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엔 성안이 결혼식에 갔었다.
신랑의 들러리가 되어 주기로 확실히 결심한 나는, 식장 앞 로비에서 하객을 영접하는 신랑의 주위를 줄 곧 맴돌았었다. 잠시 딴 눈을 팔고 있을 때 신랑과 인사하고 돌아서는 여인을 보았다. 갑자기 심장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오늘 그녀가 올 거라고 똘민이가 귀띔은 해 주었었지만, 나를 이미 봐 두었는지 나를 향해 곧장 걸어오는 나의 '풋사랑'앞에서 무기력하게 심장의 소리만 죽이고 있었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우린 손을 내밀었다. 고 2때 캠핑 갔다가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잡아봤던 그 손. 나의 한 손에 그녀의 한 손이 꼭 포개어지는 가느다름한 그 느낌 그대로, 말 할 수 없는 감정의 물결이, 추억의 사건들이 주마등처럼 그녀 얼굴 위를 어지럽혔다.
저 오뚝한 코. 그래 그대로야.
나이 들면 눈 밑을 지방 흡입술로 빼 버리겠다던 그 눈, 다행히 그대로였다
그리고 저 입술.
캠핑에서 돌아올 때 친구들은 울산까지 가야 했었고 나는 중간 역에서 내려야 했었다. 지금은 없어진 비둘기호 완행열차. 내가 내릴 역에서 기차가 멈추기 5분 전 쯤 그녀의 손을 이끌고 객실 밖으로 나왔다. 열차 계단의 문을 닫고 발판을 내렸다. 발판위에서 가까이 마주 선 다음,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눈을 감아 보라고 했다. 나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들어주던 최초의 여인. 나는 그녀의 입술에 살짝 뽀뽀를 했었다. 부끄러워 그녀의 표정은 살피지도 못했다. 타이밍은 정확했었고 열차는 나의 심정을 아는 듯 잽싸게 플랫폼에 멈춰 있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개찰구를 향해 마구 걸었었다. 객실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5명의 친구들이 창 밖으로 작별 인사하는 소리에 할 수 없이 뒤돌아섰다. 나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겠던지,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며 웃는 모습에 내 얼굴엔 더욱 열이 올랐다. 난 그녀를 무척 좋아했었다. 이 도령이 춘향이를 좋아 했던 만큼.
그녀의 명함 사진을 예쁘게 책갈피로 만들어 지니고 다닌 적이 있었다. 그런데 울산 시내에서 잃어버린 것이다. 시내에서 강변 버스 정류장까지 500여 미터를 4, 5번은 왔다갔다 거린 기억이 난다. 비가 오락가락 하던 그 날, 예쁜 내 사랑을 주워 가지 말라며 제발 흙탕물속에서라도 그대로 떨어져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비를 맞으며 같은 길을 땅만 보며 뛰다시피 혼을 놓고 걸어다녔다. 책갈피를 잃어버리면 그녀마저 잃어버릴 것만 같았었다.
한번은 그녀의 형부를 소개받은 적도 있었다. 그 분의 얼굴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진토니가 독하지 않다며 시켜주신 기억은 난다. 명절을 맞아 서울에서 내려오신 형부는 예쁜 처제의 남자 친구가 몹시도 궁금하셨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비극의 혈서 사건.
나는 연필 칼을 준비했다. 토요일 방과 후 시장에서 하얀색 천를 준비해서 그녀를 커피숍에서 기다렸다. 종에 불과했던 풍신수길이 지문을 고쳐 찢어 일본의 왕이 되었다는 전설을 장황하게 설명하며 테이블 위로 칼과 천을 올려놓았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인형처럼 눈을 깜빡깜빡 거렸다. 나는 이다음에 너와 결혼할 것을 결심하는 혈서를 쓸 것이며 이왕에 혈서를 쓸 바엔 풍신수길처럼 성공할 수 있는, 운을 잡는 지문을 고쳐 찢겠다는 내용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엽기스럽다. 하지만 그 때 나의 각오는 비장했었다. 그녀만 응해 준다면 전교 1등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고, 그녀만을 바라보며 영원히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기 애쓰며 조용히 그녀는 입을 열었다. 우린 아직 어리니 친구사이로 좋게 지내다 그런 문제는 어른이 된 다음 나중에 생각하자는 지극히 이성적인 대답이었다. 물론 그녀의 말이 전적으로 옳았겠지만 난 그것이 너무나 싫었었다.
조급히 생각한 탓도 있었겠지만, 어정쩡한 상태가 너무 싫었다. 그녀의 말은 내가 미래에 잘 되면 애인하고 내가 못되면 친구로 남겠다는 말로만 들렸다. 사람이 좋으며 시종일관 순수하게 그냥 좋아야지 왜 나중에 생각해야만 한단 말인가? 난 한참을 고민했었다. 그리고 한동안 슬픔에 빠졌었다.
그녀보다 나 자신을 더 사랑해서 일까? 고 3 진학을 앞두고 나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백지상태에서 공부에만 전념하기로 냉정하게 마음을 다졌다.
무슨 일이 더 있었을까?
아픈 기억은 망각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으려는 피나는 노력 때문인지 도무지 그녀가 싫어진 이유를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다.
급기야 나는 절교를 선언하고 커피숍에서 먼저 나와 버렸다. 속이 시원한 것도 잠시, 친구 한 명이 달려 와서는 ♡♡이 울고 있으니 빨리 가 보라고 한다. 이젠 남남인데 그럴 필요가 있냐며 매몰차게 거절했지만 내 마음은 몹시 아팠다. 슬그머니 커피숍으로 가 보았지만 그녀는 없었다. 그녀가 타고 갈 버스를 기다리던 정류장으로 뛰어 갔지만 그곳에도 역시 없었다.
정말 끝이구나! 드디어 그녀와 끝나는구나!
15년, 이렇게 헤어져서 15년이 지나 우린 다시 만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