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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 가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서 있더군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이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정희성 <숲>

                    

어느날 서점에서 사진집을 보다가 이 시를 만났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시를 나눠주고 싶었다. 이 메마른 땅에서 숲이 되자고. 희미하지만 아직도 그 꿈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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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의 강 1

-마종기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한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거리면 그 물살은 맑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여야 하겠지만

한 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일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긴 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보아주고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

 

                 

예전에 노트에 적어둔 시를 다시 보게 됐다.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 이라니!! 추위를 풀고 흐르는 싱싱한 봄날 강이 떠오른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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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드무비 > 성석제의 詩 - 어두운 길

이 길은 근처에 있는 건 무엇이든 빨아들인다

바람은 신선하고 안쪽에는 비가 내리는지

길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머리가 젖어 있다

낡은 모자를 쓰고 안경을 낀 노인이 핫도그를 팔며

이따금 내 쪽을 건너다본다

신기할지도 모르지

몇 시간째 길을 향해 앉아 있으니

그러나 나는 길에만 흥미가 있다

불이 켜지고 아이들이 그 길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문득 오토바이를 탄 청년이 튀어나온다

길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놀라 비켜서고

낮은 욕설 속에 청년은 사라진다

저 보이지 않는 어두운 길은 끝에서 무엇을 만들까

저 길을 통과하면 내 인생이 바뀔지도 모른다

길 안쪽은 근처 사람들에게 두통거리다

소문,  이를테면 누군가 목이 반쯤 잘려 쓰러져 있다든지

아이들이 이상한 노래를 부르며 몰려다니고 어른의 뺨을 친다든지

길 안쪽의 사람들은 가난과 함께 근처의 모든 죄악을 책임진다

입구에는 무엇이 씌어 있었는지 모를 팻말이 누워 있다

노인은 식은 핫도그를 물어뜯다 내게 눈길을 돌린다

그 눈길은 가래처럼 끈끈하고 불쾌하다

그 겨냥은 누구도 모면할 수 없다.

이제 길은 어둡고 고요하다

저 길은 무엇이나 빨아들인다

아이들은 자라서 큰길로 나오고 어디론가 사라지지만

길은 여전히 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저 길뿐이다

이 근처에서는 이 길만이 진실이다

                                            -- <낯선 길에 묻다>  민음사 刊, 1991년

 

어찌된 셈인지 소설가 혹은 시인인 성석제는 내게 기형도 시인의 절친한 친구로만 각인이 되어 있다.  고운기 시인인가 이창기 시인이 어느 해 기형도와 신춘문예 최종심에서 다투다 기형도를 제치고 뽑혔다는 얘길 듣고  잠시나마 그들을 싸잡아 미워했던 것처럼 이유없이 지나가는 사람 1, 2 정도로 그를 가볍게 취급했다.  

1990년 3월 초, 기형도 시인의 1주기 행사가 동숭동 시문화회관에서 있었다. 나는 출장 비디오 기사를 대동하고 그곳에 가서는 무대 위에 오른 그의 친구들을 이유없이 노려보았다. <불란서 영화처럼>의 전연옥 시인, <잘 가라 내 청춘>의 이상희 시인, 황인숙 시인, 민음사 편집주간이었던 이영준 시인, 성석제 시인 들이 차례로 무대에 올랐다. 그들은 하나같이 너무나 수줍고 진지하고 친구를 그리워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이제는 소설가로 더 유명한 성석제 시인의 시를 한편 올려놓고 또 기형도 시인 얘기를 하고 있는 꼴이라니! 재밌는 건 입심좋은 소설가가 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운명이  첫 시집의 시 여기저기에서 이미 보인다는 것이다. 나처럼 눈 어두운 독자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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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황인숙의 <자명한 산책>에 실린 '강'이라는 시라고 한다.  김형경의 <사람 풍경>을 읽다가 이 시를 봤다. 일요일 아침 고속버스를 타고 가다가 강을 보며 아~ 저 강물 흘러가는 걸 보고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던 참에 이 시가 나타났다^^ 지난 가을에 한참 산에 다녔었는데 요즘은 강에 가고 싶다. 한적한 강가에 방 하나 잡아두고 창문으로 강을 바라보며 한 해를 떠나보내면 근사하지 않을까 ㅎㅎㅎ 시집 제목도 맘에 든다. '자명한 산책' ...!

노트에 베낀 시를 펼쳐두고 이 페이퍼를 쓰고 있는데 옆에 오신 주간님이 이런 말린 고구마 같은 사람의 시를 읽느냐고 하네..... 말린 고구마 같은 사람? 표현 한번 죽이네~

참, 이 시에서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이라는 말이 눈에 들어왔다. 한 해를 보내며 드는 생각이 딱 이거다. 웃겼고 웃기고 웃길........ 그게 삶인 것 같다. 근데 이 말투 재밌네~ 웃겼고 웃기고 웃길 ㅋㄷㅋ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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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2-28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몰골,도 제가 참 자주 쓰는 말인데 너무 슬프고도 코믹하지 않아요?ㅋㄷㅋㄷ

낯선바람 2004-12-30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정말 '몰골'이... 웃을 기운도 없어요.. 한 해 가기 전에 일 마무리하려고 했는데ㅠㅠ
 
 전출처 : 로드무비 > 내 단 하나의 소원

내 단 하나의 소원

저녁녘  고요 속 바닷가로 돌아가고파

숲 가까이서 조용히 잠들고 싶어

가없는 하늘 위엔 맑디맑은 하늘

난 화려한 깃발도 소용없어

훌륭한 집도 필요없어

다만 젊은 나뭇가지로 잠자릴 엮어다오

내 베개 밑에서 슬퍼할 자는 아무도 없고

마른잎 위를 스쳐가는 가을바람 소리뿐

                 --블루 드래곤즈(중앙대 그룹사운드 ) 1977년 발표곡 '내 단 하나의 소원' 중

 

어젯밤 자다깨어 자정 무렵에 모 텔레비전 방송국의 '콘서트 7080'을 보았다. 늙수구레한 남자들이 어색한 복장으로 악기 하나씩을 꿰차고 열창을 하는데 머리가 반나마 벗겨진 보컬 김성호 씨의 노래 소리에 소름이 좍 돋았다. 노래 실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시를 방불하는 가사 때문에......

난 화려한 깃발도 소용없어 / 훌륭한 집도 필요없어 / 다만 젊은 나뭇가지로 잠자릴 엮어다오 / 내 베개 밑에서 슬퍼할 자는 아무도 없고 / 마른잎 위를 스쳐가는 바람소리뿐. 중얼거리는 듯한 그의 노래가 내 마음 깊이 젖어들었다. '예전엔 노래 가사도 사랑 타령 일색이 아니고 저렇게 은근하고 품격이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옛날 노래들이 그리워졌다.

드럼 앞에 앉은 수줍은 이는 현재 의사이고 기타리스트 두 사람은 건축회사 직원과 약사, 건반 앞의 이는 보험회사 직원이라는 보컬 김성호 씨의 소개가 있었다. 난 왜 오래 전 활동했던  가수들이 오랜만에 텔레비전에 나와 현재의 직업 따위를 이야기하면 눈물이 핑 돌지? 의사나 대기업 간부라고 해서 다행이고 더 잘나보이는 것도 아니다. 25년 전의 친구들이 배가 나오고 머리가 벗겨진 아줌마 아저씨의 모습으로 만나 함께 노래를 부른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그 긴 세월 동안 다들 먹고살겠노라고 아둥바둥했겠지?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대로......

 (http; // www.windbird.pe.kr 로 가시면 '내 단 하나의 소원'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 외 70년대 노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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