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드무비 > 성석제의 詩 - 어두운 길

이 길은 근처에 있는 건 무엇이든 빨아들인다

바람은 신선하고 안쪽에는 비가 내리는지

길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머리가 젖어 있다

낡은 모자를 쓰고 안경을 낀 노인이 핫도그를 팔며

이따금 내 쪽을 건너다본다

신기할지도 모르지

몇 시간째 길을 향해 앉아 있으니

그러나 나는 길에만 흥미가 있다

불이 켜지고 아이들이 그 길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문득 오토바이를 탄 청년이 튀어나온다

길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놀라 비켜서고

낮은 욕설 속에 청년은 사라진다

저 보이지 않는 어두운 길은 끝에서 무엇을 만들까

저 길을 통과하면 내 인생이 바뀔지도 모른다

길 안쪽은 근처 사람들에게 두통거리다

소문,  이를테면 누군가 목이 반쯤 잘려 쓰러져 있다든지

아이들이 이상한 노래를 부르며 몰려다니고 어른의 뺨을 친다든지

길 안쪽의 사람들은 가난과 함께 근처의 모든 죄악을 책임진다

입구에는 무엇이 씌어 있었는지 모를 팻말이 누워 있다

노인은 식은 핫도그를 물어뜯다 내게 눈길을 돌린다

그 눈길은 가래처럼 끈끈하고 불쾌하다

그 겨냥은 누구도 모면할 수 없다.

이제 길은 어둡고 고요하다

저 길은 무엇이나 빨아들인다

아이들은 자라서 큰길로 나오고 어디론가 사라지지만

길은 여전히 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저 길뿐이다

이 근처에서는 이 길만이 진실이다

                                            -- <낯선 길에 묻다>  민음사 刊, 1991년

 

어찌된 셈인지 소설가 혹은 시인인 성석제는 내게 기형도 시인의 절친한 친구로만 각인이 되어 있다.  고운기 시인인가 이창기 시인이 어느 해 기형도와 신춘문예 최종심에서 다투다 기형도를 제치고 뽑혔다는 얘길 듣고  잠시나마 그들을 싸잡아 미워했던 것처럼 이유없이 지나가는 사람 1, 2 정도로 그를 가볍게 취급했다.  

1990년 3월 초, 기형도 시인의 1주기 행사가 동숭동 시문화회관에서 있었다. 나는 출장 비디오 기사를 대동하고 그곳에 가서는 무대 위에 오른 그의 친구들을 이유없이 노려보았다. <불란서 영화처럼>의 전연옥 시인, <잘 가라 내 청춘>의 이상희 시인, 황인숙 시인, 민음사 편집주간이었던 이영준 시인, 성석제 시인 들이 차례로 무대에 올랐다. 그들은 하나같이 너무나 수줍고 진지하고 친구를 그리워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이제는 소설가로 더 유명한 성석제 시인의 시를 한편 올려놓고 또 기형도 시인 얘기를 하고 있는 꼴이라니! 재밌는 건 입심좋은 소설가가 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운명이  첫 시집의 시 여기저기에서 이미 보인다는 것이다. 나처럼 눈 어두운 독자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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