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터 캐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6
시어도어 드라이저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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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시어도어 드라이저 <아메리카의 비극>이 새 번역으로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되었다. 반가운 마음에 이 책을 장바구니에 담았는데, 그에 앞서 책꽂이에서 몇 년째 잠자고 있는 <시스터 캐리>부터 읽자는 생각이 들었다. 650쪽이 넘는 꽤 묵직한 두께이다. 그래서 계속 읽기를 미뤘던 것 같다. 세상에는 재미난 책이 많으니까, 이것부터 읽자, 이것부터 읽자 하다 보니 <시스터 캐리>는 지금까지 밀리기만 했다. 그런데 이 책, 생각보다 재미나다. 진작 읽을 걸 그랬다. 예전에 ‘재미 100% 보장 세계문학고전’이라는 페이퍼를 쓴 적이 있는데, 그 글을 쓰기 전에 이 책을 읽었다면 분명 그 목록에 추가했으리라.

<시스터 캐리>는 한마디로 가난한 처녀의 도시 상경기이다. 가족들이 애칭으로 ‘시스터 캐리’라고 부르는 열여덟 살 아가씨 ‘캐럴라인 미버’가 고향인 컬럼비아시티를 벗어나 부푼 꿈을 안고 대도시인 시카고로 떠나면서 작품은 시작한다. 캐리가 기차에 올랐을 때 지닌 것이라고는 작은 트렁크와 어깨에 멘 가짜 악어가죽 가방, 점심을 넣은 작은 종이 상자, 노란 가죽 손지갑뿐이다. 지갑에는 기차표와 시카고에 사는 언니의 주소가 적힌 쪽지, 그리고 사 달러가 들었을 뿐이다. 때는 1889년 8월. 캐리는 ‘무지와 젊음의 환상으로 가득 찬, 수줍으면서도 밝은 처녀’이다. 이런 소개만으로도 앞으로의 전개가 예상된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순박한 시골 아가씨가 도시로 가서 살아가기란 그리 쉽지 않으리라는 것, 온갖 유혹과 세파에 시달리다 끝내 만신창이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그런 불안한 마음이 든다. 실제로 작가는 이윽고 이렇게 말한다.


열여덟에 고향을 떠난 처녀는 둘 중 하나기 되기 마련이다. 도움의 손길을 만나 잘되거나, 아니면 미덕에 대한 대도시의 기준을 금세 받아들여 타락하거나, 그런 환경에서 균형을 잡고 중도를 걸을 가망은 전혀 없다. 도시는 나름의 교활한 간계들을 갖추고 있어서 아주 약하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유혹하는 사람과 다를 바 없다. 그곳에는 최고의 교양을 갖춘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온 마음을 담은 표현으로 유혹하는 커다란 힘이 있다. (12쪽)


이런 아가씨가 어린 데다가 꽤 예쁘장한 외모를 지녔다면, 더 쉽게 도시의 먹잇감이 된다. 지적인 면에서 그리 뛰어나지 않지만 캐리는 예쁘장한 외모와 다 자라면 제법 태가 날 몸매를 지녔다. 아니나 다를까, 캐리에게 한 사나이가 접근한다. 그의 이름은 ‘드루에’- 시카고에서 제법 잘나가는 회사 영업사원인 그는 젊고 잘생기고 호방한 성격을 지녔다. 기차에서 캐리를 보고는 넉살좋게 말을 걸어온다. 캐리는 짐짓 경계하면서도 멀끔하고 부유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허물어져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시카고에서 다시 만날 약속을 하기에 이른다. 이런 장면에서도 독자는 캐리를 걱정하게 된다. 오, 캐리, 그놈은 사기꾼에 바람둥이일지도 몰라, 절대 그 겉모습에 속지 마. 오, 순박한 아가씨가 이렇게 도시의 먹잇감이 되는구나, 쯧쯧…….

그런 예상은 얼마쯤 맞아간다. ‘제대로 무장하지도 못한 주제에 도시를 굴복시켜 제 것으로 만들고 자신의 발밑에 공손히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게 하겠다’는 꿈을 꾸며 도시 정찰에 나선 캐리. 그녀는 시카고 언니 집에서 형부와 함께 살게 되지만 한눈에 봐도 그들 생활은 궁핍하고, 형부는 캐리를 그다지 반가워하지 않는다. 하루 빨리 캐리가 일자리를 얻어 생활비를 보태도록, 제 밥값을 하도록 줄곧 눈치를 준다. 궁핍에서 비롯된 언니 부부의 금욕적인 생활은 도시에서의 활기차고 호화로운 생활을 꿈꾸던 캐리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 된다. 게다가 캐리는 도시의 실생활이 자신이 꿈꾸던 것과 크게 다름을 며칠 만에 알아차리게 된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고, 남다른 기술도 없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공장 노동자로서 기계 부품처럼 쉴 새 없이 단순 노동을 하는 것뿐이다. 그러고 받는 돈은 고작 주급 사 달러 오십센트, 언니에게 생활비를 주면 그녀 손에 남는 것은 오십센트 뿐. 그럼에도 첫 급여를 받기도 전에 어디다 쓸 지 순식간에 정하고는 마음속으로 주저 없이 돈을 물 쓰듯 써버린다.

도시의 일원이 되어 스스로 돈을 벌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살 수 있다는 즐거움에 찬 생활도 잠시. 고달픈 노동 속에 생기를 잃어가던 캐리는 덜컥 병이 나고, 며칠 앓고 나니, 일자리도 잃어버린다. 형부의 눈치 속에 아픈 몸을 이끌고 또 다른 일자리를 찾아 거리로 나서지만 도시는 이 어린 아가씨에게 더없이 차갑기만 하다. 그렇게 며칠을 고생하던 끝에 거리에서 우연히 드루에를 만나게 된다. 드루에는 캐리가 공장에서 일할 때 보았던 볼품없고 저속한 남자들에 비해, 아니, 비할 수 없을 만큼 눈부시다. 캐리가 꿈꾸던 도시의 이상적인 모습을 다 갖춘 남자였다. 깔끔한 옷차림, 밝고 여유로운 태도, 자신에게 친절하고 상냥한 모습까지..... 게다가 그는 캐리가 안쓰러운지 물심양면으로 도와준다. 화려한 레스토랑으로 데려가 잘 먹이고, 캐리가 사고 싶던 옷과 구두 등을 선물하고, 빌려주는 것이라면서 돈까지 준다. 캐리는 그가 제공하는 안락함과 편안함, 부유한 분위기에 서서히 젖어들게 되고, 마침내 언니 집을 떠나 드루에와 동거에 들어간다.

이런 캐리의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절로 조마조마해진다. 오, 이런 어리석은 아가씨 캐리, 이 세상에 공짜는 없어. 무엇이든 그 대가를 치러야만 해. 이 잘생긴 바람둥이가 노리는 것은 바로 너의 젊은 육체, 예쁘장한 외모 그런 것들이라고. 그것이 사라지면, 아니 그것을 갖고 나면 그는 너를 뻥 차버릴 거야! 정신 차리라고 이 불쌍한 여자야, 하고 말이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어느 정도 이런 수순으로 전개되지만 완벽하게 그런 예상대로 흐르지는 않는다. 허영과 속물적인 욕망도 있고, 삶의 강렬한 쾌락에 빨리 눈 떴고, 물질적인 것을 얻고자 하는 야심도 있는 캐리이지만 그녀는 완전한 허영덩어리는 아니며, 제법 총명하다. 게다가 드루에도 아주 나쁜 놈은 아니다. ‘여자들을 쫓아다니기는 해도 해를 끼칠 뜻은 전혀’ 없다. 그는 여자에게 다가가서 자기의 매력에 굴복하게 만드는 것을 즐길 뿐이다. 타고난 욕망에 이끌렸고 이를 주된 기쁨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 또한 허영심이 넘치고 뽐내기를 좋아했으며 캐리처럼 좋은 옷에 속아 넘어간다. 캐리도 드루에도 천성적으로 악하지 않은 이들이라 두 사람은 그럭저럭 함께 동거생활을 잘 꾸려나간다. 그런 여기에 ‘허스트우드’라는 새로운 남자가 나타나면서부터 문제가 벌어진다. 이 두 남자와 캐리 사이에 기묘한 삼각관계가 펼쳐지면서 ‘시스터 캐리’의 인생은 예상 가능하면서도 뜻밖의 모습으로 전개된다(여기까지가 이 작품의 100여 쪽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이 작품을 읽는 재미는 이렇게 살짝 예상을 어긋나는 전개에 있다.

<시스터 캐리>가 처음 출간된 1900년 무렵, 이 작품은 ‘부도덕’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온갖 비난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이 작품의 부도덕한 면이 과연 무엇인지, 캐리가 정말 도덕적이지 않은 인물인가, 자기의 욕망을 이루고자 가차 없이 사람을(남자들을) 이용하고 차 버리는, 팜므파탈이자, 타락의 여신으로 그려지는가 궁금해 하면서 책장을 넘겼다. 그런데 캐리는 전혀 그런 인물이 아니어서 조금 뜻밖이었다. 작품이 외설스러운가 싶었는데, 그 또한 아니다. 이 책에서 가장 야한(?) 장면이라면 키스 정도이다. 하하하, 그것 참. 드루에와 함께 살게 되는 장면에서도 이렇다 할 섹스신 하나 없다(그래서 조금 아쉽?). 알고 보니, 도덕의 기준이 요즘과 아주 달랐던 것이다. 당시로서는 캐리가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남자와 동거한다는 설정 자체가 부도덕이었다. 그러나 그때로부터 100여 년이 흐른 오늘날은 좋아하는 남녀가 함께 사는 것쯤은 흔한 일이 아닌가.

그렇다고 캐리가 부유하게 살고자, 온갖 수단으로 돈을 벌고 그 돈을 흥청망청 쓰는 것도 아니다. 남자의 돈을 받고, 남자로부터 선물을 받고, 남자가 제공하는 집에 살면서 안락함을 누리는 것, 그 자체로 ‘비도덕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더욱이 캐리는 드루에에게 그런 것들을 받을 때마다 마음속으로 주저한다. 캐리가 정말 속물인 데다가 뻔뻔하고 아주 이기적인 여자였다면,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이, 게다가 하나라도 더 받아내려고 안간힘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캐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드루에 뿐만 아니라, 이런 태도는 허스트우드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드루에, 허스트우드와 함께 하는 도시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캐리는 외모가 훨씬 좋아지고, 태도도 바뀌고 옷차림도 달라진다. 이제 도시의 온 남자들이 그녀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된다. 캐리는 그것으로 얼마쯤 만족감을 느끼지만 그뿐이다. 혼자 힘으로 서야 할 때가 왔을 때 그녀는 남자들의 ‘경우에 어긋나는 특별한 호의를 원치’ 않는다. 일자리가 필요했지만 ‘거짓된 주장이나 호의로 그녀를 사려고 하는 남자는 결코 원치’ 않게 된다. 캐리는 ‘정직하게 생활비를 벌고’ 싶다(322쪽). 더욱이 드루에나 허스트우드 등과의 관계에서도 결정적인 순간에(이 책을 읽을 이들을 위해 여기에서는 자세히 밝힐 수 없지만) 인간적인 면모를 잃지 않는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들이 원해서 그녀에게 다가왔고, 그녀를 얻고자, 그녀의 마음을 얻고자 모든 것을 제 스스로 쏟아 붓지 않았는가?


저는 제 앞으로 100만 달러를 갖고 있습니다. 당신이 온갖 사치를 할 수 있도록 해드릴 수 있습니다. 저한테 요구만 하시면 뭐든 다 해드리겠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돈 자랑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당신을 사랑하기에 당신의 소원이라면 뭐든지 이루어 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된 것도 사랑 때문입니다. 딱 삼십 분만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589쪽)


오히려 캐리의 마음을 얻고자 했던 남자들이 캐리를 허영덩어리에 속물로 봤던 게 틀림없다. 돈으로 사랑을 포장하고, 돈만 있으면 모든 게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캐리는 부유함이 상징하는 것들을 동경하고 그 세계에 속하고자 애쓴다. 그러나 캐리는 100% 그런 여자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녀에게서 그렇지 못한 면모를 봤을 때 그들이 더 안달이 나고, 조바심 냈던 것은 아닐까. 100여 년 전에 캐리는 결혼하지 않은 채 남자와 동거했다는 이유로 부도덕의 표본처럼 평가받았지만, 오늘날의 기준으로 대부분의 인간은 캐리 정도의 허영과 욕망, 성공이나 돈에 대한 갈증을 느끼며 살아간다. 이것은 허스트우드나 드루에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시스터 캐리>는 19세기 시카고와 뉴욕을 배경으로 자본과 돈이 주는 환상과 그것을 끊임없이 욕망하고 그로 말미암아 굴곡진 삶을 살아가는 여러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모습이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작품의 해설에서는 도시에서 온갖 사건을 겪은 ‘캐리’가 끝내 어떤 성장이나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는 면에서 한계를 드러낸다고 평하고 있던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캐리는 냉혹한 도시, 그 허영과 욕망으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궁핍을 겪고, 안락함도 누리면서 몇 년 사이에 인생의 우여곡절을 제 나름으로 경험한다. 그런 가운데 좋은 옷과 우아한 환경, 그런 세계에 한없이 이끌렸던 여인이 그 세계의 공허함을 엿보게 된다. 남자들의 부질없는 말에 더는 흔들리지 않고, 남자들은 변할 수도 있고 실패하기도 한다는 것을 그녀는 알게 된다. 그렇기에 그들이 아무리 듣기 좋은 말로 아첨을 해도 캐리에게는 이제 소용이 없다. 그녀를 움직이려면 돈이 아닌, 그녀가 갖지 못한 우월함, 더 타고난 우월함이 있어야 한다. 드루에도, 허스트우드도 아닌 ‘에임스’를 보며 ‘이 사람은 행복해질 수도 있을 거야. 혼자 힘으로. 강한 사람이니까.’ 생각하게 되고 그가 속한 세계에 호기심을 느끼는 캐리는 그런 의미에서 한 단계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책과는 담을 쌓았던 캐리가 도시에서 올라와서는 그나마 통속적인 대중소설을 읽다가, 마지막에 이르러 <고리오 영감>을 읽는 장면은 그래서 의미 있다. 그럼에도 캐리는 아직 이 도시의, 자본주의 사회의 헛된 약속이 주는 공허함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흔들의자에 앉아 발을 흔든다. 그 모습조차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노예가 되어 욕망과 허영의 불꽃을 좇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멀리 있는 것을 향해 끊임없이 손을 내미는 인간의 모습. <시스터 캐리>는 그런 인간의 모습을 때로는 가혹하리만치 냉철하게 또 때로는 연민 어린 시선으로 그리고 있다.


“세상에는 한번 살아보고 싶은 삶이 수없이 많지만, 불행히도 우리는 한 번에 한가지씩밖에는 누릴 수가 없습니다. 멀리 있는 것을 향해 아무리 손을 내밀어 봐도 소용이 없지요.” (6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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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란공 2020-10-12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찐한 장면은 안나오지 말입니다-.-;;

잠자냥 2020-10-12 10:26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아쉽습니다. -.-;;

Falstaff 2020-10-12 10: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우, 이 작품은 저한테 좀 사연이 있는 책이군요. ㅋㅋㅋㅋ 81년인가 학원사 세계문학전집으로 읽었다가, 십여 년 쯤 지나 술자리에서 우연히 드라이저 이야기가 나와 한 번 이 책 얘기했다가, 아이고, 맞은 편에 앉은 분이 글쎄 <시스터 캐리>로 논문을 쓰신 모교 영문과 대선배로 밝혀졌습니다. 코피 줄줄.... ㅋㅋㅋ 그래도 Theodore Dreiser, [th] 발음 겁나 강조하면서, 자네가 드라이저를 읽어봤다는 게 참 기특하네, 어깨 툭툭 두드림을 당했습지요. ㅋㅋㅋㅋㅋㅋ
그 양반 아직 살아 있는지 몰라......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0-10-12 10:28   좋아요 0 | URL
81년에 이 책을 읽으신 이분! ㅋㅋㅋㅋㅋ 기특하십니다. ㅋㅋㅋㅋ 어깨 툭툭 두드림 당할만 하네요. ㅋㅋㅋㅋㅋ
띠어도어 ㅋㅋㅋ

coolcat329 2020-10-12 14:07   좋아요 0 | URL
ㅋㅋㅋ 상상을 안 할 수 없네요

단발머리 2020-10-12 10: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참... 이 책 읽어봐야겠어요. 소개해주신 간략한 줄거리도 괜찮지만 잠자냥님께 이런 칭찬을 받은 작품이라면...
그냥 지나칠수 없습니다!!!

잠자냥 2020-10-12 10:28   좋아요 0 | URL
한 번 꼭 읽어보세요. 일단 재미있습니다. ㅎㅎㅎ

다락방 2020-10-12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참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또 책 사야겠네요. 너무 읽어보고 싶어요. 두꺼운 책이며 야한 장면은 없다니 조금 저어되지만, 그래도 사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잠자냥 2020-10-12 10:43   좋아요 0 | URL
아, 그러게 말이에요. 전 캐리가 드루에랑 한 살림 차리던 날 드디어 나오는가 꼴깍 침을 삼켰는데...... 거참 -_-

다락방 2020-10-12 10:31   좋아요 1 | URL
드라이저 왜그랬을까요? 제가 한 수 가르쳐줘야 할까요? 19금 쓰는 법..... ( ˝)

잠자냥 2020-10-12 10:42   좋아요 0 | URL
이게 아마 캐리가 드루에랑 동거한다는 설정만으로 부도적한 작품이라고 온갖 비난을 받아서리... 그런 장면을 쓰고도 삭제한 건 아닐까 눈물을 머금고 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님이 이 책을 읽고 그 부분만 다시 재창작....ㅋㅋㅋ

Falstaff 2020-10-12 11:15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아메리카의 비극>에서는 잘 생기기만 했지 한심한 청춘인 크라이드가 청순한 숫처녀 여공 로버타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가 버리는 게 나오는데요, 그 책에서도 야한 장면은 절대 안 나옵니다. 시절이 시절이라 독자가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줘야지요. ㅋㅋㅋㅋㅋ
드라이저가 무척 많은 형제 자매 속에서 자랐는데, 아빠가 (화재로) 사업을 말아먹으면서 무지하게 가난하게 살았답니다. 그래 형제들은 주로 교도소를 들낙거렸고, 자매들은 매춘부가 되기도 했답니다. 창녀가 된 누이를 모델로 해서 작품을 쓴 것이 바로 <시스터 캐리>라고, <아메리카의 비극> 해설에 적혀 있더군요.

다락방 2020-10-12 11:19   좋아요 0 | URL
아 사람 사는 모습이야 한 부모 밑에서도 제각각인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누이는 매춘부가 됐는데 드라이저는 작가라니... 마음이 좀 거시기하네요.....

레삭매냐 2020-10-12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스터 캐리, 옆지기에게 듣고서는
예전부터 호시탐탐 중고서점에서
노리고 있는데 당최 나오질 않네요.

물론 도서관에서 빌렸다가 펴지도
못하고 강제반납당한 추억도 쿨럭...

잠자냥 2020-10-12 10:31   좋아요 2 | URL
오, 옆지기 님이 재미나게 읽으신 모양이군요?
전 이 책 읽고 별로면 중고에 내다팔려고 생각했는데, 그냥 갖고 있기로 했습니다. ㅎㅎㅎ

레샥매냐 님은 아마 이 책 읽으시면 시어도어 드라이저 전작 읽기에 들어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니면 최근 나온 을유문화사판 <아메리카의 비극>부터 시작하시고 이 책으로 옮겨가는 수순은 어떨지-

레삭매냐 2020-10-12 11:18   좋아요 1 | URL
넵, 추천해 주신 대로 <아메리카의 비극>
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시스터 캐리>는 과 숙제로 만났었다고
하더라구요 ㅋㅋ 스무 고개 하는 그런
느낌이었죠.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 - 뒤라스가 펼쳐 보이는 프랑스판 ‘부부의 세계’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장소미 옮김 / 녹색광선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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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작품은 읽는 재미가 크지는 않다. <연인> 정도를 제외하고는 읽고 난 뒤 ‘스토리’가 크게 기억에 남는 작품이 거의 없다. 그럼에도 뒤라스 작품을 계속 찾아 읽는 까닭은 ‘스토리’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문장을 읽는 맛, 문장 사이 빈 여백에 머물며 가만히 생각하게 하는 순간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은 뒤라스 작품 가운데 드물게 읽는 재미와 행간을 거니는 즐거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뜨거운 여름 휴양지, 관광객이 그리 많이 몰리지 않는 어느 작은 섬마을에 다섯 남녀가 찾아온다. ‘사라’와 ‘자크’, ‘루디’와 ‘지나’, 그리고 ‘다이아나’. 사라와 자크에게는 다섯 살 난 아들이 있으니 일행은 모두 여섯이다. 부부이자, 친구사이인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견딜 수 없다고 느끼면서도 늘 다 함께 있어야 한다고, 심지어 밤에도, 저녁에도 함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른바 절친들이다. 몇 해째 여름이면 늘 이 외딴 섬마을에서 함께 휴가를 보내는 이들, 그런데 이번 여름은 너무나 덥다. 그들의 입에서는 내내 ’덥다‘는 말이 떠나지 않는다. 아무 할 일 없이, 수영하고 함께 밥을 먹고, 시시껄렁한 잡담이나 나누며 뜨겁다, 덥다를 아침부터 밤까지 줄곧 되뇌는, 어찌 보면 참 지겨워 보이는 휴가 풍경이다.

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이들은 서로 불만족스러워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사라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그 누구보다 가장 권태로워 보인다. 사라가 집착하는 대상, 그래서 당연(?)하게도 그녀가 무척 사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상은 어린 아들뿐이다. 자크에게는 저 지겨운 더위만큼이나 넌더리가 나는 상태인데도, 자크는 사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다지 관심이 없다. 거기에 사라는 루디와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으며, 루디와 지나 부부는 아침부터 밤까지 사사건건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벌인다. 물론 사라와 자크도 지겹도록 싸운다.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모질고 기나긴 다툼’이 해변 전체의 밤들을, 휴가를 망치고 있다. ‘하잘것없지만 삶을 망치는 다툼들’이 휴가지에서도 끈질긴 더위처럼 그들에게 들러붙어 있는 것이다.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그 권태로움과 일상의 지겨움이 책장을 넘어 내 주위까지 덮쳐오는 기분이다. 그 뜨거운 태양과 함께.

그런데 이 권태로운 그들 앞에 한 사건,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두 개의 커다란 사건이 일어난다. 하나는 이 섬에서 어느 청년이 지뢰가 터져 폭사하고, 바로 그 다음날 낯선 남자가 멋진 보트를 타고 휴양지에 나타난 것이다. 지뢰 사건으로 하루아침에 아들을 잃은 노부부는 아들의 사망 신고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하면서 며칠이고 버티고, 이 무거운 분위기는 섬 전체를 지배한다. 한편 새롭게 나타난 ‘남자’는 이 다섯 사람에게 호기심과 욕망의 대상이 되는데, 자크와 루디 등 남자들은 그가 가진 멋진 보트를 군침 흘리며 탐내기 바쁘다. 남자와 친해져서 보트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는 꿈을 꾼다. 이와 달리 여자들은 남편이나 익숙한 남자 친구가 아닌, 새로운 남자의 등장에 사뭇 호기심이 인다. 그중에서도 사라의 반응이 남다르다. 그들은 그렇게 그 남자와 서서히 가까워지고, 사라는 그로 인해 조금씩 권태에서 벗어나 자신의 닫혀 있던 욕망의 문을 열게 된다.

이 작품을 읽다 보면, 누구라도 그러할 텐데, 부부란 뭘까, 결혼이란 뭘까, 사랑이란 과연 무엇일까 생각하게 된다. 자크와 사라는 허구한 날 싸우면서도 ‘7년째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고 한다. 루디와 지나는 더 격하게 싸운다. 싸울 때마다 늘 끝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누군가의 눈에는 “첫눈에도 영원한 커플”처럼 보인다. 게다가 루디는 아내인 지나를 증오할 때조차 좋아한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실제로 그렇게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사람을 욕망하고, 그 사람과 관계를 맺게 된 이후로도 그 사랑을 온전히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느냐이다. 아내가 밤에 다른 남자 꿈을 꾼다고 말하자, 나도 그렇다는 남편. 그래, 꿈이야 꿀 수 있지. 하지만 꿈이 아닌 현실에서 다른 남자나, 여자를 욕망하고 실제 행동으로 옮긴다면, 그래도 이 부부 사이에 여전히 사랑이 남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게다가 사라는 ‘더는 자기 소유의 집을 아파트를 한 남자와의 공동생활을 원하지’ 않는다. 젊었을 땐 이런 것들을 갈망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른 식으로 살고 싶고, 그래서 남은 날들을 다른 곳, 호텔의 익명성 속에서 보내고 싶다. 그런데 현실은 이 지긋지긋한 남편과 똑같은 친구들에 둘러싸여 전혀 새롭지 않은 휴가지에서 더위와 씨름하고 있는 것이다.


“부부가 갖고 있는 서로에 대한 지식, 아마 그게 제일 형편없는 지식일걸.” (52쪽)


“따지고 보면 세상에 서로가 서로에게 안 갇혀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90쪽)


다섯 친구 가운데 유일하게 솔로인 다이아나는 이렇게 말한다. “체험된 모든 사랑은 변질된 사랑”이라고. “가장 이상적인 부부조차 사랑을 장려하지 않는다”고. 사랑에 냉소적인 다이아나의 말처럼 체험된 모든 사랑은 변질된 사랑일지도 모른다. 확실히 제아무리 이상적인 부부조차 사랑을 장려하지는 않는 것 같기도 하다. “20년 동안 변하지 않고 한결 같은 여편네랑 살면 온전할 수가 없는 법이야. 영원히 만신창이가 되는 거”라고 이야기하는 식료품상인의 말처럼 결혼으로 묶이는 남녀의 삶은 동화에서 그려지듯 ‘그리고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이후에 더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이 모든 삶의 과정을 지뢰로 폭사한 아들을 둔 노부부는 함께 겪었으리라. 그리고 이제는 아들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일을 마주하고 있다. 그 오랜 세월동안 노부부가 변함없이 처음 그때처럼 서로 사랑했다고 믿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권태도, 삶이 주는 아름다움도, 구질구질함도, 고통도 같이 겪어왔을 것이다. 때로는 저 무시무시한 삶에 압도당해 사랑이 자리할 공간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사랑엔 휴가가 없어.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아. 사랑은 권태를 포함한 모든 것까지 온전히 감당하는 거야, 그러니까 사랑엔 휴가가 없어.” “그게 사랑이야. 삶이 아름다움과 구질구질함과 권태를 끌어안듯, 사랑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어.” (306쪽)


그럼에도 나는 그 노부부의 삶 속에 사랑이 잠시 인생의 이런저런 일에 압도당해 그 설자리를 잃었을지라도, 그로 말미암아 다른 사랑을 꿈꾸는 일은 없었으리라 믿고 싶다. 잠시 사랑의 자리가 삶의 구질구질함이나 권태로 인해 낮아졌을지언정, 아예 사라지지 않았기를, 그랬으리라고 믿고 싶다. 그렇기에 그 모든 일들을 겪고도 지금 함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지금 사라와 자크에게서 사랑은 휴가를 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 집을 떠나려고 한다. 아니, 어쩌면 이미 집을 나갔을지도 모른다. 자크의 그 이중적인 생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래서 나는 사라가 ‘타키니아의 작은 말’을 보러 가기 보다는, 배를 타고 그 강을 건너가기를 바랐다. 이제와서 자크와 함께 타키니아의 작은 말을 보러 떠난들, 그들의 집나간 사랑이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그 작은 말이 정말 그렇게 예뻐 보일까. 사랑이라는 감옥이 아닌, 결혼이라는, 부부라는 감옥에 갇힌 그들의 모습은 왠지 이 작품의 더위처럼 지리멸렬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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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0-10-08 15: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간혹가다가 너무 행복해서 미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뒤라스의 대표작 <부영사>를 찾아 읽습니다. 금속활자로 된 책으로, 김화영, 김치수 등과 함께 파리가 아닌 엑상프로방스에서 학위를 받은 최현무, 소설 쓸 때의 필명 ‘최윤‘의 번역입니다. 그럼 곧장 삶이 너무 지겨워지기 시작합니다. ㅋㅋㅋㅋㅋㅋ 역시 뒤라스를 읽으면서 재미를 기대하긴 힘들지요.
딱 하나 빼고요. <복도에 앉은 남자>. 왜 그런고하니, 이거 완전 포르노거든요. ㅋㅋㅋㅋㅋㅋㅋ 절판된지는 무척 오래고 도서관에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김인환, 민음사에서 <연인> 낸 사람의 번역으로 기억하는데요. 그 작품만큼의 포르노는 순문학에서 읽어본 적이 없을 지경입니다. ㅋㅋㅋㅋㅋ
모르긴 몰라도 민음사 <연인>이 단편집 <복도...남자>에 실린 단편 <애인>을 거의 복사한 걸 거예요.

잠자냥 2020-10-08 15:44   좋아요 1 | URL
크하하하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 이런 <복도에 앉은 남자> 바로 검색 들어갑니다. 왠지 제목부터 뭔가 야하네요............... 복도에 앉아서 뭐하는지 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0-10-08 15:48   좋아요 1 | URL
복도에 앉아 뭐 하냐고요? 아이 뭘 그런 걸 물어보셔..... ㅋㅋㅋㅋㅋㅋㅋ

문학사상사 1986년, 김인환 역 맞습니다.

잠자냥 2020-10-08 15:53   좋아요 1 | URL
책값이 무려 2,880원 밖에 안 하는군요! ㅋㅋㅋㅋㅋ 일단 중고등록 신청이라도 해봅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도서관 찾아봐야지. 아마 있어도 서고에 있겠군요......(에잉 없네요)
암튼 폴스타프 님께 땡스 투 28원을 기증하고 싶습니다. ㅋ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0-10-08 20:06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일단 중고등록...

2020-10-15 1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0-15 1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문명과 혐오 - 젠더·계급·생태를 관통하는 혐오의 문화
데릭 젠슨 지음, 이현정 옮김 / 아고라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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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혐오>를 읽고 난 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코로나 시대 이후로 나는 이 지구에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바이러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왔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니, 거기에 한 가지 더 덧붙여야 할 것 같다. 인간은 이 지구에 ‘혐오’를 양산하는 존재라고. 이 말을 듣고 많은 이들이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칠지도 모르겠다. 혐오라니? 내가? 난 아니야 절대!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나부터 돌아보자면, 나 자신도 ‘혐오’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은 아니다. 소수자나 여성, 어린이, 장애인 등 약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지극히 당연히 생각하면서도 내 마음속 깊은 곳에도 특정 대상에 혐오는 존재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코로나 이후 특정 종교에 대한 혐오가 생겼다(8.15 집회 이후). 그 집회에 참석했던, 번번이 이름만 바꾸는 특정 정당에 대한 혐오도 있다. 그리고 매번 마스크 시비로 난동을 부리거나 마스크 쓰라는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이른바 ‘오륙남’에 대한 혐오도 생겼다. 이런 내 마음속 은밀한 혐오를 일기장이 아닌 곳에 글로 남긴다는 것이 부끄럽기는 하다. 그럼에도 <문명과 혐오>의 저자 ‘데릭 젠슨’이 세계의 차별과 혐오 문화에 대해서 이보다 더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자기 생각을 적나라하게(때로는 포르노를 본 후 여성에게 느끼는 생각까지) 밝히고 있기에, 나 또한 이 책에 대한 감상을 남기려면 진실로 솔직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특정 집단이나 대상에게 ‘혐오’를 갖고 있다고 드러내놓고 말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그렇지만 잘 돌아보면 최근 몇 년 사이 우리나라에서는 ‘혐오 발언’이 아무렇지 않게 유통되고, 그것이 혐오라고 지적하면 도리어 ‘표현의 자유’ 및 ‘역차별’을 운운하는 기이한 현상까지 쉽게 볼 수 있다. 차별과 혐오가 일상에 공기처럼 퍼져 있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문명과 혐오>의 저자는 인류 문명 자체가 파괴와 착취, 혐오를 바탕으로 성장했음을 수많은 사례를 들어 조목조목 분석한다. 아니, 인류가 혐오를 기반으로 성장했다고? 문명이 그렇게 이루어졌다고? 그게 무슨 과대망상이야?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기 쉽다. 나 또한 혐오 집단은 인종 차별이나 소수자 혐오, 성차별을 일삼는 특정 집단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처럼 마음속에 작은 혐오를 지니고 살지만, ‘세련되게’ ‘교묘히’ ‘잘’ 감추는 법을 알고 있어서, 그걸 숨기고 살아간다. 그러나 저자는 ‘가장 덜 세련된 사람들만이 혐오를 그대로’ 드러낼 뿐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는 ‘자기이익, 전통, 경제, 옛날 종교’와 자신의 혐오를 뒤섞어버린다고 지적한다. 잘 알다시피, 나치조차 자신들의 미덕을 주장했다. 그러면서 어떤 형태의 혐오는 우리에게 잘 보이지 않는지, 안 보이는 형태의 혐오는 얼마나 많은지 질문한다. 혐오집단이라고 하면 우리나라의 ‘일베’나 저 미국의 ‘KKK’ 같은 단체 떠올리기 쉬운데, 그렇게 드러내놓은 혐오집단보다, 아니 그에 못지않게 보이지 않는 혐오의 위험성을 폭로하는 것이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혐오를 양산하고 있다는 말은 문명의 원동력이 된 경제 성장 자체가 혐오와 착취를 기반으로 삼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다이아몬드와 같은 보석, 강철, 설탕, 석유, 초콜릿, 담배 등등 인류가 탐을 냈던 거의 모든 자원은 노예 노동이 빚어낸 상품들이다. 꼭 노예 노동이 아니더라도, 그런 자원이 생산되는 아시아나, 아프리카, 중남미 국가들의 원주민 삶의 터전을 짓밟고, 착취한 결과물이다. 다국적 대기업들이 이윤을 추구하면서 일상적으로 저지르는 잔학행위들은 지금도 사람들의 눈을 가린 채 교묘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인류는 그 상품을 소비하고, 생산하는 데 일정 역할을 하고 있다. 노예 노동 상품들이 너무나 부드럽게 전 세계를 돌아다니고 있다. 저자의 말처럼 ‘전 지구적 경제 체제에서 살고 있고, 이제 노예제는 그 어느 때보다 지구화’된 것이다. 데릭 젠슨은 혐오라는 이름보다 ‘경제’라는 이름으로 더 많은 잔학행위가 벌어지는 사회, 생명에 대한 혐오, 멸시, 무시가 우리 경제의 단단한 기초를 이루고 있는 오늘날 문명사회의 어두운 면을 폭로한다.

저자의 이런 주장에 반기를 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럼 먹고 살지도 말란 말인가? 어떤 물건을 소비하고 그 물건을 생산하는 데 노동자로서 일조하는 일은 이 사회를 살아가는 데 피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하고. 게다가 그게 어떻게 혐오로 이어지느냐고, 지나친 일반화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예컨대 ‘큰 석유회사에서 일하는 개인들 각각은 혐오 범죄를 저지를 의도가 없을 거야. 단지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것뿐이지.’라고 말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에 대해서도 단호하다. 그렇게 하다보면 스스로 끔찍한 잔학행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라고. 그에 따르면 기업과 혐오 집단은 사촌간이다. 같은 문화적 요구에서 나온 다른 형태일 뿐이다. 세상 사람들의 주체성을 빼앗는 것, 모든 사람, 모든 것을 사물로, 객체로 바꾸는 것이 목표이다. 기업들은 폐허를 만드는 자들로, 그들이 손만 대면 무엇이나 돈으로 바뀐다. 숲, 바다, 산, 강, 사람 등 생명체를 죽은 것, 즉 돈으로 바꾸어놓는 그들의 역할은 문화적으로 정당화되고 지지받고 보호받는다. 그렇기에 그들은 더욱 거리낌 없이 행동하게 된다.

자본과 성장을 앞세운 사회는 경쟁을 부추기고, 그것은 다시 분노와 혐오의 물결을 만들어낸다. 이런 사회에서 인간은 인간이 아닌 ‘대상’이 된다. ‘혐오는 타자를 개인으로 보지 않고 사물로 본다. 타자가 아예 안 보일 수도 있다.’ 경쟁이 정당화 되고, 경쟁을 통해 더 많은 부를 소유하는 것, 즉, ‘소유욕이 강한 사람들이 존경받는 문화’, 즉 전체를 희생하고서라도 개인이 이익을 보는 행동이 보상받는 문화라면 그 문화는 전쟁을 좋아하고, 여자와 어린이를 학대하며, 경쟁이 심하며 개인들은 안전하지 못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데릭 젠슨은 끊임없이 자신이 속한 미국 사회의 예를 드는데, 멀리 가지 않고도 지금 혐오로 물든 이 땅의 현실을 보면 알 수 있다. 경쟁이 일상화 되고, 그 경쟁을 통해 무언가를 많이 소유하는 것이(특히 돈) 존경으로 이어지는 사회, 권력을 쥔 자들이 그 권력을 키우기 위한 목표를 정하고, 나머지들은 하나같이 그 권력의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몰두하는 사회. 바로 지금 우리의 자화상은 아닌가? 이런 분위기에서 자란 10대와 20대들이 여성을 성적 착취의 도구로만 보고 ‘노예’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붙여서 소비한 N번방과, 그 비슷한 방들, 날마다 일어나는 디지털 성범죄, 성범죄……. 이 모든 일들은 경제 성장이라는 이름 아래, 혐오를 양산하고 오히려 부추기는 사회가 낳은 끔찍한 결과이다.

이 책에서는 ‘사람들이 중산층에서 떨어져 나가서 예전에 익숙했던 삶의 방식을 유지할 수 없을 때, 전에는 당연히 누릴 수 있다고 여겼던 자원을 가질 수 없게 될 때’ 불안해지고 혐오를 저지르기 쉽다고 말한다. 미국에서는 남북전쟁 이후, 노예제 폐지 이후 린치 횟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노예제가 폐지되기 전, 노예주들이 노예의 목숨과 노동에 무제한적인 권한을 가졌던 때에는 노예주가 노예를 혐오할 필요가 없었다. 단지 자기보다 ‘낮은 존재’로 내려다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다가 이와 같은 자원을 마음대로 쓸 수 없게 되었을 때 예전의 얕잡아보던 느낌이 ‘혐오’로 바뀐다. 그리고 종종 그것은 대대적인 폭력 행위로 드러난다. 이렇게 겁을 주는 행동은 자신이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원 또는 사람을 어떤 이유에서건 가질 수 없게 된 사람들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경기가 나쁘거나 경제가 몰락하는 시기에 혐오 행위가 늘어나는데, 현재 우리나라도 자기 것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특정 세대와 성별을 중심으로 혐오가 당연하듯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누군가를 ‘통제’하고자 하는 욕구는 타인을 대상, 사물로 인식하고자 하는 욕구와 관계가 있다. 그렇기에 만일 자신이 혐오하는 존재가 ‘대상’이 아니라, ‘사물’이 아니라 나와 똑같은 생명을 지닌 한 사람의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인류는 혐오를 멈출 수 있다. ‘당신이 타인들을 물건으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하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바라는 대로 대우하고 인식하는 것이 당신한테도 가장 이롭다고’ 느낀다면 인류는 혐오를 걷어낼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N번방에 있는 여성들이 자기의 ‘노예’가 아니라 나와 똑같이 수치심을 느끼고 고통을 느끼며, 모멸감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면, 그 많은 남자들이 그 방에 들어가서 여성을 ‘소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를 혐오하는 사람들은 그 대상을 한 개인으로 상상할 수 있는 능력,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다양성은 타자를 수많은 방식으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다. 선입견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다르게 타인을 파악할 줄 아는 것이다. 타인을 다양한 방식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다양성을 파괴하게 될 것이다. (340쪽)


데릭 젠슨이 생각하는 진짜 다양성이란 ‘나무, 물고기, 인간을 어떻게 해야 가장 잘 써먹을까 하는 생각도 하지 않고 어떻게 해야 그들을 이용해서 이익을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털끝만큼도 하지 않으면서 그들을 마주할 수 있는 인간 공동체의 능력이다.’ 다양성은 생산에 대한 생각 없이 사는 삶이자 그냥 마실 수 있는 깨끗한 물, 댐으로 막히지 않고 산에서 바다까지 흐르는 강물, 풍부한 야생의 문화들이다. 다양성은 사는 것처럼 사는 삶이다. 다양성은 인간과 생명체의 통제되지 않으며 통제될 수 없는 흐름이다. 이런 다양성을 통해, 하나의 대상에서 개개인의 개성을 갖춘, 인격을 갖춘 한 사람으로, 생산의 도구가 아닌 생명을 지닌 존재로, 경제적 이윤을 남길 대상이 아닌 생명을 지닌 존재로, 자연을 비롯한 사람 하나하나를 생각할 수 있다면,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다면 이 지구에 혐오는 더 이상 뿌리 내릴 수 없을 것이다.

경제는 살아 있는 것을 죽은 것으로 바꾼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은 새로운 홀로코스트나 마찬가지이다. 홀로코스트 때 제노사이드 참가자들 대부분은 유대인 아이들에게 직접 총을 쏘지 않았고 가스실에 가스를 틀지도 않았다. 관료 대부분은 메모를 하고 전화 통화를 하고 회의에 참가했을 뿐이다. 나치는 인간을 죽였지만 오늘날 우리는 홀로코스트에 참여했던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처럼 단지 지구를 죽이고 있다. 생산하고 소비하면서 말이다. 대기업 간부들은 나치 고위층처럼 어떻게 생산과 통제를 극대화할지, 어떻게 가장 효과적으로 인간과 자연을 착취할지 여념이 없다. 이 시스템에 반기를 드는 것, 의문을 갖는 것만으로도 혐오를 멈추는 데 일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은 채, 우리가 홀로코스트에 동조한 수많은 아이히만처럼 이 착취 경제와 그 경제를 바탕으로 성장한 문명이 주는 혜택에 젖어 그저 기쁘게 소비하기 바쁘다면 ‘우리 스스로 조용히 가스실’로 들어가, 혐오의 구덩이 속에 온 인류가 끝내 절멸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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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시즈 2020-09-25 14: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만큼 인상적인 후기 잘 읽었습니다. 지구는 천국처럼 완벽한 곳도 아니지만 지옥처럼 멀 해도 안되는 불가능의 지역도 아니지요. 그래서 우리가 더 나은 선택을 함으로써 더 좋아질 수 있는 기회의 땅인 것이겠지요. 알라딘밖에서도 유명해지신 잠자냥님의 글을 이렇게 보니 저도 많이 배우고 느낍니다. 제 공간에도 들러주셔서 감사드리고요. 종종 뵙겠습니다~

잠자냥 2020-09-25 14:54   좋아요 2 | URL
네, 율리시즈 님 말씀처럼 이 책은 인간이 더 이상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게,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아직 있다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울 속에서도 희망이 있다고 해야 할까요. ㅠ_ㅠ.... 더 나은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바라봅니다. 저부터 그렇고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하고요, 서재에서 종종 뵙겠습니다.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0
오라시오 키로가 지음, 엄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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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만나는 작가 오라시오 키로가. 책을 받아들고 <깃털 베개>부터 읽는다. 짧은 작품인데 매우 강렬하다. 소름이 쭈뼛쭈뼛 돋다가 머리맡에 놓인 베개를 꺼림칙하게 쳐다보게 된다. 이 작품을 읽는 이들은 모두 그러하리라. 작품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녀의 신혼생활은 몸서리가 날 만큼 두려운 나날이었다. 남편의 냉혹하고 모진 성격 때문에 천사처럼 온순한 금발 신부가 어릴 적부터 동경해온 신혼의 꿈은 꽁꽁 얼어붙고 말았다.”(97쪽) 첫 부분부터 무언가 불길한 일이 곧 일어날 것 같다. 모두가 단꿈에 젖는다는 신혼이라는데, 왜 여자는 두려울까? 얼마나 달콤한지 ‘허니문’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진 신혼. 그런데 아내는 행복하기는커녕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다. 밤마다 공포에 짓눌려 비명을 지른다. 남편은 영문을 알 수 없어 의사를 불러와 진찰하도록 해보지만, 의사 또한 아내의 병명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아내의 병은 나날이 심해져만 간다. 이 작품은 억압적인 결혼 생활에 짓눌린 여성의 삶을 공포라는 외피로 묘사한다. 사랑한다지만 싸늘하기 짝이 없는 남편과 일궈나가는 일상의 스트레스로 여자는 알 수 없는 병에 걸리고 앓아누운 것은 아닐까? 특히 이 작품 결말을 장식하는 ‘그 사건’은 아내를 착취하고 그 피를 빨아먹는 남편이란 존재의 은유로도 읽힌다.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는 이처럼 공포와 환상이 뒤섞여 풍요로운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작품이 주를 이룬다. <목 잘린 닭>도 마찬가지이다. ‘마시니페라스 부부에게는 아이가 넷 있었는데 모두 백치였다.’로 시작하는 첫 문장부터 섬뜩하다. 아이들은 어쩌다 모두 백치가 됐을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아이들이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벽돌담에서 무엇을 보는지 조금씩 밝혀진다. 아이들이 빚어내는 비극도……. 이 작품을 읽노라면 사랑의 속성이 얼마나 나약하고 허물어지기 쉬운 것인지 절감하게 된다. 아이들이 백치가 되어버릴 때마다 부부는 서로를 탓하고 원망한다. 그러면서도 욕망은 남아 있는지, 아니면 그토록 어리석은 인간이기에 또다시 헛된 꿈을 꾸면서 이번만은 다르리라는 기대와 바람 속에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하는 일을 거듭한다. 욕망과 어리석음으로 점철된 가련한 인간의 모습이다.

 오라시오 키로가의 작품 안에서는 사랑이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는다. 광기 서늘한 사랑과 욕망은 존재하는데, 그 사랑은 대부분 좋은 결실을 이루지 못한다. 달콤한 신혼도 파국으로 치닫거나, 백치 아이들을 줄줄이 낳을 뿐이다. 결혼을 앞두고 ‘질펀하게 놀아야’한다는 그릇된 욕망은 뜻하지 않은 비극을 낳기도 한다(<천연 꿀>). 한눈에 반한 사랑의 아름다움을 그린 <사랑의 계절>에서도 ‘네벨’과 ‘리디아’의 순수한 사랑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못한 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흐르듯 세월만 덧없이 흘러간다. 그들의 사랑이 이뤄질 만 하면 미치광이 같은 인물(모르핀 중독자 리디아의 엄마)로 인해, 번번이 무너진다. 처음부터 사랑이 일종의 ‘광기’에서 시작하기도 한다(<뇌막염 환자와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 낮에는 멀쩡하다가도 밤마다 40도가 넘는 고열 속에서 낯모르는 이를 찾아 헤매고 그의 이름을 부른다. 그런 여인의 사랑 고백을 들으며 처음에는 불쾌하게 여기던 ‘나’는 서서히 그 고백이 진짜라면 얼마나 좋을까 꿈꾸게 된다. 그런데 이 작품을 읽다 보면 어차피 사랑은 일종의 ‘광기’이자 ‘격정’, ‘환상’에 도취된 상태가 아닌가 싶어진다.

 이렇듯 오라시오 키로가가 그리는 사랑의 세계는 광기와 욕망이 뒤섞이다가 마침내 죽음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린다. 그는 왜 이토록 죽음의 그림자를 걷어내지 못했을까? 작가 이력을 살펴보면 그가 죽음에 집착한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것도 같다. 아버지를 비롯해, 의붓아버지, 친구, 누나와 형, 아내까지 비명횡사하고, 1937년에는 오라시오 키로가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키로가 주변에는 죽음이 너무나 짙게 드리워졌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처럼 죽음의 그림자가 쫓아다니는 작품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사랑도, 욕망도, 광기도 죽음 앞에서는 고개 숙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인간은 사랑하고 욕망하고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다. <멘수들>의 두 노동자처럼 금세 탕진하고 말 것을 알면서도 잠깐의 향락과 즐거움을 위해 몸이 부서져라 일하고, 갖고 싶은 물건을 손에 넣고자 폭우 속 강물에 기꺼이 몸을 던진다(<강에서 나무를 건져올리는 이들>). 살고, 사랑하고, 욕망하고, 꿈꾸고, 죽어가는 인간들. 그러한 삶이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에서 환상적이면서 강렬한 언어로 그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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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복의 소녀 쏜살 문고
크리스타 빈슬로 지음, 박광자 옮김 / 민음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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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복의 소녀>를 한두 페이지 넘기면 지은이 크리스타 빈슬로의 사진이 실려 있다. 까만 머리에 조용한 눈, 잔잔하지만 어쩐지 슬퍼 보이는 미소. 표정보다 눈길이 가는 것은 복장이다. 그녀는 셔츠와 넥타이에 트위드 재킷을 입고 있다. 1888년에 태어나 1944년에 세상을 떠난 그녀이기에 그 당시 이런 차림새는 틀림없이 파격이었을 것이다. 크리스타 빈슬로는 20세기 초, 연극과 영화, 소설 등 다양한 매체에서 활약하며, 레즈비언 문학의 가능성을 보여 준 선구적 작가로 꼽힌다. 그런데도 나는 그이의 작품을 이제야 처음 읽는다.

크리스타 빈슬로는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은 채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으며 작품 활동을 이어 나갔다. 그러던 중 나치 독일의 폭정이 거세지자 조국을 등진 채 미국, 프랑스 등 해외를 떠돌게 된다. 긴 망명 생활 탓에 작가로서의 입지는 물론 모국어를 잃게 된 빈슬로는 비참하게도 더는 작품 활동을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빈슬로는 2차 세계 대전 동안 레지스탕스로 활약했으나 전쟁 막바지에 나치 스파이로 오인을 받고, 반려자와 함께 남프랑스 숲속에서 살해당한다. 이런 까닭에 그동안 그녀의 작품은 거의 잊히고 만다.

<제복의 소녀>에는 그런 작가의 삶과 정체성이 투영되어 있다. 이 작품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눌 수 있는데, 1부에서는 빈슬로의 자전적 캐릭터라 할 수 있는 ‘마누엘라’의 탄생과 유년 시절, 가족들 이야기가 펼쳐지고, 2부에서는 그녀가 억압적인 기숙사 학교에 들어간 뒤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1958년 <제복의 처녀>라는 영화로 더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유럽, 미국은 물론 일본과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흥행했다고 하는데, 여성 제자와 여성 교사의 ‘동성애’ 코드가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일으키며 지금까지도 ‘여자 기숙사 학교’를 소재로 한 영화에 일종의 클리셰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단다.

영화는 원작의 1부에 속하는 마누엘라의 탄생과 유년 시절 이야기는 생략된 채, 2부에 속하는 기숙학교 입학 장면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그것도 나름 의미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마누엘라의 성장 과정은 꼭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한때는 잘 나가던 군인 아버지와 다정하고 따뜻한 어머니, 그리고 두 오빠의 축복을 받으며 태어난 마누엘라는 아낌없는 사랑과 보호 속에 행복하게 유년 시절을 보낸다. 이 시기 마누엘라에게 큰 고민은 그다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종종 마누엘라는 여느 소녀들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아이들과 인디언 놀이를 할 때, 마누엘라는 남자 아이들처럼 바지를 입고 허리에 무기를 차고 싸우러 나가고 싶다. 그런데 마누엘라는 여자이기 때문에 치마를 입고 얌전히 있어야 한다. 마누엘라에게 허락된 진정한 자유는 고작 체조를 할 때뿐이다. 그때만 바지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누엘라가 처음 (본인도 자각하지 못한 채) 느끼는 정체성의 혼란은 오빠의 부탁에서 시작된다. 오빠 ‘베르티’는 마누엘라가 다니는 학교의 ‘에바’에게 관심이 많다. 어느 날 오빠는 마누엘라에게 에바에게 가서 자기 이야기 좀 해보라고 넌지시 부탁한다. 그때부터 에바를 관심 있게 지켜본 마누엘라는, 자기도 모르게 에바를 좋아하게 되고, 어느덧 오빠의 부탁은 안중에도 없어지고 만다. 에바 앞에 나서자니, 어쩐지 형편없이 초라한 기분이 들어 몇 날 며칠 몰래 에바 뒤를 밟기만 한다. 그럴 때도 자기 옷차림에 불만을 느낀다. 원피스는 싫다. 오빠처럼 바지를 입고 싶다. 그런 모습으로 에바 앞에 서고 싶다! 왠지 모르지만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다는 엄마의 말도 어린 마누엘라의 마음에 걸린다. 하느님은 가톨릭교회에만 계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두 번째 정체성 혼란은 가깝게 지내던 소년 ‘프리츠’의 엄마 때문에 찾아온다. 프리츠와 서로 좋아하면서 다정하게 지내던 마누엘라는 우연히 프리츠의 엄마를 만나게 되고, 그 이후로 모든 관심이 그녀에게 쏠리기 시작한다. 프리츠네 집에 자주 놀러가는 것도 어쩐지 그 애 엄마를 만나기 위해서인 것 같다. 세상을 떠난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프리츠 엄마를 향한 애정으로 변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크리스타 빈슬로가 묘사하는 마누엘라의 애정과 열정은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이런 줄도 모르고 마누엘라의 아버지 ‘마인하르디스’는 어린 딸이 벌써부터 남자 아이와 가깝게 지내는 게 못마땅해서 프린츠와 떼어놓으려는 생각에 딸을 엄격하기 짝이 없는 기숙학교에 보내버린다. 그리고 자기는…….

이 책을 읽는 이들이라면 마누엘라의 성 정체성을 위와 같은 장면들을 통해 짐작하고도 남게 된다. 여자를 좋아하는 마누엘라가 소녀들만 모인 기숙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으니,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가 어떨지 조금은 예상 가능하기도 하다. 같은 학교에 머무는 다른 소녀와 열렬한 사랑을 주고받는 게 아닐까 싶은데, 뜻밖에도 그 대상은 모든 아이들의 열광적인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폰 베른부르크’ 선생님이다. 프리츠의 엄마를 좋아했고, 기숙학교에서도 다른 아이들이 아닌 선생님을 향한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품게 되는 마누엘라. 마누엘라는 왜 또래가 아닌 훨씬 나이 많은 여성을 향한 애정을 품는 것일까? 앞서 말했듯이, 일찌감치 잃어버린 엄마를 대체할 대상을 찾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크리스타 빈슬로는 소녀의 그 고독감과 외로움 위에 선명하게 ‘정체성’ 문제를 덧입힌다.

남다른 정체성으로 고통 받는 마누엘라의 삶을 지켜보면서 자연스럽게 ‘제복’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이 제복은 마누엘라가 기숙학교에 입학하면서 입게 되는 ‘교복’, 그 푸르죽죽한 남색의 촌스럽고도 억압적인 제복을 뜻하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여성’과 ‘이성애’라는, 본인이 선택하지 않은 강요된 젠더 규범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성이라는 성 역할과 이성애 규범에 충실히 따라야 한다는 억압적인 제복에 비하면 낡은 남색 교복은 그나마 구속력이 조금 약하다고 볼 수 있다. 그 교복은 학교를 떠나고 벗어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이라는, 이성애자가 되어야 한다는, 이성애자만이 정상이라는 그 ‘제복’은 평생 마누엘라를 따라다니며 얽어맬 것이다. 이 제복은 벗고 싶어도 도저히 떼어낼 수 없는 강력한 규범이다.

심지어 이 제복은 아름답고 젊고, 재산도 있고, 매력 있고, 총명한 데다가 심지어 귀족 출신인, ‘폰 베른부르크’ 선생님도 피할 수 없다. 이렇게 모든 걸 다 갖춘 ‘엄친딸’ 같은 선생님이 대체 결혼도 마다하고, 왜 이 무덤 같은 기독교 학교에서 선생님으로 ‘썩어 가고’ 있는 것일까? 동료 교사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의아하기만 하다. 그런데 이 선생님에게도 말 못할 속사정이 있는 것이 아닐까? 크리스타 빈슬로는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폰 베른부르크 선생님또한 어떤 의미로는 ‘마누엘라’와 비슷한 처지임을 작품 곳곳에서 은연중 드러낸다. 폰 베른부르크 선생님이 동료 교사와 이야기 나누는 장면은 결정적이다.


“이곳에 너무 빠지지 않는 게 좋아요. 선생님도 언젠가는 지칠 거예요. 학생들은 계속 들어오고 나가지만, 결국 곁을 스쳐 갈 뿐입니다.”
“그래요. 내 곁을 스쳐 갈 뿐이죠. 그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는 그들을 잊을 수가 없어요. 적어도 두 세 명은. 마드무아젤, 정말이에요.”
그러면서 처음으로 자신감 넘치던 그녀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떨렸다.
“그래도 몇 명은 나를 잊지 않겠죠.” (<제복의 소녀>, 208쪽)


약혼자와 파혼하고 기숙학교 교사로 살아가는 베른부르크 선생처럼, 마누엘라 또한 결혼에 부정적이다. 장교의 부인이 되기를 꿈꾸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마누엘라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당당히 의견을 밝히면서 “남자가 싫다”고 말한다. “제대로 된 남자를 못 만난 거야."라는 친구의 말을 부정하면서 프리츠를 떠올리기도 한다. 틀림없이 프리츠를 좋아했다. 그렇지만 마누엘라가 생각하기에 결혼은 좋아하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마누엘라의 아버지, 이제는 퇴역한, 능력도 없고, 방탕하기만한 이 아버지는 예쁜 딸을 앞세워 한몫 잡아볼 꿈에 부풀어 있다. 딸이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멋진 장인이 되어 북독일 어디에 있는 훌륭한 소유지의 넓은 뜰을 거닐거나, 사냥 친구들에게 붉은 포도주와 고급 시가를 대접하는 자신의 모습을 즐겨 상상한다. 딸내미가 부자 남자를 잡아서 집안을 일으키길 기대한다. 폰 베른부르크 선생님도 마누엘라도 모두 이런 가부장제의 희생자이기도 하다. 더욱이 그들은 이성애자가 아니므로, 이 ‘딸’이라는 성 역할에 주어진 ‘제복’의 굴레는 얼마나 더 버거울까.


“저는 남자 아이가 되고 싶어요. 여자인 것이 정말 싫어요. 이런 머리 모양, 이런 치마가 싫어요. 집에서는 오빠하고 체조할 때 바지를 입었어요. 전 항상 바지를 입고 싶어요. (......) 저는 여자가 싫어요. 남자가 되어서 폰 페른부르크 선생님을 위해 살고 싶어요.” (<제복의 소녀>, 189쪽)


치마가 아닌 바지를 입고, 남자가 되어서 좋아하는 사람 앞에 당당히 서고 싶었던 마누엘라. 그리고 그 사람을 위해 살고 싶었던 마누엘라. 연극 때문에 처음 남성 옷차림을 하고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자유롭고 홀가분한 기분에 잔뜩 젖어드는 마누엘라. 이 여성이라는, 이성애 중심의 ‘제복’ 안에 갇힌 소녀의 꿈과 바람은 과연 이루어질까. 그런데 오늘날까지도 마누엘라를 괴롭힌 그 ‘제복’의 억압적인 규범들은 여전하기만 하다. 그래서 이 작품의 결말은 여러 의미로 쓸쓸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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