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첫 페이퍼를 신나서 올렸으나. 

전에 썼던 글을 가져오자니, 책 내용 정리한 것만 있는 글도 있고...

이렇게 한 책으로 여러 번 우려먹어도 되나 하는 생각도 들면서 ㅋㅋㅋ 약간 귀찮아지고 있다.

그래도 시작했으니 해봐야지.










제 3장 '대캘리번'은 1984년 독립적으로 출간되었던 연구의 결과물로, 이 책의 기초이자 핵심 아이디어가 들어있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그때 이미 제목을 이렇게 붙인 것으로 보아 페데리치는 노동자를 자본가 혹은 부르주아의 정복대상으로 보았을 뿐 아니라 마녀사냥과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이미 착안했던 것 같다 (캘리번은 마녀의 자식이다).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 표지



3장은 강렬한 이미지로 시작한다. 근대 해부학의 창시자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의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 의 표지라고 하는데, 가운데 배가 갈라 드러내어져 있는 여성이 있고, 이 책의 저자는 그 여성이 교수형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임신했다고 밝혔지만 임신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후 교수형에 처했다고 서술했다고 페데리치는 밝히고 있다.


임신이 아니라는 것을 해부해서 밝혔다는 것인가? 그러면 이미 그 여성은 죽었을텐데, 죽은 여성을 다시 교수형에 처했다는 말인가? 저 당시 의술의 수준으로 개복을 하면 사람을 살리기는 어려웠을 것 같은데, 저 여성에게 어떤 혐의가 있을테니 생명은 중요하지 않고 임신 여부를 밝히기 위해서 해부를 한 것이고 교수형은 상징적인 의미로 이미 죽은 사람에게 또 집행한 것인가? 임신 5주쯤 아주 작은 점에서 심장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나는 놀라우면서도 좀 무서웠던 기억인데, 그 당시 해부학의 수준으로 그렇게 작은 태아를 알아볼 수 있었을까? 여러가지 의문이 들었지만 확인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여성 뒤에 서 있는 창 같은 것을 들고 뭔가를 수호하는 듯한 느낌의 해골은 해부학을 상징하는 것 같고, 해골 옆에는 한 여인 (매춘부나 산파일 거라고 한다) 이 머리를 숙이고 있고, 구경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성이다. 해부학이 도움이 되는 예는 이런 것 외에도 많았을텐데 학술서의 표지가 굳이 이런 그림이었다는 것이 당시 여성 혐오의 분위기를 잘 나타내주는 것 같다.



얼마 전 낭독 모임에서 <템페스트>를 배역을 나눠 읽었다. <캘리번과 마녀>를 읽기 전 캘리번이 어떤 인물인지 파악하고 싶어서 골랐던 것이기도 하지만, 극의 주제가 관용과 용서와 화해라고 해서 더 끌렸다. 물론 이야기 안에 선과 악의 구도가 있기는 하지만 응징이나 복수와는 좀 거리가 멀고 결말 부분에서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진다. 악의나 불의가 있을지언정 인생은 희망적이라고 외친다.



오 놀랍구나! 훌륭한 사람들이 여기에 이렇게도 많다니!

인간은 정말 아름답구나! 이런 분들이 존재하다니.

참, 찬란한 신세계로다!


<템페스트> 5막 1장 181-84행, 미랜더의 대사










그래서 <캘리번과 마녀>에서 캘리번이 어떻게 그렇게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는지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3장 초반을 읽으며 다시 생각해보니 분위기에 취해 잠시 잊고 있었지만 여기서 미랜더가 찬미한 것은 다른 인간들이고, 캘리번은 야만적인 것으로 악의 상징으로, 인간이 아닌 것으로 묘사되었다. 정령 애리얼과 캘리번은 각각 프로스페로의 정신과 육체를 상징하는 것이라는 해석을 봤었는데, 이게 근대 들어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기 시작한 시대적 분위기의 반영이었던 것이었구나. 단편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이 연결되면 재미있기도 한데, 하나를 알기 위해서 다른 많은 것을 알아야 진정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좀 답답해진다. 공부라는 것은 (사실 시작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역시 끝이 없다.



인색함, 신중함, 책임감, 자기통제 같은 '이성의 힘'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방탕함, 게으름, 생명 에너지의 체계적인 탕진 같은 '육체의 저급한 본능들'이 있다.


3장 196쪽


어릴 적부터 '이성은 다른 동물에게는 없고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것' 이라는 말, 혹은 '인간만이 말을 할 수 있다'는 말을 보면 의문이 생겼다. (요즘은 별로 이런 이야기를 책에서 하지 않는 것 같다) 다른 동물에게 이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인간이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정말 확인해보기는 한 건지 궁금했다. 보면 생김새 말고는 별로 아는 게 없는 것 같던데 말이다. 나중에 데카르트의 말을 보고 그게 어디서 왔는지를 알게 되었고, 여전히 오만한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인간은 자연과 선을 그었고, 거리낌없이 자연을 이용하고 파괴해 왔다.



막스 베버에 따르면 신체의 개혁은 부르주아 윤리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부의] 획득을 필요충족을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삶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3장 197쪽


3장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문장은 이 문장이었다. 막스 베버를 읽어보지 않아서 (마르크스도 안 읽었고, 미셸 푸코도 안 읽었고, 막스 베버도 안 읽었는데 이 책을 같이 읽자고 한 것이 참 무모했다는 생각이 계속 든다. 부끄럽다.) 페데리치의 문장만 읽고 하는 생각임을 미리 밝혀둔다. 물론 자본주의에서는 필요한 부 이상의 부를 계속 축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부의 획득을 '삶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여긴다니? 이건 개인 차원이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체제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자연스런 삶의 즐거움을 우리에게서 박탈하고자 하며 (베버의 말 - 그가 얘기했던 자연스런 삶의 즐거움이란 뭘까?), 농업 사회에서 태양, 계절적 순환에 관계되었던 노동일을 좀더 기계적이고 규칙적으로 바꾸었다. 노동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에 정해진 시간 출근하여 퇴근하게 되었고, 노동자 양성을 위해 학교라는 시스템도 만들어졌다.



어릴 때는 학교에 개근상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성적이 좋아 받는 우수상 보다도 칭찬받아야 할 것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 나는 수두로 일주일간 결석을 해서 초등학교 때 개근상을 받지 못했는데, 6년 개근상을 받는 아이들을 부러워했다. 내가 일부러 빠졌던 것도 아닌데.. 전염병이라서 못 간 거였는데. 감기에 걸려도 꼬박꼬박 학교에 가고 출근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한국 사람들을 서양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당황했다. 감기로 죽을 수도 있는데, 감기에 걸렸으면 쉬어야지, 그리고 다른 사람한테 옮기잖아. - 아! 정말 그렇네. 요즘 학교는 개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고 (아마 그런 상도 없지 않을까) 코로나 시대를 거치고 나면 아픈데도 학교에 가는 것은 오히려 민폐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형성될 것 같다.



자연과 이성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은 노동이 노동자의 신체로부터 분리되어 상품으로 변형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노동자는 한정된 시간 동안 자신의 노동력을 구매자의 처분에 맡길 수 있다.

이는 '그가 자신의 노동력을' (자신의 에너지, 자신의 능력을)

"꾸준히 자신의 자산이자 자신의 상품으로 간주해야만 한다"는 의미가 된다.


맑스의 말, 198쪽


새삼스레 내가 지금까지 익숙하게 생각해 온 학교 생활, 직장 생활에 회의를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일정 시간을 일하고 대가를 받기로 계약한다는 것은 내 몸의 자유를 그 시간 동안 포기한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19세기 후반에는 노동자들이 이 개념에 익숙해 있었다고 하지만, 16-17세기 즉 사초축적의 시기에는 임노동에 대한 혐오가 극심하였고, 이에 대해 부르주아지는 처벌을 강화하여 노동자들을 길들이는 한편, 공중목욕탕과 선술집을 폐쇄하고 '비생산적인' 섹슈얼리티와 사교행위 등을 금지했다고 한다. 신체는 악의 근원이기도 했으나 한편 노동력의 보유고이기도 했기에 신체의 움직임과 부속기관들에 대한 연구, 해부학의 발전이 뒤따른다. 데카르트가 인간의 정신적인 영역과 물리적인 영역을 구분했듯 신체를 어떤 본질적인 목적을 갖지 않는 기계적인 물질이라고 보는 기계론적 철학은 자연계에 대한 지배계급의 통제를 강화하는데 기여하여 인간본성에 대한 통제가 최우선적이며, 가장 필수불가결한 단계가 되도록 만들었다 (206쪽). 데카르트는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자기 관리를, 홉스는 국가 차원에서 개인의 종속을 이야기했으나 두 경우 모두 신체를 자본주의적 노동규율이 요구하는 자동기법과 규칙성에 걸맞게 조정하는 결과를 낳았다 (207쪽). 결국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들이 정복(식민화)하려고 했던 이질적이고 위험하며 비생산적인 존재, 즉 야만적인 저 캘리번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232쪽) 이제야 3장의 제목이 왜 '대캘리번'인지, 이 책의 제목이 왜 <캘리번과 마녀>인지 밝혀졌다.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최초의 기계는

증기엔진이나 시계가 아니라 바로 인간의 신체였던 것이다.


218쪽



학교에서 데카르트와 홉스에 대해 배울 때 나는 그들의 사상에 대해 배웠을 뿐, 그것이 우리를 미래의 노동자로 양성할 목적으로 학교라는 곳에 앉혀놓도록 만들었음을 알지 못했다. 물론 그 중 소수는 지배계급이 되었겠지만, 그들 역시 자본주의라는 큰 체제 내에서 하나의 역할을 맡은 미약한 개인일 뿐이다. 지배계급에 녹아들어갈 수록 부를 '삶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여기게 되겠지. 이런 것을 알고서도 멀쩡하게 학교에 다니거나 회사에 다니는 것은 얼마나 괴로울까. 지금까지 잘 몰랐기에, 아니면 이 개념들을 연결짓지 않고 따로따로 생각했기에 크게 괴로워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살아오면서 문득 솟구쳤던 의문, 반항심이 이 이야기와 맥락이 통하는 걸 보면 무의식적으로 나의 내면에서도 이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뭔가 이상함' 혹은 의문을 계속 파고 들어가 정리해 둔 것이 철학이겠지. 나는 흘려버렸던 생각들을 이미 옛날에 다 하고 또 정리해둔 철학자들에게 새삼스레 감사하다. 살아오면서 어느 때보다도 철학이 왜 우리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또 왜 우리가 철학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절실하게 느꼈다. 지금까지 내 감정을 부정하고 '이성' 에 충실하며 살아오려고 노력했고, 서양에서 발전시킨 방법론에 의거한 과학을 공부했고 그들의 사고방식을 체화하려고 애썼기에 일과 생활에 있어서의 나를 분리하기가 어려워 좀 혼란스럽지만.



다시 책 내용으로 돌아가, 인간을 정신과 신체로 분리하고 기계적인 신체를 노동력으로 확보하고자 했던 시기에 중세 동안 교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신을 탐구하느라 바빠서 인간을 탐구할 수가 없었겠지) 대중적으로 확산되어 있었던 마법적인 세계관, 즉 중세의 '마법적인 힘을 담는 그릇'으로 인간을 보았던 개념은 타파되어야 했다. 마법은 노동을 하지 않고도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는 수단, 다시 말해서 노동의 거부를 의미했다. (210쪽) 또 마법은 규칙화된 노동과정을 불가능하게 하는 시공간에 대한 질적 개념에 근거했다. 개인에게 특수한 힘을 부여하는 우주라는 개념 또한 자본주의적인 노동규율과 양립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210-211쪽)



마녀 박해는 당시 임노동의 실질적 주체인 남성 노동자에게는 (마법적인 힘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의) 본보기가 되는, 그리고 새로운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여성을 통제할 수 있는, 그러면서도 당시 산파 등의 여성에 의해 행해졌던 낙태와 피임을 통제하여 새로운 노동력도 확보하는 획기적인 방법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드디어 4장에서는 마녀사냥 이야기가 나온다. 이 책의 주요 논지가 마녀 사냥이 여성이 가정에 종속되고 경제적 활동으로부터 소외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기에 핵심 내용인 것 같아 기대했으나, 사실 3장 만큼의 카리스마는 없었던 것 같다. 3장 너무 멋짐.



무지하면서 멋지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어 의문이 안 생긴다...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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