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 예전에 병원 관련 일을 했었다. 2002년 그 곳에 3개월인가 새로운 의사가 근무했었다. 키는 약간 큰 편이고, 얼굴은 허여멀쑥했으며, 꽤 말라 걸을 때 배를 중심으로 반으로 접히지 않을까 우려스러운 몸매의 소유자였다. 그렇다고 외모가 보기 싫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난, 좋아 보였다.
그 사람은 나와 충분히 친해지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과는 거의 어울리지 못하고 걸핏하면 내 방에 왔었다. 라디오 안테나를 잡아빼도 전파가 잘 잡히지 않아 즐겨듣는 CD를 갖고 다녔었는데, 그 CD들을 들으며 잡담을 나눴었다.
그는 의대를 졸업하고, 전문의가 되려고 준비하는 중이었다. 사실, 레지던트 과정을 밟았었다. 외과에 지원해 근무를 했었는데, 친구가 외과 체질이 아닌 것 같다고 했었단다. 그래서 이번엔 뭘 하고 싶냐고 했더니 산부인과가 좋다고 했다. 내가 보기엔 소아과도 적성에 잘 맞을 것 같았는데, 아이들이 자기 얼굴을 보면 운단다.
나보다 2살쯤 어렸고, 온 집안식구가 일요일이면 교회에 나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겉으로는 매우 부드럽고 순하고(?) 착하게 생겼는데, 그의 일상생활 얘기를 들어보면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았다. 어느 날은 친구와 Bar에 가서 상상도 못할 만큼의 술을 마셔서 내가 없던 날, 병원 침대에 누워서 종일 잤다는 얘기도 했었다. 내가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더니, 다른 사람들이 그런 말을 자주 한단다.
그는 내 CD에 관심을 많이 보였었다. 그 중 Buena Vista Social Club의 사운드 트랙을 신기한 듯 쳐다봤고, 나는 신나서 어떤 앨범인지 친절히 소개를 해줬다. 그리고 그 다음날 샀다며 자랑을 했었다.
그렇게 직장에서 하루에 1-2시간씩 얘기를 하며, 어느 순간 그가 좋아졌다. 그의 종교가 기독교라는 것 때문에 화가 나기도 했었다. 그러다 그 생각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로 바뀌었고, 그가 내 방에 안 찾아오는 날은 궁금함을 남몰래 숨겼다. 남들이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도 전혀 없었다. 우리는 얘기를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까. 때로 내 방에서 한참 얘기하다가 환자가 오면 간호사가 슬립을 들고 찾아오기도 했었다. 그 때 우리나라는 한창 월드컵으로 달아올라 있을 때라 어느 날 나는 독일전을 보러 시청 광화문 앞으로 달려나갔고 너무나 목청껏 응원하고 고생하느라 목에 뭐가 돋아 그 다음날 그에게 내 목을 보여주기도 했었다.
3개월은 어찌나 빨리 흘러가던지 그는 애초에 3개월만 근무하기로 한 거였는데, 그만두는 날이 다가오자 나는 속이 답답했다. 선물이라도 하나 해야겠다 싶어 내가 본 책 중에 가벼워보이지 않으면서 보는 즐거움이 있는 이주헌의 '내 마음속의 그림'을 줬다. 그걸 주기 위해 가까운 사람에게 "직장 동료가 그만두는데 선물로 15,000원 상당의 책을 주면 남들이 이상하게 볼까?"라는 질문을 해서 괜찮겠다는 말을 들은 후에 줄 수 있었다. 한참동안 고심한 말까지 책에 적어서...
그는 떠나갔다. 이제 볼 수 없었다. 그는 내 방에 심심하면 찾아와서 편하게 얘기를 나누고, 음악을 함께 들었지만 아무런 기약도 없이 떠나간 것이다. 그렇게 그를 떠나보내고 나는 마음을 잡지 못했다. 즐겨듣던 CD들도 짐스러웠고, 책을 읽어도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는 것처럼 힘겨웠다. 고민 끝에 전화를 했다. 한번 만났으면 좋겠다고 용기를 내서 말을 했다. 그는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좋다고 해서 날짜를 잡았다.
마치 대학교 처음 들어와 순수한 첫사랑을 만난 과거로 돌아간 것처럼 마음이 끌리는대로 그를 좋아하는 내 마음을 숨길 수가 없이 떨렸다. 그러나, 그를 만나는 건 순탄치 않았다. 주저하는 그의 마음을 읽어서 안 그래도 불편했는데, 만나기로 한 날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다시 전화해서 날짜를 바꿨다.
그를 만나기로 한 날, 친구를 만났다. 그의 얘기를 했다. 친구와 시시콜콜 얘기하는 동안 내 머릿속에 한줄기 빛이 보였다. 그를 만나지 말아야 할 것 같았다. 나를 그다지 탐탁해하지 않는 걸 알면서 굳이 만나야 할까 싶었다. 문득, 피천득 님의 '인연' 마지막 구절도 생각났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그런데 세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나 갔다오려 한다. 소양강의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떨리는 마음을 추스리고 마지막으로 통화를 했다. '죄송한데요, 아무래도 안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제가 경솔했던 것 같네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그 사람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계획대로라면 지금 어느 대학병원에 산부인과 레지던트 3년차로 있을 것이다. 그의 전화번호와 이름은 아직도 내 휴대전화에 고이 저장돼 있다. 비록, 한번도 통화버튼을 누르진 못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