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첫 페이퍼를 신나서 올렸으나. 

전에 썼던 글을 가져오자니, 책 내용 정리한 것만 있는 글도 있고...

이렇게 한 책으로 여러 번 우려먹어도 되나 하는 생각도 들면서 ㅋㅋㅋ 약간 귀찮아지고 있다.

그래도 시작했으니 해봐야지.










제 3장 '대캘리번'은 1984년 독립적으로 출간되었던 연구의 결과물로, 이 책의 기초이자 핵심 아이디어가 들어있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그때 이미 제목을 이렇게 붙인 것으로 보아 페데리치는 노동자를 자본가 혹은 부르주아의 정복대상으로 보았을 뿐 아니라 마녀사냥과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이미 착안했던 것 같다 (캘리번은 마녀의 자식이다).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 표지



3장은 강렬한 이미지로 시작한다. 근대 해부학의 창시자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의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 의 표지라고 하는데, 가운데 배가 갈라 드러내어져 있는 여성이 있고, 이 책의 저자는 그 여성이 교수형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임신했다고 밝혔지만 임신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후 교수형에 처했다고 서술했다고 페데리치는 밝히고 있다.


임신이 아니라는 것을 해부해서 밝혔다는 것인가? 그러면 이미 그 여성은 죽었을텐데, 죽은 여성을 다시 교수형에 처했다는 말인가? 저 당시 의술의 수준으로 개복을 하면 사람을 살리기는 어려웠을 것 같은데, 저 여성에게 어떤 혐의가 있을테니 생명은 중요하지 않고 임신 여부를 밝히기 위해서 해부를 한 것이고 교수형은 상징적인 의미로 이미 죽은 사람에게 또 집행한 것인가? 임신 5주쯤 아주 작은 점에서 심장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나는 놀라우면서도 좀 무서웠던 기억인데, 그 당시 해부학의 수준으로 그렇게 작은 태아를 알아볼 수 있었을까? 여러가지 의문이 들었지만 확인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여성 뒤에 서 있는 창 같은 것을 들고 뭔가를 수호하는 듯한 느낌의 해골은 해부학을 상징하는 것 같고, 해골 옆에는 한 여인 (매춘부나 산파일 거라고 한다) 이 머리를 숙이고 있고, 구경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성이다. 해부학이 도움이 되는 예는 이런 것 외에도 많았을텐데 학술서의 표지가 굳이 이런 그림이었다는 것이 당시 여성 혐오의 분위기를 잘 나타내주는 것 같다.



얼마 전 낭독 모임에서 <템페스트>를 배역을 나눠 읽었다. <캘리번과 마녀>를 읽기 전 캘리번이 어떤 인물인지 파악하고 싶어서 골랐던 것이기도 하지만, 극의 주제가 관용과 용서와 화해라고 해서 더 끌렸다. 물론 이야기 안에 선과 악의 구도가 있기는 하지만 응징이나 복수와는 좀 거리가 멀고 결말 부분에서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진다. 악의나 불의가 있을지언정 인생은 희망적이라고 외친다.



오 놀랍구나! 훌륭한 사람들이 여기에 이렇게도 많다니!

인간은 정말 아름답구나! 이런 분들이 존재하다니.

참, 찬란한 신세계로다!


<템페스트> 5막 1장 181-84행, 미랜더의 대사










그래서 <캘리번과 마녀>에서 캘리번이 어떻게 그렇게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는지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3장 초반을 읽으며 다시 생각해보니 분위기에 취해 잠시 잊고 있었지만 여기서 미랜더가 찬미한 것은 다른 인간들이고, 캘리번은 야만적인 것으로 악의 상징으로, 인간이 아닌 것으로 묘사되었다. 정령 애리얼과 캘리번은 각각 프로스페로의 정신과 육체를 상징하는 것이라는 해석을 봤었는데, 이게 근대 들어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기 시작한 시대적 분위기의 반영이었던 것이었구나. 단편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이 연결되면 재미있기도 한데, 하나를 알기 위해서 다른 많은 것을 알아야 진정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좀 답답해진다. 공부라는 것은 (사실 시작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역시 끝이 없다.



인색함, 신중함, 책임감, 자기통제 같은 '이성의 힘'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방탕함, 게으름, 생명 에너지의 체계적인 탕진 같은 '육체의 저급한 본능들'이 있다.


3장 196쪽


어릴 적부터 '이성은 다른 동물에게는 없고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것' 이라는 말, 혹은 '인간만이 말을 할 수 있다'는 말을 보면 의문이 생겼다. (요즘은 별로 이런 이야기를 책에서 하지 않는 것 같다) 다른 동물에게 이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인간이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정말 확인해보기는 한 건지 궁금했다. 보면 생김새 말고는 별로 아는 게 없는 것 같던데 말이다. 나중에 데카르트의 말을 보고 그게 어디서 왔는지를 알게 되었고, 여전히 오만한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인간은 자연과 선을 그었고, 거리낌없이 자연을 이용하고 파괴해 왔다.



막스 베버에 따르면 신체의 개혁은 부르주아 윤리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부의] 획득을 필요충족을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삶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3장 197쪽


3장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문장은 이 문장이었다. 막스 베버를 읽어보지 않아서 (마르크스도 안 읽었고, 미셸 푸코도 안 읽었고, 막스 베버도 안 읽었는데 이 책을 같이 읽자고 한 것이 참 무모했다는 생각이 계속 든다. 부끄럽다.) 페데리치의 문장만 읽고 하는 생각임을 미리 밝혀둔다. 물론 자본주의에서는 필요한 부 이상의 부를 계속 축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부의 획득을 '삶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여긴다니? 이건 개인 차원이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체제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자연스런 삶의 즐거움을 우리에게서 박탈하고자 하며 (베버의 말 - 그가 얘기했던 자연스런 삶의 즐거움이란 뭘까?), 농업 사회에서 태양, 계절적 순환에 관계되었던 노동일을 좀더 기계적이고 규칙적으로 바꾸었다. 노동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에 정해진 시간 출근하여 퇴근하게 되었고, 노동자 양성을 위해 학교라는 시스템도 만들어졌다.



어릴 때는 학교에 개근상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성적이 좋아 받는 우수상 보다도 칭찬받아야 할 것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 나는 수두로 일주일간 결석을 해서 초등학교 때 개근상을 받지 못했는데, 6년 개근상을 받는 아이들을 부러워했다. 내가 일부러 빠졌던 것도 아닌데.. 전염병이라서 못 간 거였는데. 감기에 걸려도 꼬박꼬박 학교에 가고 출근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한국 사람들을 서양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당황했다. 감기로 죽을 수도 있는데, 감기에 걸렸으면 쉬어야지, 그리고 다른 사람한테 옮기잖아. - 아! 정말 그렇네. 요즘 학교는 개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고 (아마 그런 상도 없지 않을까) 코로나 시대를 거치고 나면 아픈데도 학교에 가는 것은 오히려 민폐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형성될 것 같다.



자연과 이성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은 노동이 노동자의 신체로부터 분리되어 상품으로 변형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노동자는 한정된 시간 동안 자신의 노동력을 구매자의 처분에 맡길 수 있다.

이는 '그가 자신의 노동력을' (자신의 에너지, 자신의 능력을)

"꾸준히 자신의 자산이자 자신의 상품으로 간주해야만 한다"는 의미가 된다.


맑스의 말, 198쪽


새삼스레 내가 지금까지 익숙하게 생각해 온 학교 생활, 직장 생활에 회의를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일정 시간을 일하고 대가를 받기로 계약한다는 것은 내 몸의 자유를 그 시간 동안 포기한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19세기 후반에는 노동자들이 이 개념에 익숙해 있었다고 하지만, 16-17세기 즉 사초축적의 시기에는 임노동에 대한 혐오가 극심하였고, 이에 대해 부르주아지는 처벌을 강화하여 노동자들을 길들이는 한편, 공중목욕탕과 선술집을 폐쇄하고 '비생산적인' 섹슈얼리티와 사교행위 등을 금지했다고 한다. 신체는 악의 근원이기도 했으나 한편 노동력의 보유고이기도 했기에 신체의 움직임과 부속기관들에 대한 연구, 해부학의 발전이 뒤따른다. 데카르트가 인간의 정신적인 영역과 물리적인 영역을 구분했듯 신체를 어떤 본질적인 목적을 갖지 않는 기계적인 물질이라고 보는 기계론적 철학은 자연계에 대한 지배계급의 통제를 강화하는데 기여하여 인간본성에 대한 통제가 최우선적이며, 가장 필수불가결한 단계가 되도록 만들었다 (206쪽). 데카르트는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자기 관리를, 홉스는 국가 차원에서 개인의 종속을 이야기했으나 두 경우 모두 신체를 자본주의적 노동규율이 요구하는 자동기법과 규칙성에 걸맞게 조정하는 결과를 낳았다 (207쪽). 결국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들이 정복(식민화)하려고 했던 이질적이고 위험하며 비생산적인 존재, 즉 야만적인 저 캘리번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232쪽) 이제야 3장의 제목이 왜 '대캘리번'인지, 이 책의 제목이 왜 <캘리번과 마녀>인지 밝혀졌다.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최초의 기계는

증기엔진이나 시계가 아니라 바로 인간의 신체였던 것이다.


218쪽



학교에서 데카르트와 홉스에 대해 배울 때 나는 그들의 사상에 대해 배웠을 뿐, 그것이 우리를 미래의 노동자로 양성할 목적으로 학교라는 곳에 앉혀놓도록 만들었음을 알지 못했다. 물론 그 중 소수는 지배계급이 되었겠지만, 그들 역시 자본주의라는 큰 체제 내에서 하나의 역할을 맡은 미약한 개인일 뿐이다. 지배계급에 녹아들어갈 수록 부를 '삶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여기게 되겠지. 이런 것을 알고서도 멀쩡하게 학교에 다니거나 회사에 다니는 것은 얼마나 괴로울까. 지금까지 잘 몰랐기에, 아니면 이 개념들을 연결짓지 않고 따로따로 생각했기에 크게 괴로워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살아오면서 문득 솟구쳤던 의문, 반항심이 이 이야기와 맥락이 통하는 걸 보면 무의식적으로 나의 내면에서도 이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뭔가 이상함' 혹은 의문을 계속 파고 들어가 정리해 둔 것이 철학이겠지. 나는 흘려버렸던 생각들을 이미 옛날에 다 하고 또 정리해둔 철학자들에게 새삼스레 감사하다. 살아오면서 어느 때보다도 철학이 왜 우리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또 왜 우리가 철학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절실하게 느꼈다. 지금까지 내 감정을 부정하고 '이성' 에 충실하며 살아오려고 노력했고, 서양에서 발전시킨 방법론에 의거한 과학을 공부했고 그들의 사고방식을 체화하려고 애썼기에 일과 생활에 있어서의 나를 분리하기가 어려워 좀 혼란스럽지만.



다시 책 내용으로 돌아가, 인간을 정신과 신체로 분리하고 기계적인 신체를 노동력으로 확보하고자 했던 시기에 중세 동안 교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신을 탐구하느라 바빠서 인간을 탐구할 수가 없었겠지) 대중적으로 확산되어 있었던 마법적인 세계관, 즉 중세의 '마법적인 힘을 담는 그릇'으로 인간을 보았던 개념은 타파되어야 했다. 마법은 노동을 하지 않고도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는 수단, 다시 말해서 노동의 거부를 의미했다. (210쪽) 또 마법은 규칙화된 노동과정을 불가능하게 하는 시공간에 대한 질적 개념에 근거했다. 개인에게 특수한 힘을 부여하는 우주라는 개념 또한 자본주의적인 노동규율과 양립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210-211쪽)



마녀 박해는 당시 임노동의 실질적 주체인 남성 노동자에게는 (마법적인 힘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의) 본보기가 되는, 그리고 새로운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여성을 통제할 수 있는, 그러면서도 당시 산파 등의 여성에 의해 행해졌던 낙태와 피임을 통제하여 새로운 노동력도 확보하는 획기적인 방법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드디어 4장에서는 마녀사냥 이야기가 나온다. 이 책의 주요 논지가 마녀 사냥이 여성이 가정에 종속되고 경제적 활동으로부터 소외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기에 핵심 내용인 것 같아 기대했으나, 사실 3장 만큼의 카리스마는 없었던 것 같다. 3장 너무 멋짐.



무지하면서 멋지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어 의문이 안 생긴다...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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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은 시초축적 이후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논리를 따라가며 발췌해보았다.

(문장을 많이, 그리고 순서를 약간 변형하였으므로 굳이 출처는 달지 않았다)


 

맑스는 시초축적을 농민으로부터 토지를 박탈하여 “자유로운” 노동자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의 물적-인적 약탈과 자본주의 성장의 관계는 인식하고 있었으나, 자본주의가 성별, 인종, 나이 등에 따라 노동계급을 세밀하게 분할하였으며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변화를 가져온 것에 대해서는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았다. 애덤 스미스도 오직 시장을 위한 생산만을 가치창조 활동이라 정의했다.

 

 

 

 

 

 

 

 

 

잠깐 애덤 스미스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애덤 스미스가 원흉이다?)

 

 

인클로저로 공동경작 체제가 붕괴되면서 농민집단은 경제적 격차와 증오로 양극화되었고, 장인들은 선대제를 활용한 상업자본가들에 의해 경제적 지위를 위협받았다. 임금은 노동자를 노예화하는 도구가 되었다.

여성은 임신과 육아로 부랑자나 이주노동자가 되기 어려웠고 재생산 (출산 및 가사 노동) 에 한정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재생산 노동이 지배계급을 위한 것이거나 가정 바깥에서 이루어진 경우에는 최저수준으로 보수가 지급되었지만 가정에서 일어나는 노동인구 재생산은 ‘자연적 사명’으로 신비화되고 ‘여자의 일’ 이란 꼬리표가 붙어서, 경제적 중요성과 자본축적 과정에서의 기능은 잊혀졌다.


무시도 아니고 인식되지 않다니, 정말 슬프다…

존재하는 노동이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다니.

<아내 가뭄>에서 여성 돌봄 노동의 가치의 구현에 대해 알아봤었는데, 그게 왜 지불되지 않게 되었는지를 여기서 보게 되었다.


 

토지사유화가 해방시킨 것은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이었다. 자본을 가지고 있는 지주는 노동자를 착취하고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국가와 고용주들은 남성에게만 임금을 지불하고 여성의 노동을 무보수로 착취할 수 있었다. 가정 밖의 여성은 재생산 노동의 평가 절하로 임금이 낮아져 만성적인 가난에 시달렸다. 상인들의 식료품 매점매석으로 물가가 상승하였고 식민지에서 금과 은이 유입되어 부가 재분배되자 이러한 상황이 더 심화되었다. 애덤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이 시장을 조절한다고 했지만, 이는 노동자의 조직화를 금지하고 상인에게 상품의 가격결정과 유통에 자유를 보장해 준 국가 정책의 산물이었다. 물가 상승으로 실질 임금이 하락하자 매춘이 증가하고 반란이 만연했으며 범죄율이 증가했다.


국가들은 1) 더 잘 훈육된 노동력을 창출하고 2) 사회적 저항을 분쇄하고 3) 노동자들을 일자리에 묶어두기 위한 정책을 폈다.

집단 모임을 금지했고, 노동자의 도피를 막고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공공부조 (생활 능력이 없는 국민에게 국가의 책임 하에 직접 금품을 제공하거나 최저생활을 보장하는 제도) 를 도입했다.


현대 국가의 개념이 이쯤 생겨난 것 같다. 기본 소득과 비슷한 개념이랄까..

기본 소득은 노동을 하지 않아도 지급한다는 점에서 더 사람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는 것 같지만, 어쨌든 체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16-17세기 아메리카에 이어 유럽 본토에서도 인구가 감소했다. 16세기 중엽에는 인구가 국부를 결정한다는 관념이 일종의 사회적 공리가 되어 있었다. 포르투갈 배들은 아프리카에서 인간 화물을 싣고 왔으며, 종교개혁가들은 성적 금욕에 대한 기존 기독교의 찬양을 부정하면서까지 결혼과 성의 가치를 드높였다 (가증스럽다). 인구기록이 시작되고 국가가 성, 출산, 가족생활을 감독하며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성이 자신의 신체와 출산에 대해 행사하던 통제권을 파괴하기 위해 마녀사냥이 시작되었다. 피임, 낙태, 영아살해에 대해 가혹한 처벌이 가해졌고 출산 과정에 남성 의사가 관여하기 시작했으며, 산파는 국가의 관리를 받게 되었다.

여성들은 출산노예로 전락했다. 아메리카 식민지의 여성 노예는 새로운 노동력 창출의 수단으로 공개적으로 이용되었고 자식은 경매로 팔려나가는 등 유럽의 여성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 있었으나, 장소를 불문하고 여성의 신체는 노동력을 재생산하고 노동인구를 확대시키는 기구로 변질되었고, 여성 자신이 스스로의 몸을 제어할 수 없었다.

출산에 대한 여성의 통제권을 불법화한 것은 여성에 대한 효과 측면에서나 노동의 자본주의적 조직화라는 귀결의 측면에서나 대단히 중요한 변화였다. 새로운 성적 분업에서 여성은 스스로의 의사에 반해 출산하거나 모성을 강요받았을 뿐 아니라 비노동자로 정의되었다. 여성은 남편을 돕는 방식으로만 ‘생산’에 참여할 수 있었고 여성이 집에서 한 일은 그것이 내다 팔기 위한 노동일지라도 비노동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곧 가내여성운동은 모두 ‘집안일’로 분류되었고, 가외여성노동에 대한 보수는 남성노동의 보수에 비해 적었으며 생계유지에 충분치 않았다. 매춘 금지와 일자리로부터의 여성 배제는 가정주부의 탄생 및 가족의 노동력 생산기지로서의 재구성을 야기했다. 여성과 그 자식들의 신체와 노동에 대한 권리는 남성에게 부여되었다.

 

자본주의는 유럽의 ‘아메리카 병합’과 두 세기 동안 플랜테이션 농장들에서 유럽으로 흘러들어간 ‘피와 땀'을 토대로 발전했다. 이후 지금까지도 대대적인 경제위기로 자본주의 체제가 위협받을 때마다 자본가계급은 대규모의 식민지 건설과 노예화의 과정으로 위기를 극복하려 한다. 플랜테이션 체제는 공장제, 이주노동, 지구화의 선례가 되었다. (오늘날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을 위한 ‘저렴한 소비재’의 공급원으로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노동자가 활용된다). 여성 무임노동과 마찬가지로 노예제는 ‘보수가 지급되지 않는 노동시간’을 확대하는 방편으로 활용되었다. 


이 책의 제목 <캘리번과 마녀>는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서 따온 것이다. <템페스트>에서는 마녀의 아들이자 토착민 반란자인 캘리번과 먼 바다를 항해하는 유럽 출신 프롤레타리아트 트린큘로(광대)와 스테퍼노 (뱃사람)이 음모를 꾸며 섬의 현재 주인 프로스퍼로를 몰아내고자 음모를 꾸민다. 이 작품에서 유럽 프롤레타리아트는 좀도둑이자 술주정뱅이로, 캘리번은 악마 같은 존재로 묘사되며 이들의 음모는 불명예스럽게 종결된다. 캘리번의 모친인 마녀 시코락스는 극에 등장하지도 않는다.


 

아메리카 식민지 초기에는 프롤레타리아트 백인여성이 원주민 혹은 노예들과 친밀하게 지냈고 살림을 차리고 자식을 낳기도 했으나 노예제가 확립된 이후 인종적 계서제가 법에 근거하여 자리잡기 시작했다. 유럽의 성차별 문화는 토착여성에게서 자립성을 박탈하고 그들의 남성친족들의 권력을 증가시키는 새로운 성적 계서제를 도입했다. 아프리카의 노예 공급이 감소하면서 여성의 성생활과 출산 패턴에 대한 규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노동의 성적 분업은 남성과 여성의 업무에 차별을 두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들의 경험, 삶, 자본과의 관계, 노동계급 내의 다른 부문들과의 관계에서도 차별을 규정했다. 결과적으로 성적 분업은 권력관계를 만들었다. 여성 무임금노동의 은폐 덕택에 자본주의는 ‘보수가 지급되지 않는 노동시간’을 확대할 수 있었다. 계급적대는 남녀간의 적대관계로 굴절되었다. 남성은 임금을 받는다는 이유로, 그리고 자본주의 축적에 대한 그들의 기여를 인정받았다는 이유로 여성에게 권력을 행사해왔다. 남성노동자는 그때도 지금도 일종의 공모자로 작용하고 있다.


헉헉.. 내용이 참 많다. 그냥 맥락대로 따라가면 되기는 하는데, 그래도 논리를 정리해 두어야 머릿속에 잘 남을 것 같다. 다음 장에서는 이제 본격적으로 마녀사냥이 나오는가..? 했는데 3장에서는 푸코의 '신체 이론'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고 4장이 본격적으로 마녀사냥 이야기인 듯. (3장 어렵겠다)

 

남아메리카 식민지에서는 하층계급 유럽인 여성, 메스티조 여성, 아프리카인 여성들이 서로 협력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인디언 여성들은 스페인 치료사들에게 성적 유혹에 쓰도록 벌새humming bird를 줬다.

물라토 여성들은 메스티조 여성들에게 남편을 길들이는 방법을 가르쳤다.

'늑대' 여성은 '코요테 (메스티소+인디오)' 여성을 '악마'에게 소개시켜 줬다.

181쪽


이는 여성이 공통된 경험을 통해 식민지배와 피부색의 구분선을 극복하고 동맹을 형성할 수 있었음을 보여 주는 생생한 사례다. 그들이 재생산을 통제하고 성차별에 맞서 싸우기 위해 전통적 지식 및 실천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함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182쪽).

 

조금 억지스럽게 여성의 연대를 말하고자 하는게 느껴졌다. 여성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감정적으로 공감하지만, 이 문장이 이 부분의 논리에 아주 부합하는 것 같지는 않다. 꼭 필요한 문장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쨌든, 여러 입장의 여성이 연대할 수 있으며 그것이 필요하다고 치자. 맞벌이 여성의 입장으로서 내가 아이를 키우는 데 조력을 구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가족, 기관, 도우미 등. 그런데 결국 내가 도움을 받는 사람은 항상 여성이었다. 재생산 노동이 여성의 전문 분야로 여겨지기도 하고, 노동 강도에 비해 임금이 적다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비용 절감을 위해 외국 국적의 도우미를 고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무엇을 고려해도 항상 불편했다.

 

내가 고용주 혹은 용역을 발주하는 사람(?)의 입장이라고 치고, 내가 이들 여성과의 연대를 실천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인간적으로 친절하게 대하고 임금을 높게 조정하는 일?

아니면 재생산 노동이 여성의 영역으로 한정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여성을 고용하지 않는 (남성을 찾아보는?) 일?

다른 여성에게 일을 맡기지 않고 나 스스로의 힘으로 키우는 것?

그것이 불가능하니까 나의 가정 밖에서의 일을 그만두는 것?


이것은 사회 구조의 문제니까 개인적으로는 뭔가 변화를 줄 수 있는 일이 없을까?

또 답이 없어보이는 문제를 만들어 보았다.

 

 

+ 남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는 그렇다 치고, 카리브 제도에서는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가... 잊고있던 책을 다시 떠올려본다.

 

 

 



 

 

(이 책의 주인공 버사 앙투아네타 메이슨 - 제인 에어의 남자 로체스터의 부인- 은 크레올 (유럽인의 자손으로 현지인에서 태어난 사람 혹은 유럽인과 식민지 현지인의 혼혈)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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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11-03 15: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캘리번과 마녀를 읽기 위해 템페스트를 읽었던 날들의 기억이 떠오르네요. 템페스트 읽으면서 마녀는 왜 마녀가 되었는가를 저 역시도 궁금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에게 캘리번과 마녀, 혁명의 영점은 좀 어려웠는데 이미 2년정도 지났으니 지금 다시 읽으면 처음보다 더 나을까요?

덕분에 복습합니다.

건수하 2021-11-03 16:57   좋아요 0 | URL
저도 캘리번과 마녀 때문에 템페스트를 읽었지요! ^^

어려워서 1장씩 2장씩 읽고 글로 정리하고 모여서 이야기도 하고 그랬는데.. <혁명의 영점>은 저는 아직 못 읽어봤고요,
지금은 <캘리번과 마녀> 다 읽고 마리아 미즈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읽고 있어요. :)
 








데리치는 ‘가사노동에 임금을’ 이란 캠페인을 벌여온 여성운동가이자 정치철학자이다. 그의 저서 <혁명의 영점>의 서문에서 페데리치는 여성운동을 벌이던 초창기에는 가사 노을 ‘거부’하는데 초점을 두었다가 점점 가사 노동의 가치를 ‘인정’ 하는 쪽으로 옮겨갔다고 말한다.

전쟁을 겪으며 독립적으로 일해본 경험이 있었던 어머니 세대의 영향을 받아 여성이 가사 노동의 전담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 태도를 가졌다가,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해서는 우선 가사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고 위상을 높여야겠다는 쪽으로 전환한 것이다.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 정아은









정아은 작가의 책을 읽고 페데리치의 책을 읽어보고 싶다 생각했다. 

여성이 가사 노동의 전담자라는 사실을 거부하다가, 가사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했다는 것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서문>


페데리치는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여성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가치를 생산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남성에게 종속되었다는 정통맑스주의의 주장 -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 근거한 - 을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자본주의에서 여성들이 남성에게 종속된 것은 “여성노동”의 “비생산적인” 본성 때문이 아니라 여성들이 임금을 받지 못하는 조건 속에 있기 때문이며, 남성의 지배는 임금이 남성들에게 부여한 권력에서 비롯된다.

한국어판 서문 9쪽


결국 임금을 받고 안 받고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서론>


페데리치는 이 책의 근원이 된 연구의 동기를 두 가지로 이야기한다.


1)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기원과 발전을 재고하고자 함

2)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영향이 전지구적으로 확장되면서 새로운 인클로저,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박해, 여성에 대한 폭력 심화가 만연함


페데리치는 이 작업을 여성이 자본주의에서 생산 구조 밖에 속하게 된 과정을 역사 속에서 찾는 것으로 시작한다. 거다 러너는 <가부장제의 창조>에서 가부장제가 기원전 2000년 경에 시작된 역사의 결과물이라고 보지만, 이어지는 저서 <역사 속의 페미니스트>에서 역사의 개혁기마다 여성에 대한 억압과 탄압이 더욱 공고해졌다고 이야기했다.

마녀사냥은 12세기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있으며, 일반적으로 중세에 흔했던 것으로 여겨지나 근세(16-17세기)에 더 횡행했다. 실비아 페데리치는 이 시기 마녀사냥이 행해진 배경, 그리고 마녀사냥과 자본주의와의 상관 관계를 연구했다.

이 책의 부제는 여성, 신체 그리고 시초축적이다. 푸코의 몸 이론, 그리고 맑스주의에서 여성의 존재를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맑스는 시초축적이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노동력 재생산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간과하였고, 푸코는 권력의 원천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간과하였다고 주장한다.


<1장>


중세시대에도 가부장제는 이미 존재했지만, 영주의 권위가 여성의 남편 및 아버지의 권위를 압도했기 때문에 농노공동체에서 남성에 대한 여성의 종속상태는 제한적이었다. 토지가 대개 가족단위에 교부되었고 여성은 토지에서 노동을 하였으며, 노동의 산물을 남성의 허락 없이도 처분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부역이 금납으로 대체되면서 농민층에 분열이 생겼고 많은 빈농이 도시로 이주했다. 천년왕국 운동과 이단 운동이 있었으며, 교회 중심의 사회는 위기를 느꼈다. 일부의 이단 종파에서는 여성이 설교를 행하고 사제서품을 받을 수 있는 등 권리를 누렸으며 이 시기 여성들은 낙태와 피임을 통해 재생산 기능을 통제할 수 있었다. 14세기 말 흑사병 창궐 이후 유럽의 인구가 2/3로 감소한 상황에서 지대납부와 부역을 집단적으로 거부하는 현상이 일어나 봉건질서를 지탱하던 계급관계가 전복되었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부역 혹은 노예제를 부활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여성의 재생산에 대한 자기 통제는 이러한 상황에서는 경제-사회적으로 위협이 되었다.

15세기 말 정치당국들은 강간을 합법화하고 매춘을 제도화하여 젊은 남성에게 자유로운 성관계를 허용하였고, 그 결과 여성 비하 및 여성 혐오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또한 여성에 대한 폭력에 사람들이 무관심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여기까지 1장이 끝났다. 



저자의 의도를 이야기한 서문, 그리고 전체 큰 그림을 이야기한 서론이 어려웠고 1장이 되니 그냥 쭉 읽으면 되어서 오히려 나았다. 서문과 서론은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지만 전체 내용을 아우르는 것이고, 사실 1장만 가지고 볼 때는 크게 의문점이 없다.



+ 서론에서 <몸 정치학>이 왜 여성주의에서 중요한 지에 대해 조금 언급하였지만, 몸에 관한 부분은 (어릴 때부터 터부시해온 탓인지) 아직도 낯설고, 왜 꼭 그것이 필요한지 잘 모르겠다. 얼마 전부터 출퇴근 길에 케이트 밀렛의 <성 정치학> 을 듣고 있는데, 모르는 이야기가 아님에도 너어무 불편하다. <캘리번과 마녀>를 읽으며 그동안 멀리해왔던 몸 관련 페미니즘 책들을 읽을 마음을 먹을 수 있기를.


++ 다락방님 외 페미니즘 책읽기 하시는 분들 서재를 기웃거리다가 여기도 좀 써볼까 하고 글 옮기기 시작. 알라딘에서 리뷰 아닌 페이퍼는 처음 써보는 것 같다. 포맷이 좀 낡고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 당분간 써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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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11-03 09: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저는 이 페이퍼를 읽으니 쌓아두기만 했던 성정치학을 이제 좀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엄청 읽고 싶었는데 또 준비해두니까 안읽게 되어서요.

실비아 페데리치를 읽어두면 좋더라고요. 다른 여성주의 책 읽을 때 실비아 페데리치가 자주 언급이 되어서요. 읽기도 쓰기도 응원합니다, 수하 님!!

건수하 2021-11-03 11:34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댓글 감사해요! 왠지 더 열심히 쓰고 싶어졌어요 ㅎㅎ

이 글 쓴지 좀 되었는데, <성 정치학> 출퇴근 길에 듣다가 너무 괴로워서 멈춰있는 상태예요. 생각난 김에 다시 들어봐야겠네요.

제가 다른 페미니즘 책모임을 하고 있어서, 페미니즘 함께 읽기 책 따라가진 못하고 있는데요 차곡차곡 보관함에 담고 있습니다. 언젠가 합류할게요!

공쟝쟝 2021-11-03 1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어서오세요 🫂 (페미니즘 책 함께 읽는 거 너무 좋아요😭) 올려주싱 페데리치 책은 지금까지 읽은 페미니즘 책들 중에서 제 최애 책입니다! (반가워요!)
수하님 프사의 러블 고양이, 제 반려 고양이와 많이 닮아서 친밀감을 느끼며… 몸 관련 페미니즘은 저역시 관심만(;;) 많은 상태입니다. 환영합니다, 따로 또 같이 읽어보아요! 수하님 🤗

건수하 2021-11-03 11:36   좋아요 2 | URL
공쟝쟝님 안녕하세요~ 사실 저 공쟝쟝님 서재도 많이 구경 갔어요.
첫째랑 둘째 고양이도 봤고 베어노트 얘기도 봤구요 ㅎㅎㅎ
(베어, 노션 다 깔아는 뒀지만 노션만 쪼금 쓰고 있습니다)
참, 저도 두 마리랑 같이 살아요. 러블이 첫째이자 제 첫 반려묘.. 마음으로 낳은 자식이라고 말해요 ㅋㅋ

앞으로도 자주 놀러가겠습니다~ :)

잠자냥 2021-11-09 15:45   좋아요 0 | URL
쟝쟝 너무.... 예의바르니까 이상해요. 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1-11-09 16:02   좋아요 2 | URL
잠자냥/ 저 봉건적 가정에서 교육받고 자란 깍듯한 사람입니다. 엣헴!
수하/ 실망시켜드려 죄송해요. 저는 냥은 한분만 뫼시고 있습니다. 자주 놀러오시고 잠자냥님의 음해는 잊어주세요!

건수하 2021-11-09 16:07   좋아요 1 | URL
앗??? 그럼 페미니즘 책 같이 읽기 하시는 분 중 두 마리랑 같이 사시는 분이 있는거 같아요.. 헷갈렸나봐요. 죄송해요! ;ㅁ;

공쟝쟝 2021-11-09 16:11   좋아요 1 | URL
앍 ㅋㅋㅋ 헤깔린 걸로는 죄송해하지 않기로해요ㅋㅋㅋ 우리😫

잠자냥 2021-11-09 16:27   좋아요 1 | URL
수하 님 여기 괭이 키우는 분들이 많아서 헷갈리셔도 괜찮아요. 어차피 그 괭이가 모두 우리들의 귀여운 괭이 아니겠습니까? 저 위에 댓글 단 독서괭이 말고요 ㅋㅋㅋㅋㅋ

건수하 2021-11-09 17:28   좋아요 1 | URL
제가 본 고양이 두마리 키우시는 분이 잠자냥님 이었네요! ㅎㅎㅎ

둘째의 뒷태…!

잠자냥 2021-11-10 00:01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 수하 님! ㅋㅋㅋㅋㅋ 저는 세 마리 키우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건수하 2021-11-10 09:01   좋아요 1 | URL
으악... ;ㅁ; 둘째까지밖에 못 봤어요 ㅎㅎㅎ
세 마리랑 같이 사시는군요!
 
화전가 - 배삼식 희곡
배삼식 지음 / 민음사 / 2020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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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까지 즐겁게 읽고 있었는데 마지막이 좀 슬펐다.


봉아는 꼭 영시를 읊어야만 했을까 살짝 아쉬웠고, 며느리 두 명의 대사 비중이 적은 것이 좀 안타까웠지만 시대의 반영이라고 생각하며 즐겁게 읽었다. 공연을 보면 더 감동적일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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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고 싶을 때마다 책을 펼쳤다 - 위로가 필요한 모든 순간 곁을 지켜준 문장들
우혜진 지음 / SISO / 2020년 11월
평점 :
절판


나쁘지는 않았는데, 요즘 흔한 독서 에세이치고도 베스트셀러가 많아 좀 아쉬웠다. 부담없는 독서, 독서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는 좋을 듯. 추천도서 리스트 100이 분야별로 나눠져있지도 않고 뻔한 책들의 나열인 것도 조금 실망스러운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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