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령
알베르 카뮈 지음, 안건우 옮김 / 녹색광선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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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는 어느 날 텔레비전을 보다가 크게 놀란다. “호수 위에 떠 있는 달그림자 같은 걸 쫓아가는 느낌을 좀 많이 받았고요.” 법정에서는 듣기 어려운 표현인 데다가 저런 문학적인 표현을 할 법한 사람이 아닌 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기 때문이다. 생경하고 어이없어 K는 잠시 고민에 빠진다. 저런 표현을 저 사람이 어디서 주워들은 것일까. “그대 저어오오 내 마음은 호수요.” 또는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이런 시 구절이 잠시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K는 그자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 더욱 놀란다. “이번 그 사건을 보면 실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뭐 지시했니, 지시를 받았니.” 뻔뻔하기 짝이 없는 궤변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호수 위에 떠 있는 달그림자를 쫓는다.... 이런 말을 믿으란 말인가? 사람들을 바보로 아는가? 그런데 그 바보 같은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했다. K는 또 한 번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저런 궤변을 믿는 자들이 그토록 많구나!

K는 어느 날 카뮈의 <계엄령>을 읽다가 크게 놀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이 여러 차례 반복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욱 놀랍게도 작품 속 인물들 중 여럿이 실제로 그 말을 믿기에 K의 눈동자는 더 커져갔다. 호수 위의 달그림자를 쫓았을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운운은 2025년 대한민국 서울에서 흘러나온 말이요, 혜성이 나타났고 페스트가 창궐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운운은 1948년 에스파냐의 작은 마을 카디스에서 흘러나온 말이다. 그리고 그 두 곳에서는 공교롭게도 계엄령이 선포된다. 정말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가?



점성술사: 물론, 아가씨, 확실하지! 하지만 조심해! 오늘 아침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거야. 잘 알겠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그 사실이 내 점괘를 뒤엎을 수도 있어. 나로서는 그 일어나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으니까 말이야! (p.40) 


에스파냐의 작은 마을 카디스에 불길한 혜성이 나타난다. 사람들은 카디스에 저주가 내릴 것이라 공포에 휩싸인다. 이윽고 독재자인 ‘페스트’(‘페스트’의 은유이자 실제 독재자의 이름이다)가 비서를 거느리고 나타난다. 그는 계엄령을 내린다. 포고령은 쉽게 알아듣지 못할 언어로 쓰였고 카디스 주민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당연하다. 그것이 그들이 노리는 바이기 때문이다. “민중이 애매모호한 것에 길들여지도록 하기 위한 거예요. 이해를 못 하면 못 할수록 더 말을 잘 들으니까”(p.63) 카디스의 총독은 마을을 새로 나타난 독재자 ‘페스트’와 비서에게 넘기고 달아난 지 오래. 총독뿐만 아니라, 종교인, 정치인, 법률가 등등 이른바 지도자라고 추앙받던 자들은 저마다 제 살길 찾기에 바쁘다. 판사만 하더라도 제 집 식구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다른 사람 걱정은 하지 말고 집안일이나 돌보시오. 가능하면 최대한 식량을 비축해 놔. 최대한 긁어모아. 최대한 지금은 긁어모을 때!”(p.53)

독재자의 충실한 비서는 그의 명에 따라 마을 주민들을 선별해 가슴에 표식을 달기 시작한다.  마치 나치가 유대인들에 그러했듯이..... 표식은 페스트 감염을 의미한다. 하나는 페스트 의심자, 둘은 페스트 감염자, 셋은 죽어야 할 자이다. 모두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기 시작한다. 접촉 불가. 이곳에서 사랑은 이제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안 되는 말이 되어 버린다. 마을 사람들은 페스트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런 가운데 이 작품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디에고’와 ‘빅토리아’는 사랑하는 사이로 페스트 창궐 전에 판사인 빅토리아 아버지로부터 결혼 허락까지 받은 상태이다. 사랑하는 사이라고 독재자의 비서에게 말했다가 디에고는 겨드랑이 밑에 표식을 받기까지 한다. 사랑을 말해서도 함께해서도 접촉해서도 안 되는 디에고와 빅토리아는 그들의 사랑을 지킬 수 있을까? 아니 목숨이라도 부지할 수 있을까. 



계염렁은 선포되었다. 그러니 명심해, 내가 도착하는 순간 감동적인 것은 더 이상 없다. 그따위 감동은 금지된다. 그 밖의 몇 가지 쓸데없는 것들, 예컨대 행복을 원하는 우습기만 한 초조함, 사랑에 빠진 이들의 얼빠진 얼굴, 풍광에 취하는 이기적인 작태, 불경한 풍자 행위 등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것들의 빈자리에 나는 조직을 이식한다. 처음에는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끝에 가서는 탁월한 조직이 너절한 감동따위보다 훌륭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p.75)


빅토리아는 페스트가 창궐하는 와중에도 디애고에게 ‘사랑’을 말하며 그의 곁을 떠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이런 시국에도 여자는 로맨스 타령만 하는가? 약간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카뮈는 내내 사랑을, 인간 감정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계엄 포고령에서도 독재자가 가장 먼저 금지하는 것은 ‘감동’이다. 행복이라든가, 사랑에 빠진 얼굴이라든가, 풍광처럼 아름다움에 취할 줄 아는 것이라든가 풍자나 조롱 같은 해학의 감정 등등. 왜 그들은 사랑이나 분노, 두려움 같은 인간적인 감정을 제거하려고 하는 것일까. 여기에 해답이 있다. 사랑이나 거기에서 비롯한 연대와 같은 인간적인 것이야말로 독재를, 페스트를, 파시스트를, 파시즘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거짓말을 넘어설 그 무엇이 된다고. 2025년 한국의 독재자를 무너뜨리기 위해 광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소리가 ‘연대’였음을 상기해본다면, 결국 카뮈가 역설한 그 사랑의 힘이 이 땅에서도 빛을 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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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4-11 1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 ㅑ ~ 리뷰 좋다.
역시 이 책을 사야겠습니다.
독재자는 깨어있는 시민을 싫어하고 남자들은 깨어있는 여자를 싫어하고.. 다들 등신들 같아요.

잠자냥 2025-04-11 12:28   좋아요 0 | URL
다락방의 손글씨가 더욱 빛을 발해.....

다락방 2025-04-11 15:05   좋아요 0 | URL
근데 우매한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자존심 상하는 일 아닌가요? 너무 자기 바보 인증같아요. 으..

독서괭 2025-04-11 18: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 ㅑ ~ 리뷰 좋다.
다락방님 손글씨도 참 멋지고요. 글내용도 멋지고요.
어쩜 시국에 딱 맞는 책이네요. K를 크게 놀라게 한 그대여…

잠자냥 2025-04-12 11:51   좋아요 1 | URL
실망이다 괭!! 저 아래 우리 괭들 사진 올렸는데!!!!

독서괭 2025-04-12 12:10   좋아요 0 | URL
엥!? 언제 올렸대?? 역시 사퇴할 때가 되었는가…

잠자냥 2025-04-14 09:40   좋아요 0 | URL
회장 독서괭을 파면한다!

독서괭 2025-04-14 09:57   좋아요 0 | UR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