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놀음이 따로 없구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권인 <게르망트 쪽>을 읽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스완네 집 쪽으로>와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는 화자의 유년기와 첫사랑을 중심으로 프랑스 사교계의 모습, 화자의 예술과 문학에 눈뜸을 그렸다면 <게르망트>는 본격적으로 귀족들의 신선놀음을 보여준다. 6권까지가 <게르망트 쪽>이므로 이 살롱 안, 그들만의 신선놀음은 내내 이어질 것 같은데 프랑스가 그토록 사랑한 벨 에포크란 결국 귀족과 부르주아지, 그들만의 벨 에포크는 아닐까, 벨 에포크 시대에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노동자나 하층 계급에 속하는-은 분명 그 시절을 살아가고 있었을 텐데, 그들에게도 이때가 정말 말 그대로 아름다운 시대였을까? 아니 그들에게 과연 아름다운 시대가 존재할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생각이 더 강렬하게 든 까닭은 연휴에 이창동 감독의 <가능한 사랑 Possible Love>(2026)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창동의 영화가 대부분 그렇듯이 쓰고 씁쓸하고 마음속에는 불유쾌한 감정이 오랫동안 남는다. 이 영화는 무엇보다 계급에 관한 이야기이다. 도저히 서로 화해할 수도, 이해할 수도, 공존할 수도 없는 그러므로 불가능한 사랑의 이야기- 영화에는 두 커플이 등장한다. 해고 노동자 부부인 호석(설경구)과 그의 아내 미옥(전도연), 다큐멘터리 감독 예지(조여정)와 그녀의 남편 상우(조인성). 부부 사이에서도 저마다 계급차이는 선명하다. <잃시찾>의 화자의 집안에 견줄 수 있는 인물은 ‘상우’이다. 그는 이 네 명의 등장인물 중 가장 부유하다. 그의 부와 계급은 초월적 지위를 지닌다. 극중 상우의 대사는 어떤 면에서 챗GPT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실제로 아내 예지가 “너 지금 챗GPT처럼 말한다.”라고 받아치는 장면도 있다), 영화 속 그는 여러 면에서 테크자본주의를 상징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잃시찾>의 화자의 집안은 귀족은 아니지만 부유하고 교양 있는 상류 부르주아 계층의 대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상우’가 딱 그러하다. 대대로 부유했고 그에 따라 취향도 고급스러운.





그렇다면 마땅히 아내 예지도 그래야 할 텐데 자못 간극이 있어 보인다. 서울 압구정의 같은 고등학교를 나온 ‘동창’이지만 예지의 집안은 상우에 비해 부유하지는 않다. 아버지가 세탁소를 운영했기에 예지는 상우와 호석부부의 중간에 속하는 계급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어찌어찌해서 유학길에 올랐고 그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한 덕분에 거기서 상우를 만나 결혼까지 이를 수 있었다. 상우와의 결혼으로 일종의 신분 상승을 한 속물부르주아 계급에 속한다고나 할까. 호석-미옥 부부는 예지-상우 커플에 비해 계급적으로 한참 아래이다. 철강 노동자로 입사해 열심히 일하다 운 좋게 대기업 직원이 된 호석. 그는 파업투쟁을 벌이다 해고노동자가 되지만 그래도 대기업 직원으로 일한 덕분에 자기 집도 마련했다. 그런데 미옥은 어떠한가. 가난한 집안 출신에 고등학교마저 중퇴했고, 호석과 결혼해 여전히 노동자이자 주부로 살아가고 있는 이 여자는 네 사람 중 가장 낮은 계급적 위치를 지닌다. 

한데 이 전혀 어울릴 일 없을 것 같은 네 사람이 어떻게 만남을 지속할 수 있을까? 다큐멘터리 감독인 예지는 대기업 해고 노동자를 소재로 한 영화를 찍고자 하고, 그러다 보니 ‘호석과 미옥’ 부부를 촬영하면서 만남이 잦아지게 되는 것이다. 출신과 배경, 처지 등이 서로 너무 다름에도 만남이 잦아지다 보니, 서로에게 없는 것을 욕망하게 되고 그 욕망은 균열을 불러일으킨다. 그중 가장 선명하게 자기 욕망을 드러내는 인물은 ‘미옥’이다. 무뚝뚝하고 거친 호석을 10대 때 만나 그대로 죽 살아온 미옥에게 상우는 처음 마주한 세상이다. 저 매끈한 손, 매끈한 얼굴, 매끈한 몸, 매끈한 매너, 매끈한 취향…. 모든 것이 선망의 대상이 된다. 미옥의 저 욕망은 한 번도 속해보지 못한, 가져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동경이기도 하다. 그러나 욕망한다고 해서 과연 가질 수 있을까? 한편 미옥은 가장 낮은 계급에 속하면서도 생활력이 강하고 자기주장이 있으며 고집스럽기도 하고 자기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잃시찾>의 하녀 ‘프랑수아즈’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아버지가 세탁소를 운영하기는 했지만 미국 유학파인 예지는 어쩌다 노동자를 카메라에 담게 되었을까? 촬영팀 동료의 호기심 어린 질문에 예지는 말한다. 상우와 카타르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그 인공 도시가 그토록 아름답게 깨끗하게 굴러갈 수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제3세계의 노동자들 때문이라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들이 지금도 계속 일하고 있기 때문에 이 도시의 존재가 가능한 것이라는 상우의 말에 영감을 얻어 ‘보이지 않는 노동자들의 세계’를 카메라에  담아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무려! 카타르 여행에서! 챗GPT 같은 남편의 말에 영감을 얻어! 영화를 찍게 된 감독! 예지! 이런 그가 카메라에 담는 영상은 과연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까? 진실을 담을 수 있을까? 아니, 진실에 가닿기나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인정욕구는 있어서 “지금 나 잘하고 있지?” 묻는 예지에게 상우는 인상적인 대답을 한다. “그럼, 너 지금 메소드 연기 잘하고 있어.”라고 칭찬한다. “너와 그들은 다른 사람”인데도 이해하는 척 그들이 아픔을 다 아는 척 메소드 연기 참 잘하고 있다고 나름 격려한 것이다. 그 말에 기분이 상한 예지는 자신은 지금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호석-미옥 그 부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랑, 사랑이라…. 사랑일까? 그 사랑이 가능할까? 이해하지도 이해할 수도, 아니 이해는커녕 연민조차 느낄 수 없을 텐데 사랑이 가능할까? 예지는 자기의 영화 소재로서, 대상으로서만 그들에게 다가서기에, 그녀에게는 영화를 잘 찍고자 하는  제 자신의 욕망만 존재하기에 이 사랑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 <가능한 사랑 Possible Love>은 씁쓸하게 다가온다.

두 부부가 함께한 식탁의 ‘달 이야기’도 인상 깊다. 호석과 미옥이 처음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다가 불쑥 튀어나온 달 이야기. 가진 것도 없고 앞날도 불투명하기 짝이 없는 그들이 무작정 여행을 떠나 도착한 곳은 인천 월미도의 바닷가이다. 그 바다에서 한없이 바라본 달. 이 달 이야기를 받아서 예지는 시카고 유학 생활 중 차가 끊겨 집까지 걸어가면서 바라본 달 이야기를 한다. 그때 정말 무서웠노라고…. 미옥과 예지는 그때 우린 저마다 다른 공간에서 같은 달을 바라보고 있었던 거라며 깔깔 웃지만, 아무도 그 달이 같은 달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조차도. 평생 노동자로 살아갈 것이 뻔한 이들이 막막한 심정으로 바라본 인천 월미도의 달과 미국 유학생이 바라본 시카고의 달이 같을 리가.

그런 의미에서 <가능한 사랑>의 ‘달’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그려지는 벨 에포크 시대와 같다. 화자를 비롯해 화자와 신분이 비슷하거나 비슷하게 부를 소유한 계급, 또는 게르망트 대공네처럼 귀족인 그들은 그야말로 아름다운 시대를 구가하고 있다(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고 그들만의 이 벨 에포크가 끝이 날까? 나는 왠지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살롱에 앉아 날마다 차를 홀짝거리고 샴페인과 와인을 즐기면서 사교계의 이 사람이 어떻고 저 사람은 어떻고 연일 뒷공론이며 정치가 어떻고 음악이 오페라가 미술이 연극이 문학이 어쩌고저쩌고 예술을 논한다. 그러나 이들의 이 끊임없는 유희는 속물스럽기 짝이 없고 공허의 절정을 보여주므로 이 책을 읽는 독자도 지치게 만들고 화자 또한 언젠가는 그 허상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화자가 게르망트 공작부인에게 또한 환멸을 맛보게 될 것임은 자명하다. 이런 깨달음 속에 화자가 자신의 사랑은 내내 실체 없는 허상을 쫓은, 제 자신의 망상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 그러므로 질베르트-(사랑은 아니지만 예찬하는) 오데트-게르망트 공작부인에 이르기까지 본인은 ‘사랑’이라 주장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단지 자신에게 낯설거나 결핍된 것을 향한  욕망이었을 뿐임을 깨닫는다면 얼마나 좋으랴만 과연 그러할지는 6~13권까지를 마저 읽어야 알 수 있으리라. 

상상병 환자(feat. 몰리에르), 화자가 그토록 쉽게 질베르트에 이어 게르망트 공작부인 등에게 빠지고 마는 것은 그의 생활이 한없이 권태롭기 때문이다. 그가 만일 그의 집 하녀인 프랑수아즈처럼 연일 바쁘게 노동해야 한다면 그녀들을 향한 그토록 수많은 망상과 집착을 할 여력이 과연 있을까? 혼자 열망하고 혼자 사랑하고 질투하고 혼자 이별하고…. 그에겐 놀 생각할 시간이 너무나 많다. 자기가 만든 공상과 환상 속에서 놀 시간이 너무나 너무나 많다. 흥미롭게도 <가능한 사랑>의 미옥도 시간이 많아지면서, 여유가 생기면서 자기 욕망을 직시하게 된다. 생전 처음 떠난 휴가다운 휴가지에서 자기의 욕망-상우와 상우로 상징되는 계급에 대한 욕망-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러나 그 실체 없음이 환멸과 쌍을 이룰 수밖에 없음은 예정된 수순이 아닐까. 

<가능한 사랑>도 그렇지만 <기생충>(72회 칸 황금종려상), <슬픔의 삼각형>(75회 칸 황금종려상), <아노라>(77회 칸 황금종려상) 등등 계급 문제를 다룬 영화가 최근 국제 영화제에서 큰 상을 연달아 받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도 계급과 불평등 문제를 심각하게 바라본다는 방증일 텐데, 계급 격차는 더더욱 커질 뿐. 그들 사이의 사랑은커녕 이해조차 도무지 불가능한 시대. 그 오래전의 벨 에포크도 우리 시대의 벨 에포크도 가진 자들만의 것일 뿐. 이제 노동자들은 더더욱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 저들의 아름다운 시대를 위해 오늘도 손발이 닳도록 뛰어다닐 것이다. 화자의 충실한 하녀 프랑수아즈가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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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6-09-28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연휴에 가출해서 저 영화 보고 왔는데.. 씁쓸했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이렇게 이어졌군요. 부르주아의 귀족에 대한 선망과 긁힘?이 많이 보였던 기억이 납니다.

잠자냥 2026-09-28 15:27   좋아요 1 | URL
보람찬 가출이었군요! ㅋㅋㅋㅋ 이창동 영화 정말 늘 씁쓸하죠. 전 아주 오래전에 뭣도 모르고 무려 새해 1월 1일에 <박하사탕> 보고 그해 내내 개우울...했던 기억이 납니다. ㅋㅋㅋㅋㅋㅋㅋ 나 돌아갈래~~~!! ㅋㅋㅋㅋㅋ

지금 문득 생각하니 영화에서는 그 선망과 긁힘(?)이 미옥이 예지가 입은 옷 얼마냐고 물어보는 장면과 오버랩 되는 것 같네요. ㅎ

유부만두 2026-09-28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자냥 선생님… 우와…..

잠자냥 2026-09-28 16:37   좋아요 0 | URL
😹😸

coolcat329 2026-09-29 0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가능한 사랑>을 보고 왔어요. 2시간 40분 동안 초집중해서 봤더니 관람 후에는 뒷목이 다 뻐근하더라고요. 잠자냥님 글 첫 문단을 읽자마자 자연스레 오늘 본 영화가 떠올랐는데, 바로 그 이야기가 이어져서 ‘역시!‘ 싶었습니다. 😉 <가능한 사랑>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깊이 있게 연결 지은 이 글은 여기서만 보기 아깝네요. 신문 문화면에 실려도 손색이 없는 글 잘 읽었습니다~^^

잠자냥 2026-09-29 10:19   좋아요 0 | URL
2시간 40분이 훌쩍 가기는 하더라고요. 조만간 넷플릭스에서도 하겠지만 극장에서 보는 게 더 좋은 영화 같습니다.

그나저나 과찬 감사합니다. 서재가 알라딘 신문 문화면이 아니겠습니까!? ㅎㅎ

다락방 2026-09-30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자냥 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읽다가 의식의 흐름이 저랑 비슷한 것 같습니다. 저도 읽다가 같은 시기의 노동자 이야기를 읽고 싶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귀족들 말고, 부르주아 말고, 그리고 부르주아가 보는 돈 욕심 내는 노동자들 말고, 실제 노동의 삶을 살아야만 하는 자들의 이야기를 읽고 싶다고 말이지요. 그리고 화자 쓸데없는 망상 계속하는 거 보면서 진짜, 노동해라!! 했으니까요.

올려주신 이야기 읽으면서, 미옥이 고운 남자 상우에게 빠져드는게 인상깊은데 그런데 지극히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저는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완전히 다른 처지의 사람에게 색다른 매력에 이끌리는 걸로 친다면, 미옥이 상우에게 빠진 것처럼, 근육질의 육체 노동자 마틴 에덴 에게 빠져버린 부자 여성이 있었죠! 그러나 결국은 돈으로 귀결되는 것 같아요. 돈이 사랑에 아주 많은 영향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대의 계급은 곧 돈이니까요.

언제나처럼 멋진 글입니다!

잠자냥 2026-09-30 10:03   좋아요 0 | URL
프루스트의 의식은 귀족들의 벨 에포크를 헤매고
화자의 의식은 망상 속 여인들을 헤메고
잠자냥&다락방의 의식은 노동자들의 벨 에포크를 헤매고
미옥의 의식은 상우의 매끈함을 헤매고
다락방의 또 다른 의식은 근육남의 전완근을 헤매고...... ㅋㅋㅋㅋㅋ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 - 게르망트 쪽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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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에포크는 결국 귀족들만의 그것이 아닐까 씁쓸한 기분. 화자가 그리워하는 것은 잃어버린 시절이라기보다는 잃어버린 여인들을 향한 사랑, 그 노스텔지어가 아닌가 문득 그런 생각이. 그리고 화자가 나이 든 연상의 여인에게 빠져드는 것은 결국 일종의 모성애에 대힌 갈망?(엄마 뽀뽀바라기 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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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평등 - 부와 권력은 왜 불평등을 허락하는가
토마 피케티.마이클 샌델 지음, 장경덕 옮김 / 와이즈베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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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 임금뿐만 아니라 최고 임금의 한도도 정해야 한다.”(피케티) 소득과 부의 재분배(평등)뿐만 아니라 “존엄성 지위 존중 인정 명예 등의 범주에서도 평등의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샌델). 학력주의/능력주의가 팽배한 이 사회에서도 귀 기울여야 할 내용. 그런데 인간의 이기심은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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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9-23 10:4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샌델 : 설사 완벽하게 실현되었을지라도 능력주의에는 어두운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능력주의는 공동선을 부식시키지요. 왜 그런가 하면, 능력주의는 성공한 사람들이 그들의 성공을 그들 자신이 이룬 것으로 보고, 자신의 성공을 너무 깊이 받아들이며, 성공에 이르는 길에서 그들에게 도움을 준 행운과 요행을 잊어버리고, 당신이 묘사한 것처럼 그들이 성공할 수 있게 해준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도록 부추기기 때문입니다.
‘능력주의‘라는 말을 만들어낸 마이클 영Michael Young은 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능력주의를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 위험한 것으로 보았지요. 그 위험은 정확히 이런 겁니다. 능력주의는 승자들뿐만 아니라 패자들 사이에서도 성공에 대한 일정한 태도를 키워 우리를 분열시킵니다. 능력주의는 승자들에게는 오만을, 뒤처진 이들에게는 수치심을 키워주지요. 뒤에 남겨진 사람들은 그들의 실패와 고투가 그들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는 말을 듣고, 아마도 그렇게 설득될 겁니다. (p.68)

바람돌이 2026-09-23 11: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피케티는 안 읽어봤어요. 이 사람 21세기 자본도 읽을만할까요?
샌델의 능력주의 비판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한국사회는 어떤 사회보다도 능력주의 신화가 강하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제 주변도 마찬가지인걸요. 이 신화는 너무 강고해서 바뀌기가 어쩌면 자본주의보다 더 어려울것도 같던데요. 에휴....
어쨌든 잠자냥님, 머리 아픈 건 잠시 잊고 편안한 명절 보내세요.

잠자냥 2026-09-23 11:54   좋아요 3 | URL
<21세기 자본>은 저도 다 읽지는 않고 앞부분만 좀 읽었는데요, 도표도 많고 그렇게 어려워 보이지는 않더라고요. 근데 피케티 이 사람... 이 책 읽으면서 참 신기한 사람이라고 느꼈어요. 지구촌의 부자들이 진짜 너무 미워할 듯 ㅋㅋㅋㅋㅋㅋㅋㅋ
한국은 정말... 능력주의/학벌주의 깰 수 없을 거 같아요. 저도 샌델처럼 능력주의 비판하는 글 읽으면 맞아 그래 끄떡끄떡 하다가도.... 얼마나 거기에 젖어있는지 이 책에서 샌델이 비판하는 바로 그 행동/생각을 저도 모르게 하고 있더라고요. 에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바람돌이 님도 편안한 연휴 보내세요~
 
예수의 어린 시절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말하는나무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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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을 살펴보다가 소설 분야에서 이 제목을 마주했다. <예수의 어린 시절>- 제목과 책 표지의 분위기만 보았을 때, 쉽게 스크롤하면서 다른 책으로 넘어갔을 법한 그런 책이다. 그런데 눈길이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은 “J. M. 쿳시”라는 이름 때문이다. 쿳시? 쿳시가 이런 책을 썼다고? 책 정보를 훑어보고 미리보기로 책을 살펴보면서도 반신반의했다. 지나치게 종교적인 내용이 아닐까, 에이 설마 그래도 쿳시가 그렇게 단순하게 썼으려고. 그래서 바로 사서 읽었다.

읽고 나서는 고개를 더 갸우뚱하게 된다. 오, 지저스Jesus! 도대체 당신은 어디에 있나요? 이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정말 이렇게 된다. 도대체 예수는 어디 있는가? 과연 누가 예수인가? 예수가 직접 등장하지 않으리라는 예상할 수 있었지만 은유로서의 예수조차도 발견할 수 없으니 답답한 심정. 한편으로는 내가 기독교인이 아니라서, 예수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이 작품을 읽으며 예수의 발끝 하나 찾지 못한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것이다. 독실한 기독교인이 이 책을 읽는다 하더라도 이 작품 내에서 예수의 그림자를, 그 모습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제목이 <예수의 어린 시절>이기에 작품에 등장하는 어린 소년 ‘다비드’가 예수를 상징하는 아이인가 싶기도 한데 그런 의심 아래 이 작품을 쭉 읽어나가고 책장을 덮고 나서도 나는 다비드가 예수의 어린 시절을 보여주는 인물이라고는 동의하기 어려웠다. 다비드란 소년, 똘똘하고 귀여운 구석은 있지만 고집불통! 속 터져. 특히 중반 이후 정말 제멋대로 굴 때는 이 녀석은 분명 예수가 아니다!!!! 속으로 외치게 된다.

그렇게 예수 찾기에 실패하고 책장을 덮은 <예수의 어린 시절>- 이 책은 현재 알라딘 판매량에서 “종교/역학 주간 18위, 종교/역학 top100 2주”에 올라있고, 알라딘 분류에 따르자면 아프리카소설/아프리카문학/기독교 문학에 속하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이 책의 분류 중 그나마 내가 수긍할 수 있는 것은 영화소설(쿳시의 ‘예수 3부작’을 원작으로 한 영화 <여기(Aqui)>는 2026년 칸 영화제 프리미어 부문에서 상영해 큰 화제를 모았다)/노벨문학상(잘 알다시피 쿳시는 200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정도이다. 그럼에도 아프리카문학으로 분류된 까닭은 쿳시의 모국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이기 때문일 테고 제목에 버젓이 ‘예수’가 등장하기에 종교/기독교 문학으로 분류된 것이리라. 

그러나 <예수의 어린 시절>을 읽고 나면 이 분류에 딴죽을 걸고 싶어질 것이다. 이 작품을 아프리카 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쿳시의 이전 작품들 중엔 아프리카,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배경으로 쓰인 것들이 꽤 있지만, 이 작품은 스페인어를 쓰는 ‘노비야’라는 공간 때문에 스페인 또는 최소한 스페인어의 영향을 받는 남미의 어느 나라라는 인상을 지울 길이 없다(심지어 이 작품은 영어로 쓰였음에도 영어판보다 스페인어 번역판이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출간되었다. 이는 쿳시의 생각이었다고 하는데 영어 패권주의에 대한 저항이자 예수 3부작 주인공들이 가상의 스페인어 사용 국가에 도착해 스페인어를 배우며 살아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들로 이 작품을 굳이 분류하자면 아프리카도 스페인도 남아메리카도 영어권 국가는 더더욱 아닌 제3의 공간, 디아스포라 문학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은 나이도 출신국도 정확히 알기 어려운 ‘다비드’(다섯 살로 보인다고 표현된다)라는 어린 소년과 늙은 남자 ‘시몬’(본인은 40대로 보이고 싶어 하지만 사실 남들 눈에는 60대로 보이는)이 ‘노비야’에 도착하면서 시작한다. 과거의 기억을 거의 잊은 이들은 배를 타고 난민 수용소(로 보이는 곳)에 이르러 낯선 언어인 스페인어를 배우면서 이곳에 정착하고자 애를 쓴다. 시몬은 엄마를 잃어버린 소년 다비드의 할아버지 또는 아버지로 오해받는데, 두 사람은 배에서 처음 만난 사이로 시몬은 소년에게 엄마를 찾아주려고 백방으로 노력한다. 과연 다비드는 엄마를 찾을 수 있을까? 그리고 이 두 사람은 언어도 삶의 방식도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곳에서 무사히 정착할 수 있을까? <예수의 어린 시절>은 이 두 가지 얼개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이유로 여기에 있는 거야. 우리에게 살 기회가 주어졌고 우리는 그 기회를 받아들였단다. 산다는 것은 대단한 거란다. 그 어떤 것보다 대단한 거란다.” (p.33)


시몬은 배가 고프다고, 잠자리가 불편하다고 칭얼대는 다비드에게 이렇게 말한다. 산다는 것은 대단하다고. 정말 산다는 것은 대단한가? 그 어떤 것보다 대단한가? 시니컬한 나는 시몬의 말에 쓴웃음을 짓는다. 그 자신은 정말 그렇게 믿는가? 낯선 곳, 난민 수용소에 도착한 첫날부터 일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뜻밖의 난관에 봉착해 굶주린 배를 채우는 것은 물론이요, 씻기는커녕 편히 잠잘 곳을 마련하기도 쉽지 않다. 이런 엿 같은 상황에서 시몬 그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아이에게는 어쩔 수 없이 사탕발림하는 게 아닐까? 냉소적인 생각이 먼저 든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아이에게 차갑게 말하지 않고 희망을 주려 애쓰는 저 어른의 모습에 슬며시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 노비야라는 곳은 좀 이상하다. 사람들이 무미건조하게 친절하다. 미식을 자극하는 맛있는 음식이 넘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굶주리는 사람도 없다. 시몬이 일자리를 구하면서 어울리게 되는 부두 노동자들이나 난민 수용소 사람들 등등 대부분의 사람들이 온화하다. 폭력적이지도 않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뜨겁지도 않다. 열정이나 욕망 또는 강렬한 사랑 같은 깊은 감정이 사라진 공간 같다. 단조로울 정도로 평온하고 통제된 시스템에 따라 큰 문제없이 흘러가는 사회…. 이런 분위기 때문에 노비야는 실제 도시가 아닌 가상의 도시 같기도 하고(이 책을 읽고 있는 망고 님의 말처럼) 혹시 사후세계인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쿳시가 한 인터뷰에서 이 작품의 배경을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사후세계”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굳이 사후세계로 읽지 않고, 난민이나 이주자들이 많은 가상의 도시로 읽어도 무방할 것 같고, 나는 그렇게 읽었다. 그 편이 현실적으로 더 와닿기 때문이다. 

사막처럼 메마른 이 무미건조한 도시에서 시몬은 거의 혼자 뜨거운 사람이다. 그래서 이들의 기계적인 환대가 차갑게(만) 느껴진다. 그렇기에 난민 센터에서 자신과 다비드를 담당해 도와주는 여자 ‘아나’에게 속세에서 살려고 수녀원을 나온 수녀가 아니냐고 질문하기도 한다. 아무도 원치 않는 일을 하기 위해서, 감옥, 보육원, 보호시설, 난민접수센터 같은 곳에서 일하려고 환속한 수녀…. 그러나 아나는 시몬의 질문을 가장한 이런 투정에 일침을 가한다. 센터는 감옥도, 자선단체도 아닌 사회복지의 일부일 뿐이라고. 


“그렇다고 해도 우리처럼 무기력하고 무지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끝없이 몰려오는 상황을 아무런 믿음도 없이 어떻게 견뎌낼 수 있죠?” 
“믿음이라고요? 믿음은 그것과 아무 상관이 없어요. 믿음은 눈에 띄는 결과가 없어도 자신이 하는 것을 믿는다는 의미예요. 센터는 그런 곳이 아니에요.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거예요. 우리가 도와주면 그들의 삶이 나아지죠. 그중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은 게 없어요. 어느 것도 맹목적인 믿음이 필요하지 않아요. 우리는 일을 하고 모든 것이 결국 잘 풀려요. 그만큼 단순한 일이에요.” (pp.47~48)


그러나 시몬은 아나의 주장 또는 설득에도 불구하고, 센터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2주전에 비해 이곳에 와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확실해졌느냐면서 아나는 이것이 발전이라고 말한다. 시몬이 느끼기에 그것은 발전이 아니다. 아나를 비롯한 이 도시의 사람들은 시몬과 다비드를 환대하면서 그들의 욕망의 크기를 “크래커 콩 반죽” 정도로 제한한다. 그러나 시몬은 그 이상의 다른 것, 예를 들면 으깬 감자, 그레이비가 들어간 소고기 스테이크 같은 것을 바란다. 원한다. 

“이 나라에서 가장 놀라운 게 뭔지 아세요? 너무 핏기가 없다는 거요. 모두가 너무 점잖고 친절하고 착해요. 아무도 욕을 하거나 화를 내지 않아요. 아무도 술에 취하지 않아요. 목소리조차 높이지 않아요. 당신은 빵과 물과 콩 반죽을 먹고 살면서 배부르다고 말하죠. 인간적으로 말해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스스로한테도 거짓말을 하나요?” (p.49)

그렇다. 그, 시몬은 채식주의자가 아니라서, 결코 제 욕망을 채식 정도에서 멈추게 할 수 없기에 콩이 아닌 스테이크를 원한다(다비드에게도 스테이크를 먹이고 싶다). 고기를 원한다. 고기를 먹고 싶다...... 그러니까 그는 육체적으로도 고기, 즉 인간 여자를 원한다. 먹는 게 아니라  여자를 사랑하고 만지고 안고 싶다. 때문에 젊은 여자인 아나를 비롯해 다비드의 친구 ‘피델’의 엄마 ‘엘레나’에게 추파를 던지기도 하고, 욕망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인간의 본성은 그런 것이 아니라며 그녀들에게 욕망을 불러일으키고자 애를 쓴다. 그런데 참 그것이 쉽지 않으니… 시몬의 이 들끓는 욕망을 따라가면서 모든 것이 기본적으로 제공되는 편한 사회이지만 욕망은 제거되다시피 한 공간에서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한편 다비드의 생모 찾기에 실패한 시몬은 생면부지의 여성 ‘이네스’를 보고는 느닷없이 다비드의 엄마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나는 이 장면과 이네스의 선택이 이 작품에서 가장 설득력이 떨어지는 부분이라고 생각하는데(다비드가 예수를 상징한다면, 예수의 처녀 엄마인 마리아와 연결 짓기 위한 쿳시의 무리한 시도로 보임), 진짜 놀랍게도 이 처녀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이 부탁을 받아들여서 미혼의 싱글 여성이 무려 다섯 살 소년의 엄마가 된다. 한데 특이하게도 시몬은 이네스에게만은 여성적인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줄곤 이네스를 묘사할 때 여자 같지 않다, 남자처럼 느껴진다 등등의 언어를 쓴다. 때문에 나는 혹시 이네스가 아이를 미치도록 갖고 싶은 MTF 트랜스젠더 게이, 또는 레즈비언 여성인가 의심했는데 이야기가 흐를수록........ (안 알려줌!). 아무튼 갑자기 어린 소년의 엄마가 된 이네스는 이전과는 달라진 모습으로 다비드의 교육과 양육에 자기만의 방식으로 나름 애를 쓰는데 이 부분에서는 한 인간을 키운다는 것, 교육한다는 것, 조건 없는 사랑의 의미도 생각해보게 된다.  


그러니까 갓난아이와 젓 먹이의 입에서도 그런 말이 나온다. 호의로부터 우정과 행복이 나오고, 공원에서의 우정 어린 소풍이나 숲속에서의 우정 어린 오후 산책도 나온다. 그에 반해 사랑으로부터는 아니 적어도 사랑이 더 절박하게 표현되는 갈망으로부터는, 좌절과 의심과 상심이 나온다. 그렇게 간단하다. 그는 보편적인 것(호의, 선의)보다 개인적인 것(욕망, 사랑)이 먼저라고 우기는 것일까? 그리고 그는 어째서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그냥 살아가지 않고 끊임없이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하고 있는 것일까? 이 모든 것이 낡고 편안한 것(개인적인 것)에서 새롭고 불안한 것(보편적인 것)으로 넘어가는 지나치게 완만한 과정의 일부일까? 이러한 질문들은 새로 도착한 사람이 겪는 성장 과정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걸까? 알바로, 아나, 엘레나 같은 사람들은 이런 과정을 성공적으로 거친 걸까? 그렇다면 얼마나 더 오래 있어야 그는 새롭고 완벽해진 인간이 될까? (p.84)


육식파이자 육체파(응?)인 시몬은 내내 갈망한다. ‘보편적인 것(호의, 선의)’보다 ‘개인적인 것(욕망, 사랑)’을…. 인간에게는 이것이 먼저라고. 앞서 말했듯이 노비야, 저 세계는 보편적인 것은 주어진다. 그러나 개인적인 것은 많이 부족해 보인다. 인간은 우정이나 보편적인 것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 있다. 때로는 저 개인적인 갈망이 사람을 나락으로, 벼랑으로 몰아가가도 한다. 아니 그렇게 만드는 일이 더 잦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시몬의 저 드글드글한 욕망이 좀 버겁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냥 좀 콩 반죽만으로는 안 되겠니? 심심하지만 평온하고 좋잖아 싶은.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년에 이른 시몬을 생각할 때 그러한 것이지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은 다비드에게까지 스테이크의 세상은 잊어라, 콩 크래커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고 속삭이는 것은 기만이리라.

환대 또한 그렇다. 환대하는 자들은 보편적인 것만을 제공하면서 제 임무를 다했노라 생각할 것이다. 물론 그래, 그 보편에도 미치지도 못하는 환대는 얼마나 많은가, 환대가 완전히 사라진 세계도 많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노비야에서 이뤄지는 환대는 환대의 가장 기본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다음에는? (물론 그렇다고 육체를 제공하라는 것은 아니다). 사실 누구보다 가장 먼저 환대를 보여준 이는 시몬, 그 자신이다. 시몬은 부모를 잃은 다비드에게 조건 없이 대부가 되어주기를 약속하며 소년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쿳시의 펜끝에서 갑자기 마리아가 되어버린 이네스의 선택 또한 또 다른 의미에서의 다비드를 향한 환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비드를 향한 이 두 사람 저마다의 환대 방식에는 또 나름의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이 책은 이렇게 끊임없이 낯선 자들을 향한 조건 없는 환대가 사라져가는 이 세상에서 환대의 의미를 질문하게 한다. 성경에서는 환대에 관해 예수가 말하길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태복음 25:45) 했다는데, 환대의 의미를 내내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 자체가 예수의 얼굴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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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9-21 16: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헐.... 😱 나 너무 요즘 종교적이야. 그만 경건해야지. 🤣

망고 2026-09-22 14:48   좋아요 0 | URL
예수천국불신지옥을 외치면...ㅋㅋㅋㅋ

잠자냥 2026-09-23 09:27   좋아요 0 | URL
잠멘~🤣

망고 2026-09-21 17: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읽고 있으면 그렇게 졸음이 쏟아져요ㅋㅋㅋㅋ 반 정도 읽었는데 머릿속에는 물음표만 한가득! 노비야에서 사는 사람들 다 AI같아요. 뭘까뭘까 쿳시는 무슨 생각으로 이 책을 썼을까...이번에 진짜 잠자냥님한테 제대로 낚임😤

잠자냥 2026-09-21 21:26   좋아요 1 | URL
어허~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니라! 🤣

건수하 2026-09-22 0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약간 궁금했는데 궁금만 하기로….

잠자냥 2026-09-22 08:49   좋아요 0 | URL
ㅋㅋㅋ 읽을 의욕을 꺾어버리는 리뷰인가요? 😹

건수하 2026-09-22 11:16   좋아요 0 | URL
그 정도는 아닙니다. 다만 세상엔 읽고 싶은 책이 많으므로... ^^

독서괭 2026-09-23 0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굉장히 생각이 많아지게 하는 책일 것 같아요ㅋ 제목만 보고 산 사람도 많을 것 같은데 머리 위에 물음표 백개 띄우면서 읽을 듯요 ㅋㅋㅋㅋ

잠자냥 2026-09-23 09:28   좋아요 2 | URL
미쿡 교회 안에서 펼쳐 읽어보아….🤣

푸른꽃 2026-09-23 09: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성 가득 담긴 리뷰 감동입니다~

다락방 2026-09-28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다비드는 예수인가... 알아맞혀보시오.. 의 궁금증으로 읽어보고 싶긴한데, 끝내 답을 알 수 없을 것 같아서 읽고싶지 않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흠..

잠자냥 2026-09-28 12:15   좋아요 0 | URL
그래도 쿳시인데... 천천히 읽어봅시다. ㅋㅋㅋ
 
인간 판박이
아베 코보 지음, 곽형덕 옮김 / 현대문학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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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은 실화의 세계인가 우화의 세계인가? 장자의 호접지몽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화성인 대신 AI를 대입해보면 현시대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져서 더 놀랍다. 심지어 화성인이 소설까지 써준 부분에선 소름. ”자신을 화성인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지구인 미치광이라고 굳게 믿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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