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멀다 하고 *우수에서 견적 요청이 계속 들어 온다. 그 중에 오늘이 기한인 것이 한 건 있었다. 견적을 넣어줘야 했다.
*대동에 어제 갔을 때 견적이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고 하셨는데 확인해 보고 처리해야 했다.
*동신에 절단된 소재를 찾아와야 했다.
파이프를 들고 *아시아에 가서 41L로 절단 요청해야 했다.
*신진에 가서 성형된 파이프를 찾아와서 전수 검사할 준비를 해야 했다.
*재성에 납품가야 했다.
*신영에서 2각으로 딴 파이프를 *세광에 가져가 도금을 요청해야 했다.
전날 메모지에 남긴 내용이었다.
물론, 내일로 미뤄도 될 일도 있다. 하지만 거래처와 약속이 잡힌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는 것이 나의 영업 철학이다. ^^ 상황이 변해 미뤄도 될지라도 날짜가 잡혔다면 일부러라도 제품을 가지러 간다. 그래야 신용이 쌓이고, 진짜 바빠 부탁했을 때도 약속을 지킨다는 것을 상대도 알기에 약속을 지켜 날짜에 맞춰 부탁한 일을 해 놓는다.
CNC가 늘어 5대가 되다보니 공장장 혼자서 setting하기엔 역부족이다. 그러다보니 사장님도 내가 외근 나가는 것을 꺼리는 눈치시고 아예 나를 공장에 잡아두신다.
공장장이면 1시간이면 끝낼 세팅을 2시간, 3시간이 걸린다. 내가 미숙한 탓도 있지만 간간히 걸려오는 업체의 전화도 받아야하고, 거래처에서 제품을 찾으러오면 챙겨도 줘야 한다. 다른 작업자들의 작업이 무리없이 연결되도록 챙겨야하고, 여직원들을 위해 무거운 물건도 알아서 척척 옮겨놓아야 한다.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다 다시 CNC 앞에 서서 프로그램을 짜다보면 소수 첫째자리의 덧셈, 뺄셈이 되지 않는다. 멍하다. 와중에 생각나는 건, 거래처와의 약속.
'약속을 지켜야 하는데... ' 머리가 복잡해진다.
'화인테크에 앞서 나의 신용을 지킬 권리도 없나?... ' 가슴이 답답해 진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신용도 중요하지만 오퍼레이터(Operator)로서 세팅 속도도 중요하다. 어차피 금속가공의 꽃은 오퍼레이터가 아니겠는가? 납품은 언젠가 납품할 기사를 고용하면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능숙한 오퍼레이터로서의 재능을 갖추는 것이다. 이론과 현실의 차이는 프로그램 상에서도 나타난다. 얄팍한 이론 지식으론 프로그램은 짤 수 있겠지만 세팅은 어렵다. 기름을 묻혀가며 체득해야 하는 것이다.
깜냥이 부족한 사람에게 이 무슨 무거운 짐이람?
오늘 못 한 일은 내일 해야하고 그만큼 일은 쌓였고, 그만큼 엑셀을 더 빨리 더 깊게 밟게 되고, 더 늦은 시간까지 CNC에 매달려 세팅을 하게 된다.
좀 일찍 마친다싶더니만 그것은 년 초라서 일시적인 상황이었고 또다시 예전처럼 10시가 훌쩍 넘긴 시간에 나를 찾게 된다.
다들 이렇게 사는 것인지, 나만 세상모르고 사는 것인지 모르겠다.
적당히 좋은 쪽으로 생각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