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0
뮤리얼 스파크 지음, 서정은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처음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문득 한 영화가 떠올랐다. 학생들이 일제히 일어나 '오, 캡틴, 마이 캡틴'하고 외치던 <죽은 시인의 사회>-  <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의 브로디 선생은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과 조금은 비슷한 느낌을 준다. 그녀를 따르는 '브로디 무리' 소녀들도 키팅을 따르던 학생들을 떠올리게 한다. 처음에는 정말 그랬다. 응? 그런데 이상하다.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아서 바로 이 '진 브로디' 선생은 '존 키팅'과는 좀 다른, 어떤 면에서는 꽤 뒤틀린 인물임을 깨닫게 된다.

<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를 장바구니에 담을 때는 그런 이야기를 기대했다. 꽤 진보적인 여선생이 어느 보수적인 학교에 들어가서 고리타분한 교육을 받고 자라는, 그러니까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인 여학생들에게 새로운 교육과 사상을 불어넣어 그들을 일깨우고, 다른 세계로 이끌어주는 작품이지 않을까 하는. 실제로 작품 초반에는 이 기대가 어긋나지 않는다. 브로디 선생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마샤 블레인 여학교'는 1930년대 가치관을 충실하게 학생에게 가르치 보수적인 학교이며 그곳 학생들 또한 그런 교육에 익숙하다.

그 시절, 진 브로디 선생처럼 진보적인 색채를 지닌 선생들은 보통은 진보적인 학교에 가서 자신의 교육 이념을 펼치곤 하는데, 그녀는 정반대라는 점에서 이채롭다. 브로디 선생은 그런 학교에 가봤자 자신이 할 일이 없다고 여겨, 오히려 마샤 블레인 여학교처럼 보수적 색채가 짙은 곳에서 가르치기를 고집한다. 자신이 팔을 걷어붙이고 할 일이 있는 '교육 공장'에 남기를 바란다. 거기서 그녀는 '밀가루 반죽을 부풀릴 효모 역할'을 하겠노라고, '아직 말랑말랑한 나이의 소녀를 내게 주면 그 애는 영원히 내 것이 될 거'(148쪽)라고 말한다. 때문에 그녀는 학교와는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사건건 교장과 부딪힌다. 교장에게 진 브로디는 당연히 눈엣가시이며 어떻게 해서든 학교에서 쫓아내고 싶은 존재이다.

샌디와 제니 등 브로디의 총애를 받는, '브로디 무리'는 그녀의 가르침을 받으며 점차 다른 학생들과는 구별되는 특징들을 갖추며 성장한다. 그들은 멀리서 봐도 '브로디 선생 제자라는 태'가 난다. 허락된 과목 이외의 문화, 예술, 철학 등 교장의 표현을 따르자면 부적절하고도 쓸데없는 과목들을 잔뜩 배운 그녀들은 '브로디 걸스'로 학교에서 유명하다. 어떤 아이들은 그 무리를 경멸하고 미워하지만 또 어떤 아이들은 그 무리에 끼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런 기회는 쉽사리 허락되지 않는다. 브로디 선생의 입맛에 맞아야만 그 무리에 끼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로 그녀의 모순, 어떤 면에서는 인간적 결함이라고 볼 수 있는 점이 드러난다. 진 브로디는 자신의 기준이나 눈높이에 맞지 않는 학생에게는 거침없는 표현을 써가면서 비하한다. 어쩌다 브로디 무리에 끼어들었지만 도무지 자기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소녀인 메리에게는 서슴지 않고 폭언을 한다. 이처럼 진 브로디는 자신의 기준에 비추어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존재에게는 경멸 섞인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고 배척한다. 자신이 전지전능한 '효모'가 되어 자기 입맛에 맞는 말랑말랑한 '빵'을 만드는 일에 몰두한다.

메리를 향한 거침없는 발언을 목격하게 되면서부터 브로디 선생에 대한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어라, 이 여자 좀 이상한데? 못됐다. 이런 느낌. 그러다 그 기묘함은 그녀가 무솔리니나 히틀러와 같은 파시스트를 동경하다 못해 옹호하는 장면에서 정점에 이른다. 더욱이 뒤늦게 밝혀지지만 그녀는 제자 중 한 사람을 프랑코 정권에 봉사하라면서 스페인에 보내기까지 한다. 심지어 그녀는 자신의 좌절된 사랑,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끝내 이루어지지 않은 자기의 성적 욕망을 제자 중 한 사람이 대신 이루어 주기를 꿈꾸고 교묘하게 부추긴다. 그때쯤에는 이 여자 참 기이하다, 뒤틀렸군, 이런 선생 곁에 있다면 제자로서 마음이 참 힘들고 복잡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이 작품은 학생들의 그 복잡 미묘한 감정 또한 놓치지 않는다. 샌디의 시선을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브로디 선생이 그려지는데, 그 시선을 좇다보면 분명, 샌디나 제니처럼 조금 똑똑했던 제자들이 어느 순간 진 브로디 선생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처음에는 단순히 그녀의 독특함이나 남다른 생각에 매료되어 그녀를 추종하고, 개성 있는 무리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묘한 흥분을 느끼며 똘똘 뭉치던 아이들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의 선생님이 지니고 있는 모순을 깨닫고 그녀를 냉정하게 바라본다. 그것이 바로 '성장'이리라.   


샌디는 문득 자신들 역시 행군중인 브로디 선생의 파시스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봐서는 모르지만, 사실 브로디 선생의 필요에 맞춰 무솔리니 무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줄지어 걷고 있는 파시스트들. 그거야 그렇다 치고, 걸가이드를 향한 브로디 선생의 경멸에는 질투와 모순과 오류가 있었다. 어쩌면 걸가이드가 너무 강력한 파시스트 라이벌이라서, 그리고 그 사실을 견딜 수 없어서인지도 몰랐다. (43쪽)

“브로디 선생이 누군데?”
“내 선생님, 교양 넘치는 여자였지. 그 여자 자체가 에든버러 축제나 다름없었다고나 할까. 자기 아파트에 불러 차를 내주고 전성기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어.”
“무슨 전성기?”
“자기 인생의 전성기. 한번은 여행을 갔다가 이집트인 가이드에게 연정을 느끼고 돌아와 우리에게 그 이야기를 해준 적도 있었어. 몇 명 예뻐하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나도 그중 하나였지. 당신도 아는 다리 찢기 묘기로 그녀를 즐겁게 해줬거든.”
“하지만 미친 사람은 아니었어. 미치긴. 말짱했지.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고, 연애 이야기도 전부 해줬거든.” (36쪽)


작가 뮤리얼 스파크는 이 작품에서 '샌디'의 관점으로 진 브로디 선생이라는 모순되지만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인물을 그려나간다. 브로디는 늘 자신의 전성기를 운운하면서 아이들에게 사람은 자기의 전성기가 언제인지 알아야 한다고, 그 사실을 잊지 말라고 이야기하지만 작품 후반부로 갈수록 그녀의 전성기는 이미 끝난 지가 오래임을 학생들은 물론 독자도 알게 된다. 아마도 그 순간은 학생들이 자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그녀의 모순을 깨닫고, 하나의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싹을 틔우기 시작했을 즈음이 아닐까.


“내 생각엔.” 제니가 말했다.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는 이제 끝이 난 것 같아. 계속 누가 자기를 배신했는지 알고 싶어 하거든. 전혀 예전의 브로디 선생이 아니야. 전에는 언제나 투지로 가득 차 있었잖아.” (167쪽)


이렇게 학생들은 진 브로디가 빚어내는 말랑말랑한 빵과 같은 존재에서 서서히 그녀와의 거리두기에 성공하면서 한 독립된 인간으로 '성장'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선생이 전성기를 지났을 때 오히려 연민을 느끼고, 한 인간으로서 부족한 점을 발견했을 때 안타까워할 줄 아는 어른이 되어간다. 겉보기에는 카리스마 넘치지만 그 안에는 그만큼의 모순도 존재하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브로디 선생. 그녀는 틀림없이 결함을 지닌 인물이다. 그 결함이 때로는 학생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말랑말랑한 빵들에게 늘 해로운 효모 역할만을 한 것은 아님을, '브로디 무리'가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면 알 수 있다. 한없이 이상적인 인물이었던 키팅 선생과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진 브로디는 인간적인 결함도 갖춘, 그러나 결코 미워할 수 없는 개성 넘치는 선생으로 오래 기억될 것 같다. '브로디 걸스' 그녀들에게도 그렇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