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네 집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가슴에 빛나는 사랑 하나 안고, 한 시절을 살아낸 사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나는 박완서의 소설을 읽으며 알아간다. 머리속을 배회하는 무거운 관념에 짓눌려, 방안 구석구석의 풍경까지 과도하게 묘사해대는 언어의 치열함에 골 아파, 결국은 텅 빈 의식의 세계가 허망해, 한 때 소설을 읽는 것이 참 재미없었더랬다.



나와 삼십년의 세월을 같은 세상에 살았지만, 동시대 작가라고 할 수 없는 박완서의 소설을 읽으며 나는 가볍고 충만하다. 돈암동, 종암동, 청계천, 동대문 시장, 그 낯익은 지명들이 내가 살아보지 못했던 먼 과거 속에서 생동감 있게 움직인다. 나른한 현기증을 동반하는 연탄냄새는 정겹고, 청계천 오염된 물의 악취는 사람들의 몸내처럼 달다.



그리고 노작가가 말하는 사랑은, 은밀하고, 날카롭고, 빛나고, 설렌다. 시장 바구니를 들고 한 나절 외출하는 거 외에 삶의 즐거움이 없던, 여자의 치마가 짧아진다. 멀리서 머뭇거리던 봄이, 바짝 다가선다. 결혼하고 좀처럼 손을 댄 적이 없는 머리에 장식을 한다. 청계천이 흥청대는 소리를 내며 흘러간다. 손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그녀의 첫사랑. 장님이 되어버린 그녀의 애달픈 첫사랑. 단 하루 동안의 외유를 실행에 옮길 수도 없었던 안타까운 첫사랑. 청량리역에서는 먼 곳으로 떠나는 기차가 기적을 울린다.



나는 전쟁 후 궁기가 가득한 시장통을 배회하는 그들의 사랑을 시샘한다. 이제 겨울이 시작되는데, 나는 그들처럼 봄을 맞고 싶다. 그의 머리속에 살았다는 벌레까지도 샘을 낸다. 이제 겨울이 시작될 터인데, 나는 그들처럼 겨울의 복판을 서성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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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icare 2004-12-01 0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인장님의 리뷰는 왜 이리 따뜻한지.

로드무비 2004-12-10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하니케어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