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도의 예수 랜덤소설선 1
정찬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책의 힘이란 정말 대단해서, 이 책은 중학교 때부터 외웠던 사도신경의 고백을 무색하게 했다. 빌라도는 그리스 철학으로 무장한 이성적인 사람이었고, 몰락한 가문을 극복하고 나름대로 성정하기 위해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합리적으로 사람을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예수의 처형을 결정하며, 그저 손밖에 씻을 줄 몰랐던 어리석은 빌라도는 이 책을 읽는 과정에서 서서히 지워져갔다.

고백하자면 나는 청소년기를 교회에서 보냈다. 아주 작은 개척교회에서 목사님을 아버지 삼아, 암울한 시절을 견뎌냈다. 그 때 여호수아는 나에게 또 다른 신이었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나는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했다는 그 말을 의지해 한 시절을 살아냈다.

정찬의 소설 <빌라도의 예수>는 역사와 철학, 인간을 중심으로 기독교의 세계를 그려내려는 또 하나의 시도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목적은 신에 대한 부정에 있지 않다.

작가는 소설 초반 구약의 시대를 이스라엘의 역사와 관련해 냉철하게 비판해 나간다. 신명기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정치적인 상황 아래 만들어졌다는 그의 해석은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신명기에 대한 빌라도의 이해는 예수에 대한 이해로 그대로 이어져 소설을 확장해 나가는 힘이 된다. 예수에 대한 정치적인 판단, 그리고 이성적인 판단. 동정녀임을 부정하는 마리아의 고백이나, 예수를 향한 한 여인의 애절한 사랑, 분노하고 좌절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예수에 대한 묘사나, 밀고자가 사울이라는 암시는 분명 성경과 다르지만, 그것이 신성을 부정하는 결론으로 치닫지는 않는다. 빌라도의 마지막 모습이야 말로 신적 존재로서의 예수를 보여주는 것이었으니, 어쩌면 이 소설은 빌라도의 매력으로 인해, 예수의 신성을 더욱 극대화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에 의지하여 정세를 판단하던 빌라도의 신앙고백은 지루한 얼굴로 예수천국을 외치는 어느 전도자들보다 절실하게도 보이니까.

나는 어쩌면 오랫만에 성경을 읽기 시작할 지도 모르겠다. 성조기를 흔들며 기도를 하던 한국교인들의 모습에서 나라와 국가 원수를 위해 기도하던 청소년기를 떠올렸던 나는 이사하면서 성경을 한 구석에 숨겨버렸다.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린 성전을 부수고자 했던 예수, 그가 있다는 교회가 또 다른 강도의 소굴쯤으로 여겨지는 것이야 여전하지만, 나는 빌라도와 같은 심정으로 다시 예수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 죽어가는 아이를 살리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그 아이의 고통을 함께 해서 그 아이보다 더 아파하는 것이 기적이라는 사울의 고백이 문득 가슴 절절히 느껴져서다.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기 위해 피비린내나는 전쟁을 했던 여호수아를 믿는 대신에, 나는 혹여 사람의 아들일지도 모르는 예수를 만나고 싶다.

이 간절한 고백으로 그를 부르면, 그는 이스라엘을 누볐던 그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광화문 한 복판에서 성조기를 흔들며 그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을 향해 세상을 거꾸로 하겠다, 외쳐줄 것만 같다.

그러고 보면, 소설의 힘은 참으로 위대해서, 잊고 있었던 옛사랑을 다시 기억하게 한다. 적으로만 알았던 한 인간의 이름을 새롭게 인식하게 한다. 본디오 빌라도와 예수, 전혀 다른 어감으로 다가오는 이들의 이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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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07 1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선인장 2004-09-07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귓속말 주신 님 > 안 그래도 비 그칠 것 같아 우산 없이 나섰다가, 오랫만에 달리기 열심히 해서 회사에 뛰어들어왔습니다. 이제서야 출근한 게으름쟁이 선인장입니다. 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2004-09-23 1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선인장 2004-09-23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귓속말 주신 님 > 전요, 더위에는 무뎌도, 추위에는 민감해서요, 밤에 입을 겉옷과 얇은 목도리를 준비해서 다녀요. 사막의 밤이 얼마나 혹독한지, 전 잘 알고 있거든요. 동해의 맑은 날 한 조각이 서울에서 빛납니다.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