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글샘 > 교사들의 필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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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리의 교사론 - 기꺼이 가르치려는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
파울로 프레이리 지음, 교육문화연구회 옮김 / 아침이슬 / 2000년 9월
평점 :
절판
대학 시절, 사범대 앞 비탈진 잔디밭에 붙여진 이름이 <페다고지>였다. 멋모르고 조금 높다고 -고지라고 하는 줄 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파울로 프레이리의 책 이름이 페다고지였다. 실천적 교육을 일컫는 말.
교직을 선택한 친구들끼리 학습을 하면서 읽은 프레이리이 <페다고지>는 교육에 대한 눈을 번쩍 띄게 했다. 교육은 지배 권력의 재생산 구조에 포함된 것이어서, 은행 적금식 교육(한국의 문제 풀이식이 해당함)으로는 변혁에 앞장설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문제 해결식 교육이 미래의 대안이라는 주장이었던 기억이 난다.
브라질의 선각자적인 교육학자 프레이리의 사후에 발간된 그의 마지막 저서다. 좀 지루한 부분도 있지만, 교사라면 한번 읽어볼 만한 책이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그 첫 부분은 교육자로서 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네 가지의 편지를 보내고 있다.
두번째 부분은 현장에서 가르칠 때 맞닥뜨리는 문제에 대한 네 가지의 편지가 실렸고,
마지막 부분은 교육 현장에서 철학하기라는 이론적 글이 실려 있다.
앞의 여덟 개의 편지는 단속적으로 읽어도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고 있으며, 뒤의 두 편지는 철학적인 글이어서 비교적 딱딱한 글이다.
여느 사람들은 교사라고 한다면 교육 대학이나 사범 대학에서 교사가 되기 위한 모든 준비를 철저하게 마치고 나온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래서 졸업식과 함께 발령을 받으면 바로 유능한 교사가 되기를 기대할는지도 모르고.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사범대나 교대에서는 별로 유기적이지 못한 단편된 과목들을 배우느라 허덕이고, 요즘은 임용고사를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보내다 보니 교사가 되어 있더라는 식이다.
진실로 아동에 대한 고민도, 교육 제도에 대한 철학적 통찰도, 역사적 비판의 안목도, 교과에 대한 전문적 식견도, 학생 지도와 상담에 대한 노하우, 노웨어도 전혀 없는 상태에서 교사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교사들은 발령받고 나서 부쩍 자란다. 다행스럽게도 첫 발령지에 자기와 처지가 비슷한 또래의 교사가 있으면 서로 이야기를 통해 어려움을 나누고 해결책을 건강하게 찾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곤란한 상황에서 자아 존중감만 곤두박질한 채, 자책하면서 스스로의 무능을 한탄하면서 피곤한 하루하루를 보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브라질처럼 저개발국가의 교육 이론은 미제 교육 이론보다 촌스럽긴 하지만 우리 현실에 적합한 것 같다. 나의 가려운 점을 긁어준다는 것이다.
프레이리의 교육론을 읽으면서 밑줄 그은 부분들을 적어 본다. 두고 두고 씹어 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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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의 과업은 진지함과 과학적, 육체적, 정서적, 감성적인 준비를 요구한다. 가르치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들은 타인에 대한 사랑은 물론이고 가르치는 일에 포함된 과정에 대한 사랑도 개발해야 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마음의 관료화에 '아니오'라고 말하는 방법을 꼭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모든 시도를 그만두는 것이 차라리 물질적으로 이득이 될지라도, 이 도전을 계속해야만 합니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밝히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것은 대상을 좀더 정확하게 이해하는 일이며 다른 대상들과의 관계를 깨닫는 것입니다. 도전하고 무릅쓰지 않으면 창조나 재창조를 할 수 없습니다.
할 일이 없어서 교육 실천을 준비한다는 것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확신합니다.
저임금은 결국 가르치는 직업에 어느 누구도 매력을 못 느끼게 합니다. 많은 장관들은 별다른 적성이 없는 사람들이 가르치는 일에 종사하게 될 것이라고 반복해서 말해왔습니다.
진보적인 교사의 자질에 관하여 : 겸손(결코 자아 존중감의 결여나 체념, 혹은 비겁한 같은 의미를 함축하는 말이 아니고, 반대로 겸손은 용기, 자기 확신, 자기와 타인에 대한 존중을 필요로 한다.), 무장된 사랑이 없다면 교사 직업의 부정적인 면들을 견뎌낼 수 없다. 용기, 인내, 능력, 결단력, 인내와 조급함, 말을 절제하는 삶.
교실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읽으려고 노력하고 기록하라.
우리가 말하지 말아야할 주제나 가치란 없으며, 침묵해야 하는 영역도 없다.
교육은 정치적 행동이다. 학습자들에게 의도적으로 이야기하고, 그들에게 이야기하게 해야 하며, 학습자들에게 귀기울이고, 그들이 귀기울이도록 하는 일. 이것은 의도적으로 일어나야 하고, 그것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교육의 비중립성:
교육자들이 교육을 정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진보적이고 민주적으로 일관되게 살 것인가,
아니면 과거처럼 권위적이고 반동적이거나 무의식적이고 무비판적인 선택을 하며 살 것인가,
즉 그들이 스스로를 민주적인 인간으로 규정하든지 아니면 권위적인 인간으로 규정할 것을 요구한다.
모든 것을 용인하는 허용성은 때로 '자유를 지향하는 학습'이란 인상을 주지만,
결국엔 자유와 상반되는 활동을 만들어 낸다.
허용성이 말들어내는 무법천지의 분위기, 방종의 분위기는 오히려 권위적인 입장을 강화한다.
그런 반면, 허용성은 권위주의자들이 원하는 순종적이고 복종적인 사람을 만드는 <훈련>을 거부한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과 그 투쟁을 통해 스스로 자유로워지는 민주주의자가 되기 위한 훈련마저도 허용성은 거부한다.
허용적인 사람들은 자유에 의해서도 권위에 의해서도 일관되게 규정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