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트 보네거트 <제5도살장>최근 이 책이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에서 새로 발간되었더라. 나는 이 책을 예전 버전으로 읽었다. 그리고 나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별로였던 책 리스트에서 이 책을 보고 헉! 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으리라 생각된다. 보통 커트 보네거트의 작품은 대부분 사람들의 베스트에 올라가면 올라가겠지 워스트에 손꼽히는
일은 드물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나는 정말 별로였다. <나라 없는 사람>도 딱히 강한 인상은 없었는데, 이걸 읽으니
커트 보네커트도 나하고는 좀 안 맞는 작가, 때문에 더 읽지는 않을 듯한 작가가 되어 버렸다. SF적인, 비현실적인 요소가 일단
별로였다. 물론 드레스덴 폭격의 상흔을 ‘제정신’으로 ‘제대로 된 플롯’으로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 방식이겠지만, 이게 심하다 보니 오히려 장난처럼 느껴지더라. 게다가 ‘그렇게 가는 거지’의 끊임없는 반복도 지겨웠다!!!!
유머러스하다는 면도 동의할 수 없다. 왠지 유머러스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나온 유머 같다고나 할까. 극사실주의적인 소설도 딱히
좋아하지 않지만 이렇게 황당무계한 작품도 역시 매력이 없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이 책의 미덕이라고 꼽는 점들에 대해 난 도저히 공감 안 가더라. '천재'작가가 탄생했다는 둥, '이토록 기막히게 아름답고 슬프면서도 감동적인' 이런 문구들. 다 공감할 수 없다. 9/11테러로
아버지를 잃은 아홉살짜리 꼬마가 주인공이다. 아버지의 부재로 힘들어하고 그러면서도 삶의 의미를 깨달아간다는 뭐 그런 내용인데,
도대체가... =_= 책 안에는 정말 다양한 '문학적 장르'를 파괴하는 시도들이 등장한다. 사진 이미지도 많이 사용되고, 빈
페이지로 그냥 있다던가, 페이지 하나에 한 문장 딸랑 들어간다던가, 글자들 위에 막 빨간 줄이 쳐 있다던가. 그런 시도들. 암튼
다양한 실험적인 시도들을 하고 있는데, 이런 독특한 시도들이 멋진 작품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렇다면 정말 동의할 수
없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는 어떤 감동도 들어있지 않았다. 아홉살 꼬마가 뭐 그렇게 현학적인 말들을 늘어 놓으면서 영악할 수
있을까?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는 일단 주인공 꼬마한테 절대로 감정이입이 된다거나, 그럴 수 없었다는 것. 보통 성장 소설의
꼬마들은 나름 다 조숙하기도 하고, 똘똘하기도 하고, 영악하기도 하지만 이런 애는 정말...... =_= 꼬마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나누는 대화들도(일찍이 꼬마의 할아버지는 전쟁으로 인한 상흔으로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만다.) 공감할 수 없고. 속사포 같이 쏘아 놓는 번지르르한 말들의 잔치 속에서 진이 빠지는 느낌이랄까.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이
책 또한 보통은 베스트에 꼽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난 또 별로였을 뿐이고. 만약 내가 생태주의, 탈성장, 탈자본주의,
반소비문화를 다룬 책을 많이 안 읽은 상태에서 소로우의 <월든>을 읽었다면 이 책은 좀 더 다르게 다가왔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미 <월든>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 및 소재를 다룬 책들을 많이 읽어왔던 터이고, 때문에
이제야 읽는 이 책은 당연히 뒷북처럼 느껴지더라. 게다가 난 소로우의 문체랄까, 고답적인 말투도 별로였다. 무엇보다도 책 곳곳에서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사는, 단순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평가하는 소로우의 시선이 불편했다. 마치 그들은 바보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투의 시선이랄까. 소로우 당신이 선택한 삶의 방식에 남들이 의문을 제기하는 게 싫었듯이 그저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의 삶도
당신만의 잣대로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보리스 비앙 <너희들 무덤에 침을 뱉으마>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던 터라 책
표지가 이런 줄은 몰랐다. 표지 참 비호감이다. 보리스 비앙의 <세월의 거품>을 읽기 전에 이 책을 우선 봤는데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인종 문제, 계급 문제를 다룬 20세기 프랑스 누아르 고전이라고 불리는 이 소설. 그런데 왜 이렇게
개운하지 않을까. 파격적인 성묘사와 여과 없이 드러나는 폭력적 묘사 등, 썩 기분 좋은 책은 아니다. 하지만 인종 문제를 이렇게
다뤄야 했을까 싶다. 금발에 하얀 피부 등 거의 백인에 가까운 외모를 가진(그러나 결국은 흑인으로 불릴 수밖에 없는) 주인공은
백인에게 살해당한 동생의 복수를 하기 위해 부잣집 백인 소녀들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그들과 무차별적 성관계를 맺고 잔혹하게
죽인다. 그런데 과연 ‘온당한 방식인가?’ 하는 질문이 남는다. 같은 소재(백인과 유사한 신체적 특징을 가진 흑인의 정체성 및
인종 문제)를 다룬 넬라 라슨의 <패싱>과 비교해 보면 이 작품은 특히 더 형편없게 느껴진다.
보리스 비앙 <세월의 거품>
<너희들
무덤에 침을 뱉으마>와는 전혀 다른 소설이다. 낭만적인 로맨스를 다룬 작품. 워낙 낭만적인 사랑이야기를 좋아하는 나는 이
작품에도 좀 기대를 걸고 읽기 시작했으나 시작하자마자 조금씩 뭔가 어그러지는 기분이었다. 주인공이 이상한 생쥐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게 아닌가! 아놔-. 이때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부잣집 도련님인 콜랭은 사랑에 대한 환상, 열정을 갖고 있던 중 클로에를
만나 불같은(!)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클로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리고, 그녀를 치료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면서
콜랭은 가산을 탕진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클로에의 병도 참…. 가슴에 수련이 피는 병이라;;; 물론 비유적으로 ‘암’을
상징한다는 걸 읽는 사람은 대뜸 눈치 챌 수 있지만, 그냥 암이라고 하던가. 수련이 피는 병이 뭐니. 생쥐랑 이야기를 나누질
않나, 애인 가슴에서 수련이 피질 않나. 그걸 치유하기 위해서 방안에 꽃을 계속 갖다 놔야 하질 않나. 이런 모든 비현실적,
초현실적 설정이 나하고는 정말 맞지 않았다. 보리스 비앙은 아무래도 안녕,
마커스 주삭 <메신저>
대책
없는 희망으로 범벅된 책. 시민을 길들이기 위해 국가에서 만든 도덕책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나 할까. 할리우드 영화를
고대로 옮겨놓은 듯한 느낌도 들었다. 적당한 스릴러적 요소도 넣어야겠고, 지고지순한 러브스토리도 넣어야겠고, 세상은 삭막하지만
지금 당신이 조금 주변에 관심을 기울이면 그것만으로도 세상을 좀 바꿀 수 있으리라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착해 보이려고 아주
용을 쓴다. 아주 매력 없는 모범생을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한국 현대 소설에 대한 거부감도 심하지만, 이런 작품 읽다 보면 외국
현대 문학도 좀 함량미달, 수준미달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이 사람의 다른 작품인 <책도둑>도 읽어볼까 싶었는데,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뮈리엘 바르베리 <고슴도치의 우아함>
이 책은 아마도 꽤 오랜 기간 베스트셀러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만큼 사는 사람이 많다는 소리, 잘 팔린다는
소리. 그런데 난!! ‘사지마세요!’ 하고 뜯어 말리고 싶어지는 책이다. 작가가 철학 전공자다. 아는 것도 좀 많은 듯하다. 그런 사람이 소설을
썼는데 자기가 아는 철학과 지식을 몽땅 넣어보려고 기를 썼다. 그러니 소설에서 작가의 잔소리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작중인물은
사라지고 작가만 남는구나. 게다가 근거를 알 수 없는 일본에 대한 절절 끓어 넘치는 애정은 정말 못 봐주겠더라. 작가가 일본을
사랑하면 혼자서만 조용히 사랑할 것이지 책에다가 이게 무슨 짓이야! 마커스 주삭의 <메신저>와 함께 외국 현대
소설에서도 멀어지게 만드는 강력한 책이다. 뮈리엘 바르베리 씨는 소설 그만 쓰고 그저 철학도로서 계속 나아가길 바란다.
한재호 <부코스키가 간다>
이 책은 순전히 '부코스키'에 대한 관심때문에 읽었다. 그렇다. '찰스 부코스키' 말이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읽는 내내 ‘이 책을 왜 읽고 있나’ 이런 의문이 계속 들었다. 제2회 창비 장편소설상
수상작이라는데, 정말 ‘장편’썼다고 ‘장’하다고 상준 거 같다는 생각만 들더라. 우리나라 문학상에 대한 회의감이 다시 한 번
들었고, 이런 책에 주례사 비평해주는 사람들은 또 역시 뭔가 싶어서 욕 나왔고. 이래저래 한국 현대 소설에서 계속 멀어지게
하는구나 싶었다. 한 가지 소득이 있다면 이런 책을 읽고 있으면 ‘나도 소설을 쓸 수 있다.’라는 자신감이 생긴다는 것 정도?
그러나 이런 몹쓸 자신감은 고전을 만나는 순간 바로 가차없이 박살이 난다.
조지프 히스, 앤드류 포터 <혁명을 팝니다>
이
책의 몇몇 주장에는 심히 동조할 수가 없다. 읽다 보면 ‘그래서 아무 것도 하지 말자는 건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책의 표지에는 체 게바라의 얼굴이 일회용 커피컵에 인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혁명의 상징이었던 체 게바라가 커피와 함께
소비되고 있다. 이 책은 그런 현상을 비판한다. 이른바 사회에서 일탈적 행위로 간주했던 급진적, 혁명적인 반문화(저항문화)
현상(히피나 펑크족 등등)이 자본주의와 만나면서 그 정신은 사라지고 오로지 소비현상으로만 남는 것을 비판한다. 혁명과 저항정신은
사라지고 패션과 장신구만 남았을 뿐이라는 지적이다. 체 게바라의 정신보다 그의 얼굴이 인쇄된 티셔츠가 불티나게 팔리는 현상이 바로
대표적인 예다. 때문에 이런 반문화(저항문화)는 계속 해서 또 다른 소비문화를 만들 뿐이라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제
모든 행동을 멈춰야 하는가? 과도한 소비문화를 비판하는 것은 동감한다. 그러나 소비물결을 타고 저항문화가 메인스트림에 오르면서
발생(한)하는 장점도 분명히 있지 않을까.
기타노 다케시 <위험한 일본학>
일본 사회에 대한 쓴 소리를 했다고 하는데, 이 아저씨가 머리에 똥이 가득 찼나 싶더라. 일본이 불행한 이유를 정치, 사회, 가정 편으로 나눠서 꼬집고 있는데 근거도 빈약하고, 노망난 늙은이가 추한 잔소리를 한다는 느낌만 들더라. 특히 가정 편에서 아이에게 예전과 달리 자기만의 방이 있는 것(그래서 히키코모리가 생겼다나)이 가정이 불행해지는 원흉 중 하나라는 소리는 어이가 없더라. 게다가 더 어이없는 건 모든 악의 근원이 민주주의, 남녀평등교육 때문이란다. 일본 사회 전체가 여성, 어린이 중심의 사회가 되다보니 일본이 힘이 없어지고 불행해졌다는데 더 말해 무엇 하리. 평소 이 노친네, 마초에 완전 가부장제 노예 같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지 정체를 밝히니 그처 황망할 뿐. 그나마 기대했던 유머조차 없어! 최악의 책이다. 이보게, 다케시! 일본이 불행한 이유는 당신 같은 꼰대들이 많아서라네.
루이스 버즈비 <노란 불빛의 서점>
책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 책에 관한 책을 좋아하는 편이다. 특히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쓴 책에 관한 이야기는 더 흥미를 끈다. 이 사람은 어떤 책을 읽었을까, 어떤 책에서 감명을 받았을까, 혹은 남들은 다 좋다고 하는 책인데, 별로였던 책은 없을까 등등. 호기심이 반짝한다. 하물며 책이 좋아 서점에서 일했다는 사람의 이야기란 얼마나 재미있을까! 하고 기대를 했는데…. 실망스러웠다. 책을 집어 들고 읽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어라? 계속 이러면 곤란한데….’ 하는 기분이 들었다. 책 좋아하는 사람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이 책은 솔직히 저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책에 관한(특히 도서관이나 책, 서점에 관한) 역사를 다룬 다른 책에서 다 볼 수 있는 그런 흔해빠진 이야기가 계속된다.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부분도 딱히 매력적이지는 않다. 그나마 서점에 가는 이유, 서점에서만 느낄 수 있는 흥분이랄까, 편안함을 다룬 구절은 꽤 공감 갔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기대 이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