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와 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4
귄터 그라스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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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양이들에게 살아있는 쥐를 줘본 적은 없다. 쥐 모양 장난감을 던져준 적은 있는데, 녀석들은 처음에는 흥미를 보이다가 곧 싫증을 낸다. 그러다가 내가 쥐를 움직이게 하면 다시 흥미를 보인다. 녀석들이 살아 있는 쥐를 봐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쥐가 움직이지 않으면, 또는 애초에 죽은 쥐라면 고양이는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할 것 같다. 그런데 만일 내가 내 고양이들을 즐겁게 하고자 살아 있는 쥐를 녀석들 앞에 가져다준다면, 쥐를 갖고 노는 고양이가 문제일까, 그 쥐를 가져다 준 내가 문제일까? 귄터 그라스의 <고양이와 쥐>는 제목과 달리 고양이와 쥐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럼에도 고양이와 쥐가 등장한다. 아니, 고양이는 등장해도 쥐는 등장하지 않는다고나 할까. 쥐와 비슷한 무언가가 등장할 뿐이다. 쥐와 비슷한 그것은 ‘요아힘 말케’의 비정상이리만치 큰 ‘울대뼈’이다.

작품은 풀밭에 누워 잠든 요아힘 말케의 모습을 묘사하며 시작한다. 작중 화자인 ‘나’, 즉 ‘필렌츠’는 때마침 그 옆에서 이를 앓고 있다. 그때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난다. 고양이는 연습하며 다가온다. 말케의 크 커다란 울대뼈가 고양이의 눈에 띈 것이다. ‘그것은 크고 쉴 새 없이 움직이며, 그림자를 드리웠으므로’ 검은 고양이가 쥐로 착각하거나 아니면 쥐와 같은 존재로 인식하고 사냥 대상으로 삼기에 충분한 것이다. 고양이는 ‘나’와 말케 사이에서 몸을 웅크려 뛸 자세를 취한다. 말케와 나, 그리고 고양이는 삼각구도를 이뤘고 그새 나의 이빨은 침묵하며 더 이상 아픔을 호소하지 않는다. 고양이는 드디어 말케의 후두에 뛰어오른다. 그 장면을 필렌츠는 이렇게 회상한다. ‘우리 중 누군가 고양이를 들어 말케의 목에 올려놓았던가, 아니면 이가 아팠거나 그렇지 않았던 내가 고양이를 들어 올려 말케의 쥐를 보여주었던가.’ 이윽고 말케는 비명을 지른다. 다행히 대수롭지 않은 찰과상을 입을 뿐이다. 그러나 필렌츠는 이렇게 말한다. ‘나, 너의 쥐를 한 마리의 그리고 모든 고양이의 눈에 띄게 했던 나는 이제 써야만 한다. 자꾸만 너의 울대뼈를 손에 쥐고 그것이 승리했거나 패배했던 모든 장소로 데려가라고 강요한다.’(9쪽)

말케와 나, 고양이가 삼각구도를 이루었을 때 ‘나’는 고양이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 모두 관찰한다. 고양이가 나타난 것부터 말케의 커다란 울대뼈에 호기심, 아니 정확히는 그것을 사냥감으로 인식하고 ‘연습’하는 것도 알고 있으며, 웅크려 뛸 자세를 취하는 것도, 이윽고 후두부에 뛰어오르는 것도 모두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 무료한 오후에 일어난 이 일은 하나의 사건이고, 이 사건은 이를 앓던 ‘나’가 아픔을 잊을 만큼 흥미롭다. 그때 ‘나’는 혹시 이 재미난 장난이 우리 중 누군가가 일부러 말케의 울대뼈 위로 고양이를 집어올린 게 아닐지, 아니 그게 혹시 자기 자신은 아니었는지 의심하며 말케의 울대뼈를 ‘모든’ 고양이의 눈에 띄게 했던 자신의 죄를 반성하며 이제 써야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기이하게 큰 울대뼈를 지니고 잠든 말케, 그래서 고양이에게 느닷없이 공격당해 찰과상을 입은 말케. 크게 다친 것도 아니고 찰과상에 그쳤으니 그저 아이들 장난쯤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일을 말케를 향한 자신의 최초의 죄처럼 여기면서 일종의 참회의 글을 쓰고 있다. 울대뼈를 손에 쥐고 ‘승리’했거나 ‘패배’한 모든 장소를 떠올리며 글을 쓴다. 어린 시절의 장난 하나로 조금 지나친 반응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나’의 이 고해성사가 무겁게 느껴지는 이유는 말케가 단지 울대뼈만 큰, 그래서 특이한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말케는 외동이었다.
말케는 반고아였다.
말케의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말케는 여름이나 겨울이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는 구식 목구두를 신었다.
말케는 검정 목구두의 끈에 드라이버를 매달아 목에 걸고 다녔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말케는 드라이버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목에 뭐든 걸고 다녔다. 하지만 무엇보다 눈에 띈 것은 드라이버였다. (14쪽)


외동이며 아버지가 없는 아이. 지나치게 큰 울대뼈를 가리려고 드라이버든 뭐든 여러 가지 이유로 목에 무언가를 걸고 다니던 아이, 말케. 말케는 태생적으로 마을 아이들과 조금 달랐다.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이모와 함께 살던 말케는 필렌츠와 그 친구 또래보다 한 살 많다. 말케의 어머니와 이모 말을 빌리면 몸이 약하고 병치레가 잦아 초등학교를 일 년 늦게 들어갔다고 한다. 이 또한 마을 아이들과 조금 다른 지점이다. 그런데 말케는 선하다. 누구나 자기 것을 베껴 쓰라고 놔두고, 고자질하는 법도 없다. 8, 9학년생들이 흔히 해대는 추접한 짓거리에는 유독 혐오감을 보이고 그런 불결한 장난에는 동참하지 않았기에 또다시 매우 특별한 존재가 된다. 이런 이유들로 때로는 월등하게 때로는 부자연스럽게 갈채를 받는다. 그는 박수를 받으면 기뻐했고, 펄떡거리던 울대뼈는 차분해졌다. 마찬가지로 박수를 받으면 그는 어쩔 줄 몰라 했고, 울대뼈는 새로운 자극을 받았다. 말케는 대부분 박수를 사양했는데 그래서 또다시 박수를 받는다.

말케는 아이들에게 경외의 대상이면서 한편으로는 그 조금 다른 점들 때문에 놀림감, 따돌림의 대상이 된다. 아이들은 말케를 별스러운 존재로 인식하고는 말케가 버터 바른 빵 하나만 먹어도 웃어댄다. 그 웃음은 쉽게 전염되는데 다들 웃다 보면 의아해지곤 한다. 자신들이 왜 그렇게 웃는지 이상한 것이다. 하루는 선생이 아이들에게 장래희망을 묻는다. 그때 말케는 이렇게 대답한다. “저는 언젠가 광대가 되어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겠습니다.” 이 말에 교실 안 누구도 웃지 않는다. 도리어 ‘나’는 섬뜩해진다. 왜냐하면 말케가 서커스단에서든 어디서든 광대가 되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큰 소리로 또박또박 말하며 너무도 진지한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다. 만일 말케가 장난처럼 웃으면서 광대가 되겠다고 말했다면 ‘나’를 비롯해 아이들은 다들 낄낄 웃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말케는 진심으로 진지하다. 왜일까? 여느 아이들과 다른 존재라 놀림에도 따돌림도 익숙해진 말케에게 사람들이 즐겁게 웃으며 주목한다는 것은 큰 매력으로 다가왔으리라.


“재, 왜 저래?”
“자식, 머리가 돈 거 아닐까.”
“쟤네 아버지 돌아가신 거랑 상관이 있을지도 몰라.”
“목에 저 잡동사니들은 뭐야?”
“허구한 날 기도드리러 가는 건 또 어떻고.”
“믿음이라곤 없는 것 같은데.”
“그러기엔 너무 현실적인 녀석이지.” (35쪽)


말케를 향한 주변의 이렇듯 늘 곱지 않다. 특별히 잘못한 점이 없는데도 그렇다. 그저 자기들과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철부지 소년들에게는 재미난 장난감이자 심술을 부리기에 알맞은 사냥감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말케는 아이들과 어울리고자 수영을 배우고, 잠수 솜씨를 선보이며 무리 안에서 인정받기를 갈구한다. 아이들이 자신의 큰 울대뼈가 아닌 다른 것을 봐주기를 바란다. 울대뼈는 말케에게는 숨기고 싶은 그 무엇이다. 가뜩이나 남과 조금 다르다고 따돌림과 놀림을 당하는데, 울대뼈까지 비정상적이다. 그러기에 말케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숨기려고 드라이버나 은 목걸이 등을 목에 걸어서 그것을 감추려고 한다. 그러나 그마저도 잘 되지 않자, 주위를 환기할 방법을 생각해 낸다. 다른 곳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돌리려는 것이다. 말케는 먼저 배지에 집착한다. ‘우글거리는 물고기 떼와 조용히 날아가는 갈매기들, 야광 꽃다발’ 모양 배지들을 처음에는 외투 깃에 그리고 목도리에 꽂는다. 이모에게 부탁해 형광물질로 만든 단추 여섯 개를 외투 위부터 아래까지 달아달라고 해서 스스로를 ‘광대’로 만든다. 말케는 그렇게 곰팡이가 슨 듯한 초록색 야광단추를 외투에 달고 길을 따라 내려온다. ‘그 초라한 유령은 기껏해야 아이들이나 노파를 놀라게 할 뿐’인데도 말케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는 어차피 보이지도 않는 어떤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 애쓴다.(70쪽)

말케의 이 처절한 노력, 그러니까 놀림이나 따돌림의 대상을 벗어나고, 진정한 관심과 애정의 대상이 되고자 하는 노력은 성공할 수 있을까.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독자는 초반부터 감지할 수 있다. 때문에 말케의 노력은 점점 그릇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광대가 되어 사람들을 웃기고 싶어 했던 말케는 사람들이 칭송하고 우러르는 존재, 군인이 되길 기꺼이 선택한다. 애초에 말케는 군대나 전쟁놀이, 군인다움을 강조하는 것을 그다지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느 틈엔가 ‘아직 기회가 있는 건 이 병과뿐’이라고 생각하면서 군대에 자원한다. 말케가 생각한 그 ‘기회’란 과연 무엇일까. 아마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 제대로 대우받는 것이리라. 웃음을 주고 싶던 사람에서 전쟁광이 되어버린 말케. 말케를 그렇게 몰아간 고양이들 가운데 자신들이 그렇게 몰아갔다는 것을 깨닫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 필렌츠에게도 기회는 있었다. 고양이가 애초에 말케의 울대뼈를 쥐로 인식했을 때 만일 말케를 깨워 일어나게 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순간을 침묵으로 일관하며 지켜보았다. 필렌츠는 그나마 죄의식을 갖고 말케의 음울한 변화를 회상하지만, 대다수의 고양이들은 쥐가 움직이기에 사냥을 했듯이, 쥐가 자기보다 약하기에 사냥을 했듯이 자기의 죄가 죄인지도 여전히 알지 못할 것이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전쟁이 시작된 1939년부터 패전한 1945년 무렵까지이다. 작품 속 아이들은 전쟁과는 동떨어진 듯 침몰한 적군의 배에서 노획물을 건져 올리거나 하면서 한가로이 지낸다. 때문에 작품 속에서는 나치스의 집단 광기가 직접적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말케가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따돌림 당하고 끝내 파국에 이르는 과정, 그리고 그 과거를 회상하는 필렌츠의 고백을 지켜보노라면 말케의 울대뼈(쥐)를 놀이삼아 고양이가 사냥하도록 몰아간 아이들의 놀이 자체가 그 시대의 한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신체적 결함이 있는(실은 결함도 아닌, 생김새가 조금 다를 뿐인), 남들과 조금 다른 말케는 히틀러와 나치스가 말하기를 ‘신체적으로 열등한 인종’이었던 유대인, 아니 순수한 아리아인을 제외한 여러 인종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그들을 결국 단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죽음의 유형지로 몰아간 그 시대에 침묵을 비롯하여 어떤 식으로든 동참한 독일 국민들 모두가 쥐를 노린 고양이는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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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4-06 17: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기 죄가 죄인지도 알지 못한다‘ 어려운 책인거 같은데 읽고 싶어지네요. 독일 작가가 쓴 2차대전의 독일의 행동을 비판한 책 이라니 더욱 흥미가ㅎㅎ

잠자냥 2021-04-06 17:58   좋아요 2 | URL
네, 언젠가 기회되시면 읽어 보세요. 귄터 그라스는 책 좋아하는 분들이 안 읽고 지나치긴 어려운 작가 같습니다.

레삭매냐 2021-04-06 18: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노년에 다른 부대도 아니고 나치 친위대
에 복무한 경력을 드러낸 걸 어떻게 받
아 들여야 할지...

그가 작가 초창기 시절에 그런 경력을
드러냈다면 과연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있었을 지 그것이 궁금하더라구요.

잠자냥 2021-04-06 22:03   좋아요 0 | URL
ㅎㅎ 아마도 평생 자기를 괴롭힌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작가 초창기에 그 경력을 밝혔다면 절대 그 상을 받지는 못했겠지요.

coolcat329 2021-04-06 19: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리를 잘해주셔서 재밌게 읽었습니다. 고양이 목에 나치 목걸이가 이해가 가네요.

잠자냥 2021-04-06 22:04   좋아요 0 | URL
저도 쓰다 보니 이 어려운 작품이 조금은 이해가 가더라고요. 그래서 리뷰 써두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거짓의 날들
나딘 고디머 지음, 왕은철 옮김 / 책세상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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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따금 언제나 모든 화제가 자기 가족 이야기로 국한된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또 가끔은 자기가 속한 세계가 자신을 대변한다고 굳게 믿는 사람을 만날 때도 있다. 그런 이들일수록 출신 학교와 지역, 사는 동네, 직장 이름에 민감하게 군다. 나는 이 두 부류의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 아빠 차는 뭔데, 너네 아빠 차는 뭐니자랑하는 유치원생을 보는 것 같다. 인간이 성장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성장이란 키가 크고 몸이 커지는 등 육체적 자라남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정신의 자라남도 반드시 포함된다. 인간은 어떤 의미로든 성장한다. 진정한 성장을 위해서는 여러 요소들이 따라야 하겠지만 그중에서도 자신이 속한 세계를 타인의 눈으로 바라볼 줄 아는 능력과 다른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도 마치 자기 일처럼 느낄 줄 아는 공감 능력은 꼭 필요하다. 자신이 나고 자라온 가족, 현재 속한 세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줄 안다는 것은 얼마나 큰, 그러나 그렇기에 쉽게 갖기 어려운 능력인가. 게다가 자신과 상관없는(또는 그렇게 보이는) 세계에 속한 사람에게 느끼는 공감과 연민의 능력은 또 어떤가.

 

네이딘 고디머의 <거짓의 날들>에는 이 두 가지 모습이 모두 그려진다. 고디머가 유일한 자전적 작품이라고 꼽은 이 작품의 주인공 헬렌은 고디머 그 자신이기도 하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0년대. 남아프리카 광산 지역의 백인 중산층 가정에서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낸 헬렌. 책을 좋아하는 이 소녀의 세계관은 그때는 아직 협소한 광산촌과 속물적이고 이기적인, 부모의 세계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여느 흑인을 대할 때와 달리 집안일을 돌봐주는 흑인 하녀 애나와 엄마가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엄마가 이상하다고 느낄 정도로 평범한 소녀이다. 백인의 특권은 공기처럼 자연스러워서 헬렌은 그걸 특권이라고 느끼지도 못하고 자란다. 단지 저 유럽, 그것도 영국 중상류층 가정 아이들의 평범한 생활을 다룬 동화책이 더 신기하다. 어느 책에도 헬렌의 집 애나처럼 집안일을 하고 요리를 하며, 주인집 어머니와 아버지를 마님과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흑인 여자아이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헬렌은 이상하다는 느낌만 있을 뿐 그게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이제 열일곱 살인 이 소녀가 계속 그 부모와 광산촌에만 머무른다면 소녀의 성장은 결코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육체는 성장을 멈출 때까지 계속 자라겠지만 정신은 그 어떤 변화도, 충격도, 깨달음도 얻지 못하고 그저 부모의 영향 아래, 협소한 광산촌 이웃들과의 관계 안에만 머물렀을 것이다. 비록 책을 읽는다 하더라도 실제로 경험하는 세상과는 달리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소녀는 어느 여름, 집을 떠나 나탈의 남부 해안에서 한때를 보내게 된다. 광산촌에서 바닷가로 장소 이동을 한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헬렌은 첫 번째로 자기 세계가 깨지는 경험을 한다. 풋풋한 첫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루디와의 만남이 그렇다. 루디는 헬렌의 부모와는 모든 면에서 대조적이다. 부와 명예, 명성 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헬렌의 부모와 달리, 루디는 그 무엇도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심지어 헬렌이 속한 세계인 광산촌을 이렇게 말한다. “광산촌에서 사는 건 너무 협소하고 기계적이고 소득 없는 삶이야.”(85). 헬렌은 이 말을 듣고 너무 놀라고 충격을 받아서 혼날 짓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말을 더듬는다. 화가 나고 비참하기도 하다. 그는 더 신랄하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을 생산하기 위해 어두운 지하에서 흙을 파다가 여덟 시간이 지나면 신성불가침의 위계질서 속으로 돌아와 하느님 같은 감독관을 비롯한 윗사람들에게 웃으면서 인사하고, 아랫사람들한테 인사를 받고 말이야. 그렇다고 내 밑에 누가 있다는 말은 아니야. 흑인들을 제외하면 말이야. 그들 위에 군림하는 건 특권이 아니라고! 나는 그런 일을 원치 않아. 좋은 일자리, 좋은 가족, 따분한 도시, 속이 좁은 사람들을 원치 않아. 그런 것에는 흥미가 없다고.”(85~87). 다만 이런 말을 하는 루디가 헬렌보다 무려 열 살이나 많다는 게 지켜보는 입장으로서는 꽤 못마땅하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루디와의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여름방학처럼 스쳐지나간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헬렌은 조금 달라져 있다. 자신의 둘러싼 광산촌의 삶이 진부하고 부모의 위선도 부끄럽고 민망하다. 그렇지만 루디도 처음에 열광했던 그 모습 그대로 보이지는 않는다. ‘나이를 초월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실은 여느 사람과 다름없는 어른에 불과하다는 사실’(89)을 깨닫는다. 이 또한 다행이다. 열일곱 소녀를 탐하는 스물일곱 남자, 그러면서도 그 앞에서는 자못 인생을 아는 것처럼 말하며 우쭐대는 모습이라니, 당신도 아직 성장하려면 멀었다는 생각이 루디를 볼 때마다 치밀어 올랐는데, 헬렌의 눈에도 어느 순간 그 모순이 보였으니 말이다. 학교를 졸업한 지 일 년이 지났고, 그 일 년 동안 아버지가 다니는 애서턴 광산 사무실에서 임시직으로 일하던 헬렌은 처음에는 루디의 영향으로 대학도 거부하더니, 마침내 요하네스버그 대학교로 진학한다. 두 번째 변화의 계기다. 그리고 이 두 번째 계기는 헬렌이 속했던 애서턴과의 진정한 결별을 뜻하기도 한다.

 

내가 교복이나 명예를 위해 대학에 가는 것이 아님은 확실했다. 나는 의심과 무료함과 삶에 대한 경이감 때문에 대학에 갔다. 그것은 모든 탐색의 시작이었고 자아를 찾기 위한 혼란스러운 여행의 시작이었다. (156)

 

열일곱 헬렌에게 다른 세상도 있음을 보여준 사람은 루디 단 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대학에 진학한 헬렌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타난다. 유대인 친구 요엘’, 흑인 친구 메리’, ‘이사’, ‘마커스 부부등 다양한 인종에, 다양한 출신 배경을 지닌 사람들을 만나고, 스치듯 연애도 하던 헬렌은 드디어 진짜 사랑이라고 할만한 을 만나 열정적인 사랑에 빠진다. 그러는 사이 헬렌은 이 수많은 사람들의 영향으로 인종차별이 나날이 심해지는 남아프리카의 현실에 눈을 뜬다. 특히 흑인 친구 메리를 통해 지금까지 흑인들의 말소리가 개 짖는 소리나 새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았던 헬렌은 바로 그 흑인들 속에서 자신이 자라왔음을, 자신 또한 이 세계에서는 이방인임을 통렬하게 깨닫는다.

 

헬렌과 메리가 처음 만나는 곳은 대학교의 화장실이다. 헬렌은 화장실에서 메리를 보고 충격을 받는다. 백인과 흑인이 한 공간에 나란히 있다니! 그도 그럴 것이 대학은 남아프리카에서 흑인과 백인이 같은 장소에서 손을 씻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였다. 요하네스버그를 통틀어 그런 곳은 대학 밖에 없었다. 헬렌은 이런 상황이 어색하기 짝이 없다. ‘흑인 대학생이나 백인 대학생이 인종차별 없다는 엄숙한 선언보다 더 실감 나게 다가오는 그런 사실에 익숙해지는 데는 상당한 적응 기간이 필요’(164)하다. 헬렌은 메리와 평범한 친구 관계가 되고자 무던히도 애쓰지만 무언가 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한다. 일상생활에서 흑인들을 대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정상적인 관계를 가져보려는 하찮은 시도 또한 번번이 벽에 부딪히는 것이다. 백인인 헬렌은 메리가 어떤 곳에 들어갈 수 없고, 어떤 출입구를 사용할 수 없고, 어떤 의자에 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자꾸 잊어버린다. 도시에 거주하는 모든 흑인들처럼 메리는 금기시 되는 것들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걷는 법을 배워야 했지만 헬렌에게는 그것들이 모두 당연했다. 그러는 사이 헬렌은 처음으로 백인으로서의 죄의식을 느낀다.

  

나는 메리에게 손을 뻗으려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사람들은 예수의 희생정신과 정의감과 인권선언을 가지고 노력한다.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그것은 선언되는 순간 넌센스가 된다. 절대적인 것은 흑과 백처럼 합해지고 변화하는 삶에서는 현실성이 없다. 그것이 올 때는 아무 관련 없이 온다. 이렇게 싸구려 냄새가 나는 쓸모없는 분위기에서, 개인적인 감정을 깊이 수용하는 데서 온다. (371)

 

헬렌이 흑인의 인권을 생각하는 것도, 남아프리카의 참혹한 현실과 모순도, 백인으로서의 죄의식을 느끼는 것도 모두 개인적인 감정을 깊이 수용한 것에서 시작된다. 더욱이 헬렌이 미치도록 사랑하는 남자 은 흑인사무국에서 일하면서 흑인의 삶을 향상시키고자 온몸을 던지는 백인 남자가 아닌가. 헬렌은 그의 영향도 받지 않을 수 없다. 광산도시 애서턴에서 나탈의 바닷가, 그리고 이제 요하네스버그라는 도시로 이주한 헬렌. 처음에는 집을 떠나 친구 부부의 방 한 칸을 빌려 독립하고, 그 다음에는 폴의 집에서 그와 동거하면서 삶의 모습도, 삶을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도 서서히 변화해 간다. 헬렌이 도시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대학에 처음 입학했을 때만 하더라도 그녀의 모습은 그저 이상주의자였다. 그녀 스스로도 한 인간이 남아프리카에서 자기를 완성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흑인들에 대한 압제에 맞서는 것이라고 믿는 시기였다. 공부할 장소가 없는 메리를 위해 무턱대고 부모에게 메리를 초대하겠노라 말하던 헬렌의 모습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이상주의자일 뿐이다. 훗날 헬렌이 깨달았듯이 옳은 일을 한 것처럼 행동함으로써 잘못된 것을 바로잡았다고 믿는 위선적인 사고방식의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인도인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고 인종의 벽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578)라는 것을 헬렌을 뒤늦게 깨닫지만 그 시절에는 그렇게 행동했다. 그러나 몇 년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헬렌은 그런 삶의 방식이 초래하는 결과, 즉 그런 믿음을 가질 권리와 그 믿음을 실행하는 데 있어서의 부적절함이 모두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426)하게 된다. 정신적으로 한결 성장한 것이다.

 

괜찮은 삶에 대한 생각과 실제로 사는 삶사이의 모순 사이에서 고민하고 번뇌하던 헬렌은 자신이 조금씩 성장했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아차렸을까. 그녀는 심지어 영원할 것처럼 사랑한 폴과의 관계에서도 모순이 있음을 깨닫는다. 너무나 익숙했던 폴의 방이 사실은 폴의 공간일 뿐, 자기 자신을 위한 곳이 결코 아님을 깨닫는 헬렌. 그 방이 낯설게 여겨질 때 그녀는 다시 그곳을, 그리고 폴을 떠날 수밖에 없다. 헬렌은 이제 남아프리카가 아닌, 한 번도 발을 디뎌본 적 없는 유럽으로 가고자 한다. 남아프리카도 아닌, 아직 유럽도 아닌 곳에 머물 때 헬렌은 가장 객관적으로 지나온 자기의 삶과 자기가 떠나온 도시를 돌아볼 줄 안다. 그렇게 훌쩍 성장한 것이다. ‘거짓의 날들이라고 느꼈을지언정, 그 모든 날들이 헬렌의 성장에 밑바탕이 되었다. 물론 헬렌이 그러한 삶의 조각들을 긍정적인 자기 성장의 밑거름으로 삼을 줄 아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도 한몫했으리라. 이 아름답고 눈부신 작품은 헬렌이라는 한 소녀의 7여 년간의 세월을 그리며 인간이라면 어떻게 자라야하는지를 담담히 보여준다. 헬렌은 그 이후로도 계속 성장하기를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런 네이딘 고디머가 되지 않았을까


나는 더 이상 자기기만을 하는 게 아니야. 달아나는 것도 아니야. 사랑의 모험이든, 백인이기 때문에 느끼는 죄의식이든 이상을 현실에 적용시키는 것에 따르는 위험이든, 다시 말해 내가 달아나려고 했던 것이 무엇이든 더 이상 그것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이 아니야. 내가 돌아오리라는 것을 아니까.(604~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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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3-26 13: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 앞부분에 공감이 가네요~잠자냥님 별5개면 일단 보관함으로^^

잠자냥 2021-03-26 14:11   좋아요 2 | URL
네 이 책 정말 모두에게 추천입니다. 특히 여성에게.
그나저나 절판이라는 점이 안타까운데, 아마 많은 분들이 찾으면 다시 재발간하지 않을까요.
네이딘 고디머가 저작권료에 비해 사람들이 많이 안 찾아서 수지가 안 맞는지 원.....-_-

레삭매냐 2021-03-26 15: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너무 욱겨요...

잠자냥님이 책을 땡기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당장 중고서점에 사러 갔는데
상권이 없어서 일단 하권이 사두었답
니다. 상권만 있으면 읽기라도 할 텐데
하권 밖에 없으니 읽을 수도 없더라는.

왜 좋은 책들은 하나 같이 구하기가
어려운 건지 참 -

잠자냥 2021-03-26 15:14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권부터 읽으시죸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주인공의 인생을 회고록 읽듯이 읽는 겁니닼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03-26 15:19   좋아요 3 | URL
이상하게도 이쪽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작가들 책이 절판이 많더군요. 쿳시는 그래도 최근 다시 나오긴 하는데... 아무래도 저작권료에 비해 수지가 안 맞는가 봅니다.

미미 2021-03-26 15: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반에 써주신 내용에 공감되기도하고 딱 저렇진 않지만 찔리는 부분도 많네요.^^; 책을 읽어나가면서 내가 참 미숙한 인간이구나 여러번 느껴요. 저도 찜~♡

잠자냥 2021-03-26 16:13   좋아요 2 | URL
찔리긴요.ㅎㅎㅎㅎ 책 읽으며 함께 성장해 보아요. ㅎㅎㅎㅎ

Falstaff 2021-03-26 17: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흠. 별 다섯 개짜리 절판 책은 리뷰 쓰지 말기 할까요? ㅋㅋㅋㅋ

잠자냥 2021-03-26 17:58   좋아요 3 | URL
아닙니다. 저는 이 책의 재출간을 바라는 마음으로 불쏘시개 역할을 하는 겁니다!!! ㅋㅋㅋㅋㅋㅋ
(이 작품 정말 문장이 아름답습니다. 서정성 철철, 번역가 역할도 한몫했겠지요.)

mini74 2021-03-26 2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만 읽어도 참 재미있을거 같아요. 좋은 성장소설을 읽으면, 예전의 그 나이때로 돌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몸은 사그라들고 있지만 마음은 성장하는 느낌 ㅎㅎㅎㅎ 근데 왜!!! 절판인거죠 ㅠㅠ

잠자냥 2021-03-26 21:56   좋아요 2 | URL
네 작가가 이 작품을 스물아홉에 썼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빼어난 작품입니다. 이걸로 노벨문학상도 받았고요. 그런데 정말 절판이라니! 말이 안 됩니다!!
 
여우굴 독깨비 (책콩 어린이) 3
아이반 사우스올 지음, 손영욱 그림, 유슬기 옮김 / 책과콩나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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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를 사지 않으면서도 가끔 로또가 당첨된다면 어떻게 할까 생각해 볼 때가 있다. 몇 십 억 단위로 당첨된다면 몇 억은 누구 주고 또 몇 억은 누구 주고 등등 주로 가족이나, 애인, 친구에게 떼어 줄 생각을 한다. 물론 내 것도 챙기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로또를 사지 않으니 그럴 일은 내 평생 없을 것이다.

 

가끔 읽는 어린이 책에서 뜻밖의 보물(?)을 발견하기도 한다. 호주 작가 아이반 사우스올의 <여우굴>이라는 책도 그중 하나이다. 내용은 처음엔 좀 지루하다. 켄이라는 소년이 홀로 외삼촌 집을 찾아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엄마가 싸준 엄청나게 무거운 가방을 들고, 어른 틈바구니에서 이리저리 치이면서도 안간힘을 써서 버스를 타고 가까스로 자리를 잡지만(어른들은 누구 하나 이 아이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지갑을 잃어버려서 찻삯도 치르지 못한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버스 운전사는 그냥 내리고 다음에 내라고 한다.

 

그렇게 도착한 외사촌 집은 켄의 집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켄은 도시에서 나고 자란 전형적인 도시 아이로, 부모들 또한 도시의 삶에 적응해 부유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켄의 엄마의 오빠인 밥 외삼촌은 엄마가 보기에 말 그대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인생이다. 변변한 직업도 없고, 그런데다가 애들은 셋이나 낳아서 호주 어느 오지 같은 산골 마을의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에서 뭘 먹고 사는지 알 수 없는데도 그냥저냥 살아가고 있다. 규칙과 질서, 정돈, 정리, 성공 이런 것에 길들여진, 아니 그런 삶이 온전한 삶이라고 믿어온 켄이 보기에 외삼촌 집은 혼돈 그 자체다. 쉴 틈 없이 시끄럽게 놀아대는 외사촌 휴, 조앤, 프랜시 등도 켄의 정신을 쏙 빼놓는데, 외삼촌이나, 외숙모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 집안에는 질서도 정리정돈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여기까지 읽었을 땐 아, 그래서 이 켄이라는 아이가 외삼촌 가족의 자유분방한 삶에 동화해서 서서히 변하는 이야긴가 싶었는데(그래서 좀 지루했는데), 곧 반전이 일어난다.

 

휴는 켄이 놀러왔다는 핑계로 집 가까이 있는 댐 근처 숲에서 하룻밤 야영을 허락받는다. 켄으로서는 이 또한 무시무시한 계획이다. 어른 없이 아이들만, 그것도 하필이면 댐 근처에서 야영을 한다니, 자기 집 분위기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외숙모와 외삼촌은 아무렇지 않은 듯 허락을 한다. 켄은 어쩔 수 없이 휴를 따라가서 불편하고 무섭고 끔찍한 텐트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그런데 사건은 그 다음 날, 날이 희부옇게 밝아올 무렵에 일어난다. 휴보다 먼저 일어난 켄은 텐트 밖으로 나와 주변을 살펴보던 중, 여우가 조앤이 기르는 당닭 한 마리를 물고 달아나는 광경을 보게 되고 정신없이 뒤쫓는다. 그러다가 결국 자기도 모르게 나무딸기 넝쿨이 우거진 곳에까지 들어가게 되고, 여우를 뒤쫓을 때와는 달리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곳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다. 온몸은 이미 여기저기 긁혀서 피투성이다. 사실 이 근처는 동네 아이들이 여우굴이라고 부르면서 왠지 두려워하며 가까이 가기를 꺼리는 곳이다. 잠에서 깨어나 켄을 찾던 휴도 켄의 목소리를 듣고 이 근처까지 오지만, 더는 다가오지 못하고 망설이기만 한다. 이런 사정을 알지 못하는 켄은 왜 외사촌이 자신을 빨리 돕지 않는지 답답하기만 하다. 휴는 이때서야 어른의 도움을 받고자 전날 밤에 아버지가 다급한 일이 있으면 흔들라면서 줬던 종을 신나게 울린다.

 

잠옷 바람으로 나무딸기 수풀까지 달려온 외삼촌과 외숙모- 외삼촌 밥은 귀찮은 일이 생긴 것에 일단 짜증을 내고 켄이 말썽쟁이라면서 투덜대기에 급급하다. 이때부터 약간 이 인간 뭐지? 싶었는데 자, 이제 앞으로 더 기함을 토할 일이 벌어진다. 나무딸기 수풀이 너무 무성해 연장 없이는 안으로 들어갈 수 없고, 다시 집에 가서 연장을 가져와 수풀을 잘라내는 일은 더디기만 하다. 그러는 사이 공포와 두려움에 질린 켄은 자신을 돕지 않는 것 같은 외가 식구들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그래서 자기 힘으로 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땅이 무너져 내리고 오히려 더 깊은 구덩이 안으로 추락하게 된다. 그리고 켄은 정신을 잃는다.

 

, 조앤, 프랜시 등 어린아이들은 이웃을 데리고 오거나 경찰을 부르자고 하는데 무능하면서도 주변 시선은 엄청 의식하는 밥은 절대로 안 된다고 한다(밥통 같은 인간아!). 처음에는 아내가 잠옷 바람이라고, 애들 또한 잠옷 바람이라서 싫다고 하더니(? 이 다급한 상황에 그게 이유가 될까), 경찰도 부르지 말라고 한다. 자신이 책임을 추궁 당할까봐 두려운 것이다. 게다가 평소에도 자신을 한심하게 여긴 여동생이 자기의 하나뿐인 아들을 죽였다고, 온갖 비난을 퍼부을까봐 그것도 걱정이다. 저기 저 아래 구덩이에서 조카가 떨어져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이 한심한 인간은 주변 시선과 자기 연민에 빠져 가장 좋은 선택을 하지 않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켄은 정신을 차린다. 온몸이 아프지만 살아 있다! 대체 왜 외삼촌은 날 구해주지 않는 걸까, 여기서 나가고 싶다, 제발 꺼내줘요. 가엾기 짝이 없다. 외삼촌은 어찌어찌해서 켄에게 손전등을 내려 보내준다. 켄은 두려움 속에서도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비춰보다가 놀라운 것을 발견한다. 아이답게 아무것도 헤아리지 않고 소리친다. “외삼촌! 외삼촌은 이제 부자에요!”- 이곳은 사실 오래 전에 중국인들이 금을 찾아 갱도를 여기저기 파놓았던 곳으로, 이 사실은 켄이 도착한 날 저녁에 외삼촌이 허무맹랑하지만 어쩐지 흥미로운 옛날이야기인 듯 들려주었다. 그런데 그게 사실로, 진짜로 있을 줄이야. 황금이 있다는 소리에 외삼촌의 눈빛은 달라지고 얼굴은 기묘하게 빛난다. 외숙모 또한 이상해진다. 아이들이 보기에 제 엄마와 아빠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갈비뼈를 다친 켄은 아픔이 더해 가는데 외삼촌은 자길 구해줄 생각은 하지 않고 이젠 황금에 대해서만 묻는다. 아이들은 켄이 죽을지도 모른다면서 계속 이웃이나 경찰에게 도움을 청하자고 하지만, 밥은 더 단호해진다. 심지어 의사도 부를 수 없다고 한다. 사람들이 여기 황금이 있는 것을 알면 다들 몰려올 것이라고. 게다가 이 땅은 현재 국가의 땅이므로 나라에서 알면 자기들은 황금은커녕 이 집터에서도 쫓겨날지 모른다고 무조건 입을 다물라고 한다. 켄은 그 사이 외삼촌과 외숙모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어버리게 된다. “여기 있는 것은 내 탓이 아니에요. 외삼촌네가 나빴어요.”

 

그렇지 않은가. 부모 등에 떠밀리듯 혼자 이곳에 온 것도 억울한데, 원치 않는 장소에서 야영을 하다가 깊은 구덩이에 갇혀 버렸다. 도움을 요청한 어른은 황금에 눈이 멀어 아이를 구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제 자신이 직접 그 구덩이까지 내려가서 황금을 볼 생각만 한다. 그런 주제에 네 어머니는 사실 그대로 말하면 좋아하지 않을 거다.”라며 켄을 은근히 협박하기도 한다. 켄은 이 구덩이에서 무사히 나갈 수 있을지, 저 밥통 같은 밥은 과연 정신을 차리고 애부터 구할 것인지 한숨과 답답함이 밀려온다. 그런데 이때 당연히 그런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나라면 어땠을까? 아마 나라면 나무떨기 숲을 헤치고 들어가는 게 무리라고 생각했기에 애초부터 잠옷 바람이든 뭐든 경찰이나 119를 불렀을 테지만 그렇게 하면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으니 일단 황금까지 발견했다고 치자. 황금을 무시할 수 있을까? 사지도 않은 로또에 당첨돼 주변 사람들에게 돈을 나눠 줄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흐뭇해지는데, 황금광을 발견하고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밥 외삼촌 또한 아이들에게 황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을 약속한다. 훌륭한 집, 자가용, 멋진 자전거, 보석 박힌 침대, 대학 공부 등등. 하지만 켄이 목숨을 읽고 나서도 황금으로 산 것들이 반짝반짝 빛날 수 있을까.

 

, 조앤, 프랜시도 솔깃하긴 하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아이들이다. 저 아래 켄이 더 걱정이다. 아빠가 제발 정신을 차리고 켄부터 구했으면, 그래서 의사를 불렀으면 싶다. 만일 이 책이 성인용이었다면 외삼촌 밥은 끔찍한 선택을 하고도 남았을 것 같은데, 어린이 책이라 그런 결말로는 가지 않는다. 황금을 자기 눈으로 확인하려고 무모하게 구덩이에 내려온 밥은 이제 켄과 함께 구덩이에 빠진 신세가 되고 만다. 올라갈 수 없고 올라가기도 힘겹다. 그리하여 마침내 조앤에게 말한다. 경찰을 부르라고(밥통도 자기 목숨은 소중한가 보다). 조앤은 머뭇거린다. “그럼 그걸 다른 사람한테 말해도 돼요?” 이때 밥은 조금 망설이다가 켄이 본 것은 황금이 아니었다고, 황철광(fool's gold)이었다고 말한다. 조앤은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향해 달려간다. 켄은 외삼촌에게 자신은 절대 비밀을 지킬 수 있다고, 외삼촌을 좋아하니까 비밀을 지킬 수 있다고 말하는데, 켄의 마음에는 상처가 하나도 남지 않을까? 그리고 이 남자, 밥은 정말 자기가 말한 것처럼 이 수많은 황금을 황철광이라고 여기면서 여우굴을 잊을 수 있을까. ‘fool's gold’라는 말이 여러 가지로 의미 깊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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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3-17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저는 이 리뷰만 읽어도 힘들어요. 켄이 처한 위험과 두려움이 너무 힘들어요. 형편없는 어른을 만난 것도 너무 싫고요. 아 속상해요 ㅠㅠ

잠자냥 2021-03-17 19:26   좋아요 0 | URL
그 밥통을 제가 한대 때려주고 싶었습니다!!! 으휴 그것도 어른이라고...
 
떠나지 못하는 여자 - 린다 B를 위한 진혼곡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백선희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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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생활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역적으로 몰려 유배당하는 상황은 드라마나 영화, 책에서나 만날 법하고 그렇기에 그런 생활도 언뜻 그다지 나쁠 것 같지는 않다. 옛 선비들은 유배지에서 안빈낙도하면서 그럭저럭 지내는 것처럼 보이기에 더 그런 것 같다. 그런데 그 유배 생활이 현대에, 그것도 한참 꿈꾸고, 한참 자유롭게 돌아다닐 나이의 젊은 여성에게 형벌처럼 주어진다면 어떨까? 고작 몇 평의 공간으로 한정된 감옥살이가 아니니 덜 끔찍하지 않겠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단지 저 머나먼 외딴 도시에서 살아가는 것이니 완전히 자유롭지 않은 것도 아니지 않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이스마일 카다레의 <떠나지 못하는 여자 - 린다 B를 위한 진혼곡 >을 읽기 시작한 초반에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작품은 남녀의 말다툼 장면으로 시작한다. 여자는 눈물을 흘리고, 남자는 그런 여자가 짜증스러워 온갖 비난을 퍼붓다가 결코 해서는 안 될 말까지 한다. 다른 나라라면 그런 비난을 할 리가 없는데, 이곳은 공산독재가 한창인 1980년대 후반의 알바니아. 그렇기에 “당신 정체가 뭐야, 스파이야?”라는 남자의 말은 여자에게도, 또 그 자신에게도 치명적이다. 남자의 이름은 ‘루디안 스테파’. 극작가인 그는 공산독재 치하에서도 그럭저럭 검열을 피해 작품을 무대에 올릴 수 있었고, 작가로서의 명성도 인기도 얻고 있다. 말다툼을 벌인 여자 친구 ‘미제나’도 작가로서의 명성과 인기를 통해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출판 사인회에서 만났으니까.

그런데 루디안은 어느 날 문득, 아무런 설명 없이 당 위원회의 소환을 받고 불안감을 느낀다. 예술 심의회에서 검열중인 새 작품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미제나가 고발한 것일까? 말다툼 중 “당에서 붙인 스파이가 아니냐”며 몰아붙인 것이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게다가 그때 싸움 중 책꽂이에서 떨어진 책들 중 몇몇은 공산독재에 비판적인 책들이 아니었던가. 이래저래 불안한 마음으로 당 위원회 소환에 응한 그는 그곳에서 뜻밖의 사실을 맞닥뜨린다. 한 여성이 자살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언젠가 루디안이 ‘린다 B에게. 저자의 추억을 담아.’라고 친필 사인을 해준 사람이다. 그렇게 사인을 해준 사람이 한둘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일일이 기억하며, 심지어 그 여자의 죽음에 자신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루디안은 답답할 뿐이다.

알고 보니 이것 참, 문제이긴 하다. 죽은 여자, ‘린다 B’는 이 나라 유서 깊은 가문 출신으로, 그 집안은 군주제 시절 옛 왕실의 측근이었다. 그리고 현재 유배상태이다. 그런 상태였던 린다의 일기장에 루디안의 이름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린다는 루디안을 향해 꽤 달콤한 감정을 키우고 있었고 당위원회가 보기에 그 감정은 단순한 팬 수준을 넘어섰다. 그렇기에 ‘린다 B에게. 저자의 추억을 담아.’라는 루디안의 사인은 심상치 않은 것이다. 게다가 당국은 유배당한, 옛 왕실 측근 여성의 자살에는 무언가 메시지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해석해 촉각을 곤두세운다. 알바니아 역사를 통틀어 가장 대규모로 진행된 음모소탕의 계기였던 총리자살사건 이후 당국은 아무리 평범해 보일지라도 모든 자살 뒤에 감춰져 있을지 모르는 것을 추적해왔다는 것이다. “자살을 통해 종종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한다”는 것이 당국의 생각이다.

루디안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이 린다 B라는 여성에게 직접 사인해준 기억이 없다. 게다가 자기를 향해 그토록 달콤한 감정을 키운 여성이라는데,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기억을 더듬던 그는 마침내 린다와 자기 사이에 미제나가 있음을 깨닫는다. 그랬다. 미제나는 친구에게 주겠다면서 루디안에게 사인을 받아갔던 것이다. “제 친구가 아주 기뻐할 거예요. 선생님을 정말 좋아하거든요,”라는 말을 남겼던 그녀. 눈부시게 아름다웠기에 그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던 루디안은 그때를 계기로 미제나와 연인 사이가 된다. 그렇다면 미제나는 정말 당국이 심은 스파이일까? 죽은 린다와는 또 무슨 관계일까? 단순히 친구일까? 이 작품의 재미는 무엇보다 이 세 사람의 관계를 밝혀나가는 데 있고, 두 번째로는 린다가 왜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었는지,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좇아가는 과정에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독자는 린다의 베일이 벗겨질수록 그 젊은 여성의 안타까운 삶에 연민하게 되고 그런 삶을 살게 한 공산독재 알바니아 현실에 분노하게 될 것이다.

스탈린이라는 인물과 종교 금지, 또는 정치국에 대해 조금이라도 지적을 하면 군 장교나 충성스러운 공산주의자는 감옥에 갔고 심지어 처형부대를 마주하게 되는 알바니아. 모든 전화는 도청되고 있으며, 넷 중 한 사람은 국가를 위해 감시를 한다는 소문이 진실처럼 여겨지는 알바니아. 이런 나라에서 옛 왕실의 측근 집안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유배생활을 하는 린다 B. 그런 그녀에게 저 멀리 떨어진는 수도 티라나는 그녀가 꿈꿀 수 있는 이상향과도 같다. 한 번도 발을 들여놓지 않은 도시를 린다처럼 그렇게 사랑한 사람은 없었다. 미제나는 갈 수 없는 도시이기에 그런 거라고 말하고 싶지만 유배 법규를 알고 나자 그만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린다는 매일 오후 정해진 시각에 경찰서에 출두해야 하며, 허락받지 않고 지정된 구역을 벗어날 경우 당연히 처벌을 받는다. 인근 도시마다 정해진 형벌이 있었는데, 더 먼 도시로 가는 경우엔 형벌이 가중된다. 수도 티라나는 최고형이었다. 무기징역 또는 사형. 그런 린다에게 미제나는 세상 소식을 전해주는 유일한 통로이다. 심지어 린다가 꿈꾼 루디안과의 사랑까지도 어쩌면 대신 이뤄줄 수 있는 존재.

사실 처음에는 루디안을 향한 린다의 맹목적인 애정이 생뚱맞게 느껴지기도 했다. 작가에게 아름다운 여성들이 불나방처럼 달려든다는 설정은 남성 작가들의 판타지가 아닐까 생각하는 내게 이 또한 조금은 그런 판타지로 보여서 우스꽝스러웠던 것 같다. 그러나 린다에게 루디안은 단순한 애정의 대상이 아니었다. 적어도 이 년 전부터 신문의 연극 관련 비평이나 라디오 뉴스나 텔레비전 출연을 지켜봐온 남자.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토록 오래전부터 만나길 꿈꿔온 남자, 루디안은 린다에게는 갈 수 없는 도시 ‘티라나’와 같은 대상이다. 그 사랑마저도 결코 이룰 수 없는. 단 몇 시간의 정상적인 삶을 살고자 차라리 암에 걸리기를 바랐던 린다. 그런 린다에게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강력할수록 자유는 크리라’는 말은 얼마나 공허한가.

미제나는 티라나만 가면 자유가 있으리라는 린다에게 그 생각이 얼마나 헛된지, ‘알바니아는 감옥과 유배지에만 자유가 없는 게 아니라 다른 곳도 마찬가지라고. 티라나에도 자유는 전혀 없으며 다른 곳도, 그 어디에도 자유는 없다’는 말을 들려주지만 이토록 충격적인 말에도 린다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린다는 ‘모든 건 관점의 문제’라고 말한다. 거주지를 지정당한 채 평생 살아야 하는 린다에게 티라나는 그녀가 꿈꿀 수 있는 최대한의 자유였다. 그런 린다를 지켜보노라면 단 하루도 자유를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 어디에도 그 어떤 희망도 걸지 못한다는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절망스럽고 끔찍한 현실인지 깨닫게 된다.


고마워, 프롤레타리아독재. 난 네가 얼마나 선하고 올바르고 완벽한지 알아. 학교에서 우리 머리에 그렇게 주입했으니까. 그렇지만 난 너무 지쳤어. 이런 삶을 더는 못 살겠어. (183쪽)


린다의 이 처연한 삶을 마주하게 된 루디안은 죽어서도 좀처럼 자유를 얻을 수 없는 저 지옥에 갇힌 린다를 상상 속으로 불러낸다. 지옥에 갇힌 에우리디케를 구해내고자 한 오르페우스처럼. 오르페우스와 달리 루디안은 린다, 그녀를 구해낼 수 있을까. 스스로 목숨을 끊은 린다는 죽은 뒤에야 마침내 티라나에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녕 자유일까. 그녀의 죽음에 관한 진실은 묻어버리고 자기들 입맛에 맞게 해석하고 날조하는 당 관계자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린다는 그 알바니아에서는 끝끝내 자유로울 수 없음을, ‘떠나지 못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린다가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은 오직 극작가인 루디안의 상상 속에서, 그러니까 예술의 품안에서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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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03-10 13: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바니아 출신 독재자 엔베르 호자가 스탈린
빠였다고 하더라구요 :>

린다의 루디안에 대한 끌림은 카다레 작가가
꼰대라는 사실의 방증이 아닐까 뭐 그런 생
각이 초큼 들었습니다.

잠자냥 2021-03-10 13:17   좋아요 1 | URL
저도 이 책 읽고 알바니아는 물론 엔베르 호자에 대해 많이 찾아봤어요. 요즘 알바니아에서는 호자를 그리워하기도 한다는군요.

ㅋㅋㅋㅋㅋㅋ 그나저나 진짜 린다나 미제나나 그 이름다운 여성들이 루디안한테 끌히는 거 너무 ㅋㅋㅋㅋㅋ 아 진짜 그 설정이 못마땅해서 별 하나 뺐습니다. ㅋㅋㅋㅋㅋ (암만 생각해도 작가 판타지)

다락방 2021-03-11 09: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카다레 꼰대 입니까? ㅋㅋㅋ 저는 오래전에 <부서진 사월> 하고 그 뭐더라 .. <사고> 읽었는데 하도 오래전이라서 카다레 존재를 잊고 있었네요. 그런데 잠자냥 님의 이 리뷰를 보니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요. 카다레 꼰대..라는 여러분의 댓글을 읽고 나니, 문득 이게 남자 작가들의 고질적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글은 쓰는 자의 몫이고 쓰는 자가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내든 자유지만, 남자 작가들은 남자 주인공에 자신을 반영해서 로망 실현 하는 것 같더라고요. 저는 그걸 제일 심하게 느꼈던 게 박범신이었거든요. <은교> 에서 근육질 할아버지 만들어내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서 교복 입은 소녀도 멋지게 생각하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진짜 다시 생각해도 어처구니. 하하하하하.

오늘 올리신 책 리뷰 읽는데 ‘밀란 쿤데라‘의 <농담>도 겹쳐 생각나요. 농담 한 번 잘못했다가 끌려가는 등장인물이 나오는...

아무튼 저는 이것도 장바구니에. 통 읽을 시간은 없지만 말입니다.

잠자냥 2021-03-11 09:42   좋아요 1 | URL
ㅎㅎ 저는 꼰대까지는 생각못했는데, 너무 아름다운 젊은 여성들이 별로 매력적이지도 않은 남자 작가를 작가라는 이유만으로 동경하고 사랑하게 되는 내용은 좀 싫더라고요. 남자 작가들 판타지 같아서 보고 있으면 좀 웃기기도... 근데 또 찰스 부코스키의 화려한 여성 편력 경우를 보면 그게 완전 허황된 이야기 같지는 않고... 그래도 실제로 그런 것과 작품 안에서 당연하다는 듯이 그런 설정을 하는 것은 좀 별개라고 생각돼요. 어우 박범신 은교 줄거리만 봐도 짜증나서 영화도 책도 다 패스한 그 작품.... 휴... ㅋㅋㅋㅋㅋ

<농담> 정말 재미있고 좋은 작품이죠. 공산독재 치하라는 설정이 공통점이네요.

모쪼록 바쁘신 시기 얼른 지나고 마음껏 읽고 쓰는 시간이 어서 돌아오길 바랍니다.

다락방 2021-03-11 0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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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3-11 09:59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요즘 힘드시구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봄눈 풍요의 바다 1
미시마 유키오 지음, 윤상인 외 옮김 / 민음사 / 2020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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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는 나에게 불량식품 같은 작가이다. 굳이 먹지 않아도 되고, 먹어서 좋을 것도 없는데 너무나 맛있어서 자꾸만 손이 가는 그런 불량식품. 먹을 땐 그 맛에 탐닉하느라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지만, 먹고 나면 어쩐지 공허한 기분이 드는 그런 불량식품. 그럼에도 다음에 또 먹고야 마는, 아니 기어이 먹을 수밖에 없는 그런 불량식품. <금각사>를 비롯해 <가면의 고백>, <파도 소리> 등 잘 알려진 작품은 물론, <사랑의 갈증>, <비틀거리는 여인> 등 덜 유명한 작품까지 국내에 출간된 미시마 유키오 작품은 다 읽었다. 그러고도 부족해서 미시마 유키오의 다른 작품이 출간되기를 늘 바랐다. 이렇게 매혹적인 불량식품이 또 있을까. 그런 중 <봄눈>, 그러니까 ‘풍요의 바다’ 1부에 해당하는 이 작품의 출간 소식은 가슴을 설레게 할 정도였다.  

미시마 유키오는 일찍이 “‘풍요의 바다’를 읽으면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라고 말했다. 게다가 그는 ‘풍요의 바다’ 마지막 권인 <천인오쇠(天人五衰)>를 탈고한 날, 그 유명한 할복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여러 가지로 궁금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풍요의 바다’ 4부작은 <봄눈>을 시작으로 <달리는 말>, <새벽의 사원>, <천인오쇠(天人五衰)>로 이어지는데 저마다 시대 배경과 공간을 달리하는 독립된 이야기로, <봄눈> 말미에 미시마 유키오는 “‘풍요의 바다’는 <하마마쓰 중납언 이야기>를 전거로 삼아 꿈과 전생을 다룬 이야기”라고 쓰고 있다. 대략 이 4부작의 배경이 되는 시기는 메이지 시대 말기인 1910년에서 미시마 유키오의 죽음(1970) 이후인 1975년까지를 그리고 있다. 작가 스스로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이야기한 이 대작은 과연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봄눈>의 줄거리는 어찌 보면 간단하다. 메이지 시대가 끝나고 다이쇼 시대가 시작된 1912년, 14만평에 이르는 대저택의 주인인 마쓰가에 후작의 외아들 기요아키와 아야쿠라 백작의 딸 사토코와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이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는 설정이 조금 특이하다. 처음부터 불가능한 사랑이 아니라 기요아키 스스로 금기를 설정하고 그 금기에 제 한 몸을 불사르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기요아키의 특이한 성정도 한몫한다. ‘아름다운 용모, 우아함, 우유부단한 성격, 소박함의 결여, 노력의 방기, 몽상가다운 심성, 근사한 외양, 유연한 젊음, 상처받기 쉬운 피부, 꿈꾸는 듯한 긴 속눈썹’ 등등 빼어난 미모로 주위의 선망을 받는 기요아키는 모든 것에 무관심하다. 자기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는 탐미적 몽상가로, 어린 시절 함께 자란 사토코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외면한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사토코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기요아키는 ‘자신을 사랑해 주는 인간을 깔보고, 깔볼 뿐 아니라 냉혹하게 취급하는’ 좋지 않은 성향을 지녔는데, 기요아키의 유일한 친구인 혼다는 그의 ‘이러한 종류의 오만함은 열세 살의 기요아키가 자신의 아름다움에 보내는 사람들의 갈채를 알게 된 때부터 마음 깊은 곳에서 은밀하게 길러 온 곰팡이 같은 감정’일 거라고 추측한다. 기요아키의 열세 살 때의 남다른 경험은 이 작품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그 무렵 궁중 신년 축하연에서 시동으로 불려나가 황족 여성들의 옷자락 시중을 들던 어린 기요아키는 서른 살 안팎의 아름다운 가스가노미야 비(妃)의 새하얀 목덜미가 도드라진 옆얼굴이 한순간 눈에 들어오자 가벼운 현기증을 일으키며 걸음을 비틀거리는 실수를 한다. 그때 그것이야말로 눈이 멀 듯한 여인의 아름다움에 동경을 품은 그의 첫 번째 기억이며, 이 금기의 대상에 대한 강렬한 동경의 체험은 <봄눈>에서의 기요아키 전 생애를 지배하게 된다.

기요아키는 손쉽게 사토코를 자기 사람으로 둘 수도 있었다. 집안에서도 백작의 딸인 사토코를 좋게 보고 있었으며 당사자인 사토코 또한 기요아키를 사랑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렇게 평범하고 손쉬운 것은 그에게는 아무런 매력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기요아키의 자유분방한 기질은, 자신을 좀먹는 불안을 스스로 증식시키는 성향도 함께 갖고’ 있었고 그렇기에 그는 ‘아름다운 꽃보다는 가시투성이의 음침한 꽃씨에 기꺼이 덤벼’들기를 선택한다. ‘기요아키는 어느새 그 씨앗에 물을 주고 싹을 틔워 마침내는 자기 안 가득히 그것이 번성하기를 기다리는 일 외에는 모든 관심을 잃어’버리고 ‘한눈도 팔지 않고 불안을’(43쪽) 키워나간다. 사토코가 천황이 칙허를 내린 황가의 정혼자가 되자(금기가 만들어지자) 기요아키는 사토코를 유혹해 금지된 관계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기요아키의 모습은 저 먼 옛날 <겐지모노가타리>의 겐지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금기의 대상에 빠져들기를 멈추지 못하는, 아니 오히려 그러기를 기꺼이 선택하고 거기로 자신을 몰아가는 그들.


기요아키에게 환희를 안긴 것은 불가능이라는 관념이었다. 절대적 불가능. 사토코와 자신을 잇는 실이 예리한 날붙이로 끊어버린 거문고의 줄처럼, 솟구치는 단현(斷絃)의 비명을 지르며 칙허라는 빛나는 칼에 베여 버린 것이다. 그가 어린 시절 이후 오래도록 되풀이해 온 우유부단함 속에서 비밀스레 꿈꾸고 남몰래 바라 온 사태는 이런 것이었다. 옷자락일 들며 올려다본 봄의 흰 잔설 같던 비전하의 목덜미, 우뚝 솟은 채 접근을 거부하던 비길 데 없는 그 아름다움은 그가 품은 꿈의 발원지, 그가 지닌 바람의 성취를 똑똑히 예언하고 있었다. 절대적인 불가능성. 이것이야말로 더없이 뒤틀린 자신의 감정에 변함없이 충실해 온 기요아키가 스스로 초래한 사태였다. (235쪽)


스스로 금기를 만들어 그 금기를 범하고 도리를 어기는 기요아키. 그 우미(優美)한 손을 흙, 피, 땀 그 어떤 것으로도 더럽히지 않고 지켜내, 오직 감정만을 위해 쓰인 손을 지닌 기요아키. 무엇에든 유보적이며 그게 뭔지는 몰라도 “뭔가 결정적인 것”을 꿈꾸는 기요아키. ‘모독의 쾌락’을 즐기며 ‘쇠운’이라는 말과 ‘죽음’, 그것도 젊을 때의 죽음을 꿈꾸는 기요아키. 자신에게 단 하나 진실한 것, 방향도 귀결도 없는 오직 ‘감정’만을 위해 살아가는 일에 기꺼이 몸을 던진 기요아키. 권력으로도 돈으로도 상대가 안 되는 불가능한 상대를 고르고, 불가능하기 때문에 끌렸던 기요아키. 그런 불가능한 비극을 향해 맹렬히 나아가는 기요아키를 지켜보며 혼다는 ‘그건 아름다운 일이지. 하지만 창가를 스쳐 지나가는 새 그림자 같은 찰나의 아름다움을 위해, 인생이란 희생물을 바치도록 내버려 둬도 되는 걸까.’(268쪽)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기요아키의 모습에서 미시마 유키오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의 모든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바다의 조수와 기나긴 시간의 이행, 그리고 자신도 머지않아 늙으리라는 생각에 돌연 숨이 막혔다. 노년의 지혜 따위는 이제껏 한 번도 바란 적 없었다. 어떻게 하면 아직 젊을 때 죽을 수 있을까, 그것도 되도록 괴롭지 않게. 탁자 위에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 둔 화려한 비단 기모노가 어느 틈에 어두운 바닥으로 흘러 떨어지는 것 같은, 그처럼 우아한 죽음. (162쪽)

 
<봄눈>는 뜻밖에도 기요아키와 혼다가 러일 전쟁 전사자 위령제 사진을 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금기의 사랑을 나누는 기요아키와 사토코의 이야기가 중심인데 왜 전쟁 사진을 보는 장면으로 시작한 것일까. 게다가 혼다는 훗날 기요아키와 사토코의 사랑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러일 전쟁 사진을 떠올린다. ‘그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에 흙먼지로 뒤덮인 평야의 풍경이’ 겹쳐지는 것이다. 그때 혼다는 이렇게 말한다. 사실 혼다는 이 ‘풍요의 바다’ 4부작을 실질적으로 이끌어가는 관찰자이자 주인공이라 할 수 있기에 그의 이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며, <봄눈>을 통해 미시마 유키오가 말하고자 했던 바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메이지 시대와 함께 웅대한 전쟁의 시대도 끝이 났지. 이젠 옛날이야기가 된 전쟁 이야기는 살아남은 감무와 부사관들의 시골 난롯가의 자랑거리로 전락해 버렸으니까. 이제 젊은이가 전장에 나가 전사하는 일은 많지 않을 거야. 하지만 행위로서는 전쟁이 끝난 대신 이젠 감정의 전쟁을 치르는 시대가 시작됐어. 둔감한 놈들은 보이지 않는 이 전쟁을 전혀 느낄 수 없을 테고, 그런 게 있다는 것조차 믿으려 들지 않을 거야. 그렇지만 이 전쟁은 분명히 시작됐고, 이 전쟁을 위해 특별히 선택된 젊은이들은 틀림없이 싸우기 시작했어. 넌 분명히 그중 하나고. 행위의 전쟁과 마찬가지로 감정의 전장에서도 역시 젊은이들이 전사해 간다고 생각해. 그게 아마도 널 대표로 하는 우리 시대의 운명이겠지. 그래서 넌 그 새로운 전쟁에서 전사하기로 각오를 굳힌 거야. 그렇지?”(263~264쪽) 행위로서의 전쟁 대신 감정의 전쟁을 치르는 시대. 이런 감정의 전쟁에서 기요아키는 전사하기로 각오한다. 봄눈처럼 덧없이 사라지고 말 사랑에 기꺼이 몸을 던진다. 아무리 찰나일지라도 그 덧없는 아름다움에 비할 것은 없기에.

혼다는 이 ‘풍요의 바다’를 관통하는 환생에 관한 생각도 의미 있게 밝힌다. “인간의 품는 모든 사상을 미망(迷妄)이라 생각한다면, 전생에서 현생으로 환생한 한 생명의 전생의 미망과 현생의 미망을 각각 식별해 낼 제삼의 견지가 필요합니다. 그 제삼의 견지에서만 환생을 증명할 수 있을 뿐, 다시 태어난 당사자에겐 모든 것이 영원한 수수께끼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그 제삼의 견지란 아마도 깨달음의 견지일 테니 환생이란 생각은 환생을 초탈한 인간만이 파악할 수 있겠지요. (....) 환생이란 건 우리가 생의 측면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것과 반대로, 그저 죽음의 측면에서 생을 바라본 것을 표현한 데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저 바라보는 방향이 바뀌었을 뿐인 겁니다.”(304~305쪽) 환생이란 우리가 생의 측면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것과 반대로 죽음의 측면에서 생을 바라본 것을 표현한 데 지나지 않을 거라는 말이 인상 깊다. 앞으로 2부, 3부, 4부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꽤 기대된다. 무엇보다 <봄눈>은 너무나 아름답다. 문장 하나하나가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읽는 내내 절로 탄복하게 된다. 그 문장을 눈으로 삼키며 그 아름다움에 푹 빠지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장에 이르러 있다. 책을 덮고 나면 그 아름다움은 봄날의 눈처럼 덧없이 사라지고 말아 왠지 공허해지고 허기가 지지만 다음에도 또 그 아름다움에 기꺼이 빠지기를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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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17 23: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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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17 2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