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만화 관련 리스트를 만들다가 느낀 건데, 요새는 왜 이렇게 '완전판'이니 '애장판'이니 하는 이름이 붙어 나오는 만화들이 많은 건지 원.. 이 심각한 출판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잘 팔렸던 책들을 다시 한번 팔아보고자 하는 출판사들의 궁여지책이란 건 알겠지만, 옛날 버전으로 다 있는 책들이 저렇게 새 꼬까옷 입고 짠~ 다시 나타나면 심한 갈등에 빠지게 된다. 저걸 사, 말어? 그럼 지금 있는 건 버려? 나란히 꽂아?
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내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건 사람을 우롱하는 처사라고밖에 볼 수 없다. 옛날에 살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포기한 책들이라면 선뜻 다시 손 내밀 수도 있겠지만, 그 옛날 만화책은 사서 읽는 게 아니라 빌려서 읽는 거란 의식만이 사회 전반에 팽배하던 그 시절에도 종로 6가니 청계천이니 어렵게 돌아다니며 배낭 가득 지고 이고 사다 날랐건만, 그때 그 어렵게 구해 손때 묻도록 들쳐보던 만화책의 후줄근한 외양을 비웃는 듯한 번쩍이는 표지와 빳빳한 내지와 화려번쩍한 금박 제목과 몇 겹으로 접혀 있는 칼라 브로마이드 등을 내세워 다시 사람을 유혹하다니!!! 아, 어찌 속 뒤집히지 않겠는가 말이다.
'애장판'이란 이름을 달고 처음 나온 애들은 <유리가면>과 <캔디캔디>라고 기억한다. 그래, 얘네들은 이해할 수 있다.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온갖 수상한 유령회사에서 갖가지 버전의 해적판들만이 난무했을 뿐 진짜 제대로 된 라이센스판을 거의 볼 수 없었던 책들이니까 '아, 이제야 니들이 한국 땅에서 제대로 빛을 보는구나. 암, 진작에 이랬어야지.' 하며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근데 사실 '애장판'이란 이름이 아깝게 편집도 이상하고 종이 질도 별로였지만.. -_-)
헌데, 얘네들이 장사가 좀 되고 나같은 사람들이 열심히 찾기 시작하니까 만화 출판사들 마음이 슬슬 달라지기 시작한 거다. 아, 이쪽이 장사가 되는구나.. 하면서 너도나도 발벗고 나서서 작가들을 쫓아다니며 그 옛날 고리짝 원고들을 다시 손봐 '애장판'이란 멋진 포장을 한겹 덧씌워 세상에 선보이자며 꼬드겼다. 그리고 성업중이신 수만 개의 대여점들 덕분에 돈냄새 맡아보기 힘든 우리 작가님들, 그런 유혹을 어떻게 거부하겠는가. 덕분에 십여 년이 넘게 절판 상태였던 만화책들이 줄줄이 다시 시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 오랜만에 잊혀졌던 그 제목들을 다시 대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지만, 그런 생각은 잠깐, 이제는 아주 '애장판' '완전판' '소장판'에 질식해 돌아가실 지경이다. 나온 지 몇 년 안 되고 인기도 별로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 애들까지 포장만 바꿔서 가격을 2~3배씩 올려 붙여놓다니. 장삿속도 어느 정도라야 적당히 호응을 해주는 거지, 너무 빤하면 짜증스럽지 않던가.
하지만 이 와중에서 시니컬한 내 마음을 사르르 녹여준 하나의 '애장판'이 있었으니 바로 <닥터 스크루>! 거의 10여년 전에 대원에서 나왔던 전체적으로 파란색 색감의 표지를 덮어쓴 <닥터 스크루>를 기억하시는지? 동물을 별로 안 좋아해 그런 소재로는 처음 보는 거였는데, 정말 한눈에 숑~ 가버렸다. 근데 문제는 내가 그 책을 접한 게 시기가 조금 늦어 이미 시장에 나와 있던 책들이 거의 사라져버린 상태였던 것. 해서 아무리 사방팔방 발이 닳도록 돌아다녀도 12권 전체를 사모으는 게 불가능했다. 해서 궁여지책으로, 당시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던 친구와 출판사 북페어를 찾아갔다. 그리고 담당자를 붙잡고 간절히 재판해 줄 것을 애원했으나, 냉정한 담당자 왈 "찍은 거 겨우겨우 다 팔아치운 상황이기 때문에 재판은 더 이상 없을 것!"이란다. 엉엉. 그 후에도 몇 달 간격으로 출판사에 전화를 걸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문의했지만 단 한번도 희망적인 대답을 듣지 못했고 거래(?)하던 만화 총판점들에도 다 말을 해놨지만 구하지 못해 완전히 희망을 포기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어느 게시판에선가 본 <닥터 스크루> 애장판 출간 소식!!! 오옷, 내 눈이 제대로 보고 있는 거 맞나? 그리고 다시 몇 달을 더 기다려 마침내 손에 넣은 꿈에 그리던 <닥터 스크루>. 판형이 커져서 옛날의 아기자기하던 느낌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쓸어보고 품어보고 핥..아보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정말 훌륭한 판단을 내려준 출판사에 감사한다. 으하하. (근데 <닥터 스크루> 애장판 앞의 몇 권은 나오자마자 품절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그렇게 잘 팔리는 책을 왜 몇 년씩이나 다시 찍지 않았던 건지 원.. 물론 그것도 다 출판사의 계산이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애장판'과 '완전판'의 홍수 속에 파묻힌 요즘이지만, 나름대로 이렇게 덕을 보기도 했으니 그냥 참아줘야 할까? 하긴 안 참으면 니가 어쩔 건데?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