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
토니 모리슨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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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에도 슬럼프가 있다. 글쓰기 또한 마찬가지이다. 한동안 내가 그랬다. 책을 아예 읽지 않은 것은 아니고, 읽기는 읽는데, 뭘 읽어도 그다지 감흥이 일지 않았다. 다른 때 읽었다면 분명 무척 좋았을 작품도 심드렁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뭔가를 읽고 글로 남겨두는 일도 시들해졌다. 그나마 최소한의 기록을 위해서 짧게 끼적대는 정도랄까. 이런 상태가 얼마나 지속될지 알 수 없었다. 거의 한 달 넘게 그랬던 것 같다.

그때 토니 모리슨의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를 읽게 된 것은 축복이었다. 지난 봄 사두고는 과연 언제 읽게 될 지 알 수 없었던 이 책. 새로운 작품을 읽으면 이 무덤덤한 독서 생활에서 조금 벗어날까 싶어서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새로운 작품’ 그렇다. 고백하건데, 나는 토리 모리슨의 작품을 이제야 처음 읽는다! 책을 많이 읽는 편인데도 토니 모리슨 그 이름과는 인연이 쉽사리 닿지 않았다.

책꽂이에 토니 모리슨의 작품이 몇 권 있는데도,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언젠가는 읽을 작가 정도로만 생각했다. 흑인 문제, 그러니까 인종문제를 다루는 작품들이 보여줄 수 있는 어떤 뻔한(?) 전개와 예측 가능한 내용이 펼쳐지는 것은 아닐까, 이런 편견 때문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었다. 그래도 왠지 죽기 전에는 꼭 읽어야 할 그런 작품이라고 생각해서 책은 사두었다.

곰곰 생각해 보니 참 재미있다.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는 2015년에 발표된, 토니 모리슨의 가장 최신작이다. 아흔을 바라보는 작가가 쓴 가장 최신작. 그것도 토니 모리슨의 작품 가운데 유일하게 21세기를 배경으로 한단다. 그런 작품으로 나는 처음 토니 모리슨을 만난 것이다. 그의 작품을 많이 읽어본 사람이라면 아마 내가 하는 말에 콧방귀를 뀔지도 모르겠다만, 나는 이 작품 하나만으로도 홀딱 반했다. 첫 페이지부터 완전히 몰입해서 읽게 되었다.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는 흑인의 삶, 그러니까 인종차별 문제를 다룬다. 그런데 그 방식은 사뭇 다르다. 일단 문장이 감각적이다. 쉽게 읽히고 몰입도가 대단하다. 화자가 직접 이야기하는 방식이라 그런 효과를 톡톡히 보는 것 같다. 화자 또한 여럿이다. ‘스위트니스’, ‘브라이드’, ‘브루클린’, ‘소피아’, ‘레인’ 등등. 물론 그 가운데 주요 화자는 스위트니스와 브라이드로 둘은 모녀 사이이다. 그런데 어쩐지 평범하지 않은 분위기가 느껴진다.

스위트니스는 딸인 브라이드를 낳고 경악한다. 아이는 정말로 새카맸다. 한밤중 같은 검은색. 스위트니스 자신은 피부색도 연하고 머리도 그다지 곱슬거리지 않는데, 자신의 딸은 그와 달리 완벽하게 ‘검은’ 것이다. 자신도 흑인이면서 연한 피부 빛깔 때문에 흑인임을 그다지 인식하지 않고 살던 그 앞에 검은 핏덩어리가 태어났고, 그런 아이를 보자 그녀는 미쳐버릴 지경이 된다. 실제로 잠깐 미치기도 해서 ‘한 번-겨우 몇 초였지만- 아이 얼굴에 담요를 대고 누르는’(16쪽) 행동까지 하게 된다. 브라이드는 ‘끔찍한 색으로 태어’났으며 그 때문에 브라이드의 아버지마저 아내와 딸을 버린 채 떠나고 만다. 그토록 까만 아이는 자신의 유전자를 받은 자식일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스위트니스와 브라이드, 두 모녀 사이가 순탄할 리는 없다. 아마도 이렇게 엄마에게 상처 받으며 자란 딸 브라이드가 흑인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이 세상 온갖 풍파에 시달리며 가정과 사회에서 이중으로 고통 받는 삶을 사는가 보구나…. 라고 예상할 즈음, 이야기는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흐른다. 성인이 된 브라이드는 자신의 검은 피부를 당당하게 드러내고 모두가 선망하는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로서 사회적으로도 성공하고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아가고 있다. 뜻밖의 전개인데, 이보다 더 예상치 못했던 또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 뜻밖의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은 누군가의 읽는 즐거움을 빼앗는 행위 같아서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그 이야기 속에서도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브라이드에게 가장 큰 상처를 준 사람은 그녀가 검다고 손가락질 한 사회가 아니라 그녀가 검다고 만지기조차 꺼려했던 그녀의 엄마, 같은 흑인인(그렇지만 연하기 그지없는 피부를 지닌) 스위트니스, 바로 그녀가 아닐까. 엄마 때문에 상처받으면서도 그런 엄마의 손길을 느끼고 싶어서 엄마를 위해 무시무시한 일을 저지르고 마는 브라이드. 그리고 그 일은 그녀 인생 전반에 씻을 수 없는 상처이자 트라우마가 된다.

스위트니스와 브라이드 두 모녀 말고도 또 한 사람의 중요한 인물이 있다. 브라이드의 남자 친구인 부커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부커 또한 처음에는 베일에 가려져 있는데,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그의 숨겨진 상처가 드러나고 그 상처가 어떻게 브라이드의 삶과 얽히게 되는지 담담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결국 그 상처들이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또 극복하고 이겨내면서 치유하게 되는지도.

책을 다 읽고 나면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는 매우 의미심장한 제목임을 깨닫게 된다. 이 책에는 어린 시절 엄마로부터 가장 큰 상처를 받았던 브라이드 말고도 여러 가지 형태의 폭력에 노출된 아이들이 여럿 등장한다. 그 아이들의 피부 색깔은 상관없다. 그저 어리고 약하고 힘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그리고 그 아이들의 상처는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어떤 의미로든 평생을 지배한다.

그럼에도 새 생명, 아이는 또 태어난다. 이 책의 거의 끝 부분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아이. 새로운 삶, 악이나 병에 면역이 된, 납치, 구타, 강간, 인종차별, 모욕, 상처, 자기혐오, 방기로부터 보호받는, 오류가 없는, 오직 선(善) 뿐인, 노여움은 빠진.’ (237쪽). 그런 세상을 꿈꾸며, 그런 세상이 오기를 바라면서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241쪽)라고 끝맺는 이 작품. 아마도 이제 아흔을 바라보는 노작가의 희망과 바람이 여실하게 담긴 구절이 아닐까.

이 작품은 상처투성이 인간들이 여럿 등장하지만 그럼에도 희망적으로 끝난다. 물론 그렇다고 대책 없이 희망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들이 모두 자신의 상처를 완전히 극복했다고도 볼 수 없지만 어떤 식으로든 작게나마 치유 받는다. 브라이드 그녀 자신이 ‘레인’에게 어떤 영향을 줬는지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르고, 검은 여인 브라이드를 보고 싶어 하는 ‘레인’이 나중에 정말 브라이드를 다시 만나게 될지도 알 수 없다. 끝끝내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레인은 브라이드를 아마도 평생 기억하리라. 가슴으로.


새카맣게 검다는 것, 한밤중처럼 검다는 것이 아름다울 수 있음을 보여주고, 흑인이 언제나 피해자만은 아니며 때로는 가해자가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 <하느님 이 아이를 도와주소서>는 평생 이 문제에 천착해온 작가가 그 나이 즈음에만 쓸 수 있는 작품일 것이다. 그것도 아주 너른 시선으로. 뒤늦게 만났지만 지금 만났기에 더 즐겁게 읽을 수 있었던 토니 모리슨. 나는 이제 그녀의 작품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책꽂이에 하나씩 하나씩 그녀의 작품이 들어서게 되리라. 토니 모리슨의 작품을 거의 다 읽은 사람들은 이런 내가 부러울 것이다. 이런 기분은 진심으로 책읽기만이 줄 수 있는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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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18-06-12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요즘 뜸하실까.... 하는 찰나에 이 글을 읽습니다. ㅎㅎ
저도 잊지 말고 꼭 읽어봐야겠네요.

잠자냥 2018-06-12 15:53   좋아요 0 | URL
예 요즘 많이 뜸했지요? ㅎㅎ
저도 이달의 페이퍼로 뽑히신 폴스타프 님의 ‘미국 흑인 여성 작가‘에서 몇 권 읽어볼 요량으로 따로 적어두었답니다. ㅎㅎ

양철나무꾼 2018-06-12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뜸하시다 싶어 들락거렸는데, 저와 비슷한 지병(?)이 있으셨군요~^^
저는 토니모리슨이 쉽지 않던데 정영목 님이라서 트라이 투 해보려 했었습니다.
이렇게 님의 귀한 리뷰를 읽고보니 꼭 읽어봐야 겠습니다, 꾸벅~(__)

잠자냥 2018-06-12 17:12   좋아요 0 | URL
책 읽는 분들이 다 갖고 있는 지병이 아닐까요? ㅎㅎ
이 책은 번역도 그렇지만, 문장이 잘 읽힐 거예요. 내용도 흥미진진하고, 책 부피도 부담스럽지 않고요. ㅎㅎ
 
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
다비드 그로스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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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야. 사람들은 주말이니까, 평소와는 조금 다른 특별한 것을 기대하지. 약간의 변주 같은. 나 또한 그래. 그래서 그 술집에 갔나봐. 다른 때였다면 문을 열지 않았을 것 같은 그런 펍에 그날따라 왠지 들어가고 싶더라고. 내가 그 술집에 들어섰을 때, 이미 무대 위에는 당신이 있더군. 키가 작고 홀쭉하며, 안경을 쓴 남자. 멀리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할 것 같은 나이. 그래 당신은 적어도 쉰은 넘었을 거야. 안 그래? 그런데 어울리지 않게 그 빨간 멜빵과 찢어진 청바지에 카우보이 부츠는 뭐야? 나 원 참. 당신 이름은 도발레라고 하더군.

난 사람들을 비집고 어느 구석진 자리에 않자마자 아뿔싸, 잘못 들어온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어. 순전히 당신 때문이야. 도발레, 당신이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고 있잖아? 난 사실 스탠드업 코미디를 좋아하지 않아. 거기서 하는 농담 가운데는 들어주기 힘든 것들이  많거든. 때로는 객석에 앉은 사람들을 희롱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지. 난 그런 걸 딱히 좋아하지 않거든.

도발레, 당신도 예외는 아니더군. 성적인 농담으로 가득한 이야기들을, 좋다고 낄낄거리고 있더라고. 게다가 역시나 객석 사람들을 안주삼아서 조롱하고 희롱하고. 뭐, 그래 몇몇 농담 좀 웃기기도 하더라고. 당신은 말끝마다 '네타니아' '네타니아'하던데, 그거 조롱 맞지? 마치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에 나오는, '그렇게 가는 거지', 그 구절처럼 말이야. 그래, 오늘밤 당신은 뭘 조롱하고 싶은 걸까? 살짝 호기심이 들더군.

어차피 여기까지 왔으니 시원한 맥주로 목이나 축이자 싶었지. 그러는 사이에도 당신의 속사포 같은 이야기는 멈추지 않더라고. 몇몇 이들은 낄낄거렸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는 그다지 많지 않더라고. 사람들 반응을 좀 알아차렸는지 당신은 이렇게 말하더군. “당신들은 우리 얼굴에서 스트레스를 볼 수 있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사람들을 웃게 만들어야 하는 스트레스, 그리고 우리가 기본적으로 당신들에게 우리를 사랑해달라고 구걸한다는 것.” 그래, 도발레 당신 얼굴은 좀 불편해보였어. 쇼를 얼마나 했다고 벌써 이렇게 땀을 흘리는 거야?

당신 이야기는 점점 개그가 아닌,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게 되어가고 있었어. 내 주변 사람들도 그걸 느꼈는지 작게 투덜대더라고. 나 또한 그랬지. 거참 저렇게 안 웃기기도 어렵겠다 싶더라고. 그때 마침 도발레 당신은 객석의 어떤 사람을 가리키면서 분위기 전환을 시도하더군. 대법원 판사 아비샤이 라자르가 이 자리에 왔다고. "라자르 판사는 오늘 저녁, 공적으로 우리의 한심한, 비참한 예술을 지원하러, 비공개로 이 자리에 왔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외쳤지만 솔직히 분위기를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 같아. 그런데, 그 판사는 대체 왜 온 거야? 당신하고 무슨 관계지? 좀 궁금해지긴 하더라고.

그리고 또 한 사람, 어느 여인- 당신을 예전부터 알았다고 주장하는 그 여자도 무슨 관계인지, 궁금해지더군. 판사와 그 여자는 도발레 당신이 어린 시절에 알던 사이 같은데, 오늘밤 초대를 받았던가, 아니면 스스로 찾아왔던가, 둘 중 하나겠지? 분명 뭔가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어. 그리고 당신, 당신은 개그를 포기한 건지 아니면 작정한 건지. 아예 비극적인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하더군. 솔직히 몰랐어. 내가 오늘 이런 술집에서 유대인 학살과 홀로코스트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 난 조금 불편해지기 시작했어. 어라? 이런 걸 기대한 게 아닌데, 그저 웃자고, 주말 저녁을 조금 즐기자고 나온 거야. 근데 당신은 내게 그 작은 무대 위에서 쇼아, 즉 홀로코스트를 재현하고 있다니, 이게 말이 돼?

나 같은 관객이 한둘은 아니었나봐. “개그나 한두 개 해주는 게 어때? 이 사람아?” “우리는 개그를 들으러 여기 온 거야!” “오늘은 저 사람 자체가 개그인 게 보이지 않아?” 이런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더라고. 몇몇 사람은 도무지 못 참겠는지, 자리를 뜨기 시작했어. 난 슬쩍 보았지. 당신을 아는 것 같은, 그 여자와 판사의 표정을. 그들은 당신 못지않게 심각하고 어둡더라고. 도발레 당신이 홀로코스트 이야기 속에 당신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 옛이야기를 조금씩 털어놓기 시작할 때부터 그 여자는 울상이었고, 판사는 당혹감 또는 미안한 얼굴이더라고. 그런데 참 이상하지, 나 또한 불편한 마음, 투덜대던 마음 한구석에 뭔가 슬픈 감정이 솟구치더라고.

"엄마는 군수산업체에서 총알을 분류하는 일을 했지." 당신이 이 말을 하는 순간, 아버지로부터 학대당하던 이야기를 하는 순간, 군사 캠프에서 아이들에게 괴롭힘 당하던 이야기를 하는 순간, 오늘 무대 위에서 당신이 쏟아내는 이야기는 절대 개그가 아님을 깨달았어. 농담처럼 웃어넘기고 싶지만 도무지 그럴 수 없는 이야기- 홀로코스트로 인해 망가진 한 가정의 역사. 그럼에도 계속 되는 그 여파. 엄마는 여전히 군수산업체에서 총알을 분류하고, 도발레 당신 또한 군사 캠프를 갔잖아? 그곳에선 몸집이 작은, 당신 같은 약한 아이는 먹잇감이 되기 싶겠지. 폭력이 또 다른 폭력을 낳고, 그것의 희생자는 언제나 약한 자..........

“진지하게 이야기 하는데요. 여러분, 우리는 여기 좀 웃자고 왔는데, 저 사람은 지금 홀로코스트 추모식을 하고 있잖아요. 게다가 홀로코스트를 웃음거리고 만들고 있어요.” “참을 만큼 참았소.” “사람들은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려고 여기 온 거요. 지금은 주말이고, 머리를 맑게 하고 싶어서 온 거지. 그런데 이자는 유대교의 속죄일 행사를 하고 있어.” 사람들은 또 떠나가기 시작했어. 이제 자리에는 몇 사람 남지 않았군. 나도 마음이 불편해서 저들과 함께 이 자리를 뜰까? 싶었는데, 그래, 인정할게 '유혹- 다른 사람의 지옥을 들여다보고 싶은 유혹'에 난 무릎을 꿇고 말았어. 당신에게 뭔가 더 큰 지옥이 있었을 것 같아서. 그 이야기가 궁금해서.

그래, 그거였군. 당신 어머니에게 일어난 일. 그리고 캠프에서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던 이야기. 그건 정말 충격이야. 예상 밖이었어. 당신을 집까지 데려다주던 운전병과의 일화도 뜻밖이었어. 운전병이 웃었다고 했나? ‘너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반은 정신을 잃고 있더라고. 내 개그로 너를 아기처럼 재웠지.’라고 말하면서. 운전병의 여자 친구는 '저런 상태'의 아이한테 개그를 했다면서 운전병한테 심한 욕설을 퍼부었지만, 운전병은 그랬지. ‘저애가 자고 있을 때도 나는 개그를 했지. 단 일 초도 개그 없는 상태로 내버려두지 않았어. 맨투맨 방어.’라고.

그래, 그렇구나. 그때서야 알았어. 도발레 당신이 들려준 운전병과의 일화에서 당신을, 당신의 그 고통스러웠을 삶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됐어. 도발레 당신은 자신의 참혹한 삶, 그 쓰디쓴 인생을 견디기 위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남을 웃기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살아남기 위해서 스탠드업 코미디를 택하고 웃음을 직업으로 삼았던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웃어버리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되어버리니까. 당신이 이 쇼 초반에 말했듯이. “아무 일도 없잖아! 이게 유머의 위대한 점이라고. 가끔은 웃어넘길 수도 있는 거야!”- 바로 그 말처럼, 웃음으로 아무 일 없었던 것으로 만들고 싶었던 당신의 소망이, 지금 당신을 무대 위에 서게 한 것은 아닐까.

“때로는 그  오물이 지금까지도 내 피에서 완전히 빠져나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될 수가 없지.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겠어? 그런 종류의 오물은…….” “그건 방사능이야. 그래, 나 자신의 개인적 체르노빌. 평생 지속되는 한순간. 지금도 내가 다가가는 모든 것을 오염시켜. 오늘날까지도. 나와 접촉하는 모든 사람을.” 마지막 절규에 가까운 도발레 당신의 이야기는 오늘 쇼에서 가장 슬픈 말이었어. 웃기지 않아? 스탠드업 코미디를 보고 나서 가장 웃긴 말이 아니라, 가장 슬픈 말을 기억하게 될 줄이야.

도발레, 두 시간의 쇼 동안 당신 개그는 솔직히 한 서너 개 빼고는 하나도 웃기지 않았어. 오히려 당신의 과거사로 마음을 불편하게 하다가 비극적인 감정에 빠지게 했지. 솔직히 오늘 쇼에서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감정을 느꼈을 거야. 당혹, 불쾌, 분노, 그러다가 느낀 참혹한 슬픔. 이봐, 당신은 그 사건들이 당신의 개인적 체르노빌이라고 했지? 그래 그건 분명해. 지금도 당신을 괴롭히고 있지. 어떻게 보면 전 인류의 체르노빌이라고 말하는 게 옳겠지. 그런데 그건 당신 잘못은 아니잖아? 그러니 당신이 주변 모든 사람을 오염시킨다는 생각은 그만하길 바라. 당신은 그런 와중에도 웃음으로써 고통을 희석하면서 잘 버텨왔어. 대단해. 체구는 작지만 인내심은 엄청난 사람이군. 당신의 주름이 그 고통의 흔적이었으리라는 생각을 하니 새삼 감동스럽더군.

도발레, 당신이 오늘밤 왜 그 판사를 불렀는지 난 알고 있어. 당신이 “사람들이 나를 볼 때 뭘 얻느냐는 거야. 나를 볼 때 뭘 알게 되지? 나에게서 오는 것을 볼 때?”라고 물었다는 것도. 판사로부터 그런 것을 '판결'을 기대했다니, 좀 우습긴 하지만. 오늘밤 당신의 두 시간 남짓한 쇼를 보면서 내가 느낀 걸 말해줄게. 당신은 고통 속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아남은 위대한 사람이야. 그것도 자기 아픔을 웃음으로 치유해보고자 했다니, 진심으로 숙연해졌어. 그러기 쉽지 않았을 거야. 정말. 기대하지 않았는데 두 시간 동안 한 인간의 위대한 생존기를 바라본 느낌이야. 난 무척 감동했어. 그래서 조용히 마음속으로 박수를 보냈지.

그래, 당신 말처럼 당신 개그는 “웃기지도 않고, 또한 품위도 없”어. 하지만 어때? 어차피 이건 코미디가 아니었잖아? 스탠드업 비극(tragedy)이었지. 쇼, 잘 봤네, 도발레. 쉰일곱 번째 생일 축하하네, 이제 그만 당신의 체르노빌, 그 고통에서 벗어나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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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02-21 0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말에 서점 갔다가 이 책을 보고 살까말까 망설이다 왔거든요. 왜인지 <아프리카 술집 외상은 어림없지> 생각이 나네요.

잠자냥 2022-02-21 09:14   좋아요 0 | URL
갑자기(?) 이 책이 왜 읽고 싶어지셨는지 궁금하네요. ㅎㅎ

다락방 2022-02-21 09:15   좋아요 1 | URL
아 서점 소설 코너에서 우연히 제목이 눈에 띄었어요 ㅋㅋㅋㅋ 이게 뭐지? 하고 나중에 살펴봐야겠다 읽고싶어요 북플에 체크했는데 아니 글쎄 잠자냥 님이 2018년에 읽고 리뷰를 쓰셨더라고요! 대박..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2-02-21 13:49   좋아요 0 | URL
홀로코스트를 좀 색다르게 다루고 있어요. 홀로코스트 다룬 작품들이 대개 그렇듯이 읽고 나면 마음이 좀 무거워지고요.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지만지 희곡선집
헨리크 입센 지음, 조태준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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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지 책에는 좀 복잡한 감정이 든다. 어떤 면에서는 싫은데 어떤 면에서는 좋다고나 할까. 기본적으로는 크게 호감이 없는데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무시할 수는 더더욱 없는 그런 사람을 보는 느낌이 든다. 지만지의 책에 좋지 않은 감정이 드는 것은 알다시피 그 유명한, 축약본이 많다는 점 때문이다. 축약본으로 책을 읽을 거라면 대체 왜 읽지? 싶은 나로서는 이 지만지 시리즈 초기에 많이 나왔던 세계고전 축약본에 좀 어이가 없었다. 가격은 또 왜 이리 비싼지. 보통 다른 책의 두 배는 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무시할 수 없는 까닭은, 이 시리즈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한 작품들이 꽤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작품이 축약본이 아니라면, 독자로서는 군침이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헨리크 입센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도 그런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알라딘 검색창에 헨리크 입센을 한번 검색해 보라. 발견되는 작품은 거의 <인형의 집>이고, 아주 간혹 <민중의 적>, <유령>, <들오리> 정도가 보일 뿐이다. <인형의 집>을 제외하고는 그나마도 그다지 믿음이 가지 않는 출판사에서 나온 작품이 전부이다. 


그런데 지만지에서는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를 비롯해 또 다른 입센의 희곡 <바다에서 온 여인>을 출간했으니 독자로서 어찌 완전히 외면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선뜻 책을 사게 되지는 않는다. 앞서 말했듯 책값이 너무 비싸서. 그럴 때 유용한 게 도서관 희망도서 신청 서비스다. 읽고 싶은 지만지 책은 이런 식으로 도서관을 이용해 읽으니, 나도 모르게 우리 동네 도서관에 지만지 전도사(?)가 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최근 출간된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도 도서관에 신청해서 첫 번째로 읽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읽기를 바라는 마음에 몇 자 적어본다.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는 입센의 마지막 작품으로 그가 일흔이 넘은 나이에 썼다. 그래서 그럴까? 주인공인 늙은 조각가 ‘루베크’의 모습에서 입센 그 자신의 모습이 종종 엿보이기도 한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인형의 집>의 노라와 비슷한 여인이 이 작품에도 등장한다. ‘이레네’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노라와 아주 닮았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한 남성으로 말미암아 삶이 부서지고, 그 사실을 깨닫고는 그를 거침없이 떠난다는 점에서 닮았다고나 할까. <인형의 집>을 읽을 때도 그랬지만, 나는 입센의 이런 여성주의적 관점도 꽤나 존경스럽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100년 전에 쓰인 작품들이지 않은가!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는 첫 시작부터 남자와 여자 사이에 작은 균열이 보인다.



마야 부인: 좀 들어보세요. 여긴 온통 침묵뿐이에요.

루베크 교수: (관대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게 들려?

마야 부인: 뭐가요?

루베크 교수: 침묵?

마야 부인: 네, 전 잘 들리는데요.

루베크 교수: 글쎄, 우리 아기, 당신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군. 분명 침묵은 들을 수 있는 건데 말이야. 

마야 부인: 그럼요, 혹시 또 알아요. 여기처럼 지긋지긋할 정도면….

루베크 교수: 여기라면, 온천장을 말하는 건가?

마야 부인: 사방천지의 여기를 얘기하는 거예요. 도시엔 소음과 활기가 넘쳤죠. 하지만 이건 도무지…. 내겐 그런 소음이나 활기 같은 건 죄다 죽어 없어져 버린 거 같아요.  (6~7쪽)


이 짧은 대화에서 독자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루베크와 그의 아내인 마야 사이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는 것을, 그리고 그 둘 사이에는 권태와 불만이 가득하고 이미 작은 균열이 생겼지만 애써 그 사실을 외면하고 있음을 ‘우리 아기’나 ‘침묵’, ‘지긋지긋’이라는 단어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부활의 날’이라는 작품으로 대성공을 이룬 늙은 조각가 루베크와 그의 젊은 부인 마야는 곳곳을 여행하면서 안온함을 누리는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둘의 성격차이는 확연히 드러난다. 젊은 아내는 고상한 예술보다는 소란스럽고 활기가 넘치는 파티와 같은 삶을 살고 싶다. 남편 루베크와 함께 하는 삶은 더는 살아 있음이 아닌, ‘죄다 죽어 없어져 버린’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 그들 앞에 한 여인이 등장한다. ‘이레네’- 알고 보니 그녀는 루베크가 ‘부활의 날’을 창작할 수 있도록 도와준, 아니, ‘부활의 날’이 세상에 존재 가능케 한 여인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오랜 세월이 흘러 우연히 다시 만난 루베크와 이레네의 대화는 자못 심각하다.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노라면, 독자는 곧, 루베크가 그의 창작을 위해 모델이자, 뮤즈이자, 영감의 원천이며, 사랑했던 그녀, 이레네를 철저히 이용했음을 알게 된다. 


이레네: 난 내 살아 있는 젊은 영혼을 당신에게 줬어요. 그러곤 속이 텅 빈 채로 거기에 남겨졌죠. 영혼도 없이. (그녀의 시선이 그에게로 고정된다.) 내가 죽게 된 건 바로 그것 때문이에요, 아르놀. (52쪽)


이레네는 자신이 루베크에게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가차 없이 그를 떠났다. 마치 노라가 집을 나섰듯이. 그러나 그 이후의 삶은 그리 순탄치는 않은 듯하다. 루베크 이후 만난 남자들과의 결혼 생활도 행복하지 않았으며, 정신병원을 오간 전력도 있다. 이런 모습에서는 로댕과 카미유 클로델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물론 이레네는 카미유처럼 조각에 재능이 있다거나 직접 작품 활동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모델로서, 영감을 주는 원천으로, 철저히 대상으로서만 이용당한 채 사랑은 거부당하고만, 비운의 여인이다. 만일 이레네가 루베크에게 사랑을 갈구하면서 그에게 줄곧 이용만 당하다가, 버림받았다면 무척 답답했을 텐데, 이레네는 어느 순간 루베크의 이중성을 깨닫고 스스로 그를 떠난다. 그들이 재회한 뒤 나누는 대화 속에서도 이레네는 루베크가 듣기 거북한 말들을 쏟아낸다. 


루베크와 이레네, 그리고 마야. 이 세 사람의 삼각관계 이야기인가 싶을 때 지주 울프헤임이 나타난다. 그는 거의 모든 면에서 루베크와는 상반되는 인물이다. 정신적이기보다는 육체적이고 정적이기보다는 동적이다. 매우 남성적이고 어찌 보면 야만스럽게까지 느껴지는 그에게 마야는 곧 호감을 느끼고 둘은 루베크 앞에서 거리낌 없이 서로를 향한 욕망을 표현한다. 이렇듯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는 루베크와 울프헤임 두 남자, 이레네와 마야 두 여자, 남과 여의 대비뿐만 아니라 루베크와 이레네로 상징되는 예술과 정신적인 삶, 울프헤임과 마야로 상징할 수 있는 육체적이면서도 세속적인 삶, 산 정상과 산 아래의 삶 등의 대비를 통해 여성과 남성의 문제(대상으로서 종속적인 삶을 살아가는 불행한 여인들의 삶), 예술과 세속적 삶,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깊이 있게 통찰한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인상 깊은 점은 역시 이레나와 마야 두 여인이 루베크를 대하는 방식이다. 그 둘은 결국 루베크와 함께 하면서 어떤 의미로든 균열을 발견하고, 그 기만된 삶을 깨닫고는 그의 곁을 스스로 떠난다. 버림받는 것도 아닌, 자기 발로 루베크를 떠나는 것이다. 그런 부분이 꽤 통쾌하다. 입센을 이르러 ‘현대극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까닭에는 아마도 이런 시대를 앞선 사상도 한몫 했으리라.


이 작품의 결말 부분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루베크를 산 정상으로 이끄는 이레네. 그곳에 예술이 있는 삶이, 정신이 되살아나는 삶이, 죽음이 아닌 부활이 있으리라 믿고 이레네와 함께 산 정상으로 가는 루베크…. 그러나 정말 그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질까? 어쩐지 그 모든 것은 이레네가 루베크에게 받았던 고통을 고스란히 되돌려주고자 했던, 그녀의 의도된 복수극은 아니었을까.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란 그래서 여러 의미로 읽을 수 있기에 곱씹을수록 흥미롭다. 이 짧은 희곡만으로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번역이나 책 만듦새가 믿음이 가는 그런 출판사에서 입센의 희곡 선집을 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며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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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yeongx 2018-06-29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이거 초반에 마야부인이 루베크교수가 부활의날을 완성한 이후로 작업의욕을상실했다고했는데 입센은 실제로는 우리죽은자들이깨어날때 쓴후에 또글쓰려하다가 병때문에 못쓴거래요

잠자냥 2018-06-30 01:19   좋아요 0 | URL
넵. 이 작품의 루베크 교수에게서 종종 입센의 모습이 엿보이기는 합니다만, 루베크가 입센 그 자신은 아니겠지요.

singyeongx 2018-06-30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아는사람이 있다는게신기하네요...

잠자냥 2018-06-30 17:30   좋아요 0 | URL
모쪼록 입센의 다른
희곡도 많이 번역되면 좋겠습니다...!

2018-12-17 0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17 09: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17 0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17 0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레이스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민음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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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애트우드의 <그레이스>는 흡인력이 대단하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애트우드는 정말 대단한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레이스>는 19세기 캐나다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한다. 때문에 사건의 진행과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고, 이 책을 손에 든 사람이라면 거의 대부분 그 내용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애트우드는 전개가 뻔히 예상되는 이야기를, 700페이지 가까이 되는 분량 동안 지루할 틈 없이, 숨 가쁘게 스토리를 따라가게 만든다. 그런 능력이라니,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물론 하인과 하녀가 공모해 집주인과 그의 정부였던 가정부를 살해한 실제 사건이 무척 자극적이기도 했지만, 그러한 사건을 바탕으로 실존 인물 위에 어떤 의미로는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하고, 그 캐릭터들이 종이 위에서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게 만든 것은 모두 작가의 능력 덕분이다. 실제 기록들을 이토록 흥미진진하게 재구성하다니, 그 또한 놀라울 뿐이다. 더욱이, 어찌 보면 그저 잔혹한 범죄에 지나지 않았을 사건을 소설화하면서 페미니즘적 시선을 덧붙인 점 또한 감탄스럽다. 그런 관점으로 당대의, 또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성차별 문제를 건드리는 영리함까지 놓치지 않았으니 찬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그레이스>를 이토록 흥미진진하게 만든 것은 ‘그레이스 마크스’ 그녀 자신, 아니 애트우드가 다시 새롭게 창조한 이 기이하고도 신비로운 인물 때문이다. 작품을 읽고 나니, 이 책의 표지가 매우 의미심장하다는 생각이 든다. 리커버 판 표지에는 온갖 그림이 그려져 있다. 책을 다 읽은 뒤 자세히 살펴보니 대부분은 작품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들이다. 그중 단연 으뜸은 표지 한가운데에 놓인, 보닛을 쓴 얼굴이 없는 여인의 모습이다.

보닛을 쓴 이 여인은 아마도 그레이스일 것이다. 그런데 얼굴이 없다. 왜일까? 이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모두 공감할 테지만, 책을 덮을 때까지도 그레이스 마크스, 그녀에 대해 섣불리 판단 내릴 수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이 책 22쪽에는 살인죄로 법정에 섰을 무렵의 그레이스 마크스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 생겼을까? 그래,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초상이 정말 그녀의 본 모습일까 의아해진다. 표지 속 얼굴이 없는 여인처럼 도무지 뭐라고 그 형체를 설명할 수 없는 존재. 그녀가 바로 그레이스 마크스, 또는 메리 휘트니이다.

그녀를 그레이스 또는 메리라고 부르는 까닭에는 또 깊은 의미가 있다. 이 책을 읽을 독자를 위해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이 작품의 의미심장한 어느 한 구절처럼, 그레이스는 우리가 보고 싶은 모습 그대로 변형되는 존재는 아닐까? 그게 때로는 순진무구하고 가련한 희생자 그레이스이기도 하고, 또 때로는 잔혹한 악녀 메리 휘트니이기도 한 게 아닐까. 이게 무슨 소리야 대체? 궁금한 사람이라면 바로 이 책을 읽어보시라.



내가 어떤 짓을 저질렀느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유죄나 무죄가 결정된다는 것을 그는 아직 모른다. (556쪽)


문학 작품이나 영화에서 여자들은 보통 성녀 아니면 악녀로 그려진다. 착한 여자 아니면 나쁜 여자, 잔인하고 냉혹한 가해자 또는 순진한 피해자. 마녀 아니면 성녀. 이런 관점은 세상이 여자에게 부여한 시선이다. 이브를 보라, 이브는 아무것도 모르던 순진한 피조물에서 뱀의 꼬임에 넘어가 죄를 짓는, 그래서 이 세상에 죄를 가져오는 원흉이 된다. 그레이스 마크스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질투심에 눈이 멀어 맥더모트를 사주해 두 사람의 목숨을 잔혹하게 앗아간 끔찍한 살인자, 악녀- 그게 아니면, 정신병을 앓는 가엾은 희생자 둘 중 하나다. 그레이스를 변호하는 쪽이나 그렇지 않은 쪽이나 또는 이 사건을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이나 모두 둘 중 하나이다. 중간은 없다.

하지만 정말 그레이스는 그렇게 단순한 여자일까? 정신과 의사 사이먼과 대화를 나누는 그레이스 마크스를 보라. 사이먼이 종종 깜짝 놀랄 정도로 그녀는 똑똑하다. ‘판도라의 상자’를 알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언어유희까지 할 정도의 수준이다. 그런데도 사이먼은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가 나오니 대놓고 맨스플레인(mansplain)을 하려고 한다. 페미니즘적 시선은 이렇게 그레이스 또는 메리의 입을 통해 작품 곳곳에서 드러난다.



이 말을 듣고 그는 교사 분위기로 돌입한다. 나에게 뭘 가르치려고 하는 게 보인다. 남자들은 가르치는 걸 좋아한다. 키니어 나리도 그랬다. 그가 묻는다. 판도라가 누군지 알아요, 그레이스? (218쪽)

정신병원에 있던 여자들이 대부분 여왕 폐하 못지않게 정신이 멀쩡했던 것을 보면 그들은 진짜 정신병자를 보더라도 알아차리지 못할 게 분명했다. (...) 그중에는 죽도록 때리는 남편을 피해 입원한 여자도 있었는데, 미친 쪽은 그 남편이건만 그를 잡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51쪽)

어떤 사람들은 이걸 이브의 저주라고도 부르는데 자기가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이브에게 주어진 진짜 저주는 무슨 문제가 생기자마자 그녀 탓으로 돌렸던 바보 같은 아담을 참고 견뎌야 했던 거라고 말했어요. (245쪽)

그와 처지가 비슷한 남자들은 자기가 어지럽힌 것을 치우지 않아도 되지만, 우리는 우리가 어지럽힌 것뿐 아니라 그들이 어지럽힌 것까지 치워야 한다. 하지만 그건 그들의 잘못이라기보다 그렇게 길러졌을 뿐이다. (316쪽)


더욱이 메리와의 행복했던 시절을 이야기 할 때의 그레이스를 보면 성격 또한 무척 다정다감하다. 온화하고 너그러우며 지혜롭다. 게다가 메리가, 존재하지 않는 인물, 그러니까 그레이스의 다른 자아라고 가정한다면, 그레이스는 세상을 바라보는 비판 정신 또한 무시할 수준이 못된다. 심지어 자신의 살인사건을 다루는 언론을 비판하는 혜안까지도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독자는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는 그레이스를 지켜보면서 그녀가 매우 다채로운 여자임을 서서히 깨닫게 된다.



선생님이 침대를 평화로운 곳으로 생각하신다면 그건 침대가 휴식과 편안함과 단잠의 상징이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죠. 침대에서 위험한 일들이 아주 많이 벌어지거든요. 침대는 우리가 태어나는 곳이니 우리가 인생 최초의 위기감을 맛보는 곳이죠. 여자들이 아이를 낳는 곳이니 종종 생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곳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선생님 앞에서 차마 말할 수 없는 남녀 간의 행위가 벌어지는 곳이기도 하죠. 선생님도 무얼 말하는지 아시겠지만, 누구는 그걸 사랑이라고 하고, 누구는 절망이라 하고, 또 누구는 참아야 할 모욕일 뿐이라고 하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침대는 우리가 잠을 자고, 꿈을 꾸고, 대개는 죽음을 맞이하는 곳이에요. (240쪽)

신문에서는 그가 무뚝뚝하니 고집이 세고 앞뒤 신경 안 쓰는 거만한 분위기였다고 했는데, 신문은 늘 그런 식인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에는 아침 식탁에 앉아 있을 때하고 다를 게 전혀 없었거든요. (521쪽)


그러나 이 작품 속 인물들은 거의 모두가 그레이스의 이런 명민함을 미처 깨닫지 못하거나 알면서도 외면한다. 혹 알더라도 그 똑똑함을 잔학한 영리함이라고 폄하하며 그레이스의 악녀 이미지를 강화하는데 덧씌울 뿐이다. 그렇게 단정 지어야만 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그레이스를 변호하는 목사나 사이먼 같은 사람들, 또는 그 반대로 그레이스를 악녀라고 부르는 사람들만 그녀를 그렇게 보는 걸까? 세상 자체가 그레이스라는, 여성 자체를 그렇게 이분법적 시선으로 본다. 과부를 보는 단 두 개의 시선만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저는 과부에 대해 생각해 보았어요. 과부들 특유의 우울증, 걸음걸이, 성서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의 정성 어린 헌금, 헌금 때문에 하녀들도 자기 월급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적선하라고 늘 다그침을 당했죠. 젊고 돈이 많은 과부가 화제로 등장하면 남자들이 어떤 식으로 윙크하며 고개를 끄덕이는지…. 과부가 나이가 많고 가난하면 존경을 받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어떤 대접을 받는지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해요. (243쪽)

그레이스의 저 말처럼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이렇게 독자는 그레이스를 악녀 또는 순진한 희생자로 보는 그 두 가지 시선이 여자를 향한 보통 이 세상의 시선임을 자연스레 깨달아가게 된다. 페미니즘 사고가 짙게 베인 구절이 종종 나온다고 해서 여성주의적 작품인 게 아니라, <그레이스> 자체가 여성주의 작품인 것이다. 때문에 독자는 이 작품을 읽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그레이스의 진실을 쫓는 일보다는 이 세계가 여자를 바라보는 방식에 주목하게 된다.

그레이스의 진실이 무엇인지 독자는 여전히 안개 속을 헤매며 책을 덮지만, 마음속에 이런 질문은 남는다. 그레이스를 바라보던 그 시선은 과연 온당했는가. 어쩌면 나 또한 그 두 시선의 틀 안에 갇혔던 것은 아닌가. 그레이스의 진실이 무엇이든 그녀를 향했던 시선이 문제가 아닌가. 그럼에도 그레이스, 그녀를 소환해서 진실을 알고 싶은 욕구는 간절하게 남는다. 사이먼의 고백처럼 ‘물고기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고 둘 다인, 아름답지만 노래를 부르는 위험한 인어’였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그 모두가 아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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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 어느 계단의 이야기 - 희곡 대산세계문학총서 9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 지음, 김보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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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알고 싶지만, 나만 알기에는 매우 아까운 작품이 있다. 숨겨진 명작이라고나 할까. 아니, 어쩌면 이 땅에서만 잘 알려지지 않은 비운의 명작일지도 모르겠다.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의 작품이 그렇다. 나는 이 두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전율했다. 이런 작품이 있다니! 그런데도 이토록 알려지지 않았다니! 최근에 다시 읽었다. 좋은 작품은 여러 번 읽게 하는 힘을 지녔다. 읽을 때마다 그 의미를, 깊이를 곱씹게 한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그 날 것 같은 느낌, 과장된 몸짓 때문에 나는 연극을 좋아하지 않는다. 희곡이 훨씬 좋다. 내가 무한히 상상할 수 있으니까. 그럼에도타오르는 어둠 속에서어느 계단의 이야기는 연극으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일 극 연출가라면 이 두 작품은 꼭 무대에 올리고 싶을 것 같다. 상연하기에도 꽤 적절하다. 단, 배우들의 연기가 빛나야 한다. 섣부른 연기자들에게 맡겼다가는 원작이 지닌 예리함도 강렬함도 모두 빛이 바랄 것이다.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어둠’은 여러 의미를 갖는다. 이 작품의 무대는 어느 맹인 학교이다. 이곳 학생들은 태어날 때부터 앞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눈이 멀었다는 사실을 크게 인식하지 않는 것 같다. 앞이 보이지 않는 장애를 가졌다면 우울할 법도 한데, 그들은 하나 같이 밝고 명랑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면면을 보니 이른바 부잣집 자식들- 그러니까 부르주아 계급에 속한 이들이 대부분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데다가, 주변에는 자기처럼 모두 똑같이 앞이 보이지 않는 이들 뿐이니, 장님 나라의 장님이라 자신에게 결핍된 것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알고도 외면한다.


그런데 이 학교에 이그나시오라는 ‘어둠’의 자식이 나타나면서 서서히 문제가 일어난다. 이그나시오 또한 부잣집 도련님인데, 이 녀석은 어딘가 삐딱하다. 밝고 명랑한 분위기에 걸핏하면 찬물을 끼얹고, 툭하면 비아냥거린다. 그는 학교의 다른 아이들이 ‘밝음’과 ‘즐거움’에 오염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들 모두가 ‘허황한 즐거움의 왕국’에서 자신의 실명 사실을 외면한 채 살아가고 있다고 비판하며 ‘너의 낙관주의와 너의 눈 먼 것은 똑같다’(40쪽) 말한다.


이그나시오: 너희들은 살 자격이 없어. 왜냐하면 너희들은 고뇌하려 들지 않으니까, 왜냐하면 너희들은 너희들의 비극을 직면하려 하지 않으니까. 정상인의 생활을 생각하면서 현실을 잊으려 하고. 더군다나 슬픔에 빠져 있는 자들에게 즐거움을 강요하며. (....) 너희들은 모범생들이지. 학교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절망감과 맞서는 선생님들에게 충심으로 협조하는. 장님들! 장님들 말이야! 앞을 못 보는 사람이 아니고, 이 멍청이들아!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39쪽)


이그나시오는 장님 나라에서 자신이 장님임을 인정하는, 눈 먼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럼으로써 삶의 고통과 비애를 느낄 줄 안다. 그런데 바로 ‘어둠’을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 ‘밝음’의 세계에서는 이질적인 존재가 된다. 나머지 학생들은 이그나시오가 내뿜는 어두운 분위기에 당혹해 하며 그를 교화하고자 애쓴다. 그가 그토록 인생을 비관적으로 보는 까닭은 연인이 없어서라는 단순한(?) 결론을 내리고는 애인을 만들라고 권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그들에게 이그나시오는 이렇게 말한다.


이그나시오: 나는 애인도 필요 없어. 내가 필요한 것은 온몸으로 말하는 ‘너를 사랑해’야. ‘너의 슬픔과 고뇌까지 포함해서 너를 사랑해. 허황한 즐거움의 왕국에서 살기 위해서가 아니고 너와 함께 괴로움을 같이 하기 위해서.’ 하지만 그런 여자는 없어. (38쪽)


이렇듯 그는 자신의 고통을 똑바로 응시하고,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 또한 그 괴로움을 바로 볼 줄 아는 사람이기를 바란다. 슬픔과 고뇌까지 포함해서 자신을 사랑해 줄 사람. ‘장님 세계의 장님’을 온전히 이해할 사람 말이다. 고통을 알고 느끼고, 응시할 때 비로소 삶의 진실을 마주하고 그럼으로써 진짜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 물리적으로는 볼 수 없지만 정신으로는 눈을 뜬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묵직한 진실이 이그나시오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이그나시오는 앞을 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눈 먼 사실을 외면하고 그 상태로 밝음 속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그것이 불가능하더라도 앞을 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포기한 삶을 살기를 거부하고 혼자서라도 그 길을 나아가고자 한다. 때문에 그는 길에서 동냥하는 맹인들이 이 학교의 밝고 유쾌한 아이들보다 훨씬 진실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맹인들은 ‘자신들이 정상이라고 믿는 어리석은 짓’(48쪽)은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이그나시오는 다른 학생들과 달리 지팡이를 끝내 버리지 않는데, 이 또한 자신이 맹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 의미로 볼 수 있다.타오르는 어둠 속에서는 이렇듯 자신의 실명을 인지하고 그 ‘어둠’을 회피하지 않는, 눈은 멀었지만 제대로 볼 줄 아는 한 인간과 그와 달리 진실을 외면하고 그저 아름답고 밝은 현실 속에 안주하는 인물들을 대립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묻는다. “우리 모두는 장님들과 같은 어둠 속에 있고, 그래서 우리는 우리들의 어둠의 장님들이다.”라는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의 말은 이 작품과 더불어 본다는 것의 의미, 눈 먼 상태의 의미를 곰곰이 되짚어 보게 한다. 눈을 뜬 자여, 그대는 볼 수 있지만 과연 제대로 보고 있는가?


어느 계단의 이야기 또한 삶의 비애랄까, 인간의 뜻대로 되지 않는 삶의 진실을 그린다. 한 동네에서, 그것도 똑같은 집에서 평생을 산다면 어떤 기분일까? 나는 독립과 함께 어린 시절 살던 곳을 떠났는데, 때때로 본가에 가게 되면 맞닥뜨리는 풍경이 있다.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가끔 여전히 그 동네에서 살고 있는 초등학교 동창들의 모습을 언뜻 보게 되는 것이다. 어린 시절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모습들…. 늙어가고 있음을 뚜렷하게 알 수 있는 증후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장소에서 살고 있는 기분은 어떨까 싶어진다.


어느 계단의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의 삶이 그렇다. 이 작품의 배경은 어느 도시의 허름한 연립주택 계단이다. 모든 사건이 이 계단을 중심으로 벌어진다. 그곳에서 이 주택에 사는 사람들은 미래를 꿈꾸고 사랑에 빠지고 때로는 증오하기도 하면서 온갖 사건을 만들어 나간다. 그들이 젊었을 때는 이 허름한 주택의 낡은 계단을 떠나 성공으로 가길 꿈꾸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아등바등 살아보지만 10년 뒤에도 그 계단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우르바노: 나는 내가 크게 되지는 못할 걸 알아. 그건 너도 마찬가지고. 내가 출세하면 우리 모두가 다 할 수 있는 거야. 그렇지만 더 확실한 건 10년이 지난 후라도 우리는 이 계단을 오르내릴 것이고 이 작은 공간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을 거라는 거지.

 

페르난도: 나는 시간이 두려워. 그것이 나를 가장 괴롭히고 있어. 하루하루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1년이 가고….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너와 내가 우리의 첫 담배를 숨어서 피우기 위해 이곳에 찾아들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년이 지났잖아! 우리는 이 계단을 오르내리며,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들 사이에서, 우리에 대해 수군거리는 이웃 사이에서, 우리는 그들에 대해 수군거리며, 모르는 사이에 다 커버렸지. 집세, 전기세, 감자 값을 치르기 위해 온갖 수모를 당하고 수단도 부려가며. (사이) 그러다가 내일, 아니면 요즘처럼, 하루 같이 지나갈 수 있는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후에…. 이렇게 계속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야. 아무 곳으로 향하지 않는 계단을 오르내리며, 수금원을 속이고, 일을 증오하며…. 하루하루를 허송세월로 보내며…. (어느 계단의 이야기115~116쪽)


젊었을 때의 거창한 꿈과 계획은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산산이 부서지고 그들의 대부분은 더 나아지지도, 자유로워지지도 못한다. 거의 모두가 그 계단에 얽매여 있는 것이다.어느 계단의 이야기는 이렇게 자신의 운명을 생각대로 펼쳐나가기에는 한없이 부족한 하층민의 삶을 한 계단을 중심으로 30년 동안 보여줌으로써 그 시절 스페인의 어두운 현실을 폭로한다. 사실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인 1919년에서 1949년 사이에는 스페인 내전(1936년~1939년)이 있었다. 작품 속에서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어찌 그 암울한 현실을 은유적으로라도 담아내지 않았겠는가.


3세대에 속하는 아들 페르난도와 딸 카르미나는 30년 전에 그들의 부모가 그랬듯이 장밋빛 미래를 그리는 이야기들을 똑같이 나눈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안다. 그들의 미래 또한 그리 밝지만은 않음을. 그들이 꿈꾸는 대로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그들 또한 10년 뒤에 여전히 그 계단에 얽매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런데 이들의 인생이 단지 문학 작품 속 또는 무대 위에서만 그려지는, 그런 먼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또한 안다. 우리의 비루한 삶 또한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하지만 삶이 주어진 이상, 고통 속에서도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장님들과 같은 어둠 속에 있더라도 제대로 볼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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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18-04-06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죠, 그죠, 진짜 멋있는 희곡이지요?
저도 이거 읽고 뻑~ 갔답니다. ^^

잠자냥 2018-04-06 12:04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정말 놀라운 작품입니다. 근데 이 사람 다른 작품이 더 소개된 게 없어서 무척 아쉬워요. ㅠ_ㅠ
암튼 이래서 대산세계문학총서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니까요;;

독서괭 2023-05-03 16: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읽고, 궁금해서 찾아왔어요. 역시나 멋진 리뷰가 똭!!^^ 계단 이야기 부분은 마저 읽고 다시 와야겠습니다 ㅎㅎ

잠자냥 2023-05-03 18:26   좋아요 0 | URL
아아 그 멋진 작품! 괭 님의 리뷰도 기다릴게요!

독서괭 2023-05-03 18:33   좋아요 0 | URL
정답지 본 느낌이라 뭐라 더 쓸 수 있을지.. 암튼 인상적인 작품이었어요!! 잠자냥님이 당장 사라고 하신 덕에 덜컥 사서 읽게 됐네요 ㅋㅋ

잠자냥 2023-05-03 18:48   좋아요 1 | URL
정답은 개뿔이요~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