕]의 감독인 피터 잭슨이 자신의 필생의 역작이라는 [킹콩]을 완성해서 관객앞에 섰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저는 [킹콩]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기대하기 두려웠습니다. 왜냐하면 [반지의 제왕]이 제겐 너무나도 완벽한 영화였기에 [킹콩]은 [반지의 제왕]의 벽을 결코 넘어설 수 없을 것이란걸 저는 알았던 겁니다.
게다가 저는 피터 잭슨을 감독의 세계로 이끌었다는 33년작 [킹콩]을 보지 못했을뿐더러, 그 유명한 제시카 랭의 76년작 [킹콩]또한 TV로 잠깐동안만 봤던 것이 전부입니다. 다시말해 전 [킹콩]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 백지 상태에서 피터 잭슨이 [킹콩]을 만든다고 했을때 가장 먼저 떠오른 영화가 [고질라]였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크기에 집착하다가 스스로 자멸해버렸던 [고질라]를 회상하며, 어마어마한 제작비가 투여되었다는 피터 잭슨의 [킹콩]이 오버랩되는 것은 어쩔수 없었습니다. 암튼 이런저런 이유로 [킹콩]은 제겐 기대할 수도, 그렇다고 기대하지 않을 수도 없는 영화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킹콩]이 [반지의 제왕]의 벽을 결코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고있다고 하더라도 [킹콩]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당연히 [반지의 제왕]의 개봉을 기다리는 그 설레임과는 비교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킹콩]이 개봉하자마자 시간내서 극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과연 피터 잭슨'이라는 겁니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저는 이전의 [킹콩]을 본적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다른 분들처럼 이전 [킹콩]과 피터 잭슨의 [킹콩]을 비교 분석하는 친절함을 발휘할수는 없습니다. 단지 이전 [킹콩]을 보지 못함으로써 백지상태로써 피터 잭슨의 [킹콩]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백지상태로 바라본 피터 잭슨의 [킹콩]은 거의 완벽한 오락 영화라는 점입니다.
일단 영화의 초반부분은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타이타닉]을 보는 듯 했습니다. 고전적인 시대 배경과 배위에서 피어나는 낭만적인 사랑...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인 킹콩이 등장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전혀 지루함을 드러내지 않으며 순탄하게 항해합니다.
그러나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중반이 되자 [타이타닉]은 순식간에 [쥬라기 공원], [반지의 제왕], [인디아나 존스]로 변합니다. 정신없이 해골섬에서의 모험을 즐기다보면 다음 만찬으로 [쥬라기 공원 2], [고질라]가 준비됩니다. 이렇게 여러 오락 영화의 소재가 혼합된 종합 선물 세트를 감상하다가보면 마지막엔 [미녀와 야수]식의 예상하지 못한 러브 스토리가 전개됩니다.
피터 잭슨은 아주 맘먹고 재미있는 오락 영화를 만들기로 작심을 한듯이 보입니다. 그가 비록 전 세계적인 흥행을 불러일으킨 [반지의 제왕]의 감독이라고는 하지만 그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매니아적인 B급 호러 영화에서 재능을 보였음을 상기한다면 [킹콩]에서의 피터 잭슨의 능력은 그저 놀랍다는 말밖에 달리 할 말이 없을 정도입니다.




여기에서 한가지 집고 넘어가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3시간이라는 이 영화의 러닝타임입니다. 분명 어떤 분들은 이미 [반지의 제왕]의 그 어마어마한 러닝타임을 경함한터라 [킹콩]의 러닝타임이 뭐 대수냐고 하실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반지의 제왕]과 [킹콩]은 분명 다릅니다.
[반지의 제왕]은 방대한 분량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했습니다. 그렇기에 원작을 제대로 영화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최대한의 러닝타임이 필요했으며 그것이 평균 3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으로 반영이 되었던 겁니다. 하지만 [킹콩]은 다릅니다. 원작이라고 할 수 있는 33년작의 경우 러닝타임은 1시간 40여분에 불과했으며, 76년작 역시 2시간이 약간 넘는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피터 잭슨은 그러한 [킹콩]을 3시간이라는 러닝타임으로 늘려놓습니다. 대단한 모험이 아닐 수 없는 선택이었죠.
러닝타임이 길다는 것은 흥행에서 많은 제약을 동반합니다. 극장 상영 횟수가 그만큼 줄어듬으로써 막대한 제작비가 들어간 이 영화의 경우 제작비를 회수하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길어질 수 밖에 없었으며, 아카데미용 영화가 아닌 순수 오락 영화로써 관객의 집중력을 3시간동안이나 잡아내는 데에도 어려움이 많았을 겁니다. 그러나 피터 잭슨은 그러한 모험을 감행했으며 3시간동안이나 영화의 재미를 이끌어내는 재능을 발휘한 겁니다.
해골섬에 가기전, 해골섬에 도착후, 킹콩을 뉴욕으로 생포한후로 나누며 마치 3편의 영화를 동시에 보는 듯한 재미를 느끼게 합니다. 해골섬에 가기전의 그 고전적인 로맨스와 해골섬에서의 박진감 넘치는 모험, 그리고 뉴욕에서의 스펙타클과 함께 가슴 저린 미녀와 야수의 로맨스까지... 피터 잭슨은 지루함을 느낄 틈을 주지 않으며 관객에게 말합니다. '어때 재밌지?'



  
분명 [반지의 제왕]과 [킹콩]을 비교한다면 저는 여전히 [반지의 제왕]의 손을 들어줄 것입니다. 과연 제가 죽기전에 [반지의 제왕]을 넘어서는 영화가 등장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울 정도입니다. 하지만 [킹콩]은 [반지의 제왕]과는 별도로 제게 색다른 재미를 안겨준 영화였습니다. 보통의 경우 [반지의 제왕]덕분에 커져버린 기대감을 주체하지 못하고 '에이 전작보다 못하잖아'라는 푸념을 하기 일쑤였을텐데, [킹콩]은 그러한 푸념보다는 '우와 재미있는걸'이라는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반지의 제왕]을 너무나도 사랑하기에 그 영화를 넘어설 영화가 없을 것이라며 일찌감치 기대감을 꺾었기 때문일수도 있지만 그만큼 [킹콩]이 [반지의 제왕]과는 차별적인 재미를 제게 안겨주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 짧다막한 키에서 품어져나오는 잭 블랙의 알 수 없는 자신감(그는 언제나 그랬습니다), 나약한듯 보이지만 헐리우드의 그 어떤 액션 히어로보다도 강인했던 에드리안 브로디의 터프함([피아니스트]와는 대조적인...), 현대적인 미인인줄만 알았던 나오미 왓츠의 예상하지 못했던 고전적인 아름다움(그녀에게 그런 면이 있을줄이야)까지...
피터 잭슨 감독은 [반지의 제왕]에서도 그랬던것처럼 배우들의 매력을 최대한 이끌어내고, 스펙타클한 특수효과를 적절히 사용하면서도 스토리의 전개의 힘을 절대로 잃지않는 여유로움을 보이며, 3시간이라는 기나긴 러닝타임을 관객에게 선사했습니다. 그것이 같은 괴수 영화라도 [고질라]와 [킹콩]의 차이이며, 3시간이라는 이 경이로운 오락 영화를 만든 피터 잭슨을 러닝타임의 제왕이라 부르고 싶은 이유입니다.
다음 영화를 기대해 보겠습니다. 러닝타임의 제왕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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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이준익
주연 : 감우성, 정진영, 이준기, 강성연
개봉 : 2005년 12월 29일
관람 : 2006년 1월 7일
등급 : 15세 이상

네이버에서 네티즌들에게 9.6이라는 놀라운 평점을 받고 있는 [왕의 남자]. 그 평점이 무려 12,320여명의 참가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얼마나 많은 관객들이 이 영화에 만족했는지 나타내는 간접적인 증거입니다. [왕의 남자]에 대한 호평은 네이버에서 뿐만이 아닙니다. 제 홈페이지에는 [왕의 남자]에 대한 추천글이 줄을 이었고, 덕분에 2005년의 마지막 영화로 [왕의 남자]대신 [나니아 연대기 :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을 선택했던 저는 결국 2006년의 첫 영화로 [왕의 남자]를 선택하였습니다.
이렇듯 사상 유래없을 정도의 호평을 얻고 있는 [왕의 남자]이지만 이 영화를 기대하기까지는 제겐 꽤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준익 감독 때문입니다. 이준익 감독의 전작은 [황산벌]입니다. 삼국시대 말기 신라의 김유신 장군과 백제의 계백 장군의 비극적인 황산벌 전투를 코미디로 풀어나간 [황산벌]은 우리 영화에 시대극과 코미디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출하기는 했지만 높은 평점을 주기엔 꽤 불만족스러운 영화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저는 [황산벌]의 역사 비꼬기가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쟁쟁한 영웅호걸들이 나라의 흥망성쇠를 걸고 운명의 한판을 벌였던 그 시대를 욕설과 사투리가 난무하는 우스갯거리로 전락시켰던 이준익 감독이 이번엔 우리 역사상 최고의 폭군이었던 연산을 영화화한다는 소릴들었을때 연산을 또 얼마나 비꼬며 '웃어라'고 억지를 부릴지 걱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카리스마 넘치는 예고편을 봤을때부터 맘이 바뀌었습니다. '그래 이번엔 코미디가 아니구나! 최소한 [황산벌]처럼 말도 안되는 사투리와 욕설로 관객을 웃기려 들지는 않겠구나'하는...




암튼 2006년의 첫 영화로 저는 [싸움의 기술]과 [왕의 남자]를 사이에 두고 심각하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결과 결국 [왕의 남자]를 선택했습니다. 너무 많은 분들의 추천으로인해 커져버린 기대감과 그 기대감을 채워주지 못해서 내게 이 영화가 재미없으면 어떻게 할까하는 쓸데없는 걱정(이 영화에 대한 악평을 썼다가 돌팔매 맞을지도 모른다는 심적 부담... ^^;)을 가슴에 안은채...
그러나 그 결과는 만족중에서도 대만족이었습니다. 영화가 시작하는 순간부터 끝나는 순간까지 저는 숨소리조차 크게 낼 수 없었습니다. 도저히 [황산벌]과 [왕의 남자]가 같은 감독의 영화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이준익 감독은 묵직하고 진지하게 영화속 캐릭터들의 아픔과 상처를 영화속에 표현해 냈으며, 그러한 영화속 표현들은 감동으로 변환되어 너무나도 생생하게 내 가슴속을 파고들었습니다. [황산벌]도 이런 식으로 만들었다면 그런 의미없는 웃음보다는 그 시절의 아픔을 좀더 생생하게 느꼈을텐데... 이준익 감독에게 '[황산벌]을 다시 만들어 주세요'라고 부탁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비장한 분위기가 풍기는 영화를 선호하는 탓인지도 모릅니다. [황산벌]은 영화의 소재부터가 비장함을 갖추고 있었지만 관객들이 좋아하는 코미디로 만들려다보니 그 비장함이 비꼼으로 퇴색되어 버려 아쉬웠고, [왕의 남자]는 연산군과 장녹수, 광대라는 조금은 해학적인 소재를 가지고 있지만 그러한 해학적인 소재를 오히려 비장함으로 포장해낸 그 솜씨로 인해 예상치못한 감동을 받았으니... 하지만 [왕의 남자]의 높은 평점으로 미루어보건데 그러한 바램이 저 혼자만은 아닌가 봅니다. ^^




신명나는 광대놀이의 뒷편에 치명적인 유혹과 이룰수 없는 욕망이 결국 살인으로 이어지는 [왕의 남자]의 오프닝은 처음부터 강력하게 장생(감우성)과 공길(이준기)의 캐릭터를 관객들에게 새겨넣습니다. 이준익 감독은 익숙한 솜씨로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두 캐릭터의 관계를 설명해낸겁니다. 지루한 설명이나 생뚱맞은 생략이 아닌 너무나도 적절하면서도 간결하게 말입니다.
이런 뛰어난 오프닝씬 이후 영화는 일사천리로 뛰어나가기 시작합니다. 이젠 굳이 장생과 공길의 관계를 관객에게 이해시킬 필요가 없어진 이 영화는 마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듯이 장생 일당이 그 시대 최고의 권력가인 연산(정진영)을 가지고 놀게되기까지의 과정을 쉬지 않고 진행시켜나간 겁니다. 그 결과 이 영화는 지루함을 느낄 여유를 관객에게 허용하지 않게 된거죠.
그러나 장생 일당이 연산과 만나는 영화의 중반부부터 한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것은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인 연산과 녹수(강성연)라는 캐릭터에 대한 설명이죠. 단순히 폭군과 요부라는 설정만으로 영화의 또다른 한쪽을 지탱하고 있는 연산과 녹수를 설명한다면 영화의 추가 너무 장생과 공길에게 치우치는 실수를 범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이준익 감독은 또 다른 명쾌한 해답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바로 정진영이라는 배우의 존재입니다. 카리스마 넘치는 감우성의 연기와 비교해서도 결코 뒤지지않는 정진영의 연기력은 지루한 설명없이도 연산이라는 시대의 폭군을 완벽하게 표현해냅니다. 물론 여기에는 이미 여러 영화와 TV 역사극을 통해 연산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가 그 밑바탕에 깔려있기는 하지만 연산과는 달리 녹수가 그리 부각되지 못한것을보면 역시 정진영의 연기가 연산을 표현하는데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지 설명이 됩니다. 그와 반대로 너무 정형화된 모양새로 녹수를 표현한 강성연의 연기는 다른 배우들에 비해 조금 부족해보인 것도 사실이고요.




이렇듯 장생, 공길, 연산의 캐릭터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이 영화는 아픔과 상처를 안고 불길속을 뛰어든 불나방같은 남자들의 비극을 통해 묵직하고도 비장한 마무리를 준비해냅니다.
장생과 공길의 마지막 줄타기를 보며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후회없이 인생을 보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그들을 쳐다보며 부러운듯한 미소를 짓던 연산과 녹수의 그 표정 역시 영화가 끝나고 한참까지도 쉽게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최고의 권력가로 이 세상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을것처럼 보였던 연산과 녹수이지만 그들은 결코 장생과 공길같은 진정한 사랑은 얻을 수 없었을테니 그 마지막 미소가 묘한 여운을 남겼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연산에 대한 소설이 읽고 싶어졌습니다. 한 나라의 군주로 선택되어진 그가 어쩌다가 저런 희대의 폭군이 되었는지... 단지 어머니에 대한 사무친 한때문만은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 영화에서 미처 표현할 수 없었던 그 어떤 이유가 분명 있었을 겁니다.
이것이 바로 시대극의 힘입니다. 역사를 바로 알아야 미래를 올바르게 설계할 수 있다고 주장하시던 고등학교 시절 역사 선생님의 말씀이 새삼 생각납니다. 그땐 그냥 흘려들으며 역사 시간마다 뒤에서 영어, 수학 공부를 했었는데... 이런 잘만든 영화 한편이 역사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역사에 대한 이런 작은 호기심이 [황산벌]같은 의미없는 웃음보다 휠씬 값지다고 믿기에... 이준익 감독의 이 의미있는 변신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당신의 이 의미있는 변신은 결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유혹이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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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롭 마샬
주연 : 장쯔이, 공리, 양자경, 와타나베 겐, 야쿠쇼 코지
개봉 : 2006년 2월 2일
관람 : 2005년 12월 15일
등급 : 15세 이상

영화를 본지 1달이 지났다.

영화를 보고나면 가장 먼저 '영화이야기'를 쓰는 것이 당연한 일상이 되어버린지 벌써 15년의 세월이 훌쩍 흘러버렸습니다. 하지만 [게이샤의 추억]은 작년 12월 15일에 시사회로 봤지만 1달이 휠씬 지나버린 지금에서야 이렇게 '영화이야기'를 쓰기위해 컴퓨터앞에 앉았네요.
이토록 [게이샤의 추억]의 '영화이야기'가 늦어진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2003년 2월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당시 저는 아는 분을 통해 [투게더]라는 영화 시사회에 초대되었습니다. 당시엔 영화 시사회에 자주 갈 수 없는 처지여서 시사회라면 당연히 만사 제쳐놓고 달려갔습니다.
[무극]의 첸 카이거 감독 작품이었던 [투게더]는 나름대로 의미있는 영화였습니다. 우리 배우인 김혜리가 나와서 깜짝 놀라게 했던 영화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투게더]는 조용히 개봉했다가 조용히 극장에서 내려진 영화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투게더]의 '영화이야기'는 거의 읽혀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달랐습니다. [투게더]의 개봉일은 2003년 3월 14일, 하지만 제가 시사회를 보고 '영화이야기'를 올린 날짜는 한달 전인 2003년 2월 16일입니다. 한마디로 너무 빨리 글을 올리는 바람에 아무도 [투게더]에 대한 관심이 없어 제 글이 거의 읽혀지지 않은 것이라 생각한거죠.
그 이후로 '영화이야기'를 올리는데 한가지 나름대로의 규칙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영화를 빨리 봤더라도 영화 개봉 일주일 전쯤에 글을 올리자는 겁니다. 그렇게함으로써 개봉을 앞둔 영화에 대한 관심 덕분에 조금이라도 많은 분들에게 제 글을 읽히게 되는 효과도 누릴수 있는거죠. 아무리 허접한 글이라도 좀 더 많은 분들에게 읽히고 싶은 제 나름대로의 잔머리랍니다.(또는 이 글을 늦게올린 게으름에 대한 변명이기도 하고요. ^^;)  




일본 문화의 미화!

[게이샤의 추억]은 일단 왜색이 짙은 영화입니다. 헐리우드의 흥행 거장이자, 헐리우드의 대표적인 지일파인 스티븐 스필버그에 의해 제작된 이 영화는 2차 세계대전 전후를 배경으로 게이샤라는 일본 특유의 문화를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게이샤의 추억]은 2004년 1월에 국내 개봉되었던 [라스트 사무라이]를 기억하게 합니다. [라스트 사무라이] 역시 일본 특유의 무사인 사무라이를 소재로하였으며 헐리우드의 초특급 스타인 톰 크루즈가 주연을 맡아 화제가 되었던 영화입니다.
사무라이에 이어 게이샤까지... 헐리우드의 일본에 대한 호의적인 관심은 솔직히 질투가 나기도 합니다. [라스트 사무라이]에서도 밝혔지만 일본 문화에 대한 호의적인 관심은 그냥 관심을 넘어서 일본 문화에 대한 미화로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본과는 가깝고도 먼 우리로써는 질투와 함께 우려의 시선이 먼저 갈 수 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영화는 이미 단순한 문화의 수준을 넘어서 국가 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중요한 컨텐츠로 성장하여 있습니다. 영화만큼 일반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며 힘을 발휘하는 문화도 드물것이며, 영화만큼 직접적인 수익을 남겨주는 문화도 드물것입니다. 그런 이유때문에 일본은 일찌감치 헐리우드 진출에 적극적이었으며, 어쩌면 [라스트 사무라이], [게이샤의 추억]은 그러한 일본의 오랜 노력에 대한 결실일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일본의 문화가 영화의 본고장인 미국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동안 제가 우려하는 것은 우리나라 문화의 왜곡입니다. 이미 [라스트 사무라이], [게이샤의 추억]처럼 일본 문화에 대한 미화의 자세로 일관하고 있는 그들이 언젠가는 일제침략의 만행을 헐리우드 스타들을 기용한 영화를 통해 미화를 시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입니다. 물론 너무 섣부른 걱정일지도 모르지만, 당장 그러한 만행이 벌어진다고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해당 영화의 '국내 상영 불가'뿐이라는 점이 절 오싹하게 만드는 군요.




일본은 있는데 일본인은 없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게이샤의 추억]이 별로 부럽지 않습니다. 물론 일본의 문화를 이렇게 전세계적인 화제작으로 만들수 있는 그들의 힘은 부럽지만 영화를 보는동안 이건 일본을 위한 영화가 아닌 중국을 위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것은 이 영화의 주요 캐릭터인 게이샤를 연기한 세명의 배우 장쯔이, 공리, 양자경 때문입니다. 모두들 아시겠지만 이들은 일본인이 아닌 중국인입니다. 일본의 미의 상징이라는 게이샤를 연기한 배우가 일본인이 아닌 중국인이라는 사실은 일본의 입장으로써는 그리 달갑지 않을것 같네요.
그것은 일본의 문화는 세계적으로 알려져있지만 그러한 문화를 연기할 배우는 아직 부족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와는 반대로 헐리우드 곳곳에 침투하여 있는 중국 영화의 힘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사건이기도 하고요.
물론 와타나베 겐, 야쿠쇼 코지 등 일본의 대표적인 남자 배우들의 선 굵은 연기가 있기는 합니다. 특히 와타나베 겐은 [라스트 사무라이], [배트맨 비긴스]에 이어 [게이샤의 추억]까지 연달아 헐리우드의 화제작에 출연함으로써 그 입지를 굳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게이샤의 추억]이 그 누구도 아닌 게이샤라는 일본의 문화를 통해 일본을 바라보는 영화라는 점을 다시한번 상기한다면 일본 여배우가 없는 이 이상한 일본 여성에 대한 영화에 무조건적인 부러움의 시선을 보낼 수는 없네요.
우리나라도 이런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우리 영화의 활발한 세계 진출과 함께 배우들의 역량을 높이는 것에도 게을리하면 안될 것입니다. 먼 훗날 조선 왕조를 소재로한 영화가 헐리우드에서 제작될때 주연을 일본배우나, 중국배우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이 영화를 향한 내 시선은 편협하다.

글을 쓰고나니 [게이샤의 추억]이라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헐리우드 깊숙히 침투한 일본 문화의 힘에 대한 부러움과 두려움에 대한 편협한 글이 되고 말았네요. ^^
뭐 그러한 편협한 시선을 잠시 접어두고 영화 그 자체만을 두고 본다면 [게이샤의 추억]은 대하 서사극이라고 할만한 꽤 아름다운 영화입니다. 한 남자에 대한 여자의 지고지순한 사랑, 최고의 자리를 향한 여자들의 욕망과 질투, 그리고 2차 세계 대전을 통한 그들의 흥망성쇠가 아름다운 화면을 통해 잘 꾸며져 있으니까요.
롭 마샬 감독은 아름다운 화면을 만드는 것에 이 영화의 모든 것을 투입한듯이 보입니다. 한 여자의 비련의 삶도, 추악한 욕망과 질투도 모두 아름답게만 그려져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아름다움의 한가운데엔 장쯔이와 공리, 양자경이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장쯔이와 공리는 상당히 닮았더군요. 하지만 연기의 내공에서 품어져나오는 그 카리스마는 역시 공리가 앞서있었습니다. 연륜이 괜히 있는것이 아닌가봅니다. 장쯔이의 연기가 '무난하다' 정도라면 공리의 그 표독스러운 연기는 '놀랍다' 수준입니다. 그리고 또 한명의 여배우인 양자경도 단연 눈에 띕니다. [예스 마담]등 그녀의 액션 영화에 익숙한 저였기에 일본 미의 상징인 게이샤로써의 양자경은 어색할 것이라 생각했만 의외로 차분한 그녀의 연기에 매료가 되었답니다.
얼핏 김윤진에게도 [게이샤의 추억]에 대한 캐스팅 제의가 들어왔다는 기사를 읽은 듯한데 어떤 역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차인표가 [007 어나더데이]의 출연을 고사한것처럼 김윤진 역시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우리 배우의 헐리우드 진출도 중요하지만 서두르지않고 첫 단추를 잘 꿰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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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릴러의 아버지 알프레드 히치콕







약력)




1899년 8월 13일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성 이그나티우스학교와 기술항해학교등에서 공부하고 1920년에 영화회사에 입사하여 자막 제작,조감독,미술감 독으로 일한 그는 1925년에 <쾌락의 정원>을 연출.감독으로 데뷔했다.



1926년 스크립터 겸 시나리오 작가인 알마레빌alma reville과 결혼해 딸 패트리샤Patricia를 두었다.영화에 토키가 도입될 무렵인 1929년에 <협박>을 제작하여 주목을 끌었다. <너무 많이 안 사나이><39계단>등 심리적 불안감을 교묘하게 유도하는 독자적인 묘사방법을 확립하여, 이른바 "히치콕 터치"를 창출하였다.(미국에 가기전까지 스물세편의 영화연출)



1939년에 초청을 받고 미국 할리우드로 건너가 1940년<레베카>를 시작으로 정력적인 활동을 계속하여 "스릴러 영화"라는 장르를 확립하였고, 그 분야의 제 1인자가 되었다. 그후에 <망각의 여로><나는 고백한다><다이얼M을 돌려라><이창><해리의 곤경> <현기증><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사이코><새><토파즈>등의 스릴러영화로 공포와 불안을 순수하게 추구했다.(미국에서 서른편의 영화를 연출)



1955년부터는 자신이 직접사회를 맡은 텔레비젼 영화<히치콕 극장 Alfred Hitchchcock Presents>시리즈를 방영으로 인기를 모았고,잡지<히치콕 미스테리>를 내기도 하였다. 1980년 영국 여왕으로부터 기사작위를 수여받았다. 1980년 4월 29일 신장염이 악화돼 타계했다.





필리모그라피)



1922 제13번 Number Thirteen(미완성) 제작,감독

항상 네 아내에게 말하라 always Tell Your Wife감독협력

여 대 여 Woman To Woman 미술,조감독.

1923 하얀 그림자 The White Shadow 시나리오,미술,편집

1924 정열의 모험 The Passionate Adventure 시나리오,미술,조감독

1925 블랙가드 The Blackguard시나리오,미술,조감독

숙녀의 전략 The Prude's Fall 시나리오,조감독,미술

쾌락의 정원 The Pleasure Garden 감독

1926 산 독수리 The Mountain Eagle(미국:Fear O' god) 감독

하숙인 The Lodger(A story of the London Fog)감독,시나리오

1927 내리막길 Downhill (미국:When Boys Leave Home) 감독

행실나쁜 여자 Easy Virtue감독

링 The Ring 감독,시나리오

1928 농부의 아내 The Farmer's Wife 감독,시나리오

샴페인 Champagne 감독

1929 하모니 헤븐 Harmony Heavem 감독

맨 섬의 남자 The Manxman 감독-히치콕 마지막 무성영화

협박 Blackmail 감독,시나리오,각색

1930 엘스트리 콜링 Elstree Calling 감독

주노와 공작 Juno and the Paycock 감독,시나리오

살인 Murder 감독,각색

마리 Mary 감독(<살인>의 독일어판)

1931 스킨 게임 The Skin Game 감독,시나리오,

1932 리치 앤 스트레인지 Rich and Strange(미국:East of Shanghai) 감독,각색

17번지 Number Seventeen 감독,시나리오

캠버경의 부인들 Load Camber's Ladies 제작사

1933 비엔나의 왈츠 Waltzes From Vienna(미국:Struss' Great Waltz)감독

1934 너무 많이 안 사나이 The Man Who Knew Too Much 감독

1935 39계단 The Thirty-nine Steps 감독

1936 비밀 정보원 The Secret Agent 감독

사보타주 Sabotage(미국:The Woman Alone)감독,

1937 영 앤드 이노센트 Young and Innocent(미국:The Girl Was Young) 감독

1938 숙녀 사라지다 The Lady Vanishes 감독

1939 자마이카 인 Jamaica Inn 감독

1940 레베카 Rebecca 감독

해외 특파원 Foreign Correspondent 감독

1941 스미스 부부 Mr. and Mrs. Smith 감독

의혹 Suspicion 감독

1942 도주자 Saboteur 감독,원안

1943 의혹의 그림자 Shadow of a Doubt 감독

구명선 Lifeboat 감독

1944 행복한 여행 Bon Voyage 감독

마다가스카르의 모험 Adventure Malgache 감독

1945 망각의 여로 Spellbound 감독

1946 오명 Notorious 제작사,감독,원안

1947 파라다인 부인의 사랑 The Paradine Case 감독

1948 로프 Rope 제작,감독

1949 염소좌 아래서 Under Capricorn 제작,감독

1950 무대 공포증 Stage Frigt 제작사,감독

1951 의혹의 전망차 Strangers on a Train 제작사,감독

1952 나는 고백한다 I Confess 제작사,감독

1954 다이얼 M을 돌려라 Dial M for Murder 제작사,감독,시나리오

이창 Rear Window 제작사,감독

1955 나는 결백하다 To Catch a Thief 제작사,감독

1956 해리의 곤경 The Trouble with Harry 제작사,감독

나는 비밀을 안다 The Man Who Knew Too Much 제작사,감독

1957 누명 쓴 사나이 The Wrong Man 제작사,감독

1958 현기증 Vertigo 제작사,감독

1959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North by Northwest 제작사,감독

1960 사이코 Psycho 제작사,감독

1963 새 The Birds 제작,감독

1964 마니 Marnie 제작사,제작,감독

1966 찢어진 커튼 Torn Curtain 감독

1969 토파즈 Topaz 제작,감독

1972 프렌지 Frenzy 제작,감독

1976 패밀리 플릇 Family Plot제작,감독





-CNN 역대 최고의 스릴러 영화 100선에 9작품이 히치콕의 영화!



1. PSYCHO (1960) 싸이코

4. NORTH BY NORTHWEST (1959)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7. THE BIRDS (1963) 새

14. REAR WINDOW (1954) 이창

18. VERTIGO (1958) 현기증

32. STRANGERS ON A TRAIN (1951) 스트레인저 - 열차의 이방인

38. NOTORIOUS (1946) 오명

48. DIAL M FOR MURDER (1954) 다이얼 M을 돌려라

80. REBECCA (1940) 레베카

(이상 히치콕의 영화이야기 http://my.dreamwiz.com/movie53/)





◁ 히치콕의 어록 ▷




◎ 영화란? -(1)



→ 나는 영화가 삶의 단면이기를 원치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집에서, 거리에서, 또는 극장 앞에서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관객은 삶의 단면을 보려고 돈을 지불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그럴 듯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진부해서는 안됩니다. 드라마라는 것은 재미없는 부분을 잘라낸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영화는 삶의 단면이라고 하지만 내 영화는 케이크 한조각일 뿐입니다. 대사에 대하 화면의 연결을 통해 풀어가려고 노력했습니다.



◎ 영화란? -(2)



→ 나는 젊은 처녀가 영화를 아주 재미있게 보고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광경을 상상해보기를 좋아합니다. 어머니가 묻습니다. '오늘 영화 어땠니'? 그러자 그 처녀는 '굉장히 재미있었어요.'라고 답합니다. 다시 어머니가 묻죠. '어떤 영화였니?' 딸은 " 그 영화는 이러저러한 젊은 여자가 나오는 이야긴데요..'하면서 설명을 해주는 겁니다. 나는 영화를 찍기전에 관객이 바로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화의 전체 스토리를 단순명쾌하게 전달해 고객을 만족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롱숏의 활용



→ 영상의 크기는 극적인 효과를 위해 사용되는 것이지 단지 배경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TV용 프로그램을 만들 때 한 사나이가 자수하려고 경찰서에 나타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나는 들어서는 그 사나이와 뒤에서 닫히는 문, 그리고 그가 책상까지 걸어오는 것을 클로즈업으로 잡았습니다. 세트 전체는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관객이 그 곳이 경찰서인 것을 알도록 전체를 보여줘야 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왜 신경을 쓰는가. 카메라의 오른쪽 옆에 보이는 경찰의 팔에 세 개의 줄무늬가 있다. 그것이면 그 곳이 경찰서인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극적인 순간에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롱숏을 낭비할 필요가 있겠는가.



◎ 서스펜스



→ 나는 삐걱거리는 문소리로 서스펜스를 자아내 본 적이 없습니다. 어두운 거리에서 죽은 고양이와 폐물들이 나뒹구는 것보다 밝은 대낮에 졸졸 흐르는 냇가에서 일어나는 살인이 더 흥미있습니다....서스펜스가 무엇인지 알려드릴께요. 네 사람이 포커를 하러 방에 들어갑니다. 갑자기 폭탄이 터져 네 사람 모두 뼈도 못추리게 됩니다. 이럴 경우 관객은 단지 놀랄 뿐이죠. 그러나 나는 네 사람이 포커를 하러 들어가기 전에 먼저 한 남자가 포커판이 벌어지는 탁자 밑에 폭탄을 장치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네 사람은 의자에 앉아 포커를 하고 시한폭탄의 초침은 폭발시간이 다 되어갑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똑같은 무의미한 대화도 관객의 주의를 끌 수 있는 것이죠. 관객은 '지금 사소한 얘기를 할 때가 아니야. 조금 있으면 폭탄이 터질거란 말이야'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 되니까요. 폭탄이 터지기 직전 게임이 끝나고 일어서려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말하죠. '차나 한잔하지.' 바로 이 순간 관객의 조바심은 폭발 직전이 됩니다. 이 때 느끼는 감정이 '서스펜스'라는 겁니다.



◎ 여배우론



→ 히치콕은 여성비하 또는 혐오론자라는 평을 받고 있죠.내가 왜 세련된 금발여배우를 선호하는 지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거실의 숙녀처럼 진짜 숙녀이지만 일단 침실에서는 창녀가 되는 그런 여자를 원합니다. 불쌍한 마릴린 먼로는 얼굴부터 섹스 어필하고 브리지트 바르도는 아주 섬세한 느낌을 주지 않습니다. 나는 영국,스웨덴 , 북부독일,스칸디나비아 여성들이 라틴계의 이탈리아 나 프랑스의 여성보다 훨씬 자극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적 매력은 광고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마치 학교선생처럼 보이는 영국여성은 당신과 함께 택시를 탔을때 놀랍게도 남자바지의 지퍼를 열 수도 있는 그런 인상을 줍니다.젊은 대사에 대하여 요즘 만들어지는 많은 영화중에는 영화다운 영화가 거의 없습니다. 그 영화들은 거의 내가 '대화하는 사람들의 사진첩'이라고 부르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영화에서 스토리를 전할 때 대사는 다른 식으로는 불가능할 때에만 사용해야 합니다. 나는 항상 스토리를 영화적 방법으로 화면과 화면의 연결을 통해 풀어가려고 노력했습니다.
(서스펜스를 위한 히치콕 http://myhome.hanafos.com/~psycock/frameset.htm)



-개인적으로 뽑은 히치콕 최고의 영화 - 이창(그레이스 켈리의 살벌한 미모를 감상할 수 있는 곳)






-<서스펜스 스릴러의 거장 앨프리드 히치콕이 현대영화에 물려준 것들> (씨네21)




1980년 1월 앨프리드 조셉 히치콕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3세에게 작위를 받았다. 히치콕은 매우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열린 축하연에 참석했다. 한 기자가 이런 명예를 받는데 왜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히치콕은 특유의 머뭇거리는 태도로 대답했다. “아마도 부주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대 서스펜스 스릴러 영화의 거장 앨프리드 히치콕은 그의 영화가 누린 엄청난 대중성 때문에 종종 부주의한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어쨌거나 히치콕은 특유의 능청으로 비평가와 관객을 골려줬다.



히치콕의 그 유명한 장난기는 무수한 일화를 남겼다. 종종 히치콕은 영화 안에서도 자신의 장난기를 시험했다. 히치콕이 오랜만에 고향인 런던으로 돌아와 연출한 말년의 흥행작 <프렌지>는 여성만을 골라 살해하는 연쇄살인범을 묘사한 스릴러였다. 히치콕은 예고편에 출연했다. 감자포대를 실은 트럭 뒤칸에 넥타이로 살해당한 여인의 시체가 실려 있다. 차가 흔들리면서 여인의 맨몸이 드러날 때 별안간 뚱뚱하고 퉁명스러운 얼굴의 히치콕 감독이 화면에 나타나 관객을 보고 말을 건넨다. “이런, 저 여자는 내 넥타이를 매고 있어요. 이 넥타이는 내 것이란 말이오.” 히치콕은 발가벗겨 살해당한 여자의 목에서 넥타이를 풀어 태연히 자신의 셔츠에 다시 맨다.




일상의 공포로 관객을 들쑤시다




무섭거나 긴장감을 주는 영화를 만들면서도 그 자신은 늘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대중 앞에 나타났던 서스펜스 영화의 대명사 앨프리드 히치콕. 올해는 히치콕의 탄생 100주년이다. 그렇다고 새삼스레 추모할 것도 없는 것이, 그는 20세기 대중에게 가장 널리 얼굴이 알려진 그리고 지금도 대단한 인기를 누리는 감독이기 때문이다. <사이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새>와 같은 히치콕의 대표작들은 끊임없이 텔레비전에서 방영되고 있고, 히치콕 영화에 대한 논문의 제목을 모아놓은 책이 따로 발간될 정도로 학계에서도 지속적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생전의 히치콕은 “나는 월트 디즈니를 부러워했답니다. 그는 오로지 카툰만 그리지 않아요? 만약 배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찢어버릴 수도 있고 말입니다”고 말했지만 그는 영화현장에서 배우를 비롯한 스탭들을 좌지우지했을 뿐만 아니라 관객을 심리적으로 조종하는 데 능수능란했다.



히치콕은 관객의 의표를 찌르는 데 명수였다.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에선 케리 그랜트가 연기하는 주인공 손힐이 아무도 없는 광활한 옥수수밭에서 살충제를 뿌리는 경비행기의 습격을 받았고, <사이코>에선 여주인공 마리온이 목욕탕에서 샤워를 즐기다가 칼로 난자당한다. 히치콕 영화는 사람들로 붐비는 광장에서의 살인을 즐겨 묘사하며 그와 똑같은 비중으로 가장 안전하고 사적인 장소인 목욕탕이나 거실에서의 살인묘사도 곧잘 끼워넣었다. 광장 공포증과 폐소공포증을 오가며 히치콕 영화의 사건은 가장 안전하다고 믿었던 장소에서, 당사자 이외엔 아무도 믿지 않는 불가해한 사건이 악몽처럼 벌어진다. <새>의 여주인공 멜라니는 학교에서 새떼가 아이들을 습격한 사실을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히치콕이 만들어내는 공포는 정말 무섭다. 그는 공포는 다른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편안하고 일상적인 세계에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라고 경고한다. “살인은 어두운 거리보다 밝은 대낮에 졸졸 흐르는 냇가에서 일어나는 것이 훨씬 재미있습니다. 내가 신데렐라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다면 사륜마차에서 시체가 발견되도록 할 거예요. 그렇게 했는데도 관객에게 등골이 오싹한 기분을 주지 못하면 내가 오히려 실망할걸요.”



히치콕은 훌륭한 이야기꾼이었지만 플롯에 큰 관심을 두진 않았다. 그의 관심사는 관객으로부터 심층적인 반응을 끌어내는 방식이었다. 프랑스 비평가 앙드레 바쟁은 “영화는 사람들에게 자기만족의 기쁨을 준다. 그것은 사회적 의무감과 도덕성을 거부해서 얻어지는 일종의 배반, 도피, 고독 등에서 오는 만족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히치콕은 심술궂게도 관객의 그런 기대를 배반했다. 그는 관객이 동정이나 연민을 품게끔 주인공들을 일단 도덕적으로 올바른 사람으로 위장시켜 놓은 뒤 나중에 그런 기대를 가볍게 좌절시키는 수법을 쓰곤 한다. 피닉스시의 전경을 훑다가 호텔방으로 카메라가 이동해 들어가는 <사이코>의 첫 장면과 늪에 은닉된 마리온의 차가 기중기로 들려 올려지는 마지막 장면, 어두운 심연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 같은 처음과 끝의 대비는 곧 관객을 인간 본성의 밑바닥으로 안내했다가 풀어주는 임상심리 같은 경험을 제공한다.

관객은 처음에 사장의 돈을 훔친 여주인공 마리온의 행위에 연민을 품었다가 영화 중반에 무참하게 살해당하는 대목에서 충격을 받고, 마리온을 죽인 노먼 베이츠를 동정했다가 그의 사악한 또다른 얼터 에고의 실체를 보고는 망연자실한다. 대중의 엿보기 심리를 교묘하게 건드리는 <이창>에서 히치콕은 건너편 아파트를 망원경으로 훔쳐보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진작가 제프리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관객은 기꺼이 제프리의 엿보기에 동참하면서 샛꾼의 자리를 즐기지만 제프리가 망원렌즈로 살인사건을 목격하면서 도덕적 책임감을 느낄 때 낄낄거리던 관객도 어느새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제프리가 두발 다 깁스를 하고 창문으로부터 얼굴을 돌리고 있는 것은 남의 삶을 엿본다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도덕적 책임을 요구받는 것인지를 능청스럽게 꼬집는 히치콕의 유머였다.




몽타주와 카메라워크, 미학적 경지




관객과 영화의 역동적인 관계, 낄낄거림에서 황당함으로 바뀌는 심리 메커니즘을 파고들면서도 히치콕은 그런 주제를 구구절절이 설교하지 않는다. 히치콕이 생전의 인터뷰에서 늘 자랑스럽게 말했던 ‘순수영화’라는 말은 영화의 고전적 어휘를 완성한 히치콕 영화의 정체를 간명하게 요약하고 있다. 영국의 비평가 빅터 퍼킨스는 히치콕 영화가 ‘프세볼로트 푸도프킨(에이젠슈테인과 함께 영화의 편집 원리를 확립한 러시아의 몽타주 학파 감독)의 몽타주와 프리드리히 무르나우(독일 표현주시대에 선구적인 카메라 이동 미학을 개척한 감독)의 카메라 움직임을 완벽히 결합’한 예로 꼽았다. <이창>은 한 세트에서 찍었지만 구성이 무척 정교하다. 편집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히치콕은 이 영화에서 ‘A라는 화면이 B라는 화면과 결합되면 AB라는 화면이 만들어진다’는 푸도프킨의 유명한 몽타주 공식을 시범적으로 보여줬다. 건너편 아파트를 망원경으로 훔쳐보는 제프리를 보여준 화면 다음에(A), 반쯤 벗어던진 젊은 여자가 체조하는 모습을 이어붙이고(B), 다시 웃고 있는 제프리의 모습을 보여주면(AB) 제프리는 중년의 음탕한 사내로 관객에게 인식될 것이다. 그러나 정원에서 뛰노는 강아지 다음에 제프리의 웃는 얼굴을 보여준다면 그는 중년의 인자한 신사로 비칠 것이다. 히치콕식의 순수영화 개념은 편집뿐만 아니라 화면구성의 원리에도 이어져 <사이코>와 같은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수평과 수직 이미지가 충돌하는 시각적 대립의 정수를 보여준다. 현대영화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장면인 목욕탕 살해장면은 수직으로 내려치는 노먼의 칼과 수평으로 흐느적거리는 마리온의 팔을 대비시켜서 맺음할 때까지 약 45초 동안 70회 이상 변하는 카메라 각도로 격렬한 충격을 전해준다.




현대영화에 넓게 드리운 그림자




영화학자 마크 랭거는 “히치콕의 영향은 현대영화 곳곳에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은 곳이 없다”고 말했다. <사이코> <이창> <39계단> <다이알 M을 돌려라> <열차 위의 이방인> 등 히치콕 영화만큼 자주 많이 리메이크된 영화들도 없다. ‘히치콕 이후’ 현대영화에서 관음증, 맥거핀, 광장 공포증 등 히치콕적 특징은 상식이 됐다. 히치콕은 서스펜스 스릴러뿐만 아니라 필름누아르, 공포영화 장르에서도 태두에 가까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히치콕은 명암대조가 심한 조명을 선호하는 필름누아르 장르가 할리우드에 뿌리내리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히치콕의 영향력은 로만 폴란스키, 쿠엔틴 타란티노, 심지어 최근의 <매트릭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나타난다”고 랭거는 평했다. 78년작 <할로윈>으로 시작된 난도질 공포영화는 노먼 베이츠가 샤워기 꼭지 아래서 마리온을 무참하게 난도질하는 그 유명한 <사이코>의 목욕탕 살인장면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히치콕과 동시대 감독들 가운데 히치콕의 무성영화에서 스틸기사로 일했던 영국 감독 마이클 파웰은 스스로 ‘아주 독창적이며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도깨비 같은 감독’이라고 평했던 히치콕 선배의 스타일을 모방했으며 <엿보는 톰>을 말년의 걸작으로 남겼다. 프랑스 감독 앙리 조르주 클루조는 서스펜스 장르를 통해 히치콕과 경쟁하려 무진 애를 쓰는 가운데 <공포의 보수> <디아볼릭> 같은 걸작을 남겼다. 촬영감독 출신인 영국 감독 니콜라스 뢰그는 <지금 보지 마라>에서 히치콕의 <레베카>와 <새>를 절충한 것 같은 현대적인 스릴러 영화로 감독의 입지를 굳혔다. 평생 히치콕을 존경해 히치콕과 나눈 인터뷰를 책으로 묶어 펴낸 프랑스 감독 프랑수아 트뤼포는 <피아니스트를 쏴라> <상복을 입은 신부> 등의 영화에서 히치콕 영화기법에 존경을 바쳤다.



거장에게 경배를! 거장을 베낀 거장들




히치콕은 동시대의 영화감독들뿐만 아니라 후배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영향을 끼쳤다. 브라이언 드 팔마는 아예 히치콕 영화를 그대로 모사하는 <강박관념> <드레스 투 킬> <보디 더블> 등의 영화를 만들었다. 드 팔마의 초기 대표작인 <강박관념>은 <현기증>에서 주제를 빌려와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기억으로 고통받는 남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다른 여인에게 과거에 사랑했던 여인의 이미지를 투사하려는 헛된 시도를 되풀이하는 광경을 보여준다. <강박관념>은 죽은 어머니와 똑같이 닮은 딸을 사랑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근친상간의 테마를 다룬다. 드 팔마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강박적인 욕망의 파멸을 다룬 이 영화에서 동일한 테마를 다르게 변주하는 지휘자의 입장으로 자신을 변명했다. ‘히치콕 이후’에 서스펜스 스릴러를 만드는 감독들에게 이것은 때로 피할 수 없는 운명임을 드 팔마의 작품은 암시한다. 프랑수아 트뤼포와 동세대 감독이었으며 젊은 시절에 히치콕 연구서를 출간하기도 했던 클로드 샤브롤 역시 히치콕에 존경을 바치는 스릴러 영화만을 평생 동안 만들었다. 그의 대표작인 <도살자>는 히치콕의 <의혹의 그림자>와 <기차 위의 이방인>을 합친 것 같은 걸작이며 샤브롤 스스로 히치콕 영화의 본질이라고 파악했던 등장인물들간의 ‘죄의 교환’이라는 주제를 깊숙이 탐구한 작품이었다.



서스펜스 스릴러 장르는 히치콕의 그림자를 거둬내고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됐지만, 스릴러 장르 바깥에서도 히치콕적인 기교를 추구한 예는 흔하게 널려있다. 히치콕이 처음 개발한 영화어휘는 훗날 모두 관용구가 됐다. <현기증>에서 주인공 스코티의 고소공포증을 표현하기 위해 줌렌즈와 트랙이동을 결합시킨 줌 앤 트랙의 카메라 기교를 선보인 후, 스필버그는 <죠스>에서 브로디 서장이 해변가에서 상어를 처음 목격할 때 그의 심리적 효과를 암시하기 위해 이 기법을 썼다. 마틴 스콜세지는 히치콕 영화의 음악을 담당했던 버나드 허만에게 사정을 해 <택시 드라이버>의 음악을 맡겼으며 이 영화는 <사이코>풍의 음산한 음악을 배경으로 깔고 주인공 트래비스의 눈에 비친 뉴욕 시내를 히치콕풍의 주관적 시점으로 묘사하면서 긴장감을 풍겼다. 히치콕의 영향은 다양하게 뻗어 있지만 국가와 세대간의 경계를 불문하고 그 흔적은 동일선상에 있다. <할로윈>에서 <유주얼 서스펙트>, 그리고 이명세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 이르기까지 히치콕의 그림자는 광대하다.



히치콕 미학의 대변자였던 평론가 로빈 우드는 히치콕이 ‘현대의 셰익스피어’이며 <현기증> <사이코> <새> 등은 20세기의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남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히치콕 영화에는 종종 무성영화를 보는 것처럼 대사없이 영상만으로 상황을 묘사하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현기증>에서 스코티가 마들레인을 추적하는 15분간, <사이코>에서 마리온이 피닉스시를 빠져나와 고속도로를 거쳐 베이츠 모텔에 들어서기까지 관객의 조바심을 자아내는 장면, <마니>에서 마니가 사무실을 터는 장면 등에서 이미지만으로 관객의 심리를 조종하는 히치콕의 솜씨는 약이 오를 만큼 능수능란하다. 로빈 우드는 말로는 환원불가능한, 이미지만으로 정서와 의미를 전달하는 히치콕의 스타일이 영화언어의 정체성에 가장 걸맞은 어휘를 창조한 것이라고 평가했으며 아울러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으로 도덕적 시련에 빠진 20세기의 인류에게 히치콕의 정교한 서스펜스 스릴러는 냉전시대의 가부장제 체제를 거꾸로 반영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라고 생각했다.



히치콕 영화는 처음에는 그의 스타일의 독창성에 주목한 작가주의자들에게 찬양받았으며, 도덕적 진공상태에 빠진 현대적 삶의 조건을 서스펜스 장르의 틀을 빌려 재미있는 이야기로 풀어낸 그의 작품세계 역시 전통적인 휴머니스트 입장을 취한 비평가들의 옹호를 받았다. 70년대부터는 히치콕 영화가 여성에 대한 남성의 가학적이고 맹목적인 욕망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페미니즘 진영의 거센 공격이 있었다. 어떤 입장에 서든 히치콕 영화는 얘깃거리가 풍부한 대상이었다. 히치콕은 자신의 영화를 두고 자주 ‘재미있는 영화일 뿐’이라고 일축했지만 완벽한 시청각적 균형을 갖춘 그의 영화로 사람들이 허둥대는 것에 고소해했을 것이다.



어둠 속의 정신세계를 햇빛 아래로



히치콕은 직관적으로 대중이 좋아할 재미있는 오락영화를 만들었지만 ‘사물은 겉모양과는 늘 다르다’는 것을 웅변하는, 상식과 관습을 깨는 작품세계를 추구했다. <39계단>에서 존경받는 시민은 스파이 조직의 우두머리로 밝혀지고 <파괴 공작원>에선 평화운동의 리더가 나치의 공작원으로 판명된다.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의 주인공 손힐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절박한 상황에서 필사적으로 누명을 벗으려 애쓴다. <사이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들은 알게 될거야. 내가 얼마나 선량한 사람인지. 이렇게 말하겠지. 어, 파리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하잖아”라는 노먼의 독백이 흐르는 화면 위로 승리감에 도취해 광기로 번뜩이는 눈으로 관객을 쳐다보는 노먼의 얼굴에서 관객은 ‘사물의 외양과 본질은 다르다’는 히치콕의 생각에 얼마나 깊은 비극적 통찰이 감춰져 있는지를 알 수 있다. 히치콕은 깊은 어둠에 잠겨 있는 인간의 정신세계를 밝은 햇빛 아래 드러내고 관음증과 살해와 강박관념과 죄의식으로 얼룩진 어두운 세계를 서스펜스 영화의 경쾌한 스타일로 뚫고 나갔던 아이러니의 대가였다.

 


-<히치콕을 읽는 4가지 키워드>



그 모든 것은 히치콕에서 시작되었다. 부서진 창문 사이로 끊임없이 손을 뻗치는 좀비들의 습격이나, 뒷 창문을 통해 사건을 목격하게 된 한 남자의 위험천만한 관음증이나 욕실에서 발생한 수상쩍은 칼부림 말이다. 혹자는 조지 로메로의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이나 커티스 핸슨의 <베드룸 윈도우>, 브라이언 드 팔마의 <드레스 투 킬>이라고 알고 있는 이 영화의 진정한 제목은 <새>나 <이창>이나 혹은 <사이코>로 바뀌어져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감독들과 영화들 사이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우상, 앨프리드 히치콕. 이름 자체만으로 충분한 그 남자가 있다.



앨프리드 히치콕은 1899년 영국에서 태어났다. 공놀이를 싫어하고 화가 나면 정신없이 음식을 먹어대던 영국소년은 일찍이 자신을 남들에게서 고립시키는 방법을 터득했고, 모든 이들에게 수줍던 소년은 영화라는 공간에서만 숨겨진 장난기를 펼쳤다. 단지 남을 놀래키는 재주라고 생각되던 그 장난은 이윽고 서스펜스의 대가라는 작위를 받게 되었고, 숱한 영화비평의 원전으로, 작가의 만신전에 으뜸으로 올라서게 된다. 정신분석과 페미니즘, 기호학, 형식주의, 게이 비평까지 실제적으로 어느 영화비평도 히치콕에게서 빚지지 않은 것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히치콕 영화에 나타나는 핵심적인 키워드를 모른다는 것은 구구단을 모르고 인수분해를 하겠다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그 열쇠는 히치콕이 표지하는 비밀의 문, 남성들이 득세한 지배 이데올로기의 세계, 새로운 개념의 알을 낳는 영화비평의 세계의 문고리를 여는 것이기도 하다.



키워드 No.1-관음증



서스펜스 스릴러물을 본다는 것은 남의 집 창문 너머의 부부싸움을 구경하려는 심리와 다를 바가 없다. 히치콕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창>의 남자주인공 제임스 스튜어트는 왼쪽 발이 부러진 상태로, 깁스에는 ‘L.B.제프리스의 부러진 뼈가 잠들다’라고 새겨져 있다. 일종의 대리 남근을 상실한 이 남자는 남의 집 창문을 엿보는 것을 낙으로 삼는다. <사이코>의 남자주인공 앤서니 퍼킨스(노만 베이츠) 역시 벽에 몰래 구멍을 뚫어놓은 뒤 자신의 모텔에 우연히 들른 여자 손님 자넷 리의 목욕 장면을 훔쳐본다. 이때 앤서니 퍼킨스의 시선은 완전히 여주인공 자넷 리를 포위한 상태로 그녀는 자그마한 원 안에 갇혀 있는 듯 보인다. 사람만이 아니라 높은 허공에서 불에 탄 마을을 유유자적하게 내려다보던 영화 <새>에서의 유명한 새의 시점숏도, 관음증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관음증은 말 그대로 훔쳐보기이다. 그러나 관음증의 핵심은 나는 보는데 상대방은 그 시선을 모르는 데 있다. 그것은 매우 안전한 위치에 놓여 있기 때문에 시각적 쾌락을 배가시켜주는 동력체이다. 그래서 응시의 방향은 권력의 위치를 결정짓는다. 영화 내의 어떤 인물이 관음자 입장에 놓여 있다면, 당연히 관객도 그 관음자의 시선에 동화하게 된다. 히치콕은 <사이코>의 욕실 살해장면에서 자넷 리(마리온)의 눈과 하수구를 디졸브시킴으로써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구멍으로 눈을 형상화하였다. 베이츠의 관음적인 시선이 관객의 시선과 겹치는 지점, 애초에 카메라는 관음자적인 입장에 놓여 있는 핍쇼의 연출자이고, 관객 역시 합법적인 관음자가 되기 위해 극장을 찾는지도 모른다. 관음증은 이후 영화보기의 본질에 관한 화두가 되었다. 그것은 단지 작가라는 호칭으로 감독이 장악하던 스크린에 관객이라는 존재가 끼어들기 시작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관객인 우리가 히치콕 영화에서 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점에서 히치콕은 심리학의 대가였다. 히치콕은 흔히 살인자가 누구인지 은밀하게 관객에게 노출시킨 뒤, 서스펜스를 지연시키는 전략을 썼다. 우리는 <사이코>에서 마리온이 살해될 것을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히치콕의 다른 영화 <프렌지>에서 관객은 초반에 이니셜이 들어간 장식품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여자들의 목을 조른 넥타이 살인범이 과일가게 주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함정에 빠진 주인공을 보는 초조함에다 살인은 천천히 다가온다. 게다가 우리는 노먼 베이츠와 함께 몰래 그녀를 훔쳐보는 공범 의식까지도 공유했다. 그러나 살인의 순간은 짧다. 휘두르는 칼날이나 조르는 밧줄과 함께 보유했던 긴장이 순식간에 사정되는 쾌감, 관음증이라는 안전한 응시의 둑에 갇혀 있던 공포는 물밀듯한 속도로 체내를 빠져나간다. 공포가 쾌락이 되는 지점, 이것은 프랑수아 트뤼포가 히치콕 영화를 평가한 그대로다. 살인은 연애처럼, 연애는 살인처럼.



키워드 No.2-오이디푸스 궤적



남자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적어도 고전의 할리우드영화들은 서슴없이 여성과의 결합이라고 말할 것이다. 수많은 난관과 어려움을 이기고 마침내 고향땅에 도달한 남자주인공에게 주어지는 여주인공과의 키스란 사회적인 안정을 이루었다는, 세상을 얻었다는 보증서와도 같기 때문이다. 이때 여성이란 단지 남자주인공이 능동적 주체가 되기 위한 일종의 수동적인 객체일 따름이다. 일종의 신화화된 영웅이야기로 고전 할리우드영화에서 흔히 보여지는 남성주인공의 위기와 이성과의 결합 과정은 흔히 오이디푸스 궤적이라는 용어로 불려왔다. 물론 할리우드 시스템 안에서 오이디푸스 궤적에 실패한 남성주인공의 말로는 비참함 그 자체일 뿐이다.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는 필름누아르의 탐정들이나 카우보이들은 죽음의 나락으로 혹은 영원한 떠돌이의 운명으로 전락하고 만다.



오이디푸스 궤적과 연관하여 단지 히치콕의 남자주인공들은 그들간에는 비슷하지만 다른 감독의 주인공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어떤 점들을 갖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 거세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 그들은 쉽게 함정에 빠지거나 자신의 내적인 욕망을 간신히 억제하느라 온 에너지를 다 쏟는 듯 보인다. 사실 <마니>에서 도벽이 있는 여주인공 마니를 바라보는 숀 코너리의 시선을 통해, 마니를 당장에 강간하려는 욕망을 표현하고 싶었다던 이는 히치콕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지배적이고 강력한 어머니를 두고 있거나 죽은 옛 아내라는 긴 그림자를 안고 살아간다. <레베카>에서 로렌스 올리비에는 죽은 아내를 돌보았던 그리고 히로인인 존 폰테인에게는 매우 위협이 되는 일종의 거세적 어머니인 가정부 댄버스 부인을 고용하고 있다. 물론 거세적 어머니의 으뜸은 <사이코>의 노만 베이츠의 어머니일 것이다. 그녀는 죽어서도 해골이 된 채 지하에서 아들의 마음을 조종하고 결국에는 아들과 육체적 심리적으로 한몸이 된다. <새>에서 제시카 탠디가 분한 어머니상도 살아 있으되 그 이미지는 <사이코>와 거의 유사한 것이다. 이들 남성주인공의 대부분은 심리적 결함이 있는 혹은 못된 남편의 계략에 빠진 여성들을 구원함으로써 자신의 남성성을 회복해 간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사이코>가 보여주듯 오이디푸스 궤적의 실패의 끝에는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한 노먼 베이츠의 혼란된 광기, 섬뜩한 공포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히치콕 영화는 페미니즘 비평가들에게 끊임없는 비난을 받아왔다. 확고한 가부장적인 이데올로기를 확립하는 충복으로 오이디푸스 궤적은 재생산되어왔고, 이를 가장 충실하게 재현해내는 동시에 그 궤적의 말로를 가장 실감나게 보여준 것도 히치콕이었기 때문이다.



키워드 No.3-여성 혐오증



히치콕은 자신의 영화를 절대 심각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영화를 케이크 조각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만든 케이크는 정교한 것이었다. 영화에 대한 냉정함은 사건의 단서가 되는 모자나 열쇠 따위의 사소한 물건을 차근차근 집어가는 그의 전매특허 같은 트래킹숏에도 배어 있다. 그러나 무뚝뚝한 히치콕에게도 여신은 있었다. 히치콕은 평생 두 여자를 사랑했다. 잉그리드 버그만과 그레이스 켈리. 히치콕에게 아내 알마 레빌은 언제나 촬영현장을 지키는 스크립터로 온갖 성가신 일을 도맡아하는 충실한 조력자였을 뿐이었다. 금발은 히치콕에게 유혹과 거절 두 가지 모두를 상징했다. 그의 여신인 잉그리드 버그만이 자신과 동일한 조건, 즉 감독이자 유부남인 이탈리아의 로베르토 로셀리니에게 도망쳐 갔을 때, 그는 다시는 버그만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래서 히치콕 영화에는 금발의 여신을 창조해낸 피그말리온의 오만함과 자신의 신전에 있는 여신을 겁탈하고 파괴하고자 하는 아폴로의 욕망이 모두 들어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그의 영화의 여주인공들은 한결같이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여자’들인 팜므파탈과 달리, 아는 게 거의 없는 여자들이다. 너무 많이 모르는 여자, 응시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여자는 물론 함정에 빠진 자신을 구할 수 없다. <다이얼 M을 돌려라>에서 그레이스 켈리는 자신을 죽이려던 괴한을 엉겁결에 가위로 살해한 뒤 감옥으로 사라지고, 그녀의 존재는 형사와 애인, 그리고 남편 사이의 오고가는 두뇌게임에 매몰되어 간다. 형사, 탐정 소설가, 기업체 사장, 정신과 의사. 히치콕의 여주인공을 구해주려는 전문가들이 난무하는 가운데도 히치콕의 영화들은 점차 여성 혐오증이라는 악명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단지 여성을 비하하거나 깔본다는 의미보다는, 여성에게 지닌 남성들의 뿌리깊은 위협감, 몇푼의 돈을 집어주고 도벽이 있는 마니를 통제하고 치유하려는 숀 코너리에게서 나타나는 양가감정이기도 하다.



키워드 No.4-맥거핀




이제는 너무나 흔하게 쓰는 단어인 맥거핀은 실제로 히치콕 영화 <해외특파원>에서 비롯된 것이다. 반 미어라는 원로 정치가가 쥐고 있는 암호명이 바로 맥거핀이었던 것. 그러나 그것은 단지 비밀문서를 빼오라는 지시를 담은 평범한 암호일 뿐이고, 처음에는 뭔가 있을 듯이 보이던 사건이 그 내용이나 진상을 확인해 보려 할수록 의미가 없어지는 영화적 속임수였을 뿐이었다. 히치콕에게 최대의 맥거핀이란 가장 중요한 듯 보이지만 가장 공허하고 허황되고 무의미한 어떤 것이었다. 이러한 맥거핀의 개념은 히치콕으로서는 단지 관객의 의표를 찌르는 영화상의 기술을 일컫는 말이었지만, 뒤에 라캉은 행동을 취하게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비밀, 어떤 공백의 개념으로 바뀌어 문화비평의 한 용어로 자리잡는다. 그것은 환상함으로써 얻어지는 실재계의 구멍, 주체의 욕망이 빚어내는 환상 공간, 현실로 진입 즉시 사라지는 환영 같은 것이었다. 마치 <현기증>에서 제임스 스튜어트의 환상으로만 존재했던 신비로운 여인 킴 노박이 현실에 들어서자마자 빨간 머리의 천박한 여공 주디로 바뀌는 순간 휘발되었던 어떤 환상 세계이기도 하다.



히치콕은 평생 50여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 속에는 <현기증> <사이코> <새> <오명>같은 걸작이 있는가 하면, <염소좌 아래서>나 <토파즈>같은 히치콕 스스로도  부끄러워하는 실패작도 있었다. 그러나 히치콕은 영화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일단 스토리 보드를 그리고 모든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넣은 뒤, 촬영장에서는 태연하게 원하는 장면을 지시하곤 했다. ‘머릿속으로 만들어진’ 히치콕의 작품들은 세트나, 배우, 이야기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히치콕의 연출력만으로 축조한 가장 영화적인 조합물이라는 점에서 ‘순수영화’라 불리기도 한다. 그는 아마 평생 어떤 공포증에 시달린 듯하다. 흔히 히치콕의 피해자들은 목졸려 살해당하고, 히치콕은 로프나 넥타이, 스카프, 외딴집 같은 폐쇄공포증적인 이미지에 매달린다. 이러한 팽팽한 공간의 이미지는 어떤 과잉도 용납하지 않는 그의 연출과 정확히 일치하는 서늘함을 지니고 있는 것들이다. 그것은 일상의 빈틈에서만 드러나는 죄의식과 억압, 불안의 그늘. 이후 이처럼 냉정하고 아슬아슬하게 영화적인 균형을 잡아가는 감독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심영섭/ 영화평론가(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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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지 않은 베란다 똑똑한 활용법

○ 바닥을 돋워 간이서재로


베란다를 트지 않은 대신 새시를 없애고 격자무늬의 포켓도어를 설치. 목공공사를 해 베란다를 거실높이로 돋우고 거실과 똑같은 마룻바닥을 시공해 연결감을 주었더니 튼 베란다 못지않게 거실이 넓어 보인다. 베란다 한쪽 벽에 책장과 의자 하나를 두고 간이서재로 활용했다. 베란다와 거실 사이에 포켓도어식 격자문을 설치하면 100만원 정도 든다.


○ 간이책상 놓아 주부만의 공간으로

베란다 벽면에 선반과 간이책상, 서랍장 하나만 두면 금세 멋진 작업공간이 만들어진다. 아이들에게 방해받지 않고 뜨개질, 독서, 재봉 등을 할 수 있는 주부만의 공간이 되는 것. 재봉이나 다림질처럼 전기가 필요한 일을 하게 될 때는 배선문제를 생각해 테이블의 위치를 정한다. 베란다에 콘센트가 없고 조명이 부실하다면 따로 전기 기술자를 불러 연장선을 설치하는 게 편리하다.

○ 화초 키우고 차 마시는 카페 정원

베란다를 개조하지 않고 예쁘게 가꾸는 가장 쉬운 방법은 화초를 들이는 것. 밖이 훤히 보이는 베란다 창가에 정원 분위기가 나도록 펜스를 치고 화분을 조르르 놓으면 끝! 간이의자 2개와 테이블을 놓고 로맨틱한 패브릭으로 커버링하면 노천카페와 다름없다.

○ 마음껏 뛰어노는 놀이방

집안에서 아이들이 뛰어놀면 아래층의 눈치가 보이지만 베란다는 그렇지 않다. 뛰거나 넘어져도 다치지 않도록 조립식 카펫 매트를 깔아주면 신나게 뛰어놀 수 있다. 마음대로 낙서할 수 있는 칠판을 걸어주어도 좋다. 조립식 매트는 일반적으로 6∼10개 묶음 1만원 내외.

○ 중문을 따로 달아 유럽풍 전원주택 분위기

화초 키우고 빨래 널 자리가 마땅치 않아 베란다 확장은 포기했지만 멋없는 기존의 새시문만이라도 꼭 바꾸고 싶은 사람에게 권하고 싶은 아이디어. 베란다 바깥의 새시와 바닥 타일 등은 그대로 두고 거실과 베란다 사이의 유리문만 바꾸는 것. 한쪽에 여닫이 도어를 짜맞추고 나머지 한쪽에는 유럽식 쪽창을 달면 거실 분위기가 한결 화사해 보인다. 40평대를 기준으로 시공비는 250만원선이다.

 

● 확장 공사한 베란다, 눈에 띄는 꾸밈법

○ 이국적인 계단식 테라스

베란다를 틀 때 바닥을 거실높이와 맞춘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목공공사로 거실 바닥보다 훨씬 더 높게 올린 다음 계단과 난간을 설치해 이국적인 분위기의 베란다를 만들었다. 베란다 바닥 아래의 빈 공간에는 서랍을 짜넣어 수납공간으로 활용하고 베란다 위는 테이블과 의자를 놓아 손님접대를 하거나, 저녁에는 부부가 술 한잔하는 휴식공간으로 사용한다. 어느 집과도 차별화되는 색다른 공간이긴 하지만 인건비와 새시, 온돌 바닥재 등을 포함해 시공비는 700만원선으로 꽤 높은 편.

○ 집안으로 정원 끌어들이기

트인 베란다에 나뭇결이 그대로 드러나는 패널을 덧대 아파트의 인공적인 냄새를 싹 지우고 전원주택처럼 변신한 케이스. 베란다 바닥을 높여 정원이 더 돋보인다. 베란다 전체를 화분으로 채우지 않아도 항아리, 돌절구, 미니 물레방아 등의 내추럴 소품을 더하면 멋지다. 바닥에 열처리를 하지 않으면 난방비가 조금 덜 든다. 시공 비용은 베란다 바깥 새시를 제외하고 200만원선.


○ 테이블과 스툴만으로 멋진 홈바 탄생

베란다를 트고 나서 중문을 달면 이전처럼 독립된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다. 저녁 시간, 부부가 오붓이 즐길 수 있는 홈바를 만드는 것도 아이디어. 짜맞춤 테이블에 스툴 2개만 놓으면 손쉽다. 창밖 전망이 좋은 집에 특히 추천.

몰딩 부분도 목공으로 짜넣어 아늑한 분위기를 냈다. 창 앞에는 레이스 커튼을 드리우고 앤티크 가구와 잘 어울리는 러그도 깔아 한층 더 분위기 있는 공간으로 연출했다.
○ 로맨틱한 코지 코너

베란다를 트고 나면 의외로 휑한 분위기에 당황하는 경우가 많다. 단순히 공간을 넓히는 게 아니라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내고 싶을 때는 목공과 페인팅, 조명에 특히 신경 써야 한다. 이 집은 창문을 격자창으로 하고 거실에서 베란다 사이의

○ 베란다에 소파를 놓아 거실을 넓게

20평 미만의 아파트는 거실에 소파를 놓기 애매한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베란다를 트면 거실을 훨씬 넓게 사용할 수 있다. 베란다를 터서 여기에 창을 등지고 소파를 놓으면 거실이 넓어 보이고 가구 배치가 한결 자유롭다. 특히 양쪽 날개벽이 비내력벽인 경우 다 트면 집이 몰라보게 넓어진다. 바닥의 난방과 새시, 직사광선을 막을 수 있는 UV 코팅 블라인드나 버티컬 설치 등을 꼼꼼하게 체크해야 한다.

○ 슬라이딩 도어로 난방과 소음 해결

베란다를 트면, 바닥에 난방공사를 하고 바깥창에 시스템창을 설치해도 겨울에 추운 건 사실이다. 그래서 요즘은 베란다를 트고 나서 중문을 많이 설치하는데, 난방과 장식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일석이조 아이템. 슬라이딩 도어의 프레임을 화이트로 하고 통유리로 디자인했다. 슬라이딩 도어를 다 닫아도 답답하지 않고 채광이 좋다. 확장과 목공·조명공사까지 42평 기준으로 580만원 정도 든다

 

자료출처1:우먼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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