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을 살펴보다가 소설 분야에서 이 제목을 마주했다. <예수의 어린 시절>- 제목과 책 표지의 분위기만 보았을 때, 쉽게 스크롤하면서 다른 책으로 넘어갔을 법한 그런 책이다. 그런데 눈길이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은 “J. M. 쿳시”라는 이름 때문이다. 쿳시? 쿳시가 이런 책을 썼다고? 책 정보를 훑어보고 미리보기로 책을 살펴보면서도 반신반의했다. 지나치게 종교적인 내용이 아닐까, 에이 설마 그래도 쿳시가 그렇게 단순하게 썼으려고. 그래서 바로 사서 읽었다.
읽고 나서는 고개를 더 갸우뚱하게 된다. 오, 지저스Jesus! 도대체 당신은 어디에 있나요? 이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정말 이렇게 된다. 도대체 예수는 어디 있는가? 과연 누가 예수인가? 예수가 직접 등장하지 않으리라는 예상할 수 있었지만 은유로서의 예수조차도 발견할 수 없으니 답답한 심정. 한편으로는 내가 기독교인이 아니라서, 예수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이 작품을 읽으며 예수의 발끝 하나 찾지 못한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것이다. 독실한 기독교인이 이 책을 읽는다 하더라도 이 작품 내에서 예수의 그림자를, 그 모습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제목이 <예수의 어린 시절>이기에 작품에 등장하는 어린 소년 ‘다비드’가 예수를 상징하는 아이인가 싶기도 한데 그런 의심 아래 이 작품을 쭉 읽어나가고 책장을 덮고 나서도 나는 다비드가 예수의 어린 시절을 보여주는 인물이라고는 동의하기 어려웠다. 다비드란 소년, 똘똘하고 귀여운 구석은 있지만 고집불통! 속 터져. 특히 중반 이후 정말 제멋대로 굴 때는 이 녀석은 분명 예수가 아니다!!!! 속으로 외치게 된다.
그렇게 예수 찾기에 실패하고 책장을 덮은 <예수의 어린 시절>- 이 책은 현재 알라딘 판매량에서 “종교/역학 주간 18위, 종교/역학 top100 2주”에 올라있고, 알라딘 분류에 따르자면 아프리카소설/아프리카문학/기독교 문학에 속하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이 책의 분류 중 그나마 내가 수긍할 수 있는 것은 영화소설(쿳시의 ‘예수 3부작’을 원작으로 한 영화 <여기(Aqui)>는 2026년 칸 영화제 프리미어 부문에서 상영해 큰 화제를 모았다)/노벨문학상(잘 알다시피 쿳시는 200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정도이다. 그럼에도 아프리카문학으로 분류된 까닭은 쿳시의 모국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이기 때문일 테고 제목에 버젓이 ‘예수’가 등장하기에 종교/기독교 문학으로 분류된 것이리라.
그러나 <예수의 어린 시절>을 읽고 나면 이 분류에 딴죽을 걸고 싶어질 것이다. 이 작품을 아프리카 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쿳시의 이전 작품들 중엔 아프리카,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배경으로 쓰인 것들이 꽤 있지만, 이 작품은 스페인어를 쓰는 ‘노비야’라는 공간 때문에 스페인 또는 최소한 스페인어의 영향을 받는 남미의 어느 나라라는 인상을 지울 길이 없다(심지어 이 작품은 영어로 쓰였음에도 영어판보다 스페인어 번역판이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출간되었다. 이는 쿳시의 생각이었다고 하는데 영어 패권주의에 대한 저항이자 예수 3부작 주인공들이 가상의 스페인어 사용 국가에 도착해 스페인어를 배우며 살아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들로 이 작품을 굳이 분류하자면 아프리카도 스페인도 남아메리카도 영어권 국가는 더더욱 아닌 제3의 공간, 디아스포라 문학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은 나이도 출신국도 정확히 알기 어려운 ‘다비드’(다섯 살로 보인다고 표현된다)라는 어린 소년과 늙은 남자 ‘시몬’(본인은 40대로 보이고 싶어 하지만 사실 남들 눈에는 60대로 보이는)이 ‘노비야’에 도착하면서 시작한다. 과거의 기억을 거의 잊은 이들은 배를 타고 난민 수용소(로 보이는 곳)에 이르러 낯선 언어인 스페인어를 배우면서 이곳에 정착하고자 애를 쓴다. 시몬은 엄마를 잃어버린 소년 다비드의 할아버지 또는 아버지로 오해받는데, 두 사람은 배에서 처음 만난 사이로 시몬은 소년에게 엄마를 찾아주려고 백방으로 노력한다. 과연 다비드는 엄마를 찾을 수 있을까? 그리고 이 두 사람은 언어도 삶의 방식도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곳에서 무사히 정착할 수 있을까? <예수의 어린 시절>은 이 두 가지 얼개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이유로 여기에 있는 거야. 우리에게 살 기회가 주어졌고 우리는 그 기회를 받아들였단다. 산다는 것은 대단한 거란다. 그 어떤 것보다 대단한 거란다.” (p.33)
시몬은 배가 고프다고, 잠자리가 불편하다고 칭얼대는 다비드에게 이렇게 말한다. 산다는 것은 대단하다고. 정말 산다는 것은 대단한가? 그 어떤 것보다 대단한가? 시니컬한 나는 시몬의 말에 쓴웃음을 짓는다. 그 자신은 정말 그렇게 믿는가? 낯선 곳, 난민 수용소에 도착한 첫날부터 일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뜻밖의 난관에 봉착해 굶주린 배를 채우는 것은 물론이요, 씻기는커녕 편히 잠잘 곳을 마련하기도 쉽지 않다. 이런 엿 같은 상황에서 시몬 그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아이에게는 어쩔 수 없이 사탕발림하는 게 아닐까? 냉소적인 생각이 먼저 든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아이에게 차갑게 말하지 않고 희망을 주려 애쓰는 저 어른의 모습에 슬며시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 노비야라는 곳은 좀 이상하다. 사람들이 무미건조하게 친절하다. 미식을 자극하는 맛있는 음식이 넘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굶주리는 사람도 없다. 시몬이 일자리를 구하면서 어울리게 되는 부두 노동자들이나 난민 수용소 사람들 등등 대부분의 사람들이 온화하다. 폭력적이지도 않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뜨겁지도 않다. 열정이나 욕망 또는 강렬한 사랑 같은 깊은 감정이 사라진 공간 같다. 단조로울 정도로 평온하고 통제된 시스템에 따라 큰 문제없이 흘러가는 사회…. 이런 분위기 때문에 노비야는 실제 도시가 아닌 가상의 도시 같기도 하고(이 책을 읽고 있는 망고 님의 말처럼) 혹시 사후세계인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쿳시가 한 인터뷰에서 이 작품의 배경을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사후세계”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굳이 사후세계로 읽지 않고, 난민이나 이주자들이 많은 가상의 도시로 읽어도 무방할 것 같고, 나는 그렇게 읽었다. 그 편이 현실적으로 더 와닿기 때문이다.
사막처럼 메마른 이 무미건조한 도시에서 시몬은 거의 혼자 뜨거운 사람이다. 그래서 이들의 기계적인 환대가 차갑게(만) 느껴진다. 그렇기에 난민 센터에서 자신과 다비드를 담당해 도와주는 여자 ‘아나’에게 속세에서 살려고 수녀원을 나온 수녀가 아니냐고 질문하기도 한다. 아무도 원치 않는 일을 하기 위해서, 감옥, 보육원, 보호시설, 난민접수센터 같은 곳에서 일하려고 환속한 수녀…. 그러나 아나는 시몬의 질문을 가장한 이런 투정에 일침을 가한다. 센터는 감옥도, 자선단체도 아닌 사회복지의 일부일 뿐이라고.
“그렇다고 해도 우리처럼 무기력하고 무지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끝없이 몰려오는 상황을 아무런 믿음도 없이 어떻게 견뎌낼 수 있죠?”
“믿음이라고요? 믿음은 그것과 아무 상관이 없어요. 믿음은 눈에 띄는 결과가 없어도 자신이 하는 것을 믿는다는 의미예요. 센터는 그런 곳이 아니에요.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거예요. 우리가 도와주면 그들의 삶이 나아지죠. 그중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은 게 없어요. 어느 것도 맹목적인 믿음이 필요하지 않아요. 우리는 일을 하고 모든 것이 결국 잘 풀려요. 그만큼 단순한 일이에요.” (pp.47~48)
그러나 시몬은 아나의 주장 또는 설득에도 불구하고, 센터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2주전에 비해 이곳에 와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확실해졌느냐면서 아나는 이것이 발전이라고 말한다. 시몬이 느끼기에 그것은 발전이 아니다. 아나를 비롯한 이 도시의 사람들은 시몬과 다비드를 환대하면서 그들의 욕망의 크기를 “크래커 콩 반죽” 정도로 제한한다. 그러나 시몬은 그 이상의 다른 것, 예를 들면 으깬 감자, 그레이비가 들어간 소고기 스테이크 같은 것을 바란다. 원한다.
“이 나라에서 가장 놀라운 게 뭔지 아세요? 너무 핏기가 없다는 거요. 모두가 너무 점잖고 친절하고 착해요. 아무도 욕을 하거나 화를 내지 않아요. 아무도 술에 취하지 않아요. 목소리조차 높이지 않아요. 당신은 빵과 물과 콩 반죽을 먹고 살면서 배부르다고 말하죠. 인간적으로 말해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스스로한테도 거짓말을 하나요?” (p.49)
그렇다. 그, 시몬은 채식주의자가 아니라서, 결코 제 욕망을 채식 정도에서 멈추게 할 수 없기에 콩이 아닌 스테이크를 원한다(다비드에게도 스테이크를 먹이고 싶다). 고기를 원한다. 고기를 먹고 싶다...... 그러니까 그는 육체적으로도 고기, 즉 인간 여자를 원한다. 먹는 게 아니라 여자를 사랑하고 만지고 안고 싶다. 때문에 젊은 여자인 아나를 비롯해 다비드의 친구 ‘피델’의 엄마 ‘엘레나’에게 추파를 던지기도 하고, 욕망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인간의 본성은 그런 것이 아니라며 그녀들에게 욕망을 불러일으키고자 애를 쓴다. 그런데 참 그것이 쉽지 않으니… 시몬의 이 들끓는 욕망을 따라가면서 모든 것이 기본적으로 제공되는 편한 사회이지만 욕망은 제거되다시피 한 공간에서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한편 다비드의 생모 찾기에 실패한 시몬은 생면부지의 여성 ‘이네스’를 보고는 느닷없이 다비드의 엄마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나는 이 장면과 이네스의 선택이 이 작품에서 가장 설득력이 떨어지는 부분이라고 생각하는데(다비드가 예수를 상징한다면, 예수의 처녀 엄마인 마리아와 연결 짓기 위한 쿳시의 무리한 시도로 보임), 진짜 놀랍게도 이 처녀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이 부탁을 받아들여서 미혼의 싱글 여성이 무려 다섯 살 소년의 엄마가 된다. 한데 특이하게도 시몬은 이네스에게만은 여성적인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줄곤 이네스를 묘사할 때 여자 같지 않다, 남자처럼 느껴진다 등등의 언어를 쓴다. 때문에 나는 혹시 이네스가 아이를 미치도록 갖고 싶은 MTF 트랜스젠더 게이, 또는 레즈비언 여성인가 의심했는데 이야기가 흐를수록........ (안 알려줌!). 아무튼 갑자기 어린 소년의 엄마가 된 이네스는 이전과는 달라진 모습으로 다비드의 교육과 양육에 자기만의 방식으로 나름 애를 쓰는데 이 부분에서는 한 인간을 키운다는 것, 교육한다는 것, 조건 없는 사랑의 의미도 생각해보게 된다.
그러니까 갓난아이와 젓 먹이의 입에서도 그런 말이 나온다. 호의로부터 우정과 행복이 나오고, 공원에서의 우정 어린 소풍이나 숲속에서의 우정 어린 오후 산책도 나온다. 그에 반해 사랑으로부터는 아니 적어도 사랑이 더 절박하게 표현되는 갈망으로부터는, 좌절과 의심과 상심이 나온다. 그렇게 간단하다. 그는 보편적인 것(호의, 선의)보다 개인적인 것(욕망, 사랑)이 먼저라고 우기는 것일까? 그리고 그는 어째서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그냥 살아가지 않고 끊임없이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하고 있는 것일까? 이 모든 것이 낡고 편안한 것(개인적인 것)에서 새롭고 불안한 것(보편적인 것)으로 넘어가는 지나치게 완만한 과정의 일부일까? 이러한 질문들은 새로 도착한 사람이 겪는 성장 과정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걸까? 알바로, 아나, 엘레나 같은 사람들은 이런 과정을 성공적으로 거친 걸까? 그렇다면 얼마나 더 오래 있어야 그는 새롭고 완벽해진 인간이 될까? (p.84)
육식파이자 육체파(응?)인 시몬은 내내 갈망한다. ‘보편적인 것(호의, 선의)’보다 ‘개인적인 것(욕망, 사랑)’을…. 인간에게는 이것이 먼저라고. 앞서 말했듯이 노비야, 저 세계는 보편적인 것은 주어진다. 그러나 개인적인 것은 많이 부족해 보인다. 인간은 우정이나 보편적인 것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 있다. 때로는 저 개인적인 갈망이 사람을 나락으로, 벼랑으로 몰아가가도 한다. 아니 그렇게 만드는 일이 더 잦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시몬의 저 드글드글한 욕망이 좀 버겁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냥 좀 콩 반죽만으로는 안 되겠니? 심심하지만 평온하고 좋잖아 싶은.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년에 이른 시몬을 생각할 때 그러한 것이지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은 다비드에게까지 스테이크의 세상은 잊어라, 콩 크래커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고 속삭이는 것은 기만이리라.
환대 또한 그렇다. 환대하는 자들은 보편적인 것만을 제공하면서 제 임무를 다했노라 생각할 것이다. 물론 그래, 그 보편에도 미치지도 못하는 환대는 얼마나 많은가, 환대가 완전히 사라진 세계도 많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노비야에서 이뤄지는 환대는 환대의 가장 기본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다음에는? (물론 그렇다고 육체를 제공하라는 것은 아니다). 사실 누구보다 가장 먼저 환대를 보여준 이는 시몬, 그 자신이다. 시몬은 부모를 잃은 다비드에게 조건 없이 대부가 되어주기를 약속하며 소년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쿳시의 펜끝에서 갑자기 마리아가 되어버린 이네스의 선택 또한 또 다른 의미에서의 다비드를 향한 환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비드를 향한 이 두 사람 저마다의 환대 방식에는 또 나름의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이 책은 이렇게 끊임없이 낯선 자들을 향한 조건 없는 환대가 사라져가는 이 세상에서 환대의 의미를 질문하게 한다. 성경에서는 환대에 관해 예수가 말하길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태복음 25:45) 했다는데, 환대의 의미를 내내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 자체가 예수의 얼굴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