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겨울 다섯 번의 화요일
릴리 킹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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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오고 있다. 이 여름에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랑이 피었다가 질까. 그 여름 한때에 그칠 사랑도 있겠고, 여러 번의 여름을 함께 보내는 사랑도 있으리라. 다른 모든 계절에 피었다 지는 사랑도 있겠지만 어쩐지 여름에 더 많은 사랑이 피어날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릴리 킹의 단편 모음집 《어느 겨울 다섯 번의 화요일》을 읽은 탓일지도 모르겠다. 제목은 ‘겨울’을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 나는 왜 여름을 떠올리는 것일까. 뜨겁게 타오르는 여름의 속성이 사랑의 그것과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뜨겁지만 결국 어느 지점에는 서늘한 가을에 자리를 물려주는 것까지도….

릴리 킹 또한 그런 사랑의 속성을 잘 알고 있는지 이 책에는 여름 한때 맹렬히 타올랐다가 사라지는 사랑이 여럿 그려진다. 첫 번째 작품인 <괴물>이 그 뜨거운 여름에 가장 어울린다. 열네 살 소녀 ‘캐럴’은 여름 방학을 맞이해 어느 대저택에서 상주 베이비시터로 근무하게 된다. 부모와 떨어져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자기만의 방을 갖게 된 캐럴. 이 대저택에는 노부부가 살고 있다. 이 노부부에게 베이비시터가 필요할까 싶은데, 알고 보니 파이크 부부의 장성한 딸이 아이들을 데리고 휴가 차 놀러와 있다. 캐럴은 아이들을 돌보는 틈틈이 여가 시간을 내 자기 방에서 <제인 에어>를 읽으며 일기를, 때로는 소설 같은 일기를 써내려 간다. 이런 등장인물들만으로는 아무리 봐도 캐럴에게 여름의 사랑이 찾아올 것 같지는 않다. 그럴 리가. 이윽고 파이크 부부의 아들 ‘휴’가 이 집안에 나타난다. 캐럴은 이렇게 쓴다. 그가 나타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캐럴의 일기장에는 휴의 이름이, 휴를 묘사한 문장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한다. 그런데 아뿔싸, 사랑의 감정은 공정하게 흐르지 않는다. 캐럴의 사랑 또한 그렇다. 열네 살 소녀가 마음을 키우기에 휴는 너무 나이가 많다. 이미 이십대를 훌쩍 넘긴 성인이다. 심지어 그는 유부남. 와이프와 트러블이 생기자 집으로 도망치듯 떠나온 터이다. 파이크 집안의 어른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엿들으며 이런 사실을 다 알게 되었으면서도 캐럴은 휴를 향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다. 그를 향한 열망은 더욱 커져만 간다. 집안사람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그의 장난기, 유머러스함, 농담, 짓궂음, 웃는 방식, 길고 가느다란 몸…. 그의 모든 면이 이 소녀를 사로잡는다. 그렇다면 휴는 어떨까? 휴에게 이 꼬마 숙녀는 단지 자기의 조카들을 돌보는 베이비시터에 불과했다. 관심조차 가지 않았던 이 소녀에게 휴가 눈길을 주게 되는 것은 바로 그 일기장 때문이다. 아, 저 꼬마가 나를 좋아한단 말이지? 갑자기 다른 눈길로 캐럴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앞서 말했듯이 그는 성년이고 유부남인 데다가 고용주의 아들이다. 그러나 캐럴은 미성년에 피고용인. 이 공정하지 못한 사랑은 어떻게 될까. 캐럴은 이 사랑이, 열병이 지나간 뒤, 이 여름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또 다른 여름의 소년도 있다(<도르도뉴에 가면>). 소년은 부모님이 여행을 떠난 사이 자신을 돌봐주러 온 대학생 ‘에드’, ‘그랜트’와 자유분방한 시간을 보낸다. 그야말로 꿈같은 나날이다. <괴물>의 캐럴이 베이비시터로 여름 한때 일하면서 어른을 사랑하게 된다면, 이 소년은 베이비시터들의 돌봄을 받으면서 어른의 사랑을 엿보게 된다. 엄숙한 부모 아래에서는 해볼 수 없던 것들-냉동식품을 먹으며 일상의 규칙에서 벗어난 생활을 마음껏 즐기는 소년. 이 소년의 눈에 한없이 자유로운 에드와 그랜드는 동경의 대상이 된다. 그중 ‘에드’가 더 소년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아, 어찌 아니하랴. 그랜트 또한 에드를 남몰래 마음에 품고 있었으니…. 서로가 서로를 동경하면서 훔쳐보던 여름의 기억은 이들에게 어떤 빛깔로 남게 될까. 확실한 것은 에드와 그랜트의 사랑의 크기, 아니 애정의 크기와 방향은 너무도 달랐기에 그 기억의 빛깔이 똑같은 색은 아닐 것이라는 점이다. 누군가에게는 어두운 갈색 또는 암적색에 가깝지 않았을까.

사랑해서는 안 되는 사람을 사랑하고 마음에 품고 살다가 더 큰 상처를 얻게 되는 이는 여기 또 있다. <시애틀 호텔>의 ‘나’는 대학 시절 짝사랑을 앓는다. 고백이라도 시원하게 해보고 거절당하면 그나마 억울하지나 않을 텐데, 고백은커녕 짝사랑의 대상이 다른 사람과 연애하면서 생기는 고민을 일일이 들어주기에 바쁘다. 좋아하지 않는 척, 관심 없는 척, 아무렇지 않는 척척척..... 그럴 수밖에. 하필 그 짝사랑의 대상이 동성 친구 ‘폴’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 마음을 숨기고 친구처럼 함께 지내던 ‘나’는 폴이 결혼할 즈음에야 자신이 게이라고 털어놓는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돌아온 싸늘한 반응에 ‘나’는 폴과 그렇게 멀어진다. 이 한 번의 상처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았던 것일까. 폴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여전히 약해지는 ‘나’- 중년이 되어버린 지금에도 폴의 이름은 여전히 ‘나’를 설레게 하고, 그런 폴에게서 그 오랜 세월을 돌고 돌아 연락이 온다. 시애틀의 한 호텔에서 만나자는 폴의 제안에 한껏 들뜬 마음으로 재회를 기대하며 나가는 ‘나’. 이 만남은 과연 ‘나’의 바람대로 흐를까.

《어느 겨울 다섯 번의 화요일》에 그려지는 사랑의 모습은 대개가 이렇게 어긋난 형태이다, 때문에 상처와 고통, 씁쓸함을 남기고 사라진다. 어른을 사랑하거나 동경하는 소녀/소년이 등장하기도 하고(<괴물>, <도르도뉴에 가면>), 성정체성이나 성적 기호가 다른 이를 마음에 품고 절망하기도 한다(<시애틀 호텔>, <도르도뉴에 가면>), 이미 짝이 있는 사람을, 그런 줄 알면서도 욕망하게 되어 상처를 한 가득 받기도 하고(<괴물>, <타임라인>), 금기와도 같은 관계이기에 더욱 욕망에 불붙는 사랑도 있다(<망사르드>). 사춘기의 열병 같은 사랑을 그리거나 주인공이 10대인 경우도 많은데(<괴물>, <도르도뉴에 가면>, <북해>), 작가 자신의 결코 행복하지는 않았을 10대 시절의 반영이기도 하겠지만, 도저히 이성(理性)으로는 아닌 줄 알면서도 번번이 바보 같은 선택을 하고 마는,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랑의 속성, 그리고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상처받고 나락에 떨어질지언정 결국 회복하고 한 뼘쯤은 자라는, 성장통 같은 사랑의 속성을 그리기에는 10대를 화자로 삼는 것이 어울렸기 때문은 아닐까.  

물론 짝사랑하던 대상으로부터 환대와 응답을 받는, 보기 드물게 행복한 경우도 있지만(<어느 겨울 다섯 번의 화요일>), 이 단편집에서 그려진 여러 형태의 사랑을 지켜보고, 또 그런, 그와 비슷한 사랑을 해본 이들은 안다. ‘미첼’에게 그가 그토록 원하던 ‘버섯 수프’를 사다 준 ‘케이트’의 그 다정한 마음조차 언젠가는 식어버릴 것임을…. 서로 마음이 통했다는 경이로움을 느끼고, 함께 버섯 수프를 나눠 먹으며 온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행복에 도취하는 순간도 있지만,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듯, 따뜻한 수프도 언젠가는 식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또 여름을 기다릴 것이고, 누군가를 위한 버섯 수프를 기꺼이 마련할 것이다. 사랑이, 외로운 사람이 또 다른 외로운 마음을 찾아가듯이.

사랑은 한 사람을 구원하기도 하지만 파멸로 몰아가기도 한다. 잘못된 상대를 선택했을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 어찌할 수 없음, 바로 그 불가항력이 사람들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사랑은 사람에게 어김없이 찾아오고 머물다가 또 그렇게 제자리를 떠난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흐르고 다시 또 봄, 여름이 찾아오듯이…. 내가 기억하는 가장 뜨겁던 여름은 1994년의 여름이다. 그런 여름은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았지만 세계는 나날이 더 뜨거워지고 있다. 사랑도 그럴 것이다. 사람들은 한 사랑이 저물었을 때 그런 사랑은 또 없을 것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단지 형태만 다를 뿐 그보다 더 깊고 뜨거운 사랑이 찾아오기도 한다. 사랑을 잃고, 다른 여름을 기다릴 당신에게도, 당신의 사랑도 부디 그렇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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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5-15 10: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도우의 소설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을 보면요, 거기에 이런 글귀가 나옵니다.

‘네 사랑이 무사하기를, 내 사랑이 무사하니까.‘

그 구절이 생각나는 리뷰의 마지막이네요. 이 책 아주 좋을 것 같아서 저도 읽어보겠습니다.

저는 어제 잠자냥 님께 땡투하고 책 산 사람이었다가 오늘 잠자냥 님께 땡투하고 책 산 사람 될 예정입니다. 이만 총총.

잠자냥 2025-05-15 10:31   좋아요 0 | URL
아니 갑자가 땡투 적립금이 우수수... 늘어났더라니... 이 인간, 못 말려!
그나저나 다락방아... <달리기의 기쁨 - 온몸으로 불안을 깨부수며 나아가는 해방에 대하여> 이런 책 나왔더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5-05-15 12:05   좋아요 0 | URL
저 요즘에 달리기 너무 하기 싫고 또 너무 못해서 좌절하고 있습니다 ㅋㅋ 그렇지만 책은 어쨌든 담아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만 담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5-05-15 12:51   좋아요 0 | URL
오 다락방님 이도우 읽으셨군요!
책 정리 하셨다더니, 정리할 게 끝나지 않을 예감 ㅋㅋㅋ

잠자냥 2025-05-15 13:14   좋아요 0 | URL
엥? 안 달리고 있다고...?! 놀라운데...?!

다락방 2025-05-15 14:51   좋아요 1 | URL
아뇨 어제도 달리긴 했는데 영 안달려진다... 몸이 무겁게 느껴지는 건 몸이 무거워서겠죠.. (먼 산)

Forgettable. 2025-05-15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4년에 어떤 여름을 보내셨는지 궁금하네요 ㅎㅎ 사랑이야기라 주저되지만 이 책도 담아 갑니다.

잠자냥 2025-05-15 13:15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달랑 선풍기 두 대 달린 교실에서 여름방학 보충 수업받는 중이었습니다.......-_-;;
심지어 교실은 4층이라... 너무 더웠....

독서괭 2025-05-15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악 폴 만나러 가는 “나” 엄청 상처받을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ㅠㅠ
언젠가 식어버릴 사랑이지만, 그럼에도 하지 않을 수 없는 거겠죠?

잠자냥 2025-05-15 13:16   좋아요 1 | URL
말해줄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닌 폴 그놈이 그럴 줄이야..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5-05-15 16:27   좋아요 0 | URL
진짜 말해줄 건가요? ㅋㅋㅋ

잠자냥 2025-05-15 16:29   좋아요 0 | URL
진짜...? 원한다면 비댓으로 알려줌. ㅋㅋㅋㅋㅋㅋㅋㅋ

2025-05-15 16: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5-15 16: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잠자냥 2025-05-15 17:06   좋아요 0 | URL
머야 이야기 듣고 기절한 거냥 괭?!ㅋㅋㅋㅋ

2025-05-15 17: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서괭 2025-05-15 17:09   좋아요 1 | URL
사실 알려달라고 하면 잠자냥님이 “안 알려주지롱 메롱” 직접 읽어보아라 하실 줄 알았는데 진짜 알려줘서 놀라고
내용에 또한번 놀람요 ㅋㅋ

케이 2025-05-15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994년의 여름 맞은편 동에 살던 친구 집에 가서 여름방학 동안 밀린 일기를 쓰던 기억이 나요. 제 인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땀띠가 났던 여름이었죠. 전 더운 걸 좋아하고 심지어 더위를 즐기는 사람이었는데요. 작년 여름을 겪은 후로 여름을 너무 너무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크흑 다가오는 여름이 두렵군요 ㅜㅜㅜㅜ (아이들은 아무리 더워도 하원 후에 30분 이상 놀이터에서 놀아야만 하거든요.)

이 책 너무 재밌을 것 같아요. 끝을 하나도 말씀해주지 않으시니 궁금해서라도 읽어봐야 할 것 같아요.
해피엔딩이 하나라도 있어서 다행이네요. 변해버릴 사랑이라도 제대로 받아보고 싶었던 때가 있었죠...
솔직히 전 이제 그런 사랑을 준다고 해도 싫습니다. ㅋㅋㅋㅋ 닥친 다른 일 하기도 너무 벅참요.

잠자냥 2025-05-15 14:47   좋아요 1 | URL
밀린 일기 ㅋㅋㅋㅋㅋ 최근에 읽은 책에서 독일에서 살다 온 아이가 한국 학교에서 일기 검사하는 걸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더라는 구절이 생각나네요...(강남순, <질문 빈곤 사회>) ㅋㅋㅋ 그 아이가 한국 친구들한테 물어보니까 숙제니까 하는 거지! 이랬더라는데 ㅋㅋㅋㅋㅋㅋ 암튼 밀린 일기 쓰시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그 더운 날;; ㅋㅋ
그해 정말 더웠죠. 좀만 덜 더웠어도.. 제 수능 점수가 10점은 올라갔을 텐데... (라고 주장해봅니다)

ㅋㅋㅋ 닥친 일 버거워서 사랑하기 싫다는 말에 빵 터졌습니다.
이 책 재미나요. 나중에 읽어보세요~

새파랑 2025-05-16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책 땡투 ㅋ 잠자냥님 리뷰보니 딱 제 취향이네요~!! 여름이었다 ㅋㅋ

잠자냥 2025-05-16 16:59   좋아요 1 | URL
땡투 고맙게 받아서 테니스 치고 맥주 사마실 때 보탤게요!
재미나게 읽으세요. 주말마다 비가 내려서 테니스 망했네요. 책 많이 읽는 주말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