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기 창비세계문학 41
하야시 후미코 지음, 이애숙 옮김 / 창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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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중고서점에 가서 책을 판다. 갖고 있어봤자 짐만 될 것 같은 책들을 주로 처분한다. 나는 웬만해서는 책을 팔지 않는데, 그래도 가끔 팔고 싶은 책이 나온다. 대부분은 책을 판매한 돈으로 다시 중고 책방에서 다른 책을 산다. 엄밀한 의미로는 책 교환이 맞는 셈이다. 그런데 며칠 전에는 책을 팔아서 생긴 돈으로 다른 책을 사지 않았다. 중고 서점에서 눈에 띄는 책이 없기도 했지만, 올해 이미 책을 많이 산 터라 그것들을 다 읽을 때까지는 책 사는 것을 자제하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마침 집에 원두가 딱 떨어졌다. 그래서 나는 책을 판 돈으로 원두를 200그램 사고, 여과지도 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마트에 들러서 이것저것 먹을거리도 샀다. 책 여섯 권과 바꾼 돈 3만 7천 원은 그렇게 순식간에 온전히 먹을거리로 변한 것이다. 뱃속으로 들어갈 것들과 교환해서 집으로 오는 길에 문득 하야시 후미코의 <방랑기>가 떠올랐다. 작품 속 나, 즉 하야시 후미코도 책을 판다. 읽은 책은 거의 되파는 것 같다. 그녀 또한 그렇게 생긴 돈으로 먹을거리를 산다. 나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는 그 음식이 배고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사용되고 나는 커피나 맥주, 과일처럼 허기를 채우는 것과는 거리가 먼 품목이다. 기호식품이랄까. 굳이 먹지 않아도 상관없을 그런 것들이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내 곁을 떠난 책에도, 맞바꾼 음식에도 크게 특별한 감정이 들지는 않는다.

하야시 후미코는 어떨까? <방랑기>의 그녀는 늘 굶주림과 싸운다. 배고픔이 가장 가까운 친구이다. 글을 써서 근근이 끼니를 이어가지만, 그 돈은 몇 푼 되지 않고, 어머니와 새아버지까지 부양하는 처지다. 저축은커녕 돈이 주머니에서 머물 틈이 없다. 그러기에 그녀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생활 전선에 뛰어든다. 잡일꾼, 사무원, 여공, 카페 여급, 식모 등등 닥치는 대로 일한다. 그러면서 틈틈이 책을 읽고 문학가의 길을 꿈꾸며 글을 쓴다. 그 치열한 기록이 바로 <방랑기>이다.

이 작품을 읽노라면 크누트 함순의 <굶주림>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함순의 <굶주림> 속 인물, <방랑기>의 인물도 모두 작가 자신을 대변한다. 문학에 대한 열정을 지닌 채, 글쓰기를 멈추지 못하는 주인공들이 모두 배고픔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삶의 문제 때문에 한없이 고통받는다. 그리나 <방랑기>의 그녀도 <굶주림>의 그도 생활에, 삶에, 인생에 무릎 꿇지는 않는다. 바로 거기에서 묘한 감동이 일어난다.

<방랑기>의 주인공은 하야시 후미코, 그녀 자신이다. 1920년대 여자 혼자 몸으로 세상 온갖 풍파에 맞선 것이다. 그녀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부모 부양의 의무까지 지고 있다. 더욱이 가족들은 그녀가 책상 앞에 앉으면 돈이 저절로 나오는 줄 알고 있으니 그녀로서는 더 미칠 노릇이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남자에게 기대지도 않는다. 오히려 남자에게 기대는 것을 한심하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카페 여급으로 일한다는 이유만으로 남자한테 두들겨 맞기까지 한다. 그러면서도 자기 밥벌이는 굳건히 해나간다. ‘후지 산이여! 너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는 여자가 홀로 여기 서 있다’ 이렇게 외치며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추구해나간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응원을 보내게 된다.



내 일은 성냥갑을 붙이는 일이나 재봉틀 부업과는 다르다. 책상 앞에 앉기만 하면 원고가 돈이 된다고 생각하는 가족들에게 지금의 내 심정을 솔직하게 말해봤자 소용도 없다. 차라리 재봉틀 페달을 밟으며 부업을 하는 편이 즐거울지도 모르겠다. (284쪽)

목에 분을 바른 것을 보고 노무라 씨는 정말로 여급답다며 질책한다. 네, 저는 여급이라 어쩔 수 없어요, 라고 했다. 여급이 뭐가 나쁜 거야? 무슨 일이라도 해야지. 다른 사람이 먹여살려주지도 않는데……. (384쪽)


<방랑기>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배고픔’ 그리고 ‘문학’이 아닐까. 그녀 머릿속에는 프롤레타리아도 부르주아도 없다. 그저 흰쌀밥으로 만든 한줌의 주먹밥이 먹고 싶을 뿐이며, ‘남아 있는 배추를 씹으며 하얀 쌀밥의 맛을 상상’하기를 즐긴다. 톨스토이나 체호프의 작품을 즐겨 읽으며 그들의 천재성에 감탄하고 그들을 닮고 싶어 하지만 언제나 밀려오는 것은 좌절뿐이다. ‘천재를 언제나 꿈꾸지만 이 천재는 굶주린 채 먹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범재로 끝나버릴’것 같다. ‘도대체 어디에 가면 평화롭게 밥을 먹을 수 있는가’(346쪽) 고뇌할 뿐이다.

허기와 싸우기 위해 오늘도 생활 전선에 뛰어든다. 그녀의 굶주림은 이토록 처절하지만 불쌍하다거나 가여운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밝고 씩씩한 모습으로 생활에 맞서기에 그런 것일까? 어찌 보면 한없이 짐처럼 여겨지기 쉬운 가족에게도 따스한 애정을 잃지 않았기 때문일까? 나도 그녀처럼 이렇게 삶의 무게에 지지 않고 살아나가야 할 텐데, 용기를 얻거나 마음을 다잡게 된다. 아마도 이런 점 때문에 <방랑기>가 출간 무렵 그토록 많은 사람에게 읽혔던 게 아닐지.

배고픔과 문학에 대한 개인적 열정만이 가득한 기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시절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이나 풍경 묘사도 빠지지 않는다. 그런 묘사를 통해 당시 사회에 대한 그녀만의 예리한 시선도 엿볼 수 있다. 자신처럼 빈곤 속에서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은 연민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사회를 바라보는 눈은 날카롭다. 그렇다고 통렬하게 비판적이거나 하지는 않다. 문학적으로도 아름다운 표현이 때때로 눈에 들어와 뇌리에 남는다. 이따금 보이는 그녀가 직접 쓴 시들도 그 진실함에 가슴을 울린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바보처럼 살아야 하는 걸까? 언제까지고 쌜룰로이드 냄새나는 쌜룰로이드 생활이다. 하루 종일 덕지덕지 삼원색을 칠하며 태양과 격리된 비뚤어진 공장 안에서 벌레처럼 그저 한없이 긴 시간과 청춘과 건강을 착취당한다. 어린 여자들의 얼굴을 바라보면 너무나 슬퍼서 가슴이 저려온다. (40쪽)

함께 자는 사람들의 저마다의 고통이 늦은 밤 방 안에 가득 차면서 나는 나 혼자만의 방이 갖고 싶어졌다. (228쪽)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이력서와 대조하면서 대체로 인품, 용모, 능력이 어떤지로 결정한다. 잠시 구경거리가 되고 나서, 엽서로 통보한다는 답변. 이런 일은 매번 똑같아서 익숙하지만 정말 재미없다. 잘못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아주 예쁘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런데 내게는 아무것도 없다. 그저 튼튼한 몸만 있을 뿐. 살면서 우선 어떻게든 생활해나간다는 인간의 중요업무에서 언제나 나는 비참하게 실패했다. 나는 타락하기 딱 좋은 레디메이드. 고용주는 날카로운 눈을 가졌다. 이런 여자 따위를 고용할 리가 없다. (317쪽)

하숙생활은 인간을 관료형으로 만들어버린다. 전전긍긍 주위를 살피게 된다. 큰 인물이 될 수 없다. 월말에는 이불을 말리고 시골에서 온 우편환을 바꾸러 간다. 그것만으로도 하숙의 시간은 지나가버리지요. 제 경우가 아니에요. 여기 사는 학생들 얘기에요. 하이네형도 없고 체호프형도 없다. 그저 자기 자신을 잃어가는 훈련을 받고 있을 뿐. (337쪽)


살아갈수록 인생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끝내 이룬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결국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의 꿈을 잃어버리지 않고, 끝까지 지켜내며 그것을 위해 얼마나 노력해 나갔느냐의 차이라는 생각이 든다. <방랑기>의 ‘나’ 그리고 <굶주림>의 ‘나’, 그들이 배고픔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문제에 무릎을 꿇고 그저 하루하루 먹고사는 일에만 몰두했다면, 그리하여 글쓰기를 멀리했다면 하야시 후미코도, 크누트 함순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방랑기>는 생활의 고단함 속에서도 굽히지 않고 글을 써 내려간 한 여자의 생생한 기록으로 내게는 참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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