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굴 독깨비 (책콩 어린이) 3
아이반 사우스올 지음, 손영욱 그림, 유슬기 옮김 / 책과콩나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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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를 사지 않으면서도 가끔 로또가 당첨된다면 어떻게 할까 생각해 볼 때가 있다. 몇 십 억 단위로 당첨된다면 몇 억은 누구 주고 또 몇 억은 누구 주고 등등 주로 가족이나, 애인, 친구에게 떼어 줄 생각을 한다. 물론 내 것도 챙기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로또를 사지 않으니 그럴 일은 내 평생 없을 것이다.

 

가끔 읽는 어린이 책에서 뜻밖의 보물(?)을 발견하기도 한다. 호주 작가 아이반 사우스올의 <여우굴>이라는 책도 그중 하나이다. 내용은 처음엔 좀 지루하다. 켄이라는 소년이 홀로 외삼촌 집을 찾아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엄마가 싸준 엄청나게 무거운 가방을 들고, 어른 틈바구니에서 이리저리 치이면서도 안간힘을 써서 버스를 타고 가까스로 자리를 잡지만(어른들은 누구 하나 이 아이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지갑을 잃어버려서 찻삯도 치르지 못한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버스 운전사는 그냥 내리고 다음에 내라고 한다.

 

그렇게 도착한 외사촌 집은 켄의 집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켄은 도시에서 나고 자란 전형적인 도시 아이로, 부모들 또한 도시의 삶에 적응해 부유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켄의 엄마의 오빠인 밥 외삼촌은 엄마가 보기에 말 그대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인생이다. 변변한 직업도 없고, 그런데다가 애들은 셋이나 낳아서 호주 어느 오지 같은 산골 마을의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에서 뭘 먹고 사는지 알 수 없는데도 그냥저냥 살아가고 있다. 규칙과 질서, 정돈, 정리, 성공 이런 것에 길들여진, 아니 그런 삶이 온전한 삶이라고 믿어온 켄이 보기에 외삼촌 집은 혼돈 그 자체다. 쉴 틈 없이 시끄럽게 놀아대는 외사촌 휴, 조앤, 프랜시 등도 켄의 정신을 쏙 빼놓는데, 외삼촌이나, 외숙모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 집안에는 질서도 정리정돈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여기까지 읽었을 땐 아, 그래서 이 켄이라는 아이가 외삼촌 가족의 자유분방한 삶에 동화해서 서서히 변하는 이야긴가 싶었는데(그래서 좀 지루했는데), 곧 반전이 일어난다.

 

휴는 켄이 놀러왔다는 핑계로 집 가까이 있는 댐 근처 숲에서 하룻밤 야영을 허락받는다. 켄으로서는 이 또한 무시무시한 계획이다. 어른 없이 아이들만, 그것도 하필이면 댐 근처에서 야영을 한다니, 자기 집 분위기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외숙모와 외삼촌은 아무렇지 않은 듯 허락을 한다. 켄은 어쩔 수 없이 휴를 따라가서 불편하고 무섭고 끔찍한 텐트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그런데 사건은 그 다음 날, 날이 희부옇게 밝아올 무렵에 일어난다. 휴보다 먼저 일어난 켄은 텐트 밖으로 나와 주변을 살펴보던 중, 여우가 조앤이 기르는 당닭 한 마리를 물고 달아나는 광경을 보게 되고 정신없이 뒤쫓는다. 그러다가 결국 자기도 모르게 나무딸기 넝쿨이 우거진 곳에까지 들어가게 되고, 여우를 뒤쫓을 때와는 달리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곳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다. 온몸은 이미 여기저기 긁혀서 피투성이다. 사실 이 근처는 동네 아이들이 여우굴이라고 부르면서 왠지 두려워하며 가까이 가기를 꺼리는 곳이다. 잠에서 깨어나 켄을 찾던 휴도 켄의 목소리를 듣고 이 근처까지 오지만, 더는 다가오지 못하고 망설이기만 한다. 이런 사정을 알지 못하는 켄은 왜 외사촌이 자신을 빨리 돕지 않는지 답답하기만 하다. 휴는 이때서야 어른의 도움을 받고자 전날 밤에 아버지가 다급한 일이 있으면 흔들라면서 줬던 종을 신나게 울린다.

 

잠옷 바람으로 나무딸기 수풀까지 달려온 외삼촌과 외숙모- 외삼촌 밥은 귀찮은 일이 생긴 것에 일단 짜증을 내고 켄이 말썽쟁이라면서 투덜대기에 급급하다. 이때부터 약간 이 인간 뭐지? 싶었는데 자, 이제 앞으로 더 기함을 토할 일이 벌어진다. 나무딸기 수풀이 너무 무성해 연장 없이는 안으로 들어갈 수 없고, 다시 집에 가서 연장을 가져와 수풀을 잘라내는 일은 더디기만 하다. 그러는 사이 공포와 두려움에 질린 켄은 자신을 돕지 않는 것 같은 외가 식구들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그래서 자기 힘으로 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땅이 무너져 내리고 오히려 더 깊은 구덩이 안으로 추락하게 된다. 그리고 켄은 정신을 잃는다.

 

, 조앤, 프랜시 등 어린아이들은 이웃을 데리고 오거나 경찰을 부르자고 하는데 무능하면서도 주변 시선은 엄청 의식하는 밥은 절대로 안 된다고 한다(밥통 같은 인간아!). 처음에는 아내가 잠옷 바람이라고, 애들 또한 잠옷 바람이라서 싫다고 하더니(? 이 다급한 상황에 그게 이유가 될까), 경찰도 부르지 말라고 한다. 자신이 책임을 추궁 당할까봐 두려운 것이다. 게다가 평소에도 자신을 한심하게 여긴 여동생이 자기의 하나뿐인 아들을 죽였다고, 온갖 비난을 퍼부을까봐 그것도 걱정이다. 저기 저 아래 구덩이에서 조카가 떨어져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이 한심한 인간은 주변 시선과 자기 연민에 빠져 가장 좋은 선택을 하지 않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켄은 정신을 차린다. 온몸이 아프지만 살아 있다! 대체 왜 외삼촌은 날 구해주지 않는 걸까, 여기서 나가고 싶다, 제발 꺼내줘요. 가엾기 짝이 없다. 외삼촌은 어찌어찌해서 켄에게 손전등을 내려 보내준다. 켄은 두려움 속에서도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비춰보다가 놀라운 것을 발견한다. 아이답게 아무것도 헤아리지 않고 소리친다. “외삼촌! 외삼촌은 이제 부자에요!”- 이곳은 사실 오래 전에 중국인들이 금을 찾아 갱도를 여기저기 파놓았던 곳으로, 이 사실은 켄이 도착한 날 저녁에 외삼촌이 허무맹랑하지만 어쩐지 흥미로운 옛날이야기인 듯 들려주었다. 그런데 그게 사실로, 진짜로 있을 줄이야. 황금이 있다는 소리에 외삼촌의 눈빛은 달라지고 얼굴은 기묘하게 빛난다. 외숙모 또한 이상해진다. 아이들이 보기에 제 엄마와 아빠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갈비뼈를 다친 켄은 아픔이 더해 가는데 외삼촌은 자길 구해줄 생각은 하지 않고 이젠 황금에 대해서만 묻는다. 아이들은 켄이 죽을지도 모른다면서 계속 이웃이나 경찰에게 도움을 청하자고 하지만, 밥은 더 단호해진다. 심지어 의사도 부를 수 없다고 한다. 사람들이 여기 황금이 있는 것을 알면 다들 몰려올 것이라고. 게다가 이 땅은 현재 국가의 땅이므로 나라에서 알면 자기들은 황금은커녕 이 집터에서도 쫓겨날지 모른다고 무조건 입을 다물라고 한다. 켄은 그 사이 외삼촌과 외숙모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어버리게 된다. “여기 있는 것은 내 탓이 아니에요. 외삼촌네가 나빴어요.”

 

그렇지 않은가. 부모 등에 떠밀리듯 혼자 이곳에 온 것도 억울한데, 원치 않는 장소에서 야영을 하다가 깊은 구덩이에 갇혀 버렸다. 도움을 요청한 어른은 황금에 눈이 멀어 아이를 구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제 자신이 직접 그 구덩이까지 내려가서 황금을 볼 생각만 한다. 그런 주제에 네 어머니는 사실 그대로 말하면 좋아하지 않을 거다.”라며 켄을 은근히 협박하기도 한다. 켄은 이 구덩이에서 무사히 나갈 수 있을지, 저 밥통 같은 밥은 과연 정신을 차리고 애부터 구할 것인지 한숨과 답답함이 밀려온다. 그런데 이때 당연히 그런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나라면 어땠을까? 아마 나라면 나무떨기 숲을 헤치고 들어가는 게 무리라고 생각했기에 애초부터 잠옷 바람이든 뭐든 경찰이나 119를 불렀을 테지만 그렇게 하면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으니 일단 황금까지 발견했다고 치자. 황금을 무시할 수 있을까? 사지도 않은 로또에 당첨돼 주변 사람들에게 돈을 나눠 줄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흐뭇해지는데, 황금광을 발견하고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밥 외삼촌 또한 아이들에게 황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을 약속한다. 훌륭한 집, 자가용, 멋진 자전거, 보석 박힌 침대, 대학 공부 등등. 하지만 켄이 목숨을 읽고 나서도 황금으로 산 것들이 반짝반짝 빛날 수 있을까.

 

, 조앤, 프랜시도 솔깃하긴 하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아이들이다. 저 아래 켄이 더 걱정이다. 아빠가 제발 정신을 차리고 켄부터 구했으면, 그래서 의사를 불렀으면 싶다. 만일 이 책이 성인용이었다면 외삼촌 밥은 끔찍한 선택을 하고도 남았을 것 같은데, 어린이 책이라 그런 결말로는 가지 않는다. 황금을 자기 눈으로 확인하려고 무모하게 구덩이에 내려온 밥은 이제 켄과 함께 구덩이에 빠진 신세가 되고 만다. 올라갈 수 없고 올라가기도 힘겹다. 그리하여 마침내 조앤에게 말한다. 경찰을 부르라고(밥통도 자기 목숨은 소중한가 보다). 조앤은 머뭇거린다. “그럼 그걸 다른 사람한테 말해도 돼요?” 이때 밥은 조금 망설이다가 켄이 본 것은 황금이 아니었다고, 황철광(fool's gold)이었다고 말한다. 조앤은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향해 달려간다. 켄은 외삼촌에게 자신은 절대 비밀을 지킬 수 있다고, 외삼촌을 좋아하니까 비밀을 지킬 수 있다고 말하는데, 켄의 마음에는 상처가 하나도 남지 않을까? 그리고 이 남자, 밥은 정말 자기가 말한 것처럼 이 수많은 황금을 황철광이라고 여기면서 여우굴을 잊을 수 있을까. ‘fool's gold’라는 말이 여러 가지로 의미 깊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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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3-17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저는 이 리뷰만 읽어도 힘들어요. 켄이 처한 위험과 두려움이 너무 힘들어요. 형편없는 어른을 만난 것도 너무 싫고요. 아 속상해요 ㅠㅠ

잠자냥 2021-03-17 19:26   좋아요 0 | URL
그 밥통을 제가 한대 때려주고 싶었습니다!!! 으휴 그것도 어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