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이준익
주연 : 감우성, 정진영, 이준기, 강성연
개봉 : 2005년 12월 29일
관람 : 2006년 1월 7일
등급 : 15세 이상

네이버에서 네티즌들에게 9.6이라는 놀라운 평점을 받고 있는 [왕의 남자]. 그 평점이 무려 12,320여명의 참가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얼마나 많은 관객들이 이 영화에 만족했는지 나타내는 간접적인 증거입니다. [왕의 남자]에 대한 호평은 네이버에서 뿐만이 아닙니다. 제 홈페이지에는 [왕의 남자]에 대한 추천글이 줄을 이었고, 덕분에 2005년의 마지막 영화로 [왕의 남자]대신 [나니아 연대기 :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을 선택했던 저는 결국 2006년의 첫 영화로 [왕의 남자]를 선택하였습니다.
이렇듯 사상 유래없을 정도의 호평을 얻고 있는 [왕의 남자]이지만 이 영화를 기대하기까지는 제겐 꽤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준익 감독 때문입니다. 이준익 감독의 전작은 [황산벌]입니다. 삼국시대 말기 신라의 김유신 장군과 백제의 계백 장군의 비극적인 황산벌 전투를 코미디로 풀어나간 [황산벌]은 우리 영화에 시대극과 코미디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출하기는 했지만 높은 평점을 주기엔 꽤 불만족스러운 영화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저는 [황산벌]의 역사 비꼬기가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쟁쟁한 영웅호걸들이 나라의 흥망성쇠를 걸고 운명의 한판을 벌였던 그 시대를 욕설과 사투리가 난무하는 우스갯거리로 전락시켰던 이준익 감독이 이번엔 우리 역사상 최고의 폭군이었던 연산을 영화화한다는 소릴들었을때 연산을 또 얼마나 비꼬며 '웃어라'고 억지를 부릴지 걱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카리스마 넘치는 예고편을 봤을때부터 맘이 바뀌었습니다. '그래 이번엔 코미디가 아니구나! 최소한 [황산벌]처럼 말도 안되는 사투리와 욕설로 관객을 웃기려 들지는 않겠구나'하는...




암튼 2006년의 첫 영화로 저는 [싸움의 기술]과 [왕의 남자]를 사이에 두고 심각하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결과 결국 [왕의 남자]를 선택했습니다. 너무 많은 분들의 추천으로인해 커져버린 기대감과 그 기대감을 채워주지 못해서 내게 이 영화가 재미없으면 어떻게 할까하는 쓸데없는 걱정(이 영화에 대한 악평을 썼다가 돌팔매 맞을지도 모른다는 심적 부담... ^^;)을 가슴에 안은채...
그러나 그 결과는 만족중에서도 대만족이었습니다. 영화가 시작하는 순간부터 끝나는 순간까지 저는 숨소리조차 크게 낼 수 없었습니다. 도저히 [황산벌]과 [왕의 남자]가 같은 감독의 영화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이준익 감독은 묵직하고 진지하게 영화속 캐릭터들의 아픔과 상처를 영화속에 표현해 냈으며, 그러한 영화속 표현들은 감동으로 변환되어 너무나도 생생하게 내 가슴속을 파고들었습니다. [황산벌]도 이런 식으로 만들었다면 그런 의미없는 웃음보다는 그 시절의 아픔을 좀더 생생하게 느꼈을텐데... 이준익 감독에게 '[황산벌]을 다시 만들어 주세요'라고 부탁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비장한 분위기가 풍기는 영화를 선호하는 탓인지도 모릅니다. [황산벌]은 영화의 소재부터가 비장함을 갖추고 있었지만 관객들이 좋아하는 코미디로 만들려다보니 그 비장함이 비꼼으로 퇴색되어 버려 아쉬웠고, [왕의 남자]는 연산군과 장녹수, 광대라는 조금은 해학적인 소재를 가지고 있지만 그러한 해학적인 소재를 오히려 비장함으로 포장해낸 그 솜씨로 인해 예상치못한 감동을 받았으니... 하지만 [왕의 남자]의 높은 평점으로 미루어보건데 그러한 바램이 저 혼자만은 아닌가 봅니다. ^^




신명나는 광대놀이의 뒷편에 치명적인 유혹과 이룰수 없는 욕망이 결국 살인으로 이어지는 [왕의 남자]의 오프닝은 처음부터 강력하게 장생(감우성)과 공길(이준기)의 캐릭터를 관객들에게 새겨넣습니다. 이준익 감독은 익숙한 솜씨로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두 캐릭터의 관계를 설명해낸겁니다. 지루한 설명이나 생뚱맞은 생략이 아닌 너무나도 적절하면서도 간결하게 말입니다.
이런 뛰어난 오프닝씬 이후 영화는 일사천리로 뛰어나가기 시작합니다. 이젠 굳이 장생과 공길의 관계를 관객에게 이해시킬 필요가 없어진 이 영화는 마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듯이 장생 일당이 그 시대 최고의 권력가인 연산(정진영)을 가지고 놀게되기까지의 과정을 쉬지 않고 진행시켜나간 겁니다. 그 결과 이 영화는 지루함을 느낄 여유를 관객에게 허용하지 않게 된거죠.
그러나 장생 일당이 연산과 만나는 영화의 중반부부터 한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것은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인 연산과 녹수(강성연)라는 캐릭터에 대한 설명이죠. 단순히 폭군과 요부라는 설정만으로 영화의 또다른 한쪽을 지탱하고 있는 연산과 녹수를 설명한다면 영화의 추가 너무 장생과 공길에게 치우치는 실수를 범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이준익 감독은 또 다른 명쾌한 해답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바로 정진영이라는 배우의 존재입니다. 카리스마 넘치는 감우성의 연기와 비교해서도 결코 뒤지지않는 정진영의 연기력은 지루한 설명없이도 연산이라는 시대의 폭군을 완벽하게 표현해냅니다. 물론 여기에는 이미 여러 영화와 TV 역사극을 통해 연산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가 그 밑바탕에 깔려있기는 하지만 연산과는 달리 녹수가 그리 부각되지 못한것을보면 역시 정진영의 연기가 연산을 표현하는데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지 설명이 됩니다. 그와 반대로 너무 정형화된 모양새로 녹수를 표현한 강성연의 연기는 다른 배우들에 비해 조금 부족해보인 것도 사실이고요.




이렇듯 장생, 공길, 연산의 캐릭터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이 영화는 아픔과 상처를 안고 불길속을 뛰어든 불나방같은 남자들의 비극을 통해 묵직하고도 비장한 마무리를 준비해냅니다.
장생과 공길의 마지막 줄타기를 보며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후회없이 인생을 보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그들을 쳐다보며 부러운듯한 미소를 짓던 연산과 녹수의 그 표정 역시 영화가 끝나고 한참까지도 쉽게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최고의 권력가로 이 세상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을것처럼 보였던 연산과 녹수이지만 그들은 결코 장생과 공길같은 진정한 사랑은 얻을 수 없었을테니 그 마지막 미소가 묘한 여운을 남겼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연산에 대한 소설이 읽고 싶어졌습니다. 한 나라의 군주로 선택되어진 그가 어쩌다가 저런 희대의 폭군이 되었는지... 단지 어머니에 대한 사무친 한때문만은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 영화에서 미처 표현할 수 없었던 그 어떤 이유가 분명 있었을 겁니다.
이것이 바로 시대극의 힘입니다. 역사를 바로 알아야 미래를 올바르게 설계할 수 있다고 주장하시던 고등학교 시절 역사 선생님의 말씀이 새삼 생각납니다. 그땐 그냥 흘려들으며 역사 시간마다 뒤에서 영어, 수학 공부를 했었는데... 이런 잘만든 영화 한편이 역사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역사에 대한 이런 작은 호기심이 [황산벌]같은 의미없는 웃음보다 휠씬 값지다고 믿기에... 이준익 감독의 이 의미있는 변신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당신의 이 의미있는 변신은 결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유혹이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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