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은바오가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을 읽고 남긴 100자 평에 언니들이 나타나서 저마다 오래전 ‘드 보통’의 책을 읽었던 자신들의 감상을 소소하게 남겼다(책은 이래서 좋다. 책을 읽은 지 오랜 시간이 흘렀고 나이가 다르고 세대가 달라도 그 책을 읽은 사람들은 그 책 이야기로 통한다는 것). 나도 한때는 알랭 드 보통을 꽤나 열심히 읽었고 <불안>은 아직까지도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분명히 버리지 않고 이사 올 때도 갖고 왔는데 어디에 처박혔는지(책장 뒤 칸으로 밀린 듯) 찾을 수는 없고 혹시 <불안>에 관해 뭔가 끼적인 게 있던가 싶어서 내 블로그에 ‘알랭 드 보통’이라고 검색해 보니 다음과 같은 글들이 나타났다. 아 웃겨......... ㅋㅋㅋㅋㅋㅋㅋ 각각 2007년과 2015년에 쓴 글인데 그동안 글쓰기 실력은 좀 늘어난 것인가? 길이만 늘어난 것인가.....?
제목: 알랭 드 보통의 책들 (작성 날짜: 2007/11/26)
처음 알랭 드 보통의 작품을 접하고, 솔직히 '뭐 이런 게 다 있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소설(?)은 스토리만 보자면 뻔하디 뻔한 '연애 소설'이다. 남자와 여자가 만난다. 만나서 사랑에 빠지고, 연애를 하다가, 삐걱거리고, 그러다 헤어지고. 헤어짐 뒤 고통을 앓다가, 다시 누군가를 만난다. 그런데 '뭐 이런 게 다 있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쉽게 읽히는 연애 소설은 아니기 때문이다. 상당히 현학적이다. 삐딱한 시선으로 보자면 '지적 허영'을 갖고 있는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열광할만한 요소가 다분하다.
단순히 '사랑'과 '연애' 이야기에 플라톤, 헤겔, 프루스트, 프로이드, 오스카 와일드 등등이 거론된다면 골 아프지 않겠는가? 아니, 사랑하면 사랑하는 거지, 무슨 철학자가 운운한 말들이 이렇게 많아? 알랭 드 보통이라는 작가, 그래 너 잘 났다. 잘난척하려고 이런 글 쓴 거 아니야? 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이 우리가 알랭 드 보통의 소설에 매혹당하는 (혹은 그와 반대로 역겨워하는) 이유가 된다.
보통 우리는 '사랑'을 아주 잘 안다고 생각한다. '사랑'처럼 쉽고 익숙한 단어도 없다. 너무 익숙하고 무척 빈번하게 들리는 단어이므로 '사랑'에 철학과 같은 고리타분한(?) 생각은 개입될 요소가 없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누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행위'만큼 한 사람의 기호와 가치관과 습성 등 그 사람의 '철학'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행동을 찾기 쉬울까? 어떤 사람을 사랑하기로 선택하고, 받아들이고, 그와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일련의 행동만큼 한 사람의 가치관을 쉽게 엿볼 수 있는 것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을 다룬 소설을 그저 '연애'소설 쯤으로 치부해왔는데, 알랭 드 보통은 그 연애 소설에 '철학'이라는 담론을 끌어들임으로써 '연애' 소설의 품격(?)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것은 나처럼 지적 허영에 가득 찬 사람들에게 소비되고 있는 것이고.
내가 읽은 알랭 드 보통의 책은 그의 연애소설 3부작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Essays in Love>(1993), <우리는 사랑일까 The Romantic Movement>(1994),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 Kiss & Tell>(1995)과 <불안 Status Anxiety>(2004), <동물원에 가기 On Seeing and Noticing>(2005)가 있다. <불안>과 <동물원에 가기>를 제외한 앞의 세 작품들은 모두 '사랑'에 관한 철학적 접근을 다룬 책으로 세 작품의 구조는 거의 비슷하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고 사랑에 빠지고, 사랑하고, 삐걱거리고, 헤어지고 등.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의 경우 사랑하는 여자에 대해 ‘전기’를 쓰는 심정으로 접근하고 있는데, 이런 시도는 독특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하는 사람의 전기를 써보라고 하면 재미있을 것 같지 않은가? <불안>과 <동물원에 가기>는 사랑에 관한 에세이는 아니지만, ‘삶’의 갖가지 모습에 대해 철학적 접근을 하고 있는데, 알랭 드 보통의 연애 이야기에 약간 질릴 때쯤 읽으면 좋을 듯 하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알랭 드 보통의 책은 (예를 들자면 하루키처럼) 그만의 일관된 분위기와 스타일이 확고하기 때문에 한꺼번에 모든 작품을 쭉 읽으면 금세 질린다. 몇 달에 한 권 정도 읽으면 딱 좋을 듯. (난 지금 좀 질려서 역겨워지려는 상태; -_-)
마음에 들었는지 인용 구절을 몇 개 적어놨더라.
평소에는 멀쩡한 사람도 사랑을 하면 편집증에 걸리고, 별별 최악의 생각을 다 한다. - 그 남자/그녀는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아, 싫증내고 있어, 적당한 때가 되면 이 사람은 모든 걸 없던 일로 돌릴 거야……. 편집증은 사랑이라는 감정에 따르는, 극히 자연스런 현상일 것이다. 상대를 높이 평가하니 내가 버려질 가능성이 점점 커질밖에. <우리는 사랑일까> p165
상대의 특징들을 의식하면서 우리에게는 서로의 이름을 다시 지어주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사랑은 사랑이 만들어내지 않은 이름을 들고 우리를 찾아온다. 그것은 태어날 때 부모가 준 이름이고, 여권과 등록증에 공식적으로 적힌 이름이다. 연인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독특함을 찾아낸다는 것을 고려할 때,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는 이름으로 그 독특함을 표현하고 (비록 간접적이라고 해도) 싶어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p151
두 사람이 서로 익숙해지면 익숙해질수록, 함께 이야기하는 언어는 일반적인 언어, 사전에서 정의된 담론의 언어로부터 멀어진다. 익숙함은 새로운 언어를 창조한다. 두 연인이 함께 짜 내려가는 이야기와 관련을 맺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잘 이해할 수가 없는, 친밀성에 기초한 집안 언어이다. 그것은 공유된 경험의 축적을 암시하는 언어이다. 거기에는 관계의 역사가 담겨 있다. 그 언어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말은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과 달라진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p158
어쩌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아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가지 우리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다는 것도, 본질적으로 우리는 사랑을 받기 전에는 온전하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p161
“우리”라고 쓴 게 웃기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이 우리가 알랭 드 보통의 소설에 매혹당하는 (혹은 그와 반대로 역겨워하는) 이유가 된다."라니 아 웃겨. ㅋㅋㅋㅋㅋㅋㅋ 자냥아, 여기서 니가 말하는 “우리”가 누구니? ㅋㅋㅋㅋㅋㅋ 스스로 자신을 지적 허영 가득 찬 사람이라고 정의내리고 있는 것도 웃기다. 알긴 아네........
제목: 생각 (작성 날짜: 2015/1/22)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읽었더라, 아마도 알랭 드 보통의 책이었을 것이다. A라는 인물이 현재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식(섹스 포함)은 지금까지 A가 사랑해온 과거 연인들 관계의 총합이다. A가 만나온 연인들의 지난 역사의 결과물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런 내용이었다.
이걸 달리 생각해보면, A라는 인물이 지금 만나는 연인은 과거 연인의 총합이다, 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A의 현재 연인 B는 과거 연인 C D E F에서 장점은 더하고 단점은 뺀 그런 총합. 물론 또 B에게는 C D E F에게서 볼 수 없었던 단점이 있을 수도 있지만 C D E F보다는 B가 좀 더 나은 사람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왜냐하면 A라는 인물은 C D E F를 거치면서 사람을 보는 눈도 조금은 성숙해졌을 터이며, 그 관계들을 통해 좀 더 좋은 관계를 맺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A가 지금 B를 사랑하고 있다면 바로 B가 A에게는 가장 좋은 사람, 가장 좋은 연인인 셈이다. A 또한 B에게 그런 존재이고. 그러니 우리 모두 지금 곁에 있는 연인이 최고라 여기고 사랑하라는... (읭? ㅋㅋ)
아 진짜 웃기다. 아무튼, 여기 서재에 올린 글들도 한 10년 뒤 20년 뒤 보면 이런 기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