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이 숨을 한번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세계의 곳곳에서 평균 여섯 명의 생명이 태어난다고 한다. 그런데 새롭게 태어난 모든 생물들이 부처처럼 일 곱걸음 내딛고 나서 "세상의 빛을 보게 해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라고 감사의 말을 하고 크게 읍한 다음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 울기를 시작한다면, 과연 세상엔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인간이 제일 먼저 배우고 깨달아야 하는 것이 고마움을 알고 고마움을 표현할 줄 아는 마음은 아닐까?
지금쯤 예쁜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을 내 여자친구 한 명은, 식당에서 식사라도 같이 하게 되었을 때 주인 아주머니가 물을 내어주고 음식을 차려 줄 때마다 가볍게 머리까지 숙여가며 예쁜 목소리로 '고맙습니다'란 말을 잊지 않았다. 물을 마실 때도 컵을 한 손으로 쥐는 법이 없이 두 손으로 꼭 모아 쥐고 마셨으며, 나 같은 친구를 알게 됨을 감사하게 생각하는 듯, 항상 미소짓곤 했다. 쇼핑을 할 때도 이것저것, 옆에 서있는 내가 무안할 정도로 , 만지작거리다가도 돌아설 때는 감사의 말은 빠뜨리지 않았다. 어쩌다 택시를 같이 타게 될 때도 목적지에 도착해서 미터기의 요금과 함께 요금에 포함된 세금처럼 "고맙습니다"라는 말은 같이 지불하고 내렸다.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고 언젠가부터 친구의 좋은 본을 보고 나도 고마움을 표현함에 인색하지 않도록 애써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처음엔 식당에서 당연히 차려지는 음식에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이 왠지 쑥스럽고, 남자가 좀스럽게 별 걸 다 신경 쓴다는 마음도 있었으나 이런 모든 우려는 횟수를 거듭할수록 나의 타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기울었다. 음식을 차려 놓고 돌아서는 아주머니께 "고맙습니다"라고 말을 건네면 당장은 반응이 없더라도 조금은 더 신경을 써주시는 것 같고 무엇보다 감사한 말을 함으로써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니 밥맛도 좋아지고 소화도 더 잘되는 것만 같았다.
도서관에서 누구와 얘기함도 없이 매일을 보내게 되는데, 식구 아닌 남과 나누는 유일한 말은 "고맙습니다"이다. 우리 집은 버스의 종점인데, 누군가가 벨을 누르고 버스가 멈춰 설 때에야 비로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의도적으로 제일 마지막으로 내리며 기사 아저씨께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하는 것이다. 뜻밖에 인사를 받으신 아저씨는 기분 좋게 고조된 목소리로 "예, 잘 들어가세요" 라고 응해 주신다. 그러면 오히려 내가 얼마나 고마운 줄 모른다. 아파트 입구를 향하며 그 인사는 기사 님을 위한 인사가 아니라 나를 위한 인사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어머니께서 나의 도시락과 함께 녹차를 끓여 보온병에 넣어 주신다. 식사 후 담 너머 솟아 있는 동헌의 소나무를 바라보며 녹차를 마시다 한번은, 이렇게 공부할 수 있다는 행복감과 녹차를 준비해 주시는 어머니가 너무나 고맙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작은 컵을 두 손으로 꼭 모아 쥐게 되었었다. 이렇게 감사한 마음이 나의 의지를 북돋우고 힘을 주시는 것이다. 내가 이런 마음인데 어떻게 공부를 게을리 할 수 있으며 어떻게 나쁜 일을 꿈 꿀 수 있겠는가?
이렇게 고마운 마음이 쌓이면 주위 모든 것이 아름답고 귀하게 느껴진다. 남들은 시끄럽다는 요란한 개구리 울음소리도 가족의 정다운 대화처럼 느껴지고, 이렇게 더운 날에 저렇게 까만 옷을 입고 가는 개미에게 측은한 마음이 생기고, 나무 가지 끝에 대롱거리며 매달린 거미는 그 생활이 궁금해서 좋고, 쌩-하고 날아가는 제비는 흥부전의 동심이 떠올라 좋고, 찌는 듯한 더위에 이글거리는 태양은 여름을 일깨워줘서 좋아진다.
그리고 고마운 마음은 모든 것을 사랑하게 만든다. 비가 온 뒤 아스팔트 위에 꿈틀거리며 기어가는 지렁이를 보면 행여 지나가는 자동차에 의해 그 형체가 알아볼 수 없게 변해 버릴 수도 있고, 동네 개구쟁이에 의해 몇 토막으로 분해되어질 수도 있다. 급한 일이 있어 지나쳤다면 마무리짓고 되돌아오거나 보는 즉시 이놈이 좋아 할 법한 축축한 곳을 골라 던져 주어야 내 갈 길을 갈 수 있다. 그리고 물방울이 맺힌 작은 잎사귀를 어루만지는 것, 또한 고마운 마음의 확장이라 생각한다. 아기를 어루만지듯 잎사귀를 쓰다듬으면 손바닥에 전해지는 느낌에 얼마나 기분이 좋아지는지 모른다. 나무가 전하려는 말을 들으려 애쓰며 한참을 서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나와 나무의 교감인 것이다. 결국엔 내가 나무를 사랑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나를 사랑해 주는 것이다. 동물과 달리 그 반응이 즉흥적일 순 없지만 햇볕으로 가지가 휘는 것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나무는 나를 향해 아주 천천히 아주 조금씩 관심과 사랑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향기가 없으면 사람들에게 쉽사리 외면을 당하고 만다. 사람이 아름다운 꽃이라면 고마워 할 줄 아는 마음은 그 향기가 아닐까? 작고 사소한 것에 고마워 할 줄 모르면 사람은 진정한 꽃으로 피어 날수 없고 피어난다고 한들 쉽게 시들고 말 것이다. 항상 향긋함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