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꾿빠이, 이상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 몇 장을 읽으면서, 나는 이상이 궁금했다. 이상의 유명세에 비해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너무 적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해경과 이상, 멜론과 레몬... 의문투성이인 그의 죽음과, 그보다 더 의문투성이인 그의 시를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소설이 전개되면서, 나는 이상보다 김연화와 서혁민, 피터 주에게 빠져들었다. 이상의 텍스트에 결묘하게 결합된 그들의 이야기는 무척 흥미로웠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소설은 정체성에 대한 탐구이다. 처음 이상의 데드마스크에 얽힌 일화를 읽으면서, 나는 기자 김연화의 깨달음이 너무 의외였다. 김해경과 이상의 대립에서, 결국 이상이 승리했다는, 그래서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는 김연화의 깨달음과 데드마스크의 진위여부가 어떤 연관관계가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공백을 메꿔주는 것은 결국 서혁민과 피터 주이다. 그들의 고백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김해경과 이상의 대립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이 소설은, 이상과 김해경, 김연과 김연화, 이상과 서혁민, 그리고 중국인으로서의 피터 주와 미국인으로서의 피터 주, 그리고 한국인으로서의 피터 주의 대립들로 층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인간적인 존재 김해경은 불멸의 존재 이상과 싸워 끝내 패배한다. 그래서 김해경은 물리적으로 죽었지만, 이상은 멜론과 레몬으로 신화를 만들었고,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존재하지도 않을 이상의 데드마스크는 그의 죽음을 증명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의 불멸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데드마스크의 진위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과 김해경의 싸움을 이해하는 것이다.
김연화 기자는 김연이라는 가상존재로, 데드마스크 사건에 개입한다. 김연 기자는 데드마스크가 진짜라고 확신했지만, 그 확신으로 인해 실제적 존재인 김연화는 사기사건에 휘말린 어리석은 기자가 되고 만다. 그러나 이 사건을 통해 김연화는 사랑의 딜레마를 이해하게 되고, 이상에게 중요한 건 사실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미 불멸의 존재가 되어버린 이상, 그와 관계된 모든 것은 신화이다. 신화는 논리적인 검증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에서 풀어가야 할 문제이다.
서혁민이 추구하는 삶의 목표는 이상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행동을 하고, 그의 삶의 궤적을 밟으며, 그와 같은 시를 쓰는 것. 오로지 서혁민은 그것을 목표로 살아간다. 그래서 그가 쓴 시는 이상 시의 복제물에 불과했고, 누구 하나 거들떠 보지 않는다. 그런 그가 오감도 제16호 실화는 수기 끝에 적어놓았을 때, 그 시는 서혁민의 모조품이 아니라, 이상의 시가 된다. 물론 그것은 이상의 시를 조합한 결과물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중국인으로 태어나, 한국인 가정에 입양돼, 미국에서 성장한 피터 주. 그는 오른손에 이상전집과 왼손에 김일성 저작을 손에 들고, 정체성의 문제에 대해 고민한다. 그에게 이상은 한 명의 작가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근거였다. 그런 이유로 이상에 대한 오해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부정과 연결된다. 피터 주가 견딜 수 없었던 건, 학술회의에서 잘못된 발표를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근거가 뿌리째 부정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는 서혁민이 쓴 가짜 오감도를 보고, 진짜라고 판단한다. 이상의 작품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야 하는 그로서는 당연한 결과물이다.
이렇게 소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다양한 인물들을 만나게 하고, 그 인물들 내면에 존재하는 다양한 목소리를 듣게 한다. 그리고 그들을 연결하는 이상의 시에 대한 작가 김연수의 해석은 흥미롭다. 이상의 시를 매개로 하여 1930년대 동경 풍경과 2000년대 서울 풍경이 겹쳐진다. 수많은 자료를 뒤적이며 인물들이 내는 서로 다른 목소리에 귀 기울였을 작가, 김연수에게 박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