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밑줄 등 정리를 하지 않았지만,
조지 엘리엇과 에밀리 디킨슨 부분은 좀 남겨둘까 싶어서...
13-14장은 조지 엘리엇의 작품을 별로 읽지 못한지라 알쏭달쏭했다.
<벗겨진 베일>과 <미들 마치> 축약본만 읽었기에..
마음에 남는 부분들을 옮겨본다.
성직 생활의 미덕에 대해서 쓰려고 하는 불가지론자로서, 아내의 봉사를 찬양하는 ‘타락한’ 여자로서, 모성을 찬양하는 아이 없는 작가로서, 여성적 감수성을 기꺼워하는 의미로 자신이 ‘삶에서의 실험’이라 불렀던 것을 쓰는 지성인으로서, 엘리엇은 모순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엘리엇은 정확하게 스토우의 글에서 부족한 것 (‘무서울 정도로 비극적인 요소(…) 억압받은 자의 악에 도사리고 있는 보복의 여신에 대한 묘사’)을 풀러가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풀러를 칭찬했다. 그럼에도 엘리엇은 억압받은 자의 미덕을 그린 스토우에게도 이끌렸다.
각각의 여주인공이 자신의 분노를 누르고 체념의 필요성에 순종하는 동안, 작가는 네메시스가 되어 그 여주인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그의 창조자를 ‘위해서’ 행동했던 방식이나 버사 메이슨 로체스터가 제인 에어를 ‘위해서’ 행동했던 방식과 똑 같은 방식이다. 따라서 <성직 생활의 장면들>에서 미친 여자는 바로 소설가 (남성 화자로서가 아니라 장면들 뒤에 있는 여성 작가로서) 라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
샬롯 브론테가 저항했던 모든 부정적인 전형이 조지 엘리엇에 의해서 미덕으로 전환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브론테는 여자가 지적인 발전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저주하는 반면, 엘리엇은 지적인 결핍이 가져올 무서운 효과를 인정한다. 하지만 그 때문에 감정적인 삶이 여자에게는 더 풍부해진다는 점 또한 암시하고 있다. 브론테는 자기주장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반면, 엘리엇은 남성적인 경쟁 대신에 후원해 주는 동지애에 기반한 고유한 여성적 문화의 미덕을 극화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여자들을 ‘하나의 작은 방’ 에 계속 머물게 하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데 이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지만, 그것은 또한 남성적 가치를 비판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엘리엇은 영국이 산업화-도시화된 결과 잃어버릴 위험에 처했다고 생각하는 특징들을 여자들과 관련시키고 있으며, 이는 엘리엇 소설의 보상적-보수적인 측면이다. 그 특징들이란 타자에 대한 의무, 공동체 의식, 자연에 대한 이해, 그리고 양육하는 사랑에 대한 믿음이다.
엘리엇은 지식을 추구하고 “남자의 정신과 여자의 마음”을 결합시키는 전통적으로 남성적인 임무를 여자의 방식으로 수행하면서, 젠더에 기반한 범주들을 부적절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자아의 한계와 문화 정의를 뛰어넘어 획득한 이러한 성취는 관습적인 역할을 강요당하는 여성 인물들의 현실을 바꾸어 놓지 못한다.
엘리엇은 여성들에게는 분노에 소진되지 않고서도 그 분노를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애써 보여 주고자 하는 스토우의 의도를 간파하고 있다. 스토우는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서 강제 없는 포용을 추구했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의 마지막 장을 지배하는 미친 노예는 버사 메이슨 로체스터나 버사 그랜트보다도, 그리고 도로시아 캐서본이나 로자몬드 리드게이트보다 더 성공적으로 여성적 보복을 자행하고 있다. 엘리엇이 <미들마치>에서 분노를 넘어서서, 초기 작품에서 드러나는 남성 역할의 전유를 넘어서서 작업하고 있듯이, 스토우 역시 <톰 아저씨의 오두막>에서 여성적 해방의 고유한 형태를 그리고 있다.
샬롯 브론테가 남성과 여성이 모두 동등할 수 있기를 바라며 개인의 삶에서 해결책을 찾으려 하다가 좌절했다면, 조지 엘리엇은 남성과는 다른 방식의 삶, 여성이 추구할 수 있는 삶, 그리고 여성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해결책을 찾고자 했던 것 같다.
1800년대에 이 작가들이 했던 고민은 지금 여성들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굳이 따지자면 샬롯 브론테의 소설에 더 공감하지만.. 페미니즘에 대해 알아가면서 조지 엘리엇이 하던 것과 비슷한 고민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나의 삶이 나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지만 자본주의, 가부장제와 같은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니까.
조지 엘리엇에 대해서는 아직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다른 작품들, 그리고 조지 엘리엇이 관심을 가졌던, 여성적 해방의 고유한 형태를 그렸다는 해리엇 비처 스토우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다시 읽고 더 생각해봐야겠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은 어제 읽기 시작했는데, 어릴 때 분명 읽었지만 (축약본이었을지도), 느낌이 많이 다르다. 마음을 콕콕 찌르는 대사가 엄청 많다. 마거릿 풀러의 글은 번역된 것이 아직 없어 아쉽다.
전에 <예술하는 습관>과 <글쓰는 여자의 공간>에 해리엇 비처 스토우가 있었던 것 같아서 찾아보았다.
<글쓰는 여자의 공간> 이 개정되어 새로 나왔네? 사야겠다.
1월 3일이니 1월 책도 슬슬 넘겨봐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