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씨네21에서 본 기사 타이틀에 '멜로박약 장진'이라는 웃긴 말을 넣었다. 그 말이 틀린 건 아니라 생각한다. '간첩 리철진'에서는 리철진과 그가 머무는 집주인인 고정간첩의 딸과 사랑하는 마음을 불꺼진 화장실에서 서로의 손을 맞대는 걸로 표현했고, 그 장면이 조금씩 작아져 스크린 안으로 사라지는 방식을 택했었다. 그 장면이 그 영화의 명장면(내가 뽑은)이긴 하지만... 장진은 이상하게 자기 영화를 꼭 '15세 관람가로 만든다. 적극적인 애정표현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해서겠지.
이 영화를 요점정리해보고 싶다.
1. 핸드헬드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이 쓰였다.
씨네21 기사를 보니 정확한 데이터를 뽑지 못해서 그런 시행착오를 겪었다고... 원래 그리 많이 흔들려는 게 아니었다네. 의도가 어땠든 재밌고, 신선하다.
2. 전작들에 비해 상당히 조용하다.
전작들에서 보여준 좌충우돌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많이 없어졌다.
의사가 남의 사진으로 3개월 밖에 못 살 거라는 실수를 한 거 외에는 그리... 코미디가 많이 줄어든 것 같다. 그래서 조금 아쉽다. 웃긴 장면이 몇 개 더 있긴 했지만, 정말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놓치기 어려워 숨은그림 찾기 하는 것 같았다.
3. 여전히 키스신은 없지만, 더 발전한 것 같다.
'혈통있는 전봇대'란 영화 얘기.. 참 재밌었고, 장진스러웠던 것 같다. 사랑이 뭔지도 모르고, 의사가 3개월 밖에 살지 못할 거라는 말 때문에 실의에 빠진 동치성에게 10년을 짝사랑해온 한이연이란 여자가 있다니... 한이연의 이름도 모른 채 후반부까지 끌고 온 게 대단해 보였다. 그나저나 장진은 전봇대를 꽤나 좋아하는 것 같다. '기막힌 사내들'에서도 전봇대가 대화나누는 장면이 있었던 것 같은데...
4. 지르는 장면에 대한 내 생각
'킬러들의 수다'에서는 막내(원빈)가 형(신하균)이 그 여잘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울부짖는 장면이 있는데, 그 장면은 상당히 웃겼다. 그 장면의 인물배치, 표정 등이 잘 어우러져 관객들이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와닿는 게 좀 적었다. 우습다기보다 "저 두사람 왜 저러지?"하는 생각이 앞섰고, 그 여자의 울부짖음 때문에 공을 받지 않고 넋을 빼고 있는 동치성도 솔직히 와닿지 않았다. 차라리 횡단보도에서 사고났을 때의 판타지가 훨씬 좋다.
5. 화이에서 이연으로...
씨네21에 장진과 인터뷰한 기사가 있어서 잠시 인용. --- 가장 큰 변화는 장진의 시나리오에서 늘 등장했던 ‘화이’가 증발하고 ‘이연’이란 여자가 나타났다는 거다(<웰컴 투 동막골>의 여자주인공 이름도 이연이다). 물론 단순하게 보자면 이름일 뿐이지만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은 그 캐릭터가 가지는 속성과 느낌, 여성상 역시 변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나. ‘화이’라는 어감이 자꾸만 몽롱해져간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젠 화이라는 이름을 못 쓰겠다. 꿈에만 있는 여자 같고, 허무맹랑한 여자, 현실에서 만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자꾸만 든다. 대신 이연이는 내가 만났던 사람 같은 ‘아는여자’의 느낌이다. (웃음) 물론 화이가 그랬듯 이연 역시 내가 원하고 내가 좋아하는 여자에게만 쓰일 이름이다.
그랬군. 난 제목과 연관이 있는 이름인가 했더니... 장진도 나이를 먹어가는 것 같다.
6. 주제를 잃지 않는 일관성 있는 감독
장진은 매번 약간은 감동적으로, 약간은 코믹하게 영화를 끝맺는다. 뭔가 생각할 거리를 주고, 자연스럽게 마지막까지 끌고 오는 그의 능력이 부럽다.
7. 안경 쓴 형사, 메가폰을 잡는 감독
A4지로 얼굴을 가리고 비스듬히 앉아 말을 할 때 느낌이 좀 수상하다 했더니, 얼굴을 손으로 반쯤 가리고 말하는 다음 장면에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나 능청맞아 보이던지... '킬러들의 수다'에 비해 얼굴이 꽤 나이들어 보이긴 했지만 정말 웃겼다. 난 그가 나오는 것만으로도 웃긴다.
'킬러들의 수다'를 보고 나오며 굉장히 만족스러웠고, 그의 다음 영화를 기대했다. 그 영화는 그의 영화 중 가장 돈이 된 영화였고, 장진스럽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아는 여자'는 전작에 비해 상당히 조용해져서 좀 생뚱맞아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 같은 팬이 그에게 걸고 있는 기대치를 저버리지 않은 것 같아서 기분은 좋다.
지난 6월초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갔는데, 보고 싶은 영화들은 죄다 말쯤 개봉하는 걸 보고 실망했었다. 그 중 이 영화도 있었다. 버뜨, 김선일 사건 때문에 시국이 뒤숭숭해서 예상만큼의 흥행은 못했다지. 아쉽다. 다시 장진의 다음 영화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