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놀음이 따로 없구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권인 <게르망트 쪽>을 읽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스완네 집 쪽으로>와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는 화자의 유년기와 첫사랑을 중심으로 프랑스 사교계의 모습, 화자의 예술과 문학에 눈뜸을 그렸다면 <게르망트>는 본격적으로 귀족들의 신선놀음을 보여준다. 6권까지가 <게르망트 쪽>이므로 이 살롱 안, 그들만의 신선놀음은 내내 이어질 것 같은데 프랑스가 그토록 사랑한 벨 에포크란 결국 귀족과 부르주아지, 그들만의 벨 에포크는 아닐까, 벨 에포크 시대에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노동자나 하층 계급에 속하는-은 분명 그 시절을 살아가고 있었을 텐데, 그들에게도 이때가 정말 말 그대로 아름다운 시대였을까? 아니 그들에게 과연 아름다운 시대가 존재할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생각이 더 강렬하게 든 까닭은 연휴에 이창동 감독의 <가능한 사랑 Possible Love>(2026)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창동의 영화가 대부분 그렇듯이 쓰고 씁쓸하고 마음속에는 불유쾌한 감정이 오랫동안 남는다. 이 영화는 무엇보다 계급에 관한 이야기이다. 도저히 서로 화해할 수도, 이해할 수도, 공존할 수도 없는 그러므로 불가능한 사랑의 이야기- 영화에는 두 커플이 등장한다. 해고 노동자 부부인 호석(설경구)과 그의 아내 미옥(전도연), 다큐멘터리 감독 예지(조여정)와 그녀의 남편 상우(조인성). 부부 사이에서도 저마다 계급차이는 선명하다. <잃시찾>의 화자의 집안에 견줄 수 있는 인물은 ‘상우’이다. 그는 이 네 명의 등장인물 중 가장 부유하다. 그의 부와 계급은 초월적 지위를 지닌다. 극중 상우의 대사는 어떤 면에서 챗GPT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실제로 아내 예지가 “너 지금 챗GPT처럼 말한다.”라고 받아치는 장면도 있다), 영화 속 그는 여러 면에서 테크자본주의를 상징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잃시찾>의 화자의 집안은 귀족은 아니지만 부유하고 교양 있는 상류 부르주아 계층의 대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상우’가 딱 그러하다. 대대로 부유했고 그에 따라 취향도 고급스러운.





그렇다면 마땅히 아내 예지도 그래야 할 텐데 자못 간극이 있어 보인다. 서울 압구정의 같은 고등학교를 나온 ‘동창’이지만 예지의 집안은 상우에 비해 부유하지는 않다. 아버지가 세탁소를 운영했기에 예지는 상우와 호석부부의 중간에 속하는 계급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어찌어찌해서 유학길에 올랐고 그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한 덕분에 거기서 상우를 만나 결혼까지 이를 수 있었다. 상우와의 결혼으로 일종의 신분 상승을 한 속물부르주아 계급에 속한다고나 할까. 호석-미옥 부부는 예지-상우 커플에 비해 계급적으로 한참 아래이다. 철강 노동자로 입사해 열심히 일하다 운 좋게 대기업 직원이 된 호석. 그는 파업투쟁을 벌이다 해고노동자가 되지만 그래도 대기업 직원으로 일한 덕분에 자기 집도 마련했다. 그런데 미옥은 어떠한가. 가난한 집안 출신에 고등학교마저 중퇴했고, 호석과 결혼해 여전히 노동자이자 주부로 살아가고 있는 이 여자는 네 사람 중 가장 낮은 계급적 위치를 지닌다. 

한데 이 전혀 어울릴 일 없을 것 같은 네 사람이 어떻게 만남을 지속할 수 있을까? 다큐멘터리 감독인 예지는 대기업 해고 노동자를 소재로 한 영화를 찍고자 하고, 그러다 보니 ‘호석과 미옥’ 부부를 촬영하면서 만남이 잦아지게 되는 것이다. 출신과 배경, 처지 등이 서로 너무 다름에도 만남이 잦아지다 보니, 서로에게 없는 것을 욕망하게 되고 그 욕망은 균열을 불러일으킨다. 그중 가장 선명하게 자기 욕망을 드러내는 인물은 ‘미옥’이다. 무뚝뚝하고 거친 호석을 10대 때 만나 그대로 죽 살아온 미옥에게 상우는 처음 마주한 세상이다. 저 매끈한 손, 매끈한 얼굴, 매끈한 몸, 매끈한 매너, 매끈한 취향…. 모든 것이 선망의 대상이 된다. 미옥의 저 욕망은 한 번도 속해보지 못한, 가져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동경이기도 하다. 그러나 욕망한다고 해서 과연 가질 수 있을까? 한편 미옥은 가장 낮은 계급에 속하면서도 생활력이 강하고 자기주장이 있으며 고집스럽기도 하고 자기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잃시찾>의 하녀 ‘프랑수아즈’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아버지가 세탁소를 운영하기는 했지만 미국 유학파인 예지는 어쩌다 노동자를 카메라에 담게 되었을까? 촬영팀 동료의 호기심 어린 질문에 예지는 말한다. 상우와 카타르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그 인공 도시가 그토록 아름답게 깨끗하게 굴러갈 수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제3세계의 노동자들 때문이라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들이 지금도 계속 일하고 있기 때문에 이 도시의 존재가 가능한 것이라는 상우의 말에 영감을 얻어 ‘보이지 않는 노동자들의 세계’를 카메라에  담아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무려! 카타르 여행에서! 챗GPT 같은 남편의 말에 영감을 얻어! 영화를 찍게 된 감독! 예지! 이런 그가 카메라에 담는 영상은 과연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까? 진실을 담을 수 있을까? 아니, 진실에 가닿기나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인정욕구는 있어서 “지금 나 잘하고 있지?” 묻는 예지에게 상우는 인상적인 대답을 한다. “그럼, 너 지금 메소드 연기 잘하고 있어.”라고 칭찬한다. “너와 그들은 다른 사람”인데도 이해하는 척 그들이 아픔을 다 아는 척 메소드 연기 참 잘하고 있다고 나름 격려한 것이다. 그 말에 기분이 상한 예지는 자신은 지금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호석-미옥 그 부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랑, 사랑이라…. 사랑일까? 그 사랑이 가능할까? 이해하지도 이해할 수도, 아니 이해는커녕 연민조차 느낄 수 없을 텐데 사랑이 가능할까? 예지는 자기의 영화 소재로서, 대상으로서만 그들에게 다가서기에, 그녀에게는 영화를 잘 찍고자 하는  제 자신의 욕망만 존재하기에 이 사랑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 <가능한 사랑 Possible Love>은 씁쓸하게 다가온다.

두 부부가 함께한 식탁의 ‘달 이야기’도 인상 깊다. 호석과 미옥이 처음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다가 불쑥 튀어나온 달 이야기. 가진 것도 없고 앞날도 불투명하기 짝이 없는 그들이 무작정 여행을 떠나 도착한 곳은 인천 월미도의 바닷가이다. 그 바다에서 한없이 바라본 달. 이 달 이야기를 받아서 예지는 시카고 유학 생활 중 차가 끊겨 집까지 걸어가면서 바라본 달 이야기를 한다. 그때 정말 무서웠노라고…. 미옥과 예지는 그때 우린 저마다 다른 공간에서 같은 달을 바라보고 있었던 거라며 깔깔 웃지만, 아무도 그 달이 같은 달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조차도. 평생 노동자로 살아갈 것이 뻔한 이들이 막막한 심정으로 바라본 인천 월미도의 달과 미국 유학생이 바라본 시카고의 달이 같을 리가.

그런 의미에서 <가능한 사랑>의 ‘달’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그려지는 벨 에포크 시대와 같다. 화자를 비롯해 화자와 신분이 비슷하거나 비슷하게 부를 소유한 계급, 또는 게르망트 대공네처럼 귀족인 그들은 그야말로 아름다운 시대를 구가하고 있다(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고 그들만의 이 벨 에포크가 끝이 날까? 나는 왠지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살롱에 앉아 날마다 차를 홀짝거리고 샴페인과 와인을 즐기면서 사교계의 이 사람이 어떻고 저 사람은 어떻고 연일 뒷공론이며 정치가 어떻고 음악이 오페라가 미술이 연극이 문학이 어쩌고저쩌고 예술을 논한다. 그러나 이들의 이 끊임없는 유희는 속물스럽기 짝이 없고 공허의 절정을 보여주므로 이 책을 읽는 독자도 지치게 만들고 화자 또한 언젠가는 그 허상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화자가 게르망트 공작부인에게 또한 환멸을 맛보게 될 것임은 자명하다. 이런 깨달음 속에 화자가 자신의 사랑은 내내 실체 없는 허상을 쫓은, 제 자신의 망상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 그러므로 질베르트-(사랑은 아니지만 예찬하는) 오데트-게르망트 공작부인에 이르기까지 본인은 ‘사랑’이라 주장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단지 자신에게 낯설거나 결핍된 것을 향한  욕망이었을 뿐임을 깨닫는다면 얼마나 좋으랴만 과연 그러할지는 6~13권까지를 마저 읽어야 알 수 있으리라. 

상상병 환자(feat. 몰리에르), 화자가 그토록 쉽게 질베르트에 이어 게르망트 공작부인 등에게 빠지고 마는 것은 그의 생활이 한없이 권태롭기 때문이다. 그가 만일 그의 집 하녀인 프랑수아즈처럼 연일 바쁘게 노동해야 한다면 그녀들을 향한 그토록 수많은 망상과 집착을 할 여력이 과연 있을까? 혼자 열망하고 혼자 사랑하고 질투하고 혼자 이별하고…. 그에겐 놀 생각할 시간이 너무나 많다. 자기가 만든 공상과 환상 속에서 놀 시간이 너무나 너무나 많다. 흥미롭게도 <가능한 사랑>의 미옥도 시간이 많아지면서, 여유가 생기면서 자기 욕망을 직시하게 된다. 생전 처음 떠난 휴가다운 휴가지에서 자기의 욕망-상우와 상우로 상징되는 계급에 대한 욕망-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러나 그 실체 없음이 환멸과 쌍을 이룰 수밖에 없음은 예정된 수순이 아닐까. 

<가능한 사랑>도 그렇지만 <기생충>(72회 칸 황금종려상), <슬픔의 삼각형>(75회 칸 황금종려상), <아노라>(77회 칸 황금종려상) 등등 계급 문제를 다룬 영화가 최근 국제 영화제에서 큰 상을 연달아 받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도 계급과 불평등 문제를 심각하게 바라본다는 방증일 텐데, 계급 격차는 더더욱 커질 뿐. 그들 사이의 사랑은커녕 이해조차 도무지 불가능한 시대. 그 오래전의 벨 에포크도 우리 시대의 벨 에포크도 가진 자들만의 것일 뿐. 이제 노동자들은 더더욱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 저들의 아름다운 시대를 위해 오늘도 손발이 닳도록 뛰어다닐 것이다. 화자의 충실한 하녀 프랑수아즈가 그렇듯이.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건수하 2026-09-28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연휴에 가출해서 저 영화 보고 왔는데.. 씁쓸했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이렇게 이어졌군요. 부르주아의 귀족에 대한 선망과 긁힘?이 많이 보였던 기억이 납니다.

잠자냥 2026-09-28 15:27   좋아요 1 | URL
보람찬 가출이었군요! ㅋㅋㅋㅋ 이창동 영화 정말 늘 씁쓸하죠. 전 아주 오래전에 뭣도 모르고 무려 새해 1월 1일에 <박하사탕> 보고 그해 내내 개우울...했던 기억이 납니다. ㅋㅋㅋㅋㅋㅋㅋ 나 돌아갈래~~~!! ㅋㅋㅋㅋㅋ

지금 문득 생각하니 영화에서는 그 선망과 긁힘(?)이 미옥이 예지가 입은 옷 얼마냐고 물어보는 장면과 오버랩 되는 것 같네요. ㅎ

유부만두 2026-09-28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자냥 선생님… 우와…..

잠자냥 2026-09-28 16:37   좋아요 0 | URL
😹😸

coolcat329 2026-09-29 0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가능한 사랑>을 보고 왔어요. 2시간 40분 동안 초집중해서 봤더니 관람 후에는 뒷목이 다 뻐근하더라고요. 잠자냥님 글 첫 문단을 읽자마자 자연스레 오늘 본 영화가 떠올랐는데, 바로 그 이야기가 이어져서 ‘역시!‘ 싶었습니다. 😉 <가능한 사랑>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깊이 있게 연결 지은 이 글은 여기서만 보기 아깝네요. 신문 문화면에 실려도 손색이 없는 글 잘 읽었습니다~^^

잠자냥 2026-09-29 10:19   좋아요 0 | URL
2시간 40분이 훌쩍 가기는 하더라고요. 조만간 넷플릭스에서도 하겠지만 극장에서 보는 게 더 좋은 영화 같습니다.

그나저나 과찬 감사합니다. 서재가 알라딘 신문 문화면이 아니겠습니까!?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