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들 그렇듯 러스트벨트라는 단어를 트럼프가 대통령이 될 때쯤에 처음 알았다. 그들은 트럼프가 재선에 실패했을 때 또 한 번 회자되었다.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산업 쇠퇴, 그리고 펜실베니아의 조선소 폐쇄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에서 보고) 에 대해서만 대략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러스트벨트가 여러 주에 넓게 걸쳐져있다는 걸 알게 됐다. 더불어 이리 호가 그렇게 심하게 오염된 이유도. 



<러스트벨트의 밤과 낮>을 읽기 전 나는 그 동네에 사는 사람들,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뽑은 사람들에 대해 알 수 있겠거니 생각했다. 그 사람들이 왜 자신의 이익에 그다지 도움이 안될 것 같은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은 이유에 대해서. 그건 뭐 미국만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일어나는 일이지만 말이다. 이명박, 박근혜, 그리고 윤석열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부자를 대변하는 정치인을 대통령을 뽑은 서민, 기성세대를 대변하는 정치인을 뽑은 청년들 등등이 얼마나 많았는가. 그들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그것에 대해서 알 수 있을까 기대했다. 또 언젠가는 그 사람들도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트럼프는 우리의 회복력을 보는 대신 우리를 찌부러뜨려 최악의 면을 도드라지게 했다그는 산업 노동자를 몰락한 자로 여겼고 몰락이 우리의 유일한 정체성이라고 우리 스스로 믿게 했다그는 우리의 불안을 감출  있는 희생양과 분노의 대상을 제공했고그로써 그가   권력을 탐하는   명의 부유한 권력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보게 했다.



그들이 나를 정형화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도 그들에게 똑같이 대했다. ... 나의 적대감이  나라를 갈라놓은 금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균열은 정당과 경제  이상이었다그것은 국회와 백악관을 넘어섰으며 우리의 주급과 직책을 넘어섰다 균열은 인간의 약점에서 태어난 것이었다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는 법을 잊어버렸다우리는 경계를 풀었다우리는 눈을 감았다그러자 장막과 환상을 짜는 이들이 나타나 우리 자신이 초래한 암흑을 알아보았다그들은 우리를 사리 판단에 어두운 장님으로 믿고 우리의  눈을 신중하게 가렸다우리  누구도─철강 노동자들도 변호사들도─다시는 세상을 환히   없기를 바라면서




분명 내가 궁금해했던 부분과 관련된 부분도 있었지만 그런 부분이 많지는 않았고.. 이 이야기는 결국 한 여성의 개인 서사였다. 개인을 이루는 여러 특징들, 러스트벨트에 사는 백인, 여성,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 (제철소 노동을 할 수 있을만큼) 육체적으로 건강한 사람 (앨리스는 학창 시절 육상 선수였다), 그러나 정신적으로는 양극성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 성폭행의 경험으로 고통받는 사람, 밀레니얼 세대 ... 등이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조금씩 드러났다. 요즘 이런 소재들을 조금씩 버무려둔 소설들이 많은데, 소설을 읽을 때는 조금 억지스럽다는 느낌도 들었고 거부감이 들었다. 그러나 이런 특징들이 실제 한 개인을 구성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자, 소설들을 읽을 때 억지스럽다 생각했던 것이 좀 부끄러웠다. 개인을 구성하는 이런 요소라는 것은 하나하나 떼어서 볼 수 있는게 아니니까. 이것들이 다 모여서 한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거니까. 물론 이런 요소들은 삶의 과정에서 큰 사건을 계기로 변화하기도 한다. 




앨리스 콜레트 골드바흐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공화당을 지지하는 집안에서 자랐으며 수녀가 되기를 꿈꾸었고 대학생 때는 임신중단 반대 집회에 나갔다. 그 집안에서 페미니즘은 죄악이었으며 '로 대 웨이드 사건' 판결은 미국을 멸망시킬(!) 징조였다. - 그녀의  부모님에 의하면 '로 대 웨이드 사건' 으로부터 70년 뒤, 그러니까 2043년 미국은 멸망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민주당 지지자가 되었다. 

(앨리스의 부모님이 민주당 지지자에 대해 가지고 있는 여러 이미지가 있었는데, '요가를 한다' 에서 조금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요가가 뭐 어떻다고... '마약을 한다'와 가까이 있었으니 아마도 70년대 히피들을 생각한 것 같다)



앨리스는 가톨릭 계열 대학에 다녔고 그 대학의 남학생 두 명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신뢰할 수 있는 여학생에게 상담을 했더니 피가 났는지를 물어보며 '하룻밤에 남자애 둘과 섹스를 했다면 고해를 해야할 것 같다'는 조언을 들었다. (고해를 해야 하는 이유가 피가 안 났다는 부분일까, 섹스를 했다는 부분일까, 아니면 하룻밤에 남자애 둘과 했다는 부분일까?) 고해를 하니 신부는 '성적 방종' 이라며 '여성으로서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고 했다.  



나는 안다여자들이 너무 오랫동안 남자들의 짐을 짊어지고 왔다는 것을오랜 세월 여자는 본성에 결점이 있는 요부로 묘사되었다여자는 남자를 죄로 인도하는 무절제의 화신이다아담이 사과를 먹은 것은 오로지 이브가 사과를 먼저 먹었기 때문이다에런과 벤이 나를 이용한 것은 내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고성폭행당한 죄를 용서해준 신부님은 언젠가 성인으로 추앙될 것이다사과를 먼저 먹은 것은 이브였다사과에는 선악에 대한 앎이 들어 있다아담이 선악의 차이를 말해주지 않으리란  이브는 미리 알았던 것이다.



선악의 차이를 아담은 잘 알고 있었을까? 신부님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은데...



고해를 하고 죄를 사함받았지만 불안은 수그러들지 않아 심리 치료사를 찾아갔고 거기서 앨리스는 비로소 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강간당한 거라고. 그래서 학내 위원회에 두 남학생을 성폭력으로 고발했고, 절차를 밟았다. 교수와 학생 (여학생 한 명, 남학생 나머지) 으로 구성된 위원회는 앨리스를 그날 밤의 상황이 아닌 평소의 행실로 판단했고, 그 흔한 '거부 의사를 밝혔는지' 에 대해 명확하게 답변을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남학생 중 하나가 약을 먹였기 때문이다) 합의하에 이루어진 성관계로 판단했다. 



이후 앨리스는 신앙에 회의를 가지기 시작했고, 양극성 장애 증상이 시작되었다. 석사학위 수여와 관련된 간단한 서류처리를 몇 년씩 미루고 할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였다. 그 괴로움에 경제 위기도 한 몫 거들었다. 



원하는  뭐든지   있어어른들은 어린 나에게 말했다꿈을 꾸면 이룰  있어 또래들은 어린 시절에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고그중 많은 이들이 세상을 바꾸겠다는 꿈을 꾸었다우리는  세상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기를 원했지만─한때 내가 수녀원과 교실에 그토록 매료된 이유이기도 했다─현실은 어린 시절 우리가 세운 원대한 포부에 부응하지 못했다.



고등교육을 받았음에도 페인트공으로 생계를 이어가다가 어릴 때부터 벗어나고 싶어했던 클리블랜드의 상징, 제철소에 취직하게 되었다. 



안전모가 상징하는 바를 소중히 여겼지만 안전모가 내 삶에서 의미하는 바가 두렵기도 했다. 나는 나의 어린 자아가 시도했던 것에 한참 못 미칠 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의 그 소중한 이상을 추구하고자 하는 의지마저 상실했다. 세상을 바꾸려는 희망은 더 많은 급여를 바라는 희망으로 바뀌었다. 나의 잠재력에 대한 믿음은 시들었다.



강도높은 노동과 위험한 노동 환경은 만성적 피곤함 그리고 정신적 스트레스를 가져왔고, 양극성 장애가 더해져 남자친구와의 관계도 악화시켰다. 



병은 판단력에도 영향을 미쳤다. 개인적 과실과 정신 질환이 어디에서 시작하고 끝나는지 구분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  병으로 인한 최악의 충동은 나를 스스로도 이상 알아보지 못하는 낯선 사람으로 바꿔놓았다




아래 문장은 그녀가 자신의 상황을 얼마나 혼란스러워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내가 자살하려고 하는 것은 죽고 싶어서가 아니란 일순간 깨달았다. 내가 자살하려고 하는 것은 살아가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었다의미 없는 돈을 가져다주는 일을 하면서 만족을 찾는 법을 몰랐고, 나를 지킬박사와 하이드로 분열시킨 병을 다루는 법을 몰랐고, 어린 시절의 꿈을 제철소라는 현실과 화해시키는 법을 몰랐다.




결국 그녀는 살아가는 법을 알아냈다. 월급이 많지만 보람을 느낄 수 없는 일을 그만뒀고, 병을 관리하게 되었고, 자신의 꿈을 쫓기 시작했다. 



앨리스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의 삶은 어떤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는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고 어떻게 바꾸어왔는지. 그다지 적극적으로 바꿔오지는 않았고 <행복의 약속>에서 언급된 비관주의에 입각해 뭔가를 피하는 방식의 선택을 많이 해 왔다. 



요즘 2-30대 여성 우울증을 다룬 <미괴오똑: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을 읽고 있다. 이 책에서 우울증을 앓는 여성들은 가정 폭력, 성폭력,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접하는 폭력에 노출된 경우가 많다고 했다. 우울증은 자신이 가졌던 세계에 대한 환상이 깨질 때 필연적으로 온다고 했다. 양극성 장애와 우울증은 다르고 그 원인도 다를 수 있겠지만.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일들을 겪을 때 인간이 멀쩡할 수 없는 건 당연하다. 비슷하게 아픈 사람들이 많다면 원인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것일 가능성이 높다. 



페미니즘을 알게 되고 나의 정신적 고통이 사회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이름붙일 수 있었다. 또 공동체에서 받는 정서적 지지는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나의 개인적 이야기는 어쩌면 사소하기도 하고 별로 말하고 싶지 않기도 하다. 그런데 이제는 자꾸 써야하는 이유를 알겠다. 이 책이 소설이 아니라 실화라서 더 가깝게 느껴졌다는 점은 조금 부끄럽지만,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실화라는 게 어쩌면 중요한 것 같다. 그래서 나의 생각 나의 이야기를 더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밀레니얼들의 이야기에 더 귀기울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리 멀지도 않아서) 내가 가장 오랫동안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이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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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5-29 08:26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읽느라 고생흐셨고 덕분에 이 리뷰도 잘 읽었습니다. 책을 다시 한 번 읽으며 정리하는 느낌이에요. 또한 제가 책을 읽으면서 전체보다 부분에 집중힌다는 생각도 들어요. 전 이렇게 총괄적 정리를 하지 못해서 말이지요. 함께 읽어 좋았습니다!

얄라알라 2023-05-29 13:00   좋아요 2 | URL
다락방님, 수하님, 완독 축하드립니다

맛집 리뷰가 아무리 좋은 들, 내가 직접 가서 먹어보지 않은 음식에 엄청 호응하기 어렵듯
이 책은 저도 직접 읽었던지라, (물론 세부 기억은 가물하지만) 두 분의 리뷰 읽으면서 ˝함께 읽기˝의 든든함을 다시금 느끼었습니다^^

건수하 2023-05-29 17:55   좋아요 3 | URL
이 책은 정말 전체를 다 볼 수 밖에 없는 책이었던 것 같아요. 잘 읽히면서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책이었어요.
5월에는 기한 안에 읽어 더욱 뿌듯합니다 ^^

건수하 2023-05-29 17:57   좋아요 1 | URL
얄라알라님 이미 읽으셨군요 ^^
함께 읽기의 든든함이 참 매력적입니다.

댓글 남겨주시니 힘이 나네요. 또 열심히 읽고 쓰겠습니다.

독서괭 2023-05-29 17:3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이달의 당선작으로 추천합니다!! 러스트벨트 이 책 이런 내용이었군요. 와닿는 부분이 많이셨던 것 같고. 저도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성폭행 당하고 주위 반응 진짜 어휴…🤬🤬🤬

건수하 2023-05-29 17:58   좋아요 1 | URL
이 달의 당선작 씩이나요... 그럴리 없다 생각하지만 괜히 신이 나네요 ㅎㅎ
독서괭님도 언젠가 꼭 읽어보시길. ^^

햇살과함께 2023-05-30 1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하님, 멋진 리뷰 잘 읽었어요~
저도 저 문장,, 자살하려는 하는 것이 죽고 싶어서가 아니라 살아가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라는 문장이 맘에 많이 남더라고요.
살면서, 어떻게 살아야할지 몰라서 죽고 싶다고 생각할 때(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가 있으니까요...

건수하 2023-05-30 14:31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저 문장 읽고 그렇구나- 했었어요.
어찌보면 진부한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작가의 솔직함 그리고 시간순이 아닌 구성이 이 책을 특별하게 만든 것 같아요.

책먼지 2023-05-31 10: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성폭행 당했는데 고해하라는 부분 읽다 모니터 부술 뻔했어요.. 어우 수하님 이 글 정말 좋네요ㅠㅠ 저는 미괴오똑 읽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읽기를 중단했는데 인터뷰이들의 경험이 각기 개별적이지만 어떤 부분들은 저와 소름끼치게 비슷해서 더 읽으면 돌이킬 수 없이 휩쓸려 들어갈 것 같더라고요ㅠㅠ (예를 들어 나는 죽도록 멀쩡한 척 하느라 의사 앞에서도 최선을 다해 멀쩡한 척 하는 거고 의사도 사람이니까 상대를 배려해서 행동하는 건데 이 정도면 괜찮은 거라고 무시하는 듯이 말할 때 진짜 순간 내가 이 사람 앞에서 죽어버려야 내가 안 괜찮은 걸 알까 충동느낀 적 있어요. 그런 비슷한 이야기들이 미괴오똑에도 나오더라고요) “비슷하게 아픈 사람들이 많다면 원인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것일 가능성이 높다”에 밑줄 긋습니다!!!

건수하 2023-06-01 15:03   좋아요 1 | URL
성폭행에 고해라니 정말 이게 무슨 중세시대도 아니고 ㅠㅠ

미괴오똑 읽기가 좀 힘들었는데, 그래도 좋았고 하미나 작가가 더 책을 내줬으면 하고 있어요.
인터뷰이들의 이야기가 각자 다르지만 모이는 부분이 있었어요.
후기는 잘 못 쓰겠어서 다시 한 번 읽어보고는 있는데... 그냥 못 쓰고 넘어갈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