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자본주의의 새로운 프론티어
1 접속의 시대가 오고 있다.
접속 중심의 구도에서 기업의 성공은 시장에서 그때그때 팔아치우는 물건의 양보다는 고객과 장기적 유대 관계를 맺을 수 있느냐 없는냐에 따라 점점 좌우된다.
현행 정치 제도와 법은 시장에 기초한 재산 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소유가 접속으로 바뀐다면 앞으로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다스리는 방식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사유 재산이 한 인간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뜻했고 또한 <인간을 재는 잣대>로 오랫동안 간주되었던 세상에서, 소유의 의미가 퇴색하게 되면 인간 본성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 어쩌면 이것이 더 중요한 문제인지도 모른다.
2 시장이 네트워크에 밀리는 날
<앞으로 올 시대에서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행위는 모든 것을 모든 것에 연결시키는 것>이라는 와이어드(Wired)의 편집 고문 케빈 켈리의 말은 수많은 인터넷 예찬론자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다. 켈리는 <크건 작건 모든 물질이 다양한 차원의 광범위한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미래가 올 것이라고 예견한다. 이미 기업들은 힘을 결집해야만 각 기업의 목표 달성에 유리하다는 믿음 아래, 유형 자산은 물론이고 정보와 기술 같은 무형 자산까지도 공유하기 위해 공급자와 소비자를 연결하고 있다. 네트워크를 중시하는 이런 상거래 기법은 산업 혁명의 시대에 지배 이념으로 군림했던 애덤 스미스의 강령과는 아주 동떨어진 것이다.
제품의 생명력이 짧아지는 것은 무어의 법칙으로도 설명된다. 전기 기술자로 일하다가 인텔을 설립한 고든 무어는 일찍이 컴퓨터 칩의 처리 속도는 18개월마다 2배로 늘어나는 반면 칩의 생산원가는 제자리에 머물러 있거나 하락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와 하이디 토플러에 따르면 상상을 초월하는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새로운 시장에서는 <규모의 경제가 속도의 경제로 바뀌고 있다>. 시장에 먼저 제품을 내놓는 기업만이 가격을 높게 책정하여 이익을 챙길 수 있다.
할부금을 다 갚기도 전에 구닥다리가 될 기술이나 제품을 구태여 왜 소유하겠는가? 새로운 네트워크 경제에서는 임차 형태로 상품이나 서비스에 단기간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얻는 것이 구입해서 장기간 소유한는 것보다 점점 매력 있는 대안으로 떠오른다.
3 무게 없는 전쟁
물리적 경제는 움츠러들고 있다. 물리적 자본과 재산의 축적이 산업 시대의 특징이었다면, 새로운 시대는 정보와 지적 자산의 뭉치에 얹혀 있는, 눈에 안 보이는 힘을 중시한다. 산업 세계에서 오랫동안 부를 재는 잣대로 군림해 왔던 물질 제품은 탈물질화되고 있다.
고객은 소매점에 마련된 컴퓨터 디자인 시스템을 이용하여 자기 몸에 가장 알맞은 자전거 크기와 모양을 알아낸다. 그런 다음 다양한 종류의 브레이크, 체인, 타이어, 변속 장치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자기만의 자전거 설계를 완성한다. 이 정보는 공장에 자동 전송되고 그때부터 공장에서는 제작, 조립에 들어가 3시간 이내에 고객에게 배달한다. 주문 제작 시스템이 도입되면 재고와 창고는 불필요해진다.
축적이 아니라 발빠른 회전이 지배적 정서로 자리 잡고 경제 활동이 점점 가속화하는 시대에는, 개인이 저축의 형태로 재산을 보유하는 것은 시대 착오적으로 생각된다.
MIT슬론 경영 대학원 학장을 역임한 게스터 서로는 주가 상승으로 거둔 이익의 90퍼센트는 상위 10퍼센트의 가구가 가져갔고 미국인의 60퍼센트는 주식이 없기 때문에 주가가 아무리 올라도 전혀 이득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네트워크 경제에서는 <자본설비를 보유해 보았자 재미를 못 본다..... 소유에 집착하면 점점 체중이 불어나서 기업의 발빠른 변신에 걸림돌이 될 뿐>이라고 강조한다.
미국 기업의 80퍼센트 이상이 2천여 곳의 임대업체로부터 설비의 전부 또는 일부를 빌려 쓰고 있다.
설비의 리스는 차입이 아니었으므로 회계 장부상으로는 고정 부채가 아니라 경상비로 처리되어 기업의 재무 구조를 건전하게 만드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기업들이 구입보다 리스를 선호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시장 상황의 변화에, 그리고 기존의 설비가 쓸모없어졌을 때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의 일차적목표를 달성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자산이나 업무가 아니라면 외부 하청업자에게 맡기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이다. 새롭게 부상하는 네트워크 경제에서 아웃소싱은 거의 종교처럼 떠받들어지고 있다.
기업들이 꼽는 아웃소싱의 장점은 여러 가지이다. 첫째, 아웃소싱을 하면 기업은 돈을 버는 데 집중하고, 조직을 유지하는 데 필요하긴 하지만 수익 창출과는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는 지원 기능을 외부 지원업체에 맡길 수 있다. 둘째, 아웃소싱을 하는기업은 해당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역량을 가진 업체로부터 저렴한 가격으로 질 좋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셋째, 값비싼 설비를 구입하거나 기업의 수익 창출에 직결되지 않는 주변적인 업무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쓸데없는 돈을 낭비하지 않아서 좋다. 끝으로, 리스처럼 아웃소싱도 상품의 주기가 점점 짧아짐에 따라 정신없이 바뀌는 시장 상황에 기업이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게 해준다.
새로운 상행위의 저력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나이키이다. 나이키는 내용으로 보아도 그렇고 추구하는 바도 그렇고 이제는 가상 회사가 되어버렸다... 나이키는 정교한 마케팅 원리와 유통망을 갖춘 연구 디자인실이라고 보아야 옳다....나이키는 개념을 판다.
최근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노조의 힘이 줄어드는 배경에는 아웃소싱이 있다.
새로운 시대는 비물질적이고 사색적이다. 그것은 플라톤이 말한 형상의 세계, 이데아의 세계, 이미지의 세계, 원형의 세계다. 개념의 세계, 픽션의 세계다. 산업 시대의 인간이 물질을 축적하고 가공하는 데 빠져들어 있었다면 접속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은 정신을 관리하는 데 휠씬 관심이 많다. 사업의 성패를 아이디어가 좌우하는 접속과 네트워크의 시대에는 모든 것을 아는 것이 인간의 가장 드높은 꿈이다. 자신의 정신을 최대한 확장하여 보편화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의식을 바꾸고 영향을 미치겠다는 것이야말로 모든 산업 활동을 이끌어나가는 원동력이다.
4 지적 재산의 독점
상품의 대량 생산이 아니라 개념의 대량 생산 시대가 열린 것이다.
체인 가맹점은 사업체를 사들인 것이 아니라 공급자와 미리 정한 조건에 따라 사업체에 단기간 접속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은 데 불과하다. 이 관계는 판매자- 구매자가 아니라 공급자- 사용자의 관계이다. 체인점 계약의 접속의 핵심은 접속의 합의이지 소유권의 양도가 아니다. 이것은 새로운 유형의 자본주의이다.
인체 섬유 안에 들어 있는 유형 재산은 재산으로서 인정을 받지 못 하지만, 같은 인체에서 나온 세포 계열에 대한 특허 형태의 무형자산은 존중되어 법의 보호를 받는다. 만약 무어의 가족이나 직계 후손이 나중에 이 세포 계열을 이용한 치료를 받아야 할 경우 그들은 캘리포니아 대학에 접속료를 물어야 할 것이다.
슐먼도 <우리가 지금까지 겪어본 적이 없는 위험천만한 권력의 집중 양상을 드러내는 독점, 곧 기본적 정보에 대한 독점을 확실히 규제하기 위해서 반독점법을 활성화시키자>고 제안한다.
5 서비스 세상
아리스토텔레스- 모름지기 사물의 진가는 지닐 때보다는 쓸 때 발휘되는 법이다.
영국의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서비스를 <발 위에 떨어뜨릴 수 없는 것을 돈 내고 사는 것>이라고 익살을 섞어 정의하기도 했다.
상품의 양으로 생활 수준을 재는 것이 산업 사회였다면 탈산업 사회에서는 지금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는 보건, 교육, 오락, 예술 같은 각종 편의와 서비스를 가지고 생활의 질을 따진다.
서비스 중심의 경제로 나아가고 있다는 말은 그 동안 여기저기서 수도 없이 나왔다. 하지만 서비스는 재산이 아니라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사실을 지적한 사람은 없었다. 서비스는 물질이 아니며 손으로 만질 수 없다. 그것은 수행되는 것이지 생산되는 것이 아니다.서비스는 실행되는 순간에만 존재한다. 보유하고 축적하고 상속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자는 사는 것이고 서비스는 받는 것이다. 서비스 경제에서 상품화되는 것은 인간의 시간이지 장소나 물건이 아니다. 서비스는 사람과 물건의 관계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호소한다. 사회적 동물인 사람과 사람의 접속도 점점 금전을 매개로 한 관계로 바뀐다.
알맹이를 담는 통 혹은 플랫폼을 제작하는 데 드는 비용이 점점 엇비슷해지는 상황에서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서비스의 형태로 고객에게 노하우를 제공하는 것이다.
점점 많은 기업들이 고객을 끌어 모으기 위해 제품을 그냥 주고, 제품의 유지, 보수, 업그레이드에서 돈을 벌어 들인다.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의 무료 배포는 정보 기술 회사에게는 특히 효과적인 전략이다. 한 회사의 프로그램을 통해 연결된 사람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여기에 참여한 사람이 개인적으로 누릴 수 있는 혜택도 많아지고 회사가 제공하는 서비스의 수익성도 올라간다. 업계에서는 이런 현상을 <네트워크 효과>라고 부른다.
제품의 수명이 점점 짧아지고 물품과 서비스의 이동 영역이 날로 확대되는 네트워크 경제에서 부족한 것은 사람의 관심이지 물건이 아니다. 잠재 고객의 관심을 끌어 모으기 위해 물건을 그냥 주는 것은 마케팅 전략으로 점점 각광을 받을 것이다. 고객의 관심이 계속 유지되는냐는 기업이 효과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지속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달려 있다.
에어컨 자체를 사지 않고 에어컨 서비스를 받기로 계약을 맺는다는 것은 에어컨을 통해 얻는 경험에 대해서 돈을 지불한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새로운 자본주의에서는 물질의 차원보다는 시간의 차원이 훨씬 중요하다.
6 인간 관계의 상품화
사이버스페이스 경제에서는 남아 있는 모든 시간을 네트워크의 힘이 상업성의 궤도로 끌어당긴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사방에서 밀고 들어오는 <산업화>의 노예가 된다.
새로운 마케팅 전략에서 중점을 두는 것은 시장을 얼마나 차지하느냐가 아니라 고객을 얼마나 사로잡느냐이다. 페퍼스와 로저스는 네트워크 경제에서는 <한 종류의 제품을 최대한 많은 고객에게 팔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한 명의 고객에게 이런저런 다양한 제품을 평생에 걸쳐서 최대한 많이 팔려고 노력한다>고 강조한다.
정보과학에서는 새로운 기술을 이제 <관계relation기술>이라고 불러야 한다며 정보 기술 대신 <R-기술>이란 말을 쓰자고 제안하는 사람까지 있다. MIT 슬론 경영 대학원 협동 과학 센터의 마이클 슈레이지는 <우리는 정보를 관리하는 수단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관계의 매개물이라는 쪽으로 과감한 의식 전환을 행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영 전문가와 마케팅 전문가는 이른바 <취미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고객의 관심을 끌어 평생토록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1단계는 각성기로, 고객에게 장래의 판매를 염두에 두고 회사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알리는 단계이다. 2단계는 일체감 형성기다. 고객은 회사의 제품이나 서비스에 친근감을 느끼고 그것을 자아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특정한 회사의 제품이나 서비스는 이제 그가 세상에서 자기를 차별화시키는 다양한 방법의 하나가 된다. 가령 캐딜락이나 폴크스바겐의 비클을 운전하는 것은 단순한 교통 수단의 차원을 넘어 일종의 사회적 시위를 하는 셈이다. 3단계는 앞에서 우리가 논했던 관계 형성기다. 회사와 고객은 서먹서먹한 관계에서 쌍방향 관계로 이동한다. 이때부터 R- 기술이 중요한 역할을 맡기 시작한다. 마케팅에서 말하는 <고객 친밀감>이 조성된다. 가령 홀마크라는 기업은 고객 가족의 생일이나 결혼 기념일 같은 중요한 날짜가 적힌 방대한 자료를 가지고 있다가 적당한 시기에 알맞은 카드를 추천하면서 이메일로 날짜를 환기시킨다. 4단계는 공동체 형성기다. 회사는 서비스나 제품에 대한 관심이 비슷한 고객들끼리 만날 수 있는 장을 제공한다. 회사가 이런 공동체를 만드는 이유는 긴 안목으로 상업적 관계를 구축하고 개별 고객의 평생 가치를 최대화하기 위해서이다. 크로스와 스미스는 <이런 결속은 대단히 지속성이 강하다>고 말한다.
7 삶으로서의 접속
좀더 깊이 들어가면 재산은 개인적 자유를 표현한다. 재산으로 자기를 감쌈으로써 사람은 자신의 인격성을 시공간 속에서 부풀리고 자기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을 만들어낸다. 요컨대 사람은 세계 안에서 자기를 확대할 수 있다. 그러니 소유의 시대를 다른 시대와 구별짓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소유의 자부심>이었다는 말이 나올 만도 한 것이다.
문제는 결국 이렇게 정리된다. 시간적 네트워크 안에 편입하는 것은 장소에 뿌리를 둔 삶의 충분하고 의미있는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지리는 필수 불가결한 조건인가, 아니면 지나간 시대의 주변적 찌꺼기에 불과한 것인가? 지리는 좌표이고 제약인가 아니면 고려해야 할 수많은 요소중에 하나에 불과한가? 장소에 대한 갈망을 가진 사람들은 여전히 있지만 공간을 폐지하고 우리의 경험을 시간화하려는 욕망은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하고 있다. 우리의 생활 공간을 소유에서 접속으로 어느 정도까지 탈바꿈시킬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누구이며 21세기를 어떤 식으로 살고 싶어하는가에 대한 두 가지 감수성의 우열에 따라 판가름 날 것이다.
2부 문화를 고갈시키는 자본주의
8 자본주의의 새로운 문화
통신은 인간이 공동의 의미를 발견하고 자신이 이룩한 세계를 공유하는 중요한 수단이므로 디지털 통신의 모든 형태를 상품화한다는 것은 결국 개인과 공동체의 살아있는 경험- 문화 생활- 을 구성하는 수많은 관계를 상품화하는 결과로 귀착된다.
인류학자 클리포드 기어츠의 말대로 문화라는 것이 인간이 자기 주위에 엮어나가는 <의미망>이라면, 커뮤니케이션 ㅡ 언어, 미술, 음악, 무용, 책, 영화, 음반, 소프트웨어 ㅡ 은 우리 인간이 이 의미망을 해석하고 생산하고 유지하고 변형하는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 영역의 핵심적 원리는 자원 이용의 효율화라고 벨은 주장한다. 정치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참여다. 문화 영역에서 제일로 치는 것은 자기 실현과 자기 고양이다.
미래학자 제임스 오길비는 이렇게 지적한다. <체험 산업의 성장은 산업 혁명이 생산한 물건의 효용성이 한계점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면서 덧붙인다. <이제 소비자는 '내가 아직 안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가지고 싶은 것이 뭔가?'라고 묻지 않고 '내가 아직 체험하지 못한 것 중에서 체험하고 싶은 것이 뭔가?'라고 묻는다.>
영화관은 문화 체험의 장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도피처였다. 어두운 극장 안에서 사람들은 초라한 일상사를 잠시 접어두고 좀도 거창하고 화려한 세계에 빠져들었다. 일주일 중에서 그 순간만큼은 단조로운 생활을 초월하여 이상적인 모습으로 살 수 있었다. 영화는 쿡의 관광 서비스처럼 살아 있는 패키지 상품으로 시장에 팔았다. 사람들은 5센트만 내면 자기가 꿈꾸는 다른 장소, 다른 환경으로 가서 푹 젖어들고 가장 깊은 속마음을 표현하고 희망과 꿈을 실현할 수 있었다.
새로운 시대의 주역은 <근면>이 아니라 <창조>이며 사업은 일보다는 유희에 가까워진다. 문화 사업의 초석이라 할 수 있는 창조성과 예술성을 확보하기 위해 모든 분야의 기업이 조직 환경을 재구축하는 작업에 나서고 있다. 자기 회사 직원을 사원이라고 부르지 않고 <선수>라고 부르는 기업인도 적지 않다.
9 문화의 광맥을 찾아서
고급 상표가 붙은 제품을 구입한다는 것은 그 디자이너가 창조한 가치와 의미의 세계에 자기도 끼여든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제품을 파는 활동은 <체험>을 파는 활동의 뒷전으로 밀려난다. 나이키는 운동화를 파는 것이 아니라 그 운동화를 신으면 어떻게 보일까 하는 이미지를 파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이미지가 제품을 표현> 하는 것이 아니라<제품이 이미지를 표현>한다...
10 탈근대
심리학자 로버트 리프턴은 이 새로운 세대를 <변화 무쌍한> 인간이라고 부른다.이들은 공동 관심 단지 안에서 성장했고 의료 보험 회사를 통해 의료 서비스를 받으며 자동차를 임대한다. 물건은 온라인으로 구입하고 소프트웨어는 으레 공짜려니 여기지만 추가 서비스와 업그레이드에는 당연히 돈을 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7초 안에 할 말을 모두 해야 하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정보에 즉각 접속하여 인출하는 데 익숙하고 하나에 오래 집중하지 못하며 성찰적이기보다는 찰나적이다. 자신은 노동자가 아니라 경기자라고 생각하고 근면하다는 말보다는 창조적이라는 말을 들을 때 더 뿌듯해한다. 임시직에 익숙하고 과제 해결을 중심으로 편성된 조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부모 세대처럼 단단히 뿌리 박은 삶보다는 아주 유연하고 순간적인 삶을 추구한다. 이념적이기보다는 실리적이고 글자보다는 이미지로 생각하는 쪽이다. 작문 실력은 떨어질지 모르지만 전자 데이터를 처리하는 실력은 한 수 위다. 분석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다. 디즈니월드와 클럽 메드를 <진짜>라고 생각하고 쇼핑몰을 공공의 광장으로 여기며 소비자 주권 운동이 민주주의의 전부라고 믿는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만큼이나 많은 시간을 텔레비전, 영화, 사이버스페이스에 나오는 허구적 인물과 어울리는 데 쏟아 붓는다. 심지어는 이런 허구적 인물의 성격과 경험에 대해서 친구들과 진지한 대화를 나눌만큼 이들에게 허구 세계는 현실 세계의 일부로 굳건히 자리 잡았다. 이들의 세계는 경계가 불확실하고 유동적이다. 하이퍼텍스트, 웹 사이트 링크, 피드백 고리와 함께 자란 이들은 현실을 직선적이고 객관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현실이라는 것은 시스템을 통해 나와 함께 돌아가는 것이라는 발상에 익숙하다. 실제로 어디에 사는지는 알지 못하고 또 관심조차 없지만 가상 주소로 얼마든지 이메일을 보낼 수 있다. 세계는 하나의 무대이며 삶은 공연의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의 단계단계마다 새로운 생활양식을 과감히 받아들이면서 자기를 끊임없이 바꾸어나간다. 이 변화 무쌍한 남녀를 끌어당기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스타일과 패션이다. 실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혁신을 도모한다. 정신없이 바뀌는 이들의 생활 공간에 습속, 관행, 전통이 들어설 여지는 없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다. 중요한 것은 순간을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다. 개인 생활에서도 사회 생활에서도 절정감과 카타르시스는 효율성과 생산성보다 윗자리에 놓인다.
인쇄 혁명은 차분히 성찰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책이란 것은 혼자서 조용히 읽는 것이 제격이었다. 이렇게 해서 개인의 사생활이라는 관념이 싹텄다. 아울러 자기를 반성하고 내면을 성찰하는 풍토가 자리 잡았고, 이것이 궁극적으로 자기와 세계를 치료의 관점으로 이해하는 사고 방식으로 발전했다.
이 탈근대 세계의 최종 단계에 이르면 자아는 관계의 단계 속으로 모습을 감춘다. 자신이 파묻혀 있는 관계망에 독립된 자아가 있다는 사실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서양 역사에서 지난 수백 년 동안 한복판을 차지해 온 자아는 밀려나고 그 빈 자리로 관계가 밀고 들어온다.
화면 앞에서, 가상 세계 안에서 커온 젊은이들은 변화 무쌍한 성격과 연극적 기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까다로운 역할도 전자 무대에서 얼마든지 척척 소화할 수 있다. 시장 전문가, 광고 전문가, 문화의 중간 상인은 관문 앞에서 버티고 있으면서 입장료를 받고 온갖 유형의 새로운 문화 상품과 체험에 접속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그들은 캐내서 상품으로 만들 수 있는 참신한 문화 체험의 편린을 찾아서 지역 문화를 샅샅이 훑고 다닐 것이다. 흥미진진한 체험을 안겨주는 근사한 줄거리를 찾아서 과거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각자의 이야기야말로 가장 중요한 현실이라는 생각을 찬양할 것이고 각 개인이 입장권을 내고 들어올 수 있는 가상 세계를 창조할 것이다. 각본으로 만들고 공연할 수 있는 개인의 드라마는 얼마든지 널려 있다. 한사람 한사람의 인생은 엄청난 상업적 잠재력을 가진 평생 시장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세계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을 개인 재산의 유일한 자취는 공연의 배경을 제공하는 소도구뿐일지도 모른다. 세계를 연극 무대로 보는 데 익숙한 새로운 시대의 남녀에게는 상업 세계가 제공하는 대본, 무대, 다른 배우, 청중에 접속할 수 있는 권리를 끊임없이 사는 것이 자신들이 거느리고 살아가는 다양한 인격을 살찌우는 데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연기를 할 수 있고 변신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생존의 필수 조건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11 접속자와 비접속자
통신 서비스에 대한 지배가 권력의 원천이 되고 통신에 대한 접속이 자유의 조건이 된다.
세계 인구의 부유한 1/5이 문화 체험과 개인적 변신을 찾아 소유를 과감히 포기하고 있지만 나머지 4/5는 아직도 초라한 살림살이 속에서 더 많은 재산을 갈망하고 있다.
세계 인구의 65퍼센트가 평생 전화를 걸어본 적이 한번도 없는 사람들이고 40퍼센트는 전기가 안 들어오는 곳에서 살고 있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클라인은 하이테크 잡지 '와이어드'에 기고한 글에서 <미래는 풍족하고 어디서나 살 수 있으며 교육을 많이 받은 우리 중의 소수에게만 기회의 낙원으로 다가올 것이다. 대다수의 시민들, 다시 말해서 대학을 나오지 못환 가난한 사람들, 소위 불필요한 사람들에게는 디지털 암흑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우려한다.
12 문화와 자본주의의 생태학을 향하여
디지털 혁명, 네트워크에 기반을 둔 새로운 글로벌 경제, 사이버스페이스를 둘러 싼 모든 논의는, 가치가 있는 유일한 접속은 상업권으로 뚫린 기업의 포털 사이트나 관문으로 나아가는 접속이라는 암묵적 전제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 돈을 주고 접속하는 것의 대부분이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공짜로 접할 수 있었던 문화물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꾸만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체험은 물론 그에 어울리는 문화적 치장과 복장까지도 구입하는 추세로 나아가고 있다. 우리의 공공 생활은 상업 공간으로 무섭게 빨려 들어가고 있으며 이것은 장기적으로 문명의 미래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문화는 인간 문명이 원활하게 기능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또다른 가치의 산실이 된다. 리프턴에 따르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으로 들어가서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공감 능력을 통해 동질성을 확인한다> 사회적 신뢰는 공감이라는 토대 위에서 형성된다. 공감은 <타자의 인간성을 자신의 상상력 속에 끌어들이는 노력>을 요구한다. 공감은 가장 심오한 인간의 감정에 해당된다. 친밀함과 예의 바름을 하나로 이어주는 힘도 공감에서 나온다. 공감하기 위해서는 자아의 울타리 밖으로 넘어가서 타인 안에서 감정의 둥지를 틀고 타인의 감정을 자신의 감정처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남에게 공감한다는 것은 희로애락을 함께 체험한다는 뜻이다. 그런 감정을 통해서 우리는 서로를 배우고 서로를 배려하게 된다.
문화와 상업이 적절한 균형을 이룬 생태계를 복원시키는 일은 다가오는 시대에 우리가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업이다. 그리고 다음 세대들도 지금 세대가 자연 경제와 인간 경제의 적절한 균형을 찾기 위해 기울인 것과 똑같은 정성과 노력을 이 운동에 쏟아 부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