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복의 소녀 쏜살 문고
크리스타 빈슬로 지음, 박광자 옮김 / 민음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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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복의 소녀>를 한두 페이지 넘기면 지은이 크리스타 빈슬로의 사진이 실려 있다. 까만 머리에 조용한 눈, 잔잔하지만 어쩐지 슬퍼 보이는 미소. 표정보다 눈길이 가는 것은 복장이다. 그녀는 셔츠와 넥타이에 트위드 재킷을 입고 있다. 1888년에 태어나 1944년에 세상을 떠난 그녀이기에 그 당시 이런 차림새는 틀림없이 파격이었을 것이다. 크리스타 빈슬로는 20세기 초, 연극과 영화, 소설 등 다양한 매체에서 활약하며, 레즈비언 문학의 가능성을 보여 준 선구적 작가로 꼽힌다. 그런데도 나는 그이의 작품을 이제야 처음 읽는다.

크리스타 빈슬로는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은 채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으며 작품 활동을 이어 나갔다. 그러던 중 나치 독일의 폭정이 거세지자 조국을 등진 채 미국, 프랑스 등 해외를 떠돌게 된다. 긴 망명 생활 탓에 작가로서의 입지는 물론 모국어를 잃게 된 빈슬로는 비참하게도 더는 작품 활동을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빈슬로는 2차 세계 대전 동안 레지스탕스로 활약했으나 전쟁 막바지에 나치 스파이로 오인을 받고, 반려자와 함께 남프랑스 숲속에서 살해당한다. 이런 까닭에 그동안 그녀의 작품은 거의 잊히고 만다.

<제복의 소녀>에는 그런 작가의 삶과 정체성이 투영되어 있다. 이 작품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눌 수 있는데, 1부에서는 빈슬로의 자전적 캐릭터라 할 수 있는 ‘마누엘라’의 탄생과 유년 시절, 가족들 이야기가 펼쳐지고, 2부에서는 그녀가 억압적인 기숙사 학교에 들어간 뒤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1958년 <제복의 처녀>라는 영화로 더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유럽, 미국은 물론 일본과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흥행했다고 하는데, 여성 제자와 여성 교사의 ‘동성애’ 코드가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일으키며 지금까지도 ‘여자 기숙사 학교’를 소재로 한 영화에 일종의 클리셰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단다.

영화는 원작의 1부에 속하는 마누엘라의 탄생과 유년 시절 이야기는 생략된 채, 2부에 속하는 기숙학교 입학 장면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그것도 나름 의미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마누엘라의 성장 과정은 꼭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한때는 잘 나가던 군인 아버지와 다정하고 따뜻한 어머니, 그리고 두 오빠의 축복을 받으며 태어난 마누엘라는 아낌없는 사랑과 보호 속에 행복하게 유년 시절을 보낸다. 이 시기 마누엘라에게 큰 고민은 그다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종종 마누엘라는 여느 소녀들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아이들과 인디언 놀이를 할 때, 마누엘라는 남자 아이들처럼 바지를 입고 허리에 무기를 차고 싸우러 나가고 싶다. 그런데 마누엘라는 여자이기 때문에 치마를 입고 얌전히 있어야 한다. 마누엘라에게 허락된 진정한 자유는 고작 체조를 할 때뿐이다. 그때만 바지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누엘라가 처음 (본인도 자각하지 못한 채) 느끼는 정체성의 혼란은 오빠의 부탁에서 시작된다. 오빠 ‘베르티’는 마누엘라가 다니는 학교의 ‘에바’에게 관심이 많다. 어느 날 오빠는 마누엘라에게 에바에게 가서 자기 이야기 좀 해보라고 넌지시 부탁한다. 그때부터 에바를 관심 있게 지켜본 마누엘라는, 자기도 모르게 에바를 좋아하게 되고, 어느덧 오빠의 부탁은 안중에도 없어지고 만다. 에바 앞에 나서자니, 어쩐지 형편없이 초라한 기분이 들어 몇 날 며칠 몰래 에바 뒤를 밟기만 한다. 그럴 때도 자기 옷차림에 불만을 느낀다. 원피스는 싫다. 오빠처럼 바지를 입고 싶다. 그런 모습으로 에바 앞에 서고 싶다! 왠지 모르지만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다는 엄마의 말도 어린 마누엘라의 마음에 걸린다. 하느님은 가톨릭교회에만 계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두 번째 정체성 혼란은 가깝게 지내던 소년 ‘프리츠’의 엄마 때문에 찾아온다. 프리츠와 서로 좋아하면서 다정하게 지내던 마누엘라는 우연히 프리츠의 엄마를 만나게 되고, 그 이후로 모든 관심이 그녀에게 쏠리기 시작한다. 프리츠네 집에 자주 놀러가는 것도 어쩐지 그 애 엄마를 만나기 위해서인 것 같다. 세상을 떠난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프리츠 엄마를 향한 애정으로 변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크리스타 빈슬로가 묘사하는 마누엘라의 애정과 열정은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이런 줄도 모르고 마누엘라의 아버지 ‘마인하르디스’는 어린 딸이 벌써부터 남자 아이와 가깝게 지내는 게 못마땅해서 프린츠와 떼어놓으려는 생각에 딸을 엄격하기 짝이 없는 기숙학교에 보내버린다. 그리고 자기는…….

이 책을 읽는 이들이라면 마누엘라의 성 정체성을 위와 같은 장면들을 통해 짐작하고도 남게 된다. 여자를 좋아하는 마누엘라가 소녀들만 모인 기숙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으니,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가 어떨지 조금은 예상 가능하기도 하다. 같은 학교에 머무는 다른 소녀와 열렬한 사랑을 주고받는 게 아닐까 싶은데, 뜻밖에도 그 대상은 모든 아이들의 열광적인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폰 베른부르크’ 선생님이다. 프리츠의 엄마를 좋아했고, 기숙학교에서도 다른 아이들이 아닌 선생님을 향한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품게 되는 마누엘라. 마누엘라는 왜 또래가 아닌 훨씬 나이 많은 여성을 향한 애정을 품는 것일까? 앞서 말했듯이, 일찌감치 잃어버린 엄마를 대체할 대상을 찾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크리스타 빈슬로는 소녀의 그 고독감과 외로움 위에 선명하게 ‘정체성’ 문제를 덧입힌다.

남다른 정체성으로 고통 받는 마누엘라의 삶을 지켜보면서 자연스럽게 ‘제복’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이 제복은 마누엘라가 기숙학교에 입학하면서 입게 되는 ‘교복’, 그 푸르죽죽한 남색의 촌스럽고도 억압적인 제복을 뜻하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여성’과 ‘이성애’라는, 본인이 선택하지 않은 강요된 젠더 규범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성이라는 성 역할과 이성애 규범에 충실히 따라야 한다는 억압적인 제복에 비하면 낡은 남색 교복은 그나마 구속력이 조금 약하다고 볼 수 있다. 그 교복은 학교를 떠나고 벗어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이라는, 이성애자가 되어야 한다는, 이성애자만이 정상이라는 그 ‘제복’은 평생 마누엘라를 따라다니며 얽어맬 것이다. 이 제복은 벗고 싶어도 도저히 떼어낼 수 없는 강력한 규범이다.

심지어 이 제복은 아름답고 젊고, 재산도 있고, 매력 있고, 총명한 데다가 심지어 귀족 출신인, ‘폰 베른부르크’ 선생님도 피할 수 없다. 이렇게 모든 걸 다 갖춘 ‘엄친딸’ 같은 선생님이 대체 결혼도 마다하고, 왜 이 무덤 같은 기독교 학교에서 선생님으로 ‘썩어 가고’ 있는 것일까? 동료 교사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의아하기만 하다. 그런데 이 선생님에게도 말 못할 속사정이 있는 것이 아닐까? 크리스타 빈슬로는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폰 베른부르크 선생님또한 어떤 의미로는 ‘마누엘라’와 비슷한 처지임을 작품 곳곳에서 은연중 드러낸다. 폰 베른부르크 선생님이 동료 교사와 이야기 나누는 장면은 결정적이다.


“이곳에 너무 빠지지 않는 게 좋아요. 선생님도 언젠가는 지칠 거예요. 학생들은 계속 들어오고 나가지만, 결국 곁을 스쳐 갈 뿐입니다.”
“그래요. 내 곁을 스쳐 갈 뿐이죠. 그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는 그들을 잊을 수가 없어요. 적어도 두 세 명은. 마드무아젤, 정말이에요.”
그러면서 처음으로 자신감 넘치던 그녀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떨렸다.
“그래도 몇 명은 나를 잊지 않겠죠.” (<제복의 소녀>, 208쪽)


약혼자와 파혼하고 기숙학교 교사로 살아가는 베른부르크 선생처럼, 마누엘라 또한 결혼에 부정적이다. 장교의 부인이 되기를 꿈꾸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마누엘라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당당히 의견을 밝히면서 “남자가 싫다”고 말한다. “제대로 된 남자를 못 만난 거야."라는 친구의 말을 부정하면서 프리츠를 떠올리기도 한다. 틀림없이 프리츠를 좋아했다. 그렇지만 마누엘라가 생각하기에 결혼은 좋아하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마누엘라의 아버지, 이제는 퇴역한, 능력도 없고, 방탕하기만한 이 아버지는 예쁜 딸을 앞세워 한몫 잡아볼 꿈에 부풀어 있다. 딸이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멋진 장인이 되어 북독일 어디에 있는 훌륭한 소유지의 넓은 뜰을 거닐거나, 사냥 친구들에게 붉은 포도주와 고급 시가를 대접하는 자신의 모습을 즐겨 상상한다. 딸내미가 부자 남자를 잡아서 집안을 일으키길 기대한다. 폰 베른부르크 선생님도 마누엘라도 모두 이런 가부장제의 희생자이기도 하다. 더욱이 그들은 이성애자가 아니므로, 이 ‘딸’이라는 성 역할에 주어진 ‘제복’의 굴레는 얼마나 더 버거울까.


“저는 남자 아이가 되고 싶어요. 여자인 것이 정말 싫어요. 이런 머리 모양, 이런 치마가 싫어요. 집에서는 오빠하고 체조할 때 바지를 입었어요. 전 항상 바지를 입고 싶어요. (......) 저는 여자가 싫어요. 남자가 되어서 폰 페른부르크 선생님을 위해 살고 싶어요.” (<제복의 소녀>, 189쪽)


치마가 아닌 바지를 입고, 남자가 되어서 좋아하는 사람 앞에 당당히 서고 싶었던 마누엘라. 그리고 그 사람을 위해 살고 싶었던 마누엘라. 연극 때문에 처음 남성 옷차림을 하고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자유롭고 홀가분한 기분에 잔뜩 젖어드는 마누엘라. 이 여성이라는, 이성애 중심의 ‘제복’ 안에 갇힌 소녀의 꿈과 바람은 과연 이루어질까. 그런데 오늘날까지도 마누엘라를 괴롭힌 그 ‘제복’의 억압적인 규범들은 여전하기만 하다. 그래서 이 작품의 결말은 여러 의미로 쓸쓸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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