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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대화를 나누고 싶다.
열 두 시간쯤 함께 이야기해도 지루하지 않고, 매 순간 순간을 새롭고 흥분되게 만드는 어떤 이와 재미있는 대화를 나누고 싶다.

일 이야기, 이성 친구 이야기, 연예인 사생활, 회사 상사 뒷담화, 돈 버는 이야기, 다른 이들 시집 장가 가는 이야기, 어제 본 드라마 이야기...

도 물론 재미있지만,

가끔은 위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 주제로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가 있다. 위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으면서 내가 속한 세상의 일이며, 재미있고, 진실을 담고 있고, 놀랍기까지 한 일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이를 테면,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와 같은 이야기 말이다.

(뭐... 수백억년 전의 우주 탄생이 오늘날 내가 아침마다 지옥같은 지하철에 낑겨 출근하고, 어깨 뻐근할 때까지 일하고, 오후의 식곤증을 피해 커피 한 잔 마시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겠지만서두.)

대화를 대화로써 즐기는 것이 점점 사치스런 일이 되면서, 위 카테고리를 벗어난 재미있는 대화가 귀해져버렸다.

게다가 하릴없이 하루 종일 붙어 다니고, 같은 세미나를 위해 같은 책을 보고, 내키면 하얗게 밤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누던 친구들은 이제 너무나 바쁘다. 여전히 만나면 반갑고 즐겁지만, 나눌 수 있는 대화의 주제가 한정되어간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드물게도 위 카테고리를 벗어난 주제로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한 벗의 선물로,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읽고 있다. 머리가 나쁘고 이해력의 한계가 있어서 한꺼번에 많이 읽지는 않으려 한다. 나도 이런 재밌는 얘기를 다른 이에게 해줄 수 있으려면 숙지하여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기에.

"...너 옛날에 태양계 그려놓은 그림을 지구과학 책에서 본적 있지? 태양을 둘러싼 궤도에 걸쳐진 수.금.지.화.목.토.천.해.명 말야. 근데 그게 얼마나 엉터리인 줄 아냐? 사실 지구를 팥알만한 크기로 그렸다면, 목성은 300 미터 떨어진 곳에 그려야 한다구."

이렇게 말이다.

(근데 써 놓고 보니 조금 걱정된다. 내 앞의 그가 날 재수 없어 하진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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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ninara 2005-01-17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요? 오호..재미있는데요?

물만두 2005-01-17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 지금 읽고 있는 당신 인생의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머리 복잡합니다...

sunnyside 2005-01-17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니님, 그렇담 다행이에요 ^^*
ㅎㅎㅎ 만두 님 말씀도 옳으십니다.

비로그인 2005-01-17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비싸구만이라~~잉!!

sunnyside 2005-01-17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네 쪼까 그렇습니다요~잉

starrysky 2005-01-18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저랑 똑같은 소원을 갖고 계시네요. 저도 정말 그런 대화 상대가 필요해요. ㅠㅠ
사실 두어 명 있긴 있는데 요새 제가 뻘짓하느라 좀 바빠서 자주 못 만났더니 대화가 고픕니다. 빨리 인간답게 살면서 밤새 얼굴만 봐도 좋은 친구랑 즐거운 대화 나눌 수 있는 시간 만들고 싶네요. ^^

sunnyside 2005-01-18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타리님 어떤 뻘짓을 하시느라... ^^;
동네도 비슷한데, 우리 한번 만나서 밤새 수다를 떨어볼까요? ^^
 

--이 드라마가 수상하다

어제부터 2기가 시작된 MBC 월화 드라마 '영웅시대'. 우리 시대의 실존 기업가들을 주인공으로 만든다고 하여 화제를 모았으나 기대와 달리 1기는 시청율을 올리지 못했다. 그러다 어제부터 차인표가 최불암으로 교체되어 2기가 시작되었는데.. 어째 심상치가 않다.

드라마 첫 머리에 등장한 박정희(독고영재 분)과 천태산(정주영이 모델, 최불암 분)의 대화를 보라.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자급자족, 자주국방하는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우리 군인이 나섰다!고 결연한 의지를 밝히는 박정희의 대사엔 장엄한 백그라운드 뮤직이 깔린다.

소학교 밖에 졸업을 못하고 '신문대학'과 '노동대학'에서 공부했다는 우리의 천태산씨, 역시 형편이 어려워 학비가 전액 면제인 사범학교에 갔다는 박정희는 서로 진한 교감을 나눈다. 동시에 이 나라 이 민족의 운명을 함께 헤쳐 나가보자는 영웅들의 의지는 후끈 달아오르는데..

드라마 제목이 '영웅시대'니 어느 선까지는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그 몇몇 영웅들이 이 나라의 경제를 세우는 동안, 그 아래서 최저 생계비에도 못미치는 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피땀 흘렸던 이들의 이야기를 그렸다면 '민초시대'라고 했겠지.

하지만 그 군인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끝나지 않았고, 그 기업가의 가족과 자손들이 아직도 이 나라의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지금이라면 좀 이르지 않나? 온 국민이 시청하는 공중파 TV로 몇몇 일가의 이야기를 이처럼 미화시키는 게 말이다.

--나이 파괴 드라마, 영웅시대

게다가 이 드라마는 주인공의 나이와 실제 나이가 엉망진창이다. 근데 그게 재밌다. (^^;) 몇년 전만 해도 팽팽한 차인표였던 천태산씨는 몇 년 만에 폭삭 늙어 최불암 아저씨가 되었는데 극 중 나이는 마흔 여섯. (30대부터 전원일기에서 할아버지 역할을 했다는 최불암씨는 할아버지인 지금 40대 역할을 한다. 정말 대단한 배우!)

40대 중반인 천태산의 큰아들은 강석우 - 강석우의 지금 나이가 마흔 여덟이다, 대학생인 둘째 아들 정한용 - 강석우보다 세 살 위, 이들의 고모로 나오는 이혜숙씨보다도 한참 나이가 많다. 그런가하면 동생들은 아직도 어린 아역배우들로 나오고... 이들 나이를 헤아리다보면 드라마에 빠져들기가 쉽지 않다. 에고..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거의 한세기 인물열전을 풀어가기엔 한국의 배우풀이 너무 좁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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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4-11-16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거 보고 정신이 오락가락 한답니다. 음.그냥 이건 드라마이니 줄거리나 봐야겠다 하는 생각만 갖고 봅니다.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시청률 프로테지 문제때문에 기존의 유명 배우들을 주로 섭외하다보니 이런 이상한 가족구성이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이 소설을 읽고 난 멋쩍어졌다.

난 소설을 많이 읽는 편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작품을 작품 자체로 평가할만한 능력이 안된다. 그저 화자의 생각과 경험에 나의 경험과 생각을 견주어 볼 뿐이다.

난 독학자가 비판하는 대상과 같은 모습이었다. (간단히 줄거리를 말하면, 이 소설 속의 독학자는 공부하지 않는 80년대 대학을 비판하고 이에 저항하다가 끝내 자퇴를 결심한다. 그는 40세까지 생계를 위한 최소한의 노동만을 하면서 목적없이 읽고 사유하겠노라 결심한다. 정신의 진보를 쟁취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이고도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 것이다.)

다시, 난 독학자가 비판하는 부류의 '학'생이었다. 대학에 들어오면서 난 공부와 담을 쌓았다. (물론 그 이전의 행위들도 공부는 아니었지만) 난 오로지 떼거지 속에서만 나의 존재 가치를 찾을 수 있었던 양, 선후배 동기들과 낮이고 밤이고 우르르 몰려 다녔다. 이틀에 한번씩 술 마시느라 집에 들어가지 않았고, 수업을 빼먹는 것은 예사였다. 전공서적도 제대로 산 적이 없어서 선배로부터 물려 받았으며, 컨닝을 대학 낭만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특정 교수의 수업을 보이콧한 기억은 없었기 때문에 그 집단 행동에서 빠져나간 학생들을 비난하진 않았지만, 등록금투쟁에 동참하지 않는 도서관 학우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라고 이 찬 노천바닥에 앉아 이러고 싶은 줄 아냐?'라며 항변을 했겠지만, 기실 난 그러고 싶어서 그랬던 것이다.

그나마 내 생에 '정신적 진보를 위한 투쟁'이랄만한 행위는 초등학교에서 끝이 났다. 밖에 나가 놀지 않는다고 애늙은이라 불렸는데, 엄마가 계몽사 외판원 아저씨의 입심에 넘어가 사들인 세계명작동화, 위인전집, 백과사전, 한국사 전집류를 읽고 또 읽었다. 그러다 중학교에 들어가며 딸의 수준을 과대평가한 어머니가 세계고전전집을 사주셨지만, 작은 글씨 난해한 내용에 질려 버렸다. 어린왕자, O 헨리 단편집 - 이렇게 딱 두 권만을 읽고 나의 독서 인생은 중단된 것이다.

그후로 난 '독학자'였던 적이 없다. 내 정신적 진보를 위해 친구와 의절한 적이 없다. 강의의 질을 두고 교수에게 항의한 적도 없다. 내 정신 세계의 독립보다는 타인의 교양과 수준을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썼을 뿐이다.

그 스무살 청년이 실제로 자퇴서를 냈는지,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엔 읽기를 계속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난 한번도 내 정신의 진보를 위해 무엇인가를 걸어본 적이 없다는 대목에서 멋쩍음을 넘어 잠시 슬퍼진다. 자유롭고 선명한 존재를 꿈꾸는 그의 투쟁이 부디 승리하길 바래보지만,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의미없는 생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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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2004-10-01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물류만 열심히 해도 정신의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나요?
힘들겠지요? ㅎㅎ

sunnyside 2004-10-01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가능하지 않을까요? 물류로 도달한 정신적 경지라면... 뇌의 모든 정보가 센터의 로케이션을 기준으로 정렬되고 투입된 정보가 소팅 머신의 속도로 각 로케이션에 자동으로 꽂히는.. 뭐 그런 걸까요? ^^;
 

자고로 실용서는 제목을 잘 지어야 한다. 최근에 제목만 보고 보관함에 담은 책 두 권은 <나는 15억 벌어서 35세에 은퇴했다>와 <코드 한 줄 없는 IT 이야기>.

<나는 15억 벌어서...>의 경우에는 워낙 'OO 억 벌기'에 관한 도서가 판치는 요즘에 특별한 제목은 아니다. 다만 내 개인적으로 그 책을 발견하기 전날 선배와 나눈 이야기가 주효했다.

하루 빨리 월급을 모아 종잣돈을 마련하고, 이를 재테크로 불린 다음 시골에 땅을 사서 사업을 한다. 그 다음엔 실한 영농후계자를 만나 결혼해서 잘 먹고 잘 산다는 시시껍절한 농담 따먹기를 한 뒤여서인지 제목에 단번에 눈이 갔다. 하지만 차마 돈 주고 사보지는 못하고 보관함 안에 고이 모셔 놓고 있다.

<코드 한 줄 없는 IT 이야기> 역시 제목만 보고 골라 읽었다. 나처럼 이 바닥에 있으면서도 개발자들 얘기가 딴 나라 잠꼬대인가 싶은 답답함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끌렸을 것이다. 코드 한 줄 없이도 IT를 알려주겠다? 그럼 나도 이제 개발자들 앞에서 어깨 펼 수 있는거야? 하지만 욕심이 과했지. 코드는 한 줄도 없었지만, 행도 행간의 의미도 어렵기만 한 나에게는 불가해한 코드나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검증된 저자가 쓴 책이 아니라면 실용서의 경우 제목이 매우 중요하다. 나 자신도 몰랐던 나 자신의 니즈를 콕! 찍어 제목으로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매우 구체적으로.

얼마나 구체적이어야 하나면 이정도다 => <평생 성적, 초등 4학년에 결정된다>. 3학년도 아니요, 5학년도 아니요, 저학년도 고학년도 아닌 '4학년'에 결정된단다. 전국에 4학년 자녀를 둔 부모만 읽으면 어쩌나 하는 우려는 필요 없다. 아직 4학년이 안되었으면 대비하는 마음으로 읽을 것이요, 4학년이 지났다면 '아차 늦었군'이란 마음에 서둘러 읽을 테니 공부 잘하는 자녀를 두고픈 부모들은 누구나 끌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20년 벌어 50년 먹고 사는 인생설계>라는 책은 나의 예상을 빗나가 잘 팔리는 책이다. 20년을 벌어 50년을 먹고 살어?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인생인데 너무 멀리 보는거 아냐? '나는.. 35세에 은퇴했다' 정도가 딱 적당하지.. 앞으로 20년을 더 일해야 한다고 하면 누가 그 책을 사볼까 싶었지만, 의외로 책은 잘 팔렸다. 노령화 사회에 대비하는 분들의 긴 안목이란.

본격적으로 실용서 제목 변천사를 훑어봐도 재밌을 것 같다. 실용서 제목에는 분명히 유행이 있어서 한 권의 책이 대박을 터트리면 그 아류들이 줄줄이 나온다. 아류 이름 구경도 꽤나 흥미진진하여 편집팀 분들이라면 몇가지씩 줄줄 꿰고 있다. 아침형 인간, 아침형 인간의 비밀, 아침형 인간으로 변신하라, 심지어 새벽형 크리스천까지. ^^ 출판 기획자들의 제목 짓기 고민은 오늘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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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09-11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후~ 오랜만에 줄을 잇는 페이퍼 군단!

마태우스 2004-09-11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판계에 몸담은 분답게 예리한 글이옵니다. 오랜만에 인사드려요!

sunnyside 2004-09-11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많이 게을렀죠. 몰아치기로 만회하고자 하는 발버둥.. ^^;

mannerist 2004-09-11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방 어딘가에 멋진 제목을 띤 책 하나가 있다죠. '닳지 않는 칫솔'이라고 말입니다. ㅎㅎ

sunnyside 2004-09-12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무슨 책인가 검색해 봤어요. 왜 그런 제목을 지었을까요? 목차를 보니 마지막 부분에 나온 것 같은데, 기회되면 설명 좀 해주세요. ^^

mannerist 2004-09-12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제목을 정할 때 다음과 같은 원칙에 의한다.

첫째, 튀는 제목이어야 한다.

(중략)

둘째, 간결해야 한다.

(중략)

셋째, 의미를 담고 있어야 한다.

(중략)

앞서 언급했지만, <닳지 않는 칫솔>은 남들 생각처럼 양치질 하다가 생각해낸 것이 아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칫솔 하나를 3년 넘게 쓰는 사람이 있었다. 한달만에 칫솔을 한개씩 갈아치우는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그 사람 집에 잠복하면서 감시를 한 적이 있다.

비결은 간단했다. 안 닦는 것이다 .

(p. 256 - 257 인용)

sunnyside 2004-09-12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
저 마지막 문장의 강렬한 여운... 예사로운 작품이 아닌 것 같습니다.

水巖 2004-09-12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글을 올리시는군요. 여러가지 궁금했는데......

sunnyside 2004-09-12 0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들러주셔 감사합니다. 글은 자주 안 올려도 죽 보고 있었답니다. ^^
 

친구 A 가 요즘 회사 생활의 위기에 봉착했다.

친구는 어떤 에이전시에 다니고 있는데, 친구네 회사의 가장 큰 클라이언트와 의사 소통상 문제가 생겼다. 내가 보기에 큰 잘못은 아닌데, '공식적으로' 사과를 해야 할 입장에 처했단다.

가뜩이나 일도 많은데 그런 문제까지 터지니, 정말 회사 다닐 맘에 안날 것이다. 엊그제는 나보고 같이 회사를 때려치고 여행이나 다니자, 는 기찬 제안을 한다. 나야 물론 그걸 꼭 '회사를 그만두고' 해야 할까? 라며 발뺌할 수밖에 없었지만. ^^;

10년째 지켜보는 그 친구는 어쩐 일인지 늘상 오해를 받는다. 사소한 말실수 때문에 회사 상사에게 꾸지람 받고, 친구와 다툼하고, 선배들에게 찍히고... 물론 그 원인을 모르는 건 아니다. 그 친구는 너무 솔직하고 직설적이다. 술이라도 한잔 들어가면 속에 있는 말을 다 털어놓아야 직성이 풀린다. 그 친구 술 마시는 날이면 내가 다 불안할 정도다.

그런 A 가 첨엔 매우 낯설고, 친해지기 힘들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대학 1학년 여름, 속초의 한 콘도 옷장 속에서 울다 나온 후엔 (그 시절엔 술 먹고 같이 우는 게 유행이었다. -.-) 더 이상 그 친구를 오해하지 않는다. 요즘도 가끔 섭섭할 때가 있긴 하지만 악의는 아님을 믿기에 쉽게 넘겨버릴 수 있다.

그 친구 곁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몇 년 이상 그 친구와 관계를 맺어왔다. 또한 의리있고 의협심 강하고 남에게 신세지지 않는 독립적인 A를 좋아한다. 하지만 대개 가면쓰고 살아가는 사회생활에서 친구의 그런 속 깊은 모습을 알아줄리가 만무하다. 특히 상하 구도를 띄는 갑을 관계에서 그런 이해를 바라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그에 비해 난 어떤가 하면 오해를 병적으로 싫어한다. 한 순간이라도 내가 의도치 않은 모습으로 따른 이들에게 비쳐진다는 생각을 하면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매번 변명하고 노심초사하고 두고두고 기억하고. 그런 내 모습이 또 싫어서 거꾸로 스스로를 세뇌한다. 나는 신경쓰지 않아, 이런 일은 아무 것도 아니야. 다음에 기회가 있겠지. 크게 손해 날일도 아닌걸.

A 와 나는 좀 섞어서 다시 갈라 놓을 필요가 있다. A 도 사회 생활을 좀더 편하게 하려면 늘상 자신의 진의가 전달될 것이라는 착각 내지는 자신감을 버려야 한다. 같은 말도 돌려서 할줄 알아야 하고, 하고 싶은 말을 참아야 할 때도 있을 거다. 나 역시 모두에게 나를 이해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고 대범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포기할 건 포기하다 보면 언젠가는 서로를 이해할 기회도 오기 마련이다.

A 에게 전화라도 한통 해봐야겠다. 클라이언트와의 문제는 잘 해결되었는지. 사표 던지기에 대한 갈망은 좀 잦아들었는지. 세계일주는 잠시 미루고, 지금 프로젝트 끝나면 어디 드라이브라도 가자고 제안을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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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09-11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나도 서니님 스타일인 것 같아요. 혼자 오해라고 오해해서는, 오해하지도 않은 사실을 그저 미리 사과해 버리고 마는. 그래서 가끔 주변사람들을 황당하게 만들죠.
그나저나, 콘도 옷장 속이라, 인연의 장소 치고는 기묘하네요. 그 친구가 남자분이었다면, 필경 로맨틱한 뽀뽀를 했을 텐데~ *^^*
(뭐냐, 남은 심각한데 혼자 발그레...-.-;)

sunnyside 2004-09-11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랑 비슷하시다니, 반갑고도 다행. ^^;;
전 아예 리스크가 있는 의사소통은 미리 포기해버리는 고약한 버릇까지 있답니다. 우리 자신을 가져요. 불끈!! ^^

mannerist 2004-09-11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생각난건데요, 알라딘 US 물류팀으로 지원하셔서 유에스 각처를 여행하시는 건 어떨까요? ^_^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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