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로 실용서는 제목을 잘 지어야 한다. 최근에 제목만 보고 보관함에 담은 책 두 권은 <나는 15억 벌어서 35세에 은퇴했다>와 <코드 한 줄 없는 IT 이야기>.
<나는 15억 벌어서...>의 경우에는 워낙 'OO 억 벌기'에 관한 도서가 판치는 요즘에 특별한 제목은 아니다. 다만 내 개인적으로 그 책을 발견하기 전날 선배와 나눈 이야기가 주효했다.
하루 빨리 월급을 모아 종잣돈을 마련하고, 이를 재테크로 불린 다음 시골에 땅을 사서 사업을 한다. 그 다음엔 실한 영농후계자를 만나 결혼해서 잘 먹고 잘 산다는 시시껍절한 농담 따먹기를 한 뒤여서인지 제목에 단번에 눈이 갔다. 하지만 차마 돈 주고 사보지는 못하고 보관함 안에 고이 모셔 놓고 있다.
<코드 한 줄 없는 IT 이야기> 역시 제목만 보고 골라 읽었다. 나처럼 이 바닥에 있으면서도 개발자들 얘기가 딴 나라 잠꼬대인가 싶은 답답함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끌렸을 것이다. 코드 한 줄 없이도 IT를 알려주겠다? 그럼 나도 이제 개발자들 앞에서 어깨 펼 수 있는거야? 하지만 욕심이 과했지. 코드는 한 줄도 없었지만, 행도 행간의 의미도 어렵기만 한 나에게는 불가해한 코드나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검증된 저자가 쓴 책이 아니라면 실용서의 경우 제목이 매우 중요하다. 나 자신도 몰랐던 나 자신의 니즈를 콕! 찍어 제목으로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매우 구체적으로.
얼마나 구체적이어야 하나면 이정도다 => <평생 성적, 초등 4학년에 결정된다>. 3학년도 아니요, 5학년도 아니요, 저학년도 고학년도 아닌 '4학년'에 결정된단다. 전국에 4학년 자녀를 둔 부모만 읽으면 어쩌나 하는 우려는 필요 없다. 아직 4학년이 안되었으면 대비하는 마음으로 읽을 것이요, 4학년이 지났다면 '아차 늦었군'이란 마음에 서둘러 읽을 테니 공부 잘하는 자녀를 두고픈 부모들은 누구나 끌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20년 벌어 50년 먹고 사는 인생설계>라는 책은 나의 예상을 빗나가 잘 팔리는 책이다. 20년을 벌어 50년을 먹고 살어?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인생인데 너무 멀리 보는거 아냐? '나는.. 35세에 은퇴했다' 정도가 딱 적당하지.. 앞으로 20년을 더 일해야 한다고 하면 누가 그 책을 사볼까 싶었지만, 의외로 책은 잘 팔렸다. 노령화 사회에 대비하는 분들의 긴 안목이란.
본격적으로 실용서 제목 변천사를 훑어봐도 재밌을 것 같다. 실용서 제목에는 분명히 유행이 있어서 한 권의 책이 대박을 터트리면 그 아류들이 줄줄이 나온다. 아류 이름 구경도 꽤나 흥미진진하여 편집팀 분들이라면 몇가지씩 줄줄 꿰고 있다. 아침형 인간, 아침형 인간의 비밀, 아침형 인간으로 변신하라, 심지어 새벽형 크리스천까지. ^^ 출판 기획자들의 제목 짓기 고민은 오늘도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