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비대칭 인간
이은정 지음 / 득수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생이 끝장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땅속으로 가만히 숨고 싶어진다. 알고 보면 시기만 다를 뿐 모두 비슷한 패턴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본인도 다를 바 없는데 타인에 대해서만은 객관적인 시선으로 일관하기에 우린 그토록 오만한 것이 된다. 자신은 거의 모든 삶의 피해자이고 타인은 대체로 삶의 가해자라는 피해의식 속에서 우린 그토록 이기적인 것이 된다. 그렇게 이기적이고 오만하게 혼자가 되는 늙음, 나도 그 길을 걷고 있었다.'

- p.186, '소란'의 일부, 이은정 소설집 <비대칭 인간> 중에서 (도서출판 득수)

외눈박이만 사는 마을에 양눈을 지닌 존재가 홀로 가면 필시 돌연변이나 비정상으로 취급되어 왕따나 홀대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서의 정상과 비정상은 주류에 속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구분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은정 작가의 새로운 소설집인 <비대칭 인간>은 의미심장하게도 책을 거꾸로 세워서 제목을 보면 <인간 비대칭>으로 읽힌다. 얼굴의 좌우가 다르게 보이거나 움직임이 따로일 때의 표현을 비대칭 인간이라고 표현한다면 이 때의 존재는 전체 속의 일부이자 대중과는 다른 존재의 표현이다. 그러나 비대칭 인간의 경우는 우리 모두는 똑같지 않고 다 다른 존재라는 표현에 가깝다. 비대칭 인간은 일반 속에서 특수를 특정해서 추출하는 경우라면 인간 비대칭은 우리 모두 각자가 특수한 존재라는 표현에 가깝다. 그렇기에 '비대칭 인간의 사회'는 주류 속에서 소외가 배태될 가능성이 높고 '인간 비대칭의 사회'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포용있는 곳에 가까울 것이다. 이은정 작가의 새 소설집은 비대칭 인간의 시선을 넘어서 인간 비대칭의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자는 문학적 제안으로 읽힌다.

젊은이들의 우연처럼 보이는 사고를 '눈'으로 복수하는 <눈이 와요>, 젊은 연인들의 아슬아슬한 결별과 화해를 다룬 <침대는 잘못이 없었다>, 정작 주위는 관심없어 보이는데 스스로가 얼굴의 왼쪽 오른쪽이 다르다고 고민하는 <비대칭 인간>, 배경과 스펙이 좋은 허위가족의 허울을 벗어던지고 진짜 가족을 이루려는 <유령 가족>, 갑을관계나 다름없는 건물주 틈에서 다뤄지는 세입자의 생존기인 <입금하는 사람>, 긴 기간동안 인간관계의 오해와 비난이 덧대워진 것을 한참 후에 다시 풀어가는 공감과 연대의 <소란>, 여러 희생을 감수하며 한없는 사랑을 베푸는 엄마의 행복의 자리는 어디인지 살펴보는 <엄마 같은 말> 등이 수록된 이번 소설집은 말 그대로 지금 여기 한국사회의 어떤 한 모습일 것이다. 바로 옆집 혹은 이웃의 모습과도 다르지 않은 이 이야기들은 적지 않은 울림과 감동을 준다.

모든 작가들이 그러한 경향을 지닌 건 아니지만 이은정 작가는 작품의 세월을 통해 성장의 진화를 엿볼 수 있는 부류일 것이다. 이은정 작가의 첫번째 소설집인 <완벽하게 헤어지는 방법>이 소재의 치열함을 통해 인간군상의 희비극을 다뤘다면 이번 작품들은 좀 더 일상적이면서도 삶과 사회를 이루는 질문들을 다룬다. 삶의 일상을 주로 다루는 홍상수 감독 영화의 문학적 버전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보자면 이은정 작품을 작품답게 하는 지점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 혹은 정상적으로 보이는 평범한 삶의 끝에서 경계 밖으로 추락하지 않으려고 고군분투하는 젊은이들의 묘사에 있다.

이 작가가 보기에 젊은이들은, 특히 한국사회의 젊은이들은 위태롭다. 실은 여러 젊은이들중에서 평범하고 안온하고 부유한 젊은이들이 아니라 하루하루 살기 위해 분투하는 젊은이들을 작품으로 호출한다. 이때의 젊음은 영혼의 젊음과도 다르지 않다. 육신만 이제 막 어른이 됬기에 삶과 사회를 지혜로운 원로처럼 대처할 수도 없을 뿐더러 그저 영악하게 살만큼 이기적이지도 않다.

살기 위해서든 깨닫기 위해서든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젊음은 멀리서 바라보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가까이에서 보면 얼마나 치열한가. 이 치열함과 복잡다단함은 그저 먹고 살기 위해서도 아니고 먹는 것이 해결된 상태에서의 고고한 명상도 아니고 '체험 삶의 현장'에서 모든 것을 거는 외줄타기와도 같은 아슬아슬함 속에서 조금씩 깨닫는 무엇과도 같다. '삶이 곧 수행'이란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삶이 수행이란 것을 의식하며 사는 것과 그냥 사는 것은 적지 않은 결과의 차이를 보여준다. 삶의 현장 한 가운데에 있다 보면 '감정의 관찰자'가 되기 보다는 '감정의 주인공'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학은 혹은 연극을 비롯한 여러 예술은 우리 각자가 인생이라는 무대위의 배우로 와서 잠깐 살다가는 존재라는 것을 환기시켜주는 훌륭한 장치이다. 삶의 주인공 보다는 삶의 관찰자로 살 때를 깜빡 하고 있을때 이은정 작가를 통해 문학은 그 사실을 다시 일깨워준다. 이은정 작가는 작품에 따라 여러 성격과 주제가 드러나지만 지금 여기 한국사회의 지점을 좀체 벗어나지 않는다. 아주 옛날 과거의 이야기도 아니고 이쁜 풍경화처럼 아름다운 소재의 이야기도 아니다. 그러나 진정한 미학이 선악을 넘고 미추를 넘어 삶의 총체성을 통해 나타나는 경험과 깨달음이라고 볼때 실존의 진정성은 진가를 드러낸다.

자연은 많은 소리를 들려준다. 동물소리, 물소리뿐만 아니라 식물조차도 소리를 들려준다. 도시도 많은 소리를 들려준다. 인간의 소리, 문명의 소리가 소음에 가까울 정도로 들린다. 귀와 눈이 열린 존재는 그것이 열린 만큼 이 총체속에서 배우고 나아갈 것이다. 작가와 예술가는 더 나아가서 여기에서 영감을 받고 작품을 통해 새로운 총체를 구축한다. 자신이 경험한 즐거움 뿐만이 아니라 처절했던 순간의 경험조차도 그것을 버리지 않고 작품으로 승화시킨다. 이때 치열한 삶의 무대로 걸어가는 작가 혹은 예술가의 선택은 잠재의식적인 영혼의 선택에 가깝다. 육신을 지닌 고단한 존재는 치열한 삶의 무대를 거부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를 선험적으로 차단하고 봉인된 의식으로 선택한다. 육신의 부유함과 안온함이 아니라 생존조차도 위협받는 치열한 삶의 무대를 선택한 영혼은 용기있고 성숙한 영혼이다. 섭리는 삶의 과제를 해결할 만한 존재에게 큰 과제를 주는 법이다. 위대한 작가와 예술가는 기꺼이 이 벅찬 과제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기어이 작품으로 승화시킨다.

이은정 작가처럼 실존의 진정성을 놓치지 않으려는 문학의 기획이 기어코 삶의 고단함을 넘어서길 바란다. 먼 훗날 피안에서 회고할 때, 평온했으므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치열했으므로 행복했노라고 얘기할 날이 오기를 바란다. 이는 지상에서의 상업적 성공이 어느 정도였는가와는 별개로 엄청나게 진화한 예술적 영혼이 누릴 수 있는 훈장과도 같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섬세한 체조 - 예민보스의 마음 재활훈련
요시타케 신스케 지음, 서지은 옮김 / 마르코폴로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른이 아이의 상상력으로 살아남아 간다는 것]
- 요시타케 신스케의 <섬세한 체조 (도서출판 마르코폴로, 2023)> 후기.

"모든 어린이는 예술가이다. 문제는, 어떻게 어른이 되어서도 예술가로 남아 있는가이다."
- 파블로 피카소

이 구절을 그림책 작가로 유명한 요시타케 신스케에게 대입해 본다면 어떨까요? 이미 그는 중년을 훌쩍 넘었지만 절반 이상의 마음은 여전히 어린이로 남아 있는듯 합니다. 순수함, 상상력, 자기다움, 소박함 등등이 어른이 되었다고 없어지거나 퇴화(?)되지 않은 채 생생히 살아 돌아옵니다. 그림책으로 말이지요.

이미 숱한 그림책으로 알려져 있고 <이게 정말 ~일까> 시리즈로도 잘 알려진 요시타케의 신스케의 새로운 번역 신간인 <섬세한 체조>, 부제로는 '예민보스의 마음 재활훈련'인 이 책을 감상하다 보면 이전 책들인 정교함, 정갈함과는 다른 다양한 마음의 높낮이가 다른 채로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너무 일상적이어서 잘 보이지도 않는 것들부터 크고 작은 사건들의 파장으로부터 비롯된 순간들을 기발한 상상력이 더해진 채 하나의 그림으로 딱 나타납니다. 이건 마치 사진작가인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찰나의 순간인 작품들을 그림 버전으로 바뀐 채 상상력이 더해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러티브나 기승전결이 뚜렷하지 않은 채 그림의 나열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고 하나하나의 장면들이 속시원하게 설명되는 것이 없는 것 같아도 웃음과 일상과 상상력이 버무려진 채 '생활의 발견'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사실은 강한 것, 뚜렷한 것, 확실한 것만이 우리의 삶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너무 사소해서 시시해 보이는 것, 그러나 시시하지 않고 매일 루틴처럼 우리의 삶을 이루는 것들이 얼마나 숱하게 많은 지, 그것들이 있어서 결국 소중한 것, 강렬한 것들이 주목받을 수 있도록 삶의 토대를 구성해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작은 지혜를 알려주기도 합니다.

이 세계를 구성함에 있어 우리 눈에는 잘 띄지도 않는 숱한 미생물들이 생태계의 한 기반을 구성하듯이 시시해 보이지만 시시하지 않은 일상, 소소해 보이지만 소소하지 않은 일상의 연속은 작은 행복을 예비합니다. 이런 특성은 요시타케 신스케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일본문화의 한 특성을 이루기도 합니다. 지루할 정도로 잔잔해 보이는 일본 영화나 드라마의 한 장면의 와중에서 드러나는 작은 사건, 행복, 상상은 작은 웃음과 감동을 주기도 하니까요.

센 것, 매운 것을 많이 좋아하는 한국문화와 대비해서 그들의 시선에서 우리가 혹 너무 시시하거나 잔잔해 보여서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지 둘러볼 기회마저 줍니다.

거시적으로 보자면 일본이라는 국가와 사회문화는 황혼에 접어들었거나 쇠락의 길로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정치체제나 건강한 시민의식이라는 지평으로 볼 때 이미 여러 한계를 노출하고 있고 그 상황은 현재진행형이기도 합니다. 제가 보기에 일본문화의 정점은 지브리 스튜디오의 절정기와 거의 일치했던 것 같습니다. 한때 만화의 최대강국이었던 시절에서 이젠 디지털 만화인 웹툰의 시기를 한국이 넘겨 받으면서 일본문화는 과거로 기록되고 문화의 황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전체적 기세나 규모로는 이제 힘을 쓰기 어려울 겁니다. 그러나 국가적 융성이나 쇠락에 상관없이 뛰어난 예술가나 작가는 늘 나옵니다. 일본사회의 그늘을 늘 따뜻한 시선으로 성찰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도 그런 경우일 겁니다.

요시타케 신스케는 일본문화의 한 원형처럼 보이기도 하는 소박함과 소소함에서 출발하여 어린이의 상상력을 잃지 않은 채 삶의 일상적인 시선을 놓치지 않는 매력을 지닌 그림작가입니다. 국가에 대한 반감이나 호불호와는 별개로 이런 선한 가치를 지닌 이들의 공감과 연대가 더 좋은 공동체를 이루는 바탕에 일조할 겁니다. 그곳이 한국이든 일본이든 말이지요.

신스케가 무명시절에 지었던 데뷔작인 <섬세한 체조>가 출판사들의 인정도 채 받기도 전에 자비출판으로 나온 후, 이제서야 한국에서 번역판으로 나온 것은 한참 늦은 시기이지만 신스케 팬들에게는 물론이고 그를 잘 모르는 이들에게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표지 디자인과 그림들로 인해 새로운 팬들이 생길 것 같습니다. 또한 그림과 함께 짧게 들어간 글과 경구, 문장들을 우리의 감각에 맞게 재구성한 서지은 작가의 반짝이는 번역이 인기에 상당한 도움을 줄 것 같고요.

조선시대의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는 뛰어난 학자 이전에 건실한 심신수행자였습니다. 도학으로도 불리우는 수행에 있어서 그들은 매일의 루틴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현대인들에게도 좋은 자극이 됩니다. 요가든 명상이든 필라테스이든 삶의 수행으로서의 일부를 이루는 이들은 자신의 중심을 잡고 언젠가는 그 선한 영향력을 전파하기 마련입니다. 오늘도 요시타케 신스케는 매일의 그림 스케치라는 수행을 통해서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에게 재미와 상상, 삶의 일상이 주는 행복을 전파하는 역할을 하고 있을 겁니다.

모더니즘 문학의 한 기둥을 이루는 마르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초판 출판을 자비로 시작해서 매우 천천히 스스로를 알려갔듯이 요시타케 신스케가 사무실 여직원의 작은 한마디의 칭찬에, 꾸준한 그림작업을 통해 명성의 높낮이와 상관없이 자신의 세계를 구성해 갔듯이, 그가 언급했던 대로 우리는 모두 자신의 삶의 자서전을 쓰고 있는 셈이니 길게 보고 자신의 길을 걸어갔으면 좋겠습니다. 크든 작든 타인의 장점을 잘 봐주고 칭찬해 주고 공감해 주면서 말이지요. 행복의 공동체는 결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
제임스 볼드윈.라울 펙 지음, 김희숙 옮김 / 모던아카이브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공공 선의 가치는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가]
- 제임스 볼드윈/라울 펙 지음, 김희숙 번역, 영화각본집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 후기.

‘나는 검둥이가 아니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다.
현재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끌고 간다.
우리가 ‘곧’ 역사다.
아닌 척한다면, 그냥 범죄자가 될 뿐이다.

나는 선언한다.
세계는 하얗지 않다.
하얀 적도 없고
하얗게 될 수도 없다.
흰색은 권력의 메타포로
그저 체이스 맨해튼 은행의 상징색일 뿐이다.’

- 라울 펙 감독의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 2016> 1시간 26분 18초의 장면 중에서.
- 제임스 볼드윈/라울 펙 지음, 김희숙 번역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 2023, 도서출판 모던아카이브> p.149.

라울 펙 감독의 다큐영화인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를 보고 있다보면 나의 중학생 시절이 문득 생각난다. 당시 한국일보 기자였던 김훈 작가의 기사는 종종 너무 문학적이고 시적이어서 사회현실을 묘사한 것인지 아닌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이 다큐 또한 그렇다. 1960년대의 흑인민권운동을 중심으로 작가였던 제임스 볼드윈이 바라보는 글과 말의 시선은 현실적이라기엔 너무나 시적이고, 시적이라기엔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이 다큐가 던지는 메시지는 물론이고 그 너머의 시적 아포리즘이 강렬하다.

제임스 볼드윈은 <조반니의 방>, <빌 스트리트가 말할 수 있다면> 등으로 대단하고 유명한 작가이지만 흑인이자 동성애자로 미국사회에서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던 입장에서 파리로의 정착은 망명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로시 카운츠라는 여학생이 백인이 중심이던 학교에 등교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뉴스로 보면서 인종차별의 개선을 위해 모든 걸 감수하는 각오를 지니고 미국으로 귀국한다.

메드가 에버스, 맬컴 엑스, 마틴 루서 킹이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한 미국사회의 흑인민권운동은 여러 변화를 맞게 된다. 문제는 이들이 방식의 과격성, 온건성이나 노선과는 별개로 모두 암살의 비극을 맞이했다는 점이다. 이런 여러 크고 작은 사건들을 겪으면서 제임스 볼드윈은 작가로서 사회적 명망가로서 지식인의 활동을 이어 간다. 그가 남긴 메모인 <이 가문을 기억하라 Remember this House>는 이 세 인권운동가의 삶을 포착하고 투영해보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30페이지의 이 메모는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질 뻔 했다. 그의 동생인 글로리아와 라울 펙 감독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말이다.

라울 펙 감독의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는 흑인 민권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의 당시 미국사회와 문화의 여러 측면들을 제임스 볼드윈의 글과 말로, 배우인 사무엘 잭슨의 내레이션으로 다시 살아난다. 이는 라울 펙 감독의 볼드윈 관련 자료를 재구성한 열정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볼드윈의 공동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만약 볼드윈이 살아 있었더라면 펙 감독의 다큐에 지지를 보냈을 것이다.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는 단순한 사회고발성 다큐가 아니다. 이것은 원주민이었던 북미 인디언을 학살하고 몰아냈던, 흑인들을 노예삼아 미국 건국의 기초를 이루었던 역사에 대한 성찰이자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인종차별에 대한 문화사회학적인 시선의 명작이다. 앞에서도 얘기했던 것처럼 제임스 볼드윈의 말과 글이 보여주는 시적 아포리즘은 너무나도 함축적이어서 다큐의 수준을 한참이나 높여준다.

미국 시민들조차 이런 과거 혹은 현재에 관심이 없는 혹은 백인들이라면 이 다큐를 온전히 이해하기란 힘들지도 모른다. 반갑게도 라울 펙이 남겨준 각본집은 이 다큐의 시적 시선을 더욱 풍부하게 이해하도록 돕고 사회적, 역사적 배경을 찾아볼 근거를 마련해 준다. 한국인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다큐를 보고 나서 각본집도 꼭 볼 것을 권한다. 그리고 다시 다큐를 본다면 작품에 더욱 매료될 것이다.

러시아문학 전문가이자 번역가인 김희숙 작가는 흥미롭게도 영어권인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라는 각본집의 번역을 통해 이 다큐를 생생히 다시 살려내는데 성공했다. 김희숙 작가의 능력은 러시아와 체코, 영어의 언어와 번역능력, 유튜브채널 북클럽비바를 통한 해설과 아나운서 능력, 소설과 글을 통한 문화예술적인 능력만으론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 내가 바라보는 김 작가의 진짜 능력은 어느 작품이든 그 작품을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이유와 근거로서 제시하고 풀어놓는다. 김 작가의 작품을 바라보는 맥락적인 시선은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통찰의 시선과 별개가 아니다. 이전 번역작품인 카렐 차페크의 <로봇>, 마날 알샤리프의 <위민 투 드라이브>, 안톤 체호프의 <롯실드의 바이올린>도 수려한 번역이었을 뿐 아니라 그 번역작품 각각에 담긴 김희숙 작가의 해설은 원작 이상으로 이해와 깊이의 즐거움을 준다. 이런 넓은 시선의 문화사회적인 맥락과 지금 여기에서의 연결성을 보여주는 작가의 능력은 드물 뿐만 아니라 이런 능력을 지니지 못한 다른 지식인들에게도 요구되는 값진 덕목일 것이다.

라울 펙이라는 아이티 출신의 흑인감독이 미국 최고작가의 한 명인 제임스 볼드윈의 시선을 통해 인종차별의 과거와 현재를 얘기한 다큐를 남기고 이 각본집이 다시 한국에서 번역되는 사건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GNP총량이 커지는 만큼 다문화가정, 노동자를 비롯한 외국인들의 유입, 이민과 난민 등의 문제에서도 한국은 자유롭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가치를 갱신하고 재구성해야 하는 책임과 의무의 위치에 서 있기 때문이다.

라울 펙 감독의 다큐와 김희숙 번역가의 각본집과 그녀가 멋지게 해설해 준 북클럽비바 채널의 유튜브 영상을 같이 보게된다면 이 '트리플 3종세트'가 서로에게 연결되는 멋진 지점을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개인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것 같아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 다큐, 책, 영상 등은 각기 다른 장르같아도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공공 선(Common Good)을 위한 연대로서의 가치를 아는 이들이라면 이런 연결성은 값지고 귀하다. 이 연결성의 일부로서 참여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영화:
https://naver.me/F0Kg7KGL

유튜브 해설:
https://www.youtube.com/live/yfoQx0_V_Dw?feature=shar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빛의 영역 마르코폴로의 도서관
쓰시마 유코 지음, 서지은 옮김 / 마르코폴로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빛은 어떻게 어둠과 조우하는가 혹은 화해하는가]
- 쓰시마 유코의 <빛의 영역> 후기.

'아이를 업는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이제는 아기가 아닌 딸이 무거워 힘에 부쳤다. 아이를 등에 업은 채 허리를 겨우 펴고 일어서니 순간 눈앞이 핑 돌았지만, '지금부터는 아빠가 해줘야 할 일도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돼'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아빠 되기 연습이라는 다짐과 함께 미끄러지지 않도록 발밑을 주의하며 언덕을 따라 내려갔다. 딸은 다시 꾸벅꾸벅 잠이 든 건지, 내 등이 뜨듯했다.

무겁고 예쁜 혹이었다.'

- 쓰시마 유코 지음, 서지은 번역 <빛의 영역(도서출판 마르코폴로, 2023)> p.57 중에서.

어쩌면 대부분의 엄마들에게도 그럴 것이다. 아주 어릴 적의 아기는 예쁘지만 커갈수록 무거워지는 그런 느낌 말이다. 무려 40년도 전에 싱글맘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쓰시마 유코의 <빛의 영역>은 마치 시간을 초월한 공시적인 곳에서 독자를 기다리는 작품과도 같다. 일본의 문예잡지에서 연재된 작품이 한국에 당도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이 시대의 여성들과 독자들에게도 공감을 줄 작품이다.

실제 싱글맘이었던 쓰시마 유코가 자신의 체험담을 바탕으로 쓴 작품을 한국의 싱글맘인 서지은 작가가 번역한 일은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분명 한국에는 늦게 당도했지만 시간을 초월한 문학의 힘은 이것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어린 딸을 낳았지만 이혼을 결심한 후 새로운 집을 물색하던 중 사방에 빛이 들어오는 창이 달린 집을 얻은 것은 싱글맘에게 분명 행운이었을 것이다. 남향으로만 창이 있어도 고마울 대부분의 서민들 신세를 생각하면 더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집은 계단이 가파른데다 무려 4층에 위치해 있어서 그 집을 들락날락하기위해서는 많은 수고로움을 필요로 한다. 이 수고로움을 넘기고 나면 아침의 해가 뜰 때부터 해가 지는 노을의 시간과 한밤중의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풍경까지 많은 전망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빛의 영역은 어둠의 또다른 표현이다. 서지은 번역가가 다른 글에서 인용했듯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을 빌자면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일부로 존재한다'. 사방으로 빛이 들어오는 공간이라고 해서 24시간 빛이 들어오지는 않을 것이다. 때로는 어둠이 지속되고 때로는 천둥이 치고 때로는 소음이 뒤덮을 것이다. 그렇기에 쓰시마 유코가 시선을 보내는 빛은 어둠과 함께 하고 고요함은 소음과 함께 한다. 이런 특성은 4층의 집에서 내려와 세상에 발을 딛었을 때 더 현실적으로 그리고 뼈아프게 다가온다. 일본과 한국의 가족문화가 다를 수는 있겠지만 40년전의 편부모 가족이 보내야 하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더군다나 다자이 오사무라는 대작가의 딸이면서도 유코 본인이 1살때 이미 내연녀와 삶을 스스로 끝내버린 아버지로부터는 혜택보다는 헤아리기 힘든 수많은 그늘의 우여곡절이 있었을 것이다. 놀라운 점은 쓰시마 유코가 지극히 자전적인 작품을 남겼음에도 자신을 하소연하거나 변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버지를 인식하기도 전에 떠나버린 과거를 원망하지도 않고 이혼을 결심했지만 남편을 나쁜 놈으로만 묘사하지도 않는다. 이 지점에서 이 작품은 일본특유의 사소설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에도 일기장에 머물지 않고 문학으로 넘어가는 지위를 획득한다.

1장인 빛의 영역에서 12장인 빛의 입자까지 유코 작가는 외견상 이혼 과정을 담담히 서술하는 형태를 띠지만 세부적인 구성은 현실적인 이야기를 기존으로 상상 혹은 환상이 들어오고 여기에 꿈까지 들어온다. 삶은 현실을 바탕으로 하지만 사실 우리는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상상을 하는가 혹은 환상을 지니는가 그리고 그런 현실과 상상은 잠이 들어서는 현재의식과 무의식이 혼재된 채로 꿈에서 욕망과 공포와 바램으로 짬뽕이 되어 그려진다. 쓰시마 유코의 시선이 주목하는 방식과 더불어 빛과 어둠, 침묵과 소음은 이 꿈에 합세하여 싱글맘을 괴롭히기도 하고 들뜨게도 한다. 이 전체적인 이야기를 수려하고 자연스럽게 무리스럽지 않게 풀어간다. 몇몇 부분에서는 독자의 취향에 따라 감동과 환희의 장면이 나타날 것이다.

지금이야 편부모 가족, 다문화 가족 더 나아가 동성 가족까지, 이제는 모범적인 가족의 형태가 어떤 것이라는 답안조차 없겠지만 여전히 현실적으로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사는 가족들에게 세상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그렇기에 40년전의 한 싱글맘이 자신에게 결여된(?) 혹은 결여되었다고 사회적으로 평판내릴만한 것에 개의치 않고 일기체를 넘어 문학으로 승화한 것은 큰 울림을 준다. 이 점은 지금의 많은 이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줄 것이다. 과거에도 저렇게 살아온 작가가 있었는데 라는 안도감을 넘어 지금에도 여전히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삶의 시선을 지닌다는 것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를.

개인적인 삶이 결핍이 있다고 느끼던지 사회적으로 빈곤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 느끼던지 개인은 고단함과 괴로움을 느끼기 마련이지만 이 결핍의 자리에서 문학가와 예술가는 삶의 본질 혹은 일면을 들여다 본다. 그리고 예술적 영역을 만들어 낸다. 이 영역은 어둠을 소재로 하더라도 괴로운 경험을 이야기로 풀더라도 이 모든 것이 삶과 영혼의 진화를 위한 과정이라는 것을 어렴풋이라도 인식할 수 있다면 전체적인 시선과 서사를 잃지 않을 것이다. 기어코 빛의 영역으로 나아갈 것이다.

빈곤한 시대의 시인은 풍족한 시대의 시인보다는 행복하다. 육신은 고단하나 영혼은 진화하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니, 너 없는 동안
이은정 지음 / 이정서재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도와 바램은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움직인다]
- 이은정 작가의 <지니 – 너 없는 동안> 후기.

‘떠나기 싫은데 떠나야 하는 사람과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 없는 사람 중에 누가 더 불행할까.

동안은 자신이 저울질하는 것들이 행복이 아니라 불행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에 힘이 빠졌다. 베틀에 얽매인 피륙처럼 올곧게, 끊임없이 차오르는 감정, 그게 분노인지 슬픔인지 동안은 확신할 수 없었고, 자신의 감정을 확신할 수 없다는 건 조금 부끄러웠다. 동안은 불결하고 잡스러운 생각들에 시달려 새벽까지 잠들지 못했다.’

- 이은정 소설 <지니 – 너 없는 동안> (도서출판 이정서재, 2023) p.19 중에서.

청소년기의 삶은 어쩌면 직관(감성)과 논리(이성)의 삶 중에 어떤 방식을 중심으로 살 것인지를 결정하는 시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방법론적으로는 마치 대학에 가기 위해 문과와 이과 중에서 선택하는 것 처럼요. 어릴 적의 삶은 대체적으로 순수하고 직관적입니다. 나이에 따라 다르지만 이는 커가면서 경험과 계산이 축적되어 이성화되어 가는 것이 자연스럽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이성적으로 산다는 것, 계산적으로 산다는 것, 논리적으로 산다는 것과 대비하여 직관적으로 산다는 것과는 엄연히 차이가 있습니다. 어른이 되어 감에도 직관과 감성을 잃지 않는 것은 자신이 지닌 내재적인 성향이나 취향과는 별개로 여전히 중요하고 가치있는 일입니다. 여러 종합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자기다움, 창조성, 삶의 열정적인 방향성은 결국 여기에서 나오기 때문일 겁니다.

이은정 작가의 장편소설 <지니 – 너 없는 동안>은 에세이와 병행해 온 작가의 두 번째 소설작품입니다. ‘동안’이라는 청소년이 요술 주전자의 지니와 만나면서 벌어지는 가족과 학교친구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옛날 이야기의 ‘알라딘’이 ‘동안’이라는 주인공으로 바뀌고 지니는 천년동안 요술 주전자에 갇혀 있다가 다시 나타납니다. 원하는 소원을 무엇이든지 들어주지만 단, 조건이 있습니다. 특정한 존재에게 불행을 기원하는 형태로 말이지요. 이 점이 어린 동안에게 여러 복합적인 마음과 경험을 불러 일으킵니다. 가장 예민한 시기의 동안이에게 지니의 등장은 그의 삶을 극적으로 더 도약시킬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지니가 없어도 충분히 극적인 사춘기 드라마의 삶에 말이지요.

삶을 살다보면 행복과 불행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상응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행복과 불행의 시기를 달리 해서 주기적으로 돌고 돈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행복했던 일이 지나고 보면 불행으로 변하기도 하고 이보다 더 힘들거나 불행할 수 있을까 하는 순간도 지나고 보면 더 큰 도약을 위한 바닥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사 새옹지마라는 말은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은정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 불행처럼 보이는 사건 속에서 그것을 그대로 뒤집어 행복으로 바꿔보는 시선을 유도합니다.

한국인들은 종특적으로(!) 기도와 바램을 즐겨하는 민족입니다. 정한수 한그릇을 떠놓고 무탈함과 행복을 비는 소복 여인의 모습은 현대에도 변환이 되어 곳곳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합니다. 이런 기도와 바램은 장시간을 통하여 서서히 결과를 드러냅니다. 순간과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들도 바램과 염원의 한 조각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지니에게 소원을 비는 형태는 단적이고 환상적인 사건일지 몰라도 결국은 우리의 삶과 일맥상통하는 이야기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모두 마음 속에 요술 주전자가 있고 그 속에는 소원을 들어줄 지니가 머무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진심을 담은 소원을 비는 내 마음이 존재한다면 말이지요. 종교의 유무와 상관없이 기도와 바램의 정성이 주는 잠재력을 인지한 이들에겐 매일매일 작은 기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작은 기적들의 결과가 개인의 이기심으로만 충당될 지 공동체에 선한 영향력으로 전이될지는 또다른 선택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이은정 작가는 <지니 – 너 없는 동안>을 통해서 직관력이 완전히 닫히기 전의, 말하자면 완전한 어른(?)이 되기 전의 아이들이 가지는 순수한 영향력을 통해서 절대반지의 위력이 주는 결과가 어떻게 빛처럼 보이는지 혹은 그늘처럼 보이는 지를 들려주는 것 같습니다.

인간은 어른이 되어 가면서, 육신은 이미 어른이 되어 가면서도 마음으로는 어린아이보다 못한 경우도 많습니다. 성숙한 영혼이 되기 위해서는 한 육신의 삶을 가뿐히 넘어가는 매우매우 긴 시간의 시행착오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면서도 직관을 잃지 않는 중심의 힘을 필요로 합니다. 어른을 위한 동화가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소설은 어른을 위한 동화이기도 하면서 청소년 시기를 슬기롭게 보내고 싶은 이들을 위한 작품입니다. 마지막까지 재미와 성찰을 던져줍니다. 흔한 장르소설에서는 재미를, 엄숙한 문학에서는 가치와 교훈을 배울 수 있을 테지만 이 작품은 이 양자 사이에서 매력적인 균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은정 작가의 내공이 깊은 문장과 스타일의 문학적 기본이 베이스로 중심을 잘 잡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백세시대의 삶에서 희노애락은 쉴새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집니다. 행복과 불행은 바이오리듬처럼 오르락 내리락 하며 움직입니다. 이런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감정의 주인공이 되는 것도 흥미진진한 일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지적 시점을 갖출 수 있다면 더 멋진 일일 겁니다. 삶과 수행이 별개가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는 이들에겐 자기 객관화의 정도에 따라 의식의 수준이 더 상회하고 있다는 지표로 볼 수 있습니다. 문학에서의 전지적 시점은 그 서술양식의 정도에 따라 더 나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지표로 삼을 수도 있을 겁니다. 문학의 길이란 통찰의 시선이 전지적 시점의 그릇으로 넓혀지는 길이고 이는 더욱더 우주적 시선으로 향해 가는 삶의 수행과도 결국 통하는 길일 겁니다.

이 작품의 4장 제목처럼 ‘인류의 평화를 위한 여정’이 어른들이 보기엔 아이들 장난같이 보일지라도 그 진심어린 마음들이 모인 의식과 실천은 하늘도 움직이게 만듭니다. 하늘이 보기에 뛰어난 의식은 나이가 어리냐 많냐가 아니라 이 작품의 등장인물인 ‘고은’의 말처럼 진심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 진심이 통한다면 논리적으로는 잘 설명이 되지 않는 크고 작은 기적이 언제든 일어나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겁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