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월에 걸쳐 <백래시>를 읽었다. 전에 한 번 시도하다가 계속되는 예시들에 지쳐 중도하차 했었는데, 이번에는 여러분들과 함께 읽어서 완독할 수 있었을 것 같다. 뿌듯하다. 




정희진 선생님께서 8월호 '정희진의 공부' 에서 짧게 '지금 백래시라고 하는데, 한국은 그렇지 않다' (정확한 워딩 아님 주의) 라고 언급하신 적이 있다. 앞뒤 맥락과 잘 이어지지 않는 짧은 언급이었기 때문에 무슨 뜻인지 잘 알 수가 없어서 일단 <백래시>를 읽어보고 생각해보려고 했는데, 막상 읽고 다시 들어보려고 하니 8월호에서 어느 부분인지 찾기가 어려웠고 그러다보니 8월호 맞나? 하면서 은근슬쩍 포기하게 되었다. 최근 선생님 북토크에 다녀오신 잠자냥님, 그리고 돌아온 공쟝쟝님은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신 의도를 '한국은 애초에 더 나빠질 것도 없다' 라고 이해했다고 하셔서 그런가보다 하고 의문을 접었다. 이런 질문엔 선생님이 직접 댓글 달아주시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ㅋㅋ 




이런 의문을 갖고 책을 읽다보니 아무래도 책에 나오는 예시들과 한국의 상황을 자꾸 비교하면서 읽게 되었는데, 그래서 더 지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책을 읽으며 한 생각은, '백래시' 의 움직임은 한국이든 어디에서든 여성들이 각성하고 연대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있었을 것이며 특정 사회적 상황과 맞물려 더 강해지거나 약해졌을 뿐 그 위협은 (만약 위협이 된다면)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현재 상황은 어떤가 하면, 현재 한국 사회에서 '백래시'의 의도는 충만하나 효율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는 것이 내 생각이다. 여성이 이미 각성되어서 그런 것도 있고, 각종 폭력, 폭행, 살해 등 알려진 피해 사례가 너무 많아 계속 각성되지 않기가 힘들다. 물론 인터넷과 SNS가 여성들이 서로 공유하고 알리는데 큰 몫을 했다고 본다. 그러나 SNS나 인터넷은 백래시의 도구로도 활용될 수 있는데 현재 백래시는 그만큼 효과적이지 않다고 느껴진다. 




주요 언론은 여전히 답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지만, 정치권에서는 예전 (그 예전이 좀 많이 예전이다) 에 비해 여성 유권자의 눈치를 많이 보고 있다. 대선 때 젊은 여성 정치인을 영입했다는 티를 내려 애썼고, 기세등등하게 없애겠다던 여성가족부는 아직 그냥 두고 있다. 총선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일 테고, 총선 이후에는 아마 총선 결과 때문에 없애지 못하면서 계속 존속될 것으로 기대한다. 여가부에 내가 특별한 의미를 두고 있다기보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존속하기를 바란다. 이렇게 정치권이 여성 유권자의 눈치를 보는 이유는 부와 권력을 갖고 있는 자의 비율은 남성이 높다 하더라도, 투표권은 공평하게 1인 1표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 탁월하게 우세한 정치세력이 없고 다 비등비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2.4%!) 




하루가 다르게 울적한 뉴스가 양산되고 있지만, 국회에서 한 정당이 180석을 차지하고도 정치에서는 우세를 점하지 못하는 지금 한국의 상황이 여성과 소수자에겐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그렇다고 또 뽑아줄만한 사람이 잘 보이느냐 하면 그건 아니지만. 내년 총선을 위한 여러가지 밑밥이 눈길을 끄는 요즘이다. 잘 지켜본 뒤 나의 투표권을 행사하고 싶다. 




가끔 자신의 배우자와 같은 후보를 찍는다고 말하는 여성들을 본다. 나의 어머니도 그렇고, 또 내 주변에 좀 나이있는 분들은 다 본인의 배우자가 자신에게 물어보고 결정한다는 말을 하더라. 한 때는 왜 그러지? 정말 여성에게 미래는 없는 건가? 생각했지만 요즘은 다르게 생각한다. 마음에 둔 사람이 따로 있어도 당신들이 자꾸 물어보고 누구 찍을 거냐고, 자기가 미는 사람 찍으라고 하니까 속마음은 그렇지 않더라도 그래그래 하고 그 사람 찍었어- 라고 대답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가끔 뒤에서 그분들께 따로 물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여성들이 더 깨어있고 더 생각하고 고민하면 좋겠다. 그리고 실천하면 좋겠다.   



+ 다시 읽어보니 책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아 마이리뷰 -> 여성의 삶 으로 이동했다. 


<제 2의 성>이나 읽고 있는 <더이상 어머니는 없다>가 문헌 자료를 많이 인용했다면, <백래시>는 실제 있었던 사례들을 모았다. 이 책을 평가함에 있어 이 방대한 자료들을 모으는 데 들어간 노력도 고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례가 풍부하고 출처가 정확하게 인용되었다는 것이 이 세 권의 책이 다 '고전' 으로서 참고할만한 책이 되는 이유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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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3-09-25 15: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희진 선생님이 댓글 달아주신다면 아주 멋지게 해석해주셨을 것 같아요.ㅋㅋ
제 주변 지인 중 남편은 저길 찍어도 부인은 여길 찍으시는 분이 있어요. 그래서 투표한 다음 날 아침 개표상황 결과에 따라 그 날 하루의 분위기가 엄숙해진다는군요.
다른 집은 부부라도 어디 찍었냐고 물으면 묻지마! 비밀투표야! 라고 대답하는 부인도 있구요.ㅋㅋ
<백래시>는 다양한 범위를 다루고 있어서 참 놀라웠네요.

건수하 2023-09-26 09:18   좋아요 1 | URL
희진샘과 댓글을 나누기엔 아직 저의 내공이.. ;ㅁ;

각자 알아서 찍는 게 맞지요! 근데 꼭 남편따라 찍는다는 분이 계시고 그걸 자랑스럽게 얘기하시는 남성분들이 있더라구요.. 전에는 정말 그런가보다 했는데, 요즘 페미니즘 책을 읽으며 오랜 시간동안 인내해 온 여성들의 이야기를 보니 꼭 100% 다 그런 건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ㅎㅎ

부부가 정치성향이 잘 맞는 것도 함께 살기에 참 중요한 요건인 것 같아요.

<백래시>는 여성학 공부를 한다면 두고두고 찾아보게 될 것 같습니다 :)

거리의화가 2023-09-25 16: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여성들이 지금의 현실의 문제가 무엇인지 깨닫는 과정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수하님 말씀처럼 선거 때 누가 나왔는지 공약이 무엇인지 꼼꼼히 따져보는 것이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첫 걸음이겠네요. 누구 말 따라가는 것은 이제 그만했으면!ㅎㅎ
<백래시>는 나중에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사례가 들어있는 책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ㅠ

건수하 2023-09-26 09:25   좋아요 1 | URL
사실 지역구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는 경우가 많지요... 정당별 비례대표 부분에나 적용이 가능한데 한국에서는 비례대표 비율이 적어서 아쉽습니다. 선거제도 개편 얘기는 나온지 오래지만 두 거대정당이 관심이 없어서 말이죠..

어쨌든, 평소에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지켜봐야 총선 때도 소신있는 선택을 할 수 있으니 좀더 안테나를 세워봐야겠습니다. 한동안 어떤 여성 정치인을 후원하고 있었는데 최근 후원을 중단했고요, 요즘은 다른 여성 정치인을 눈여겨 보고 있습니다 :)

한국의 사례 정말 중요하고 필요하죠. 요즘 <여자를 모욕한 걸작들> 읽고 있는데 8 작품 중 한국 작품이 하나 있어서 (정희진 선생님이 쓰셨어요) 반가웠고, 한국의 이야기를 써야 한다고 하시던 선생님의 실천에 기뻤습니다. 우리가 이야기하고 쓰고 하는 것도 은연중 아주 미미하게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어요..


독서괭 2023-09-25 20: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평가할 때 그 노력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게다가 방대한 자료를 재미있게 잘 풀어낸 글 솜씨까지.. 👍
우리나라 분석도 따로 읽어보고 싶은데 <백래시 정치> 를 일단 담아두고만 있네요~

건수하 2023-09-26 09:28   좋아요 1 | URL
사실 자료를 모으는데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들어갔을 텐데 감사의 글에만 잠깐 등장하는 그 사람들이 조금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
맞아요, 시니컬하면서 적당한 완급조절도 일품이더라고요.

연휴를 맞아 <백래시 정치>를 상호대차 해두긴 했는데, 이건 정치에 한정한 것이니 느낌이 좀 다를 것 같기도 합니다. 과연 읽을 수 있을것인가 :)

은오 2023-09-26 23: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마지막 문단 수하님과 같은 이유로 오별을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에필로그까지 읽으면 진짜 감동과 감사가 밀려오더라고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