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와 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4
귄터 그라스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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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양이들에게 살아있는 쥐를 줘본 적은 없다. 쥐 모양 장난감을 던져준 적은 있는데, 녀석들은 처음에는 흥미를 보이다가 곧 싫증을 낸다. 그러다가 내가 쥐를 움직이게 하면 다시 흥미를 보인다. 녀석들이 살아 있는 쥐를 봐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쥐가 움직이지 않으면, 또는 애초에 죽은 쥐라면 고양이는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할 것 같다. 그런데 만일 내가 내 고양이들을 즐겁게 하고자 살아 있는 쥐를 녀석들 앞에 가져다준다면, 쥐를 갖고 노는 고양이가 문제일까, 그 쥐를 가져다 준 내가 문제일까? 귄터 그라스의 <고양이와 쥐>는 제목과 달리 고양이와 쥐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럼에도 고양이와 쥐가 등장한다. 아니, 고양이는 등장해도 쥐는 등장하지 않는다고나 할까. 쥐와 비슷한 무언가가 등장할 뿐이다. 쥐와 비슷한 그것은 ‘요아힘 말케’의 비정상이리만치 큰 ‘울대뼈’이다.

작품은 풀밭에 누워 잠든 요아힘 말케의 모습을 묘사하며 시작한다. 작중 화자인 ‘나’, 즉 ‘필렌츠’는 때마침 그 옆에서 이를 앓고 있다. 그때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난다. 고양이는 연습하며 다가온다. 말케의 크 커다란 울대뼈가 고양이의 눈에 띈 것이다. ‘그것은 크고 쉴 새 없이 움직이며, 그림자를 드리웠으므로’ 검은 고양이가 쥐로 착각하거나 아니면 쥐와 같은 존재로 인식하고 사냥 대상으로 삼기에 충분한 것이다. 고양이는 ‘나’와 말케 사이에서 몸을 웅크려 뛸 자세를 취한다. 말케와 나, 그리고 고양이는 삼각구도를 이뤘고 그새 나의 이빨은 침묵하며 더 이상 아픔을 호소하지 않는다. 고양이는 드디어 말케의 후두에 뛰어오른다. 그 장면을 필렌츠는 이렇게 회상한다. ‘우리 중 누군가 고양이를 들어 말케의 목에 올려놓았던가, 아니면 이가 아팠거나 그렇지 않았던 내가 고양이를 들어 올려 말케의 쥐를 보여주었던가.’ 이윽고 말케는 비명을 지른다. 다행히 대수롭지 않은 찰과상을 입을 뿐이다. 그러나 필렌츠는 이렇게 말한다. ‘나, 너의 쥐를 한 마리의 그리고 모든 고양이의 눈에 띄게 했던 나는 이제 써야만 한다. 자꾸만 너의 울대뼈를 손에 쥐고 그것이 승리했거나 패배했던 모든 장소로 데려가라고 강요한다.’(9쪽)

말케와 나, 고양이가 삼각구도를 이루었을 때 ‘나’는 고양이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 모두 관찰한다. 고양이가 나타난 것부터 말케의 커다란 울대뼈에 호기심, 아니 정확히는 그것을 사냥감으로 인식하고 ‘연습’하는 것도 알고 있으며, 웅크려 뛸 자세를 취하는 것도, 이윽고 후두부에 뛰어오르는 것도 모두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 무료한 오후에 일어난 이 일은 하나의 사건이고, 이 사건은 이를 앓던 ‘나’가 아픔을 잊을 만큼 흥미롭다. 그때 ‘나’는 혹시 이 재미난 장난이 우리 중 누군가가 일부러 말케의 울대뼈 위로 고양이를 집어올린 게 아닐지, 아니 그게 혹시 자기 자신은 아니었는지 의심하며 말케의 울대뼈를 ‘모든’ 고양이의 눈에 띄게 했던 자신의 죄를 반성하며 이제 써야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기이하게 큰 울대뼈를 지니고 잠든 말케, 그래서 고양이에게 느닷없이 공격당해 찰과상을 입은 말케. 크게 다친 것도 아니고 찰과상에 그쳤으니 그저 아이들 장난쯤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일을 말케를 향한 자신의 최초의 죄처럼 여기면서 일종의 참회의 글을 쓰고 있다. 울대뼈를 손에 쥐고 ‘승리’했거나 ‘패배’한 모든 장소를 떠올리며 글을 쓴다. 어린 시절의 장난 하나로 조금 지나친 반응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나’의 이 고해성사가 무겁게 느껴지는 이유는 말케가 단지 울대뼈만 큰, 그래서 특이한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말케는 외동이었다.
말케는 반고아였다.
말케의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말케는 여름이나 겨울이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는 구식 목구두를 신었다.
말케는 검정 목구두의 끈에 드라이버를 매달아 목에 걸고 다녔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말케는 드라이버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목에 뭐든 걸고 다녔다. 하지만 무엇보다 눈에 띈 것은 드라이버였다. (14쪽)


외동이며 아버지가 없는 아이. 지나치게 큰 울대뼈를 가리려고 드라이버든 뭐든 여러 가지 이유로 목에 무언가를 걸고 다니던 아이, 말케. 말케는 태생적으로 마을 아이들과 조금 달랐다.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이모와 함께 살던 말케는 필렌츠와 그 친구 또래보다 한 살 많다. 말케의 어머니와 이모 말을 빌리면 몸이 약하고 병치레가 잦아 초등학교를 일 년 늦게 들어갔다고 한다. 이 또한 마을 아이들과 조금 다른 지점이다. 그런데 말케는 선하다. 누구나 자기 것을 베껴 쓰라고 놔두고, 고자질하는 법도 없다. 8, 9학년생들이 흔히 해대는 추접한 짓거리에는 유독 혐오감을 보이고 그런 불결한 장난에는 동참하지 않았기에 또다시 매우 특별한 존재가 된다. 이런 이유들로 때로는 월등하게 때로는 부자연스럽게 갈채를 받는다. 그는 박수를 받으면 기뻐했고, 펄떡거리던 울대뼈는 차분해졌다. 마찬가지로 박수를 받으면 그는 어쩔 줄 몰라 했고, 울대뼈는 새로운 자극을 받았다. 말케는 대부분 박수를 사양했는데 그래서 또다시 박수를 받는다.

말케는 아이들에게 경외의 대상이면서 한편으로는 그 조금 다른 점들 때문에 놀림감, 따돌림의 대상이 된다. 아이들은 말케를 별스러운 존재로 인식하고는 말케가 버터 바른 빵 하나만 먹어도 웃어댄다. 그 웃음은 쉽게 전염되는데 다들 웃다 보면 의아해지곤 한다. 자신들이 왜 그렇게 웃는지 이상한 것이다. 하루는 선생이 아이들에게 장래희망을 묻는다. 그때 말케는 이렇게 대답한다. “저는 언젠가 광대가 되어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겠습니다.” 이 말에 교실 안 누구도 웃지 않는다. 도리어 ‘나’는 섬뜩해진다. 왜냐하면 말케가 서커스단에서든 어디서든 광대가 되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큰 소리로 또박또박 말하며 너무도 진지한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다. 만일 말케가 장난처럼 웃으면서 광대가 되겠다고 말했다면 ‘나’를 비롯해 아이들은 다들 낄낄 웃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말케는 진심으로 진지하다. 왜일까? 여느 아이들과 다른 존재라 놀림에도 따돌림도 익숙해진 말케에게 사람들이 즐겁게 웃으며 주목한다는 것은 큰 매력으로 다가왔으리라.


“재, 왜 저래?”
“자식, 머리가 돈 거 아닐까.”
“쟤네 아버지 돌아가신 거랑 상관이 있을지도 몰라.”
“목에 저 잡동사니들은 뭐야?”
“허구한 날 기도드리러 가는 건 또 어떻고.”
“믿음이라곤 없는 것 같은데.”
“그러기엔 너무 현실적인 녀석이지.” (35쪽)


말케를 향한 주변의 이렇듯 늘 곱지 않다. 특별히 잘못한 점이 없는데도 그렇다. 그저 자기들과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철부지 소년들에게는 재미난 장난감이자 심술을 부리기에 알맞은 사냥감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말케는 아이들과 어울리고자 수영을 배우고, 잠수 솜씨를 선보이며 무리 안에서 인정받기를 갈구한다. 아이들이 자신의 큰 울대뼈가 아닌 다른 것을 봐주기를 바란다. 울대뼈는 말케에게는 숨기고 싶은 그 무엇이다. 가뜩이나 남과 조금 다르다고 따돌림과 놀림을 당하는데, 울대뼈까지 비정상적이다. 그러기에 말케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숨기려고 드라이버나 은 목걸이 등을 목에 걸어서 그것을 감추려고 한다. 그러나 그마저도 잘 되지 않자, 주위를 환기할 방법을 생각해 낸다. 다른 곳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돌리려는 것이다. 말케는 먼저 배지에 집착한다. ‘우글거리는 물고기 떼와 조용히 날아가는 갈매기들, 야광 꽃다발’ 모양 배지들을 처음에는 외투 깃에 그리고 목도리에 꽂는다. 이모에게 부탁해 형광물질로 만든 단추 여섯 개를 외투 위부터 아래까지 달아달라고 해서 스스로를 ‘광대’로 만든다. 말케는 그렇게 곰팡이가 슨 듯한 초록색 야광단추를 외투에 달고 길을 따라 내려온다. ‘그 초라한 유령은 기껏해야 아이들이나 노파를 놀라게 할 뿐’인데도 말케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는 어차피 보이지도 않는 어떤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 애쓴다.(70쪽)

말케의 이 처절한 노력, 그러니까 놀림이나 따돌림의 대상을 벗어나고, 진정한 관심과 애정의 대상이 되고자 하는 노력은 성공할 수 있을까.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독자는 초반부터 감지할 수 있다. 때문에 말케의 노력은 점점 그릇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광대가 되어 사람들을 웃기고 싶어 했던 말케는 사람들이 칭송하고 우러르는 존재, 군인이 되길 기꺼이 선택한다. 애초에 말케는 군대나 전쟁놀이, 군인다움을 강조하는 것을 그다지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느 틈엔가 ‘아직 기회가 있는 건 이 병과뿐’이라고 생각하면서 군대에 자원한다. 말케가 생각한 그 ‘기회’란 과연 무엇일까. 아마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 제대로 대우받는 것이리라. 웃음을 주고 싶던 사람에서 전쟁광이 되어버린 말케. 말케를 그렇게 몰아간 고양이들 가운데 자신들이 그렇게 몰아갔다는 것을 깨닫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 필렌츠에게도 기회는 있었다. 고양이가 애초에 말케의 울대뼈를 쥐로 인식했을 때 만일 말케를 깨워 일어나게 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순간을 침묵으로 일관하며 지켜보았다. 필렌츠는 그나마 죄의식을 갖고 말케의 음울한 변화를 회상하지만, 대다수의 고양이들은 쥐가 움직이기에 사냥을 했듯이, 쥐가 자기보다 약하기에 사냥을 했듯이 자기의 죄가 죄인지도 여전히 알지 못할 것이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전쟁이 시작된 1939년부터 패전한 1945년 무렵까지이다. 작품 속 아이들은 전쟁과는 동떨어진 듯 침몰한 적군의 배에서 노획물을 건져 올리거나 하면서 한가로이 지낸다. 때문에 작품 속에서는 나치스의 집단 광기가 직접적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말케가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따돌림 당하고 끝내 파국에 이르는 과정, 그리고 그 과거를 회상하는 필렌츠의 고백을 지켜보노라면 말케의 울대뼈(쥐)를 놀이삼아 고양이가 사냥하도록 몰아간 아이들의 놀이 자체가 그 시대의 한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신체적 결함이 있는(실은 결함도 아닌, 생김새가 조금 다를 뿐인), 남들과 조금 다른 말케는 히틀러와 나치스가 말하기를 ‘신체적으로 열등한 인종’이었던 유대인, 아니 순수한 아리아인을 제외한 여러 인종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그들을 결국 단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죽음의 유형지로 몰아간 그 시대에 침묵을 비롯하여 어떤 식으로든 동참한 독일 국민들 모두가 쥐를 노린 고양이는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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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4-06 17: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기 죄가 죄인지도 알지 못한다‘ 어려운 책인거 같은데 읽고 싶어지네요. 독일 작가가 쓴 2차대전의 독일의 행동을 비판한 책 이라니 더욱 흥미가ㅎㅎ

잠자냥 2021-04-06 17:58   좋아요 2 | URL
네, 언젠가 기회되시면 읽어 보세요. 귄터 그라스는 책 좋아하는 분들이 안 읽고 지나치긴 어려운 작가 같습니다.

레삭매냐 2021-04-06 18: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노년에 다른 부대도 아니고 나치 친위대
에 복무한 경력을 드러낸 걸 어떻게 받
아 들여야 할지...

그가 작가 초창기 시절에 그런 경력을
드러냈다면 과연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있었을 지 그것이 궁금하더라구요.

잠자냥 2021-04-06 22:03   좋아요 0 | URL
ㅎㅎ 아마도 평생 자기를 괴롭힌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작가 초창기에 그 경력을 밝혔다면 절대 그 상을 받지는 못했겠지요.

coolcat329 2021-04-06 19: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리를 잘해주셔서 재밌게 읽었습니다. 고양이 목에 나치 목걸이가 이해가 가네요.

잠자냥 2021-04-06 22:04   좋아요 0 | URL
저도 쓰다 보니 이 어려운 작품이 조금은 이해가 가더라고요. 그래서 리뷰 써두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