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안 시켰지만 그냥 하는 글쓰기 공부> 2일차- 어제(11월 2일)는 정희진 쌤 글쓰기 특강 두 번째 시간. 아이고 머리야.... 강의 전 피곤함을 잊으려고 저녁 늦게 마신 커피가 카페인이 많았는지 새벽 2시 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여 현재 두통과 멍한 증세를 겪고 있지만 그래도 기다리는(?) 분들을 위해 씁니다.
두 번째 시간의 주제는 “생각하는 힘을 키우기 방식 : 탈식민주의, 통섭(通攝), 횡단의 정치의 이해”로, 탈식민주의, 통섭, 횡단의 정치 등의 키워드는 <정희진의 공부>나 그간 희진 쌤이 쓰신 책들을 읽어온 사람들이라면 이미 익숙한 단어들일 것이다. 나 또한 그런 터라 어제의 강의는 복습의 의미도 있었고 또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쌤은 먼저 책을 잘 읽기 위해서는 자신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면서 강의를 시작했다. 자신의 절실한 욕구를 알 때 책을 더 잘 읽게 되는데(절실할 때 흡수가 더 잘 됨/함유율과 흡수율은 다르다/누구에게나 좋은 책이 나에게도 좋은 책일까?), 예컨대 전업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이라면 지금 당장 조지 오웰의 <왜 쓰는가>를 읽어야 한다고.
글쓰기는 “상처나 고통이 자원이 되는” 유일한 분야이기도 하며, 비교적 공정하기도 하다(사회적 합의가 쉬움/좋은 글은 누구나 대개 인정). 그러므로 내성적이고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은 성격의 소유자라면 글을 써라. 돈도 많이 들지 않는다(그러나 돈도 잘 벌리지 않는다)고 독려(?)하시면서 활기차게 강의를 시작. 쌤은 강의에서 바라는 것을 수강생들에게 물어보셨는데 많은 이들이 도움이 될 만한 책이나 영화를 소개해달라고 했는가 보다. 쌤은 그래서 그 첫 책으로 <그 많은 개념어는 누가 만들었을까>를 추천. 영화는 미하엘 하네케 <히든>, 켄 로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M. 버터플라이>를 꼭 보라고. 모두 식민자-피식민자간의 관계를 다룬 영화들인데 왜 이 영화들을 추천했는지는 이 글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깨닫게 될 것이다.
<그 많은 개념어>를 추천한 이유는 아무래도 글쓰기는 언어와 관련이 깊은데(언어는 또 사유와 관련이 깊고) 우리가 현재 쓰는 언어란 영어(근대 영국)에서 일본을 거쳐 식민지 조선으로 들어와 현재의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다. 때문에 이런 책을 읽으면 현대의 우리, 근대의 우리 언어에 대해서 알 수 있으므로 꼭 읽어야 한다고. 글은 결국 사유의 표현으로 어떻게 생각하는 능력을 키울지 고민해야 하는데, 생각을 많이 할 때는 사람이 외롭고 긴장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 외로움과 긴장감을 참고 나오는 글이 좋은 글이 된다고.
탈식민이론은 나와 타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특히 독특한 시각 훈련(사유 훈련)에 좋다(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프란츠 파농 <검은 피부, 하얀 가면> 탈식민의 시원인 책이므로 꼭 읽을 것), 탈식민의 출발점은 “이분법”을 극복하는 것이다. 갑/을이 아니라 갑을병정의 세계. 하이브리드한 세계, 잡종/혼종의 세계이다. 글을 쓸 때는 탈식민적 사고를 지향해야 한다. 인간은 "Social-Body"이다. 사회적 산물이자 행위자. 그런데 “깨끗한 페미니스트” 또는 “완벽한 맑시스트”가 존재할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진보란 “사회의 나쁜 법칙(유혹)이 나에게 침투하지 못하도록 내부에서 투쟁하는 것” 이것이 진보가 아닐까. 글쓰기에서도 타협하지 않는 것, 살짝 포기하거나 자신을 속이지 않는 글쓰기를 해야 한다.
탈식민은 포스트모던과도 맥락상 통한다. 근대는 자유주의(개인의 선택/동의/계약으로 이루어진 사회로 사회의 기본은 개인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의 보수성으로는 이 현실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온 것이 구조주의(갈등/기능/사회구조 중시). 구조조의는 개인의 노력만으로 이 사회 구조를 바꿀 수 없다고 본다. ‘구조가 문제’라는 관점. 맑스주의와 일부 페미니즘이 여기 속한다. 근대의 자유주의는 개인의 변화를, 구조주의는 사회 변화를 요구하지만 이것은 한계가 있으므로 포스트구조주의가 등장. 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도 중요하지만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한다.
포스트구조주의와 포스트식민주의는 사유방식이 비슷하다. 탈식민은 이분법을 극복하는 과정이다. 이분법이란 “A not A”로 “A가 A를 규정”한다. 식민주의는 백인이 유색인을 규정/서구가 동양을 규정/남성이 여성을 규정/비장애인이 장애인을 규정한다. 이럴 때 규정의 기준은 임의적이고 집단적이다. 이때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여자는 다 그래/여자는 다 똑같아/여자는 그래도 돼’ 등등 여성을 생물학적 존재(집단)로만 보기에 성폭력이 일어난다(성폭력이 여성주의에서 중요한 이유). 식민주의는 결국 편견과 고정관념을 강화한다. 우리는 편견을 당하기도 하고 행사하기도 하는 존재(쌤은 당신도 이런저런 편견이 있다고 하시면서 “개량한복 입은 중년남자”에 편견 있다고 하셨는데 진짜 빵 터졌다. 저도 그렇습니다!). 이 점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것을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탈식민-
이분법/이원론을 벗어나는 탈식민적 사유는 이 모든 것을 벗어나므로 독특한 사유가 가능하다. 쉽게 말해서 “내 현실의 사유”를 해야 한다. “나”는 이 이분법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 자신과 솔직하게 직면하는 일이 중요(쌤은 여기서 일기를 쓰지 못하는 자신을 말씀하셨는데 나 또한 일기를 쓰지 못한다. 불편해지는 지점...) 아무튼 모든 이분법에 저항(브레이크/스톱)하는 사유가 필요한데, 젠더와 페미니즘이 탈식민주의 사고에 가장 부합한다.
대부분의 글은 이분법으로 이루어진다. 보자 “임신중단은 여성의 선택이냐 태아의 생명권이냐” 이런 식으로 흘러간다. 이런 점에서 칼럼이라는 장르는 글쓰기 연습에 좋다. 정해진 분량이 있으므로 분량에 맞춰서 글 쓰는 훈련을 하게 되고 당대의 사고를 잘 알고 있어야 하므로 이 또한 사유 훈련에 도움이 된다. 그런데 이때 이분법으로만 이루어진 글을 쓰면 글은 아무런 매력이 없다. 그러므로 어떤 사안에 관해 글을 쓸 때 1. 소거부터 하라. “북핵”에 대해서 쓴다고 가정하면 북핵에 대한 통념부터 일단 제거하는 것이다. 이것들을 제거해 나가야 새로운 시각의 글을 쓸 수 있다. 많이 알수록 소거할 것도 많다. 쓰기는 아는 것을 쓰는 게 아니라 모르는 것을 쓰는 것. 글을 쓰면서 새로 알게 되는 것이 있다면 잘 쓴 글이다. 자신이 아는 것부터 소거해 나가다 보면 생각의 긴장과 외로움이 발생한다. 사고 훈련이 된다. (아니 근데 아는 것도 없는데 그나마 아는 거 다 제하고 나면 뭘 쓰죠? 동공지진...... @_@)
또 다른 예 “독립”의 반대는 “의존”인가? 이런 프레임 안에서 갇혀 있으면 뻔한 글만 나온다. 그게 아니라 “독립”을 “관계”와 연관 지어 생각해보자. 관계로 보면 정신분석을 하게 되고 정신분석을 하다보면 틀림없이 페미니즘과 맞닿게 되고.... 이런 식의 흐름을 타다 보면 좋은 글, 새로운 글이 나오게 된다. 이런 글을 쓰려면 결국 책을 읽어야 한다. 패러다임의 변화를 갖고 오는 책(토마스 쿤, <과학 혁명의 구조>)을 많이 읽어야 하고 사회에는 또 그런 책이 많아야 한다. 공동체의 자원이 풍부해야 한다. 나의 상대가 발전해야 나도 발전. 여성의 경제적 독립? “독립”이라는 기존의 언어 프레임에만 갇혀 있으면 남성들과 똑같은 전철을 밟을 뿐이다.
보편적(Universal) 사고는 위험하다. 기준이 하나인 세계가 “보편”이다. 이것은 폭력적이다(자유주의/구조주의의 세계). Poly Universe- 버전이 여러 개 다양성의 세계. 그러나 이 또한 위험하다, 다양성은 “존중” “배려” “관용” “똘레랑스”로 말하는데, 과연 이때 누가 누구를 배려하고 관용을 베푸는가? 다양성의 거짓- 빨주노초파남보는 모두 같은 권력인가? 진짜 빨갱이는 자신을 표현할 때 붉은색을 쓰지 못한다(보수인 국민의 힘이 빨강을 쓰지 않는가? 정의당/녹색당은 도리어 빨간색을 쓰지 못한다. 핑크는 또 어떤가? 성소수자의 컬러가 되었다) 백인이 레게 머리를 하면 다양성이지만 흑인이 직모를 하면 열등감의 표현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필요한 것이 TRANS-VERSE(도란스/횡단)의 사고(교차성의 정치학)이다. 110V를 220V로 바꾸는 사고. 나라는 존재는 “언제나 과정 중. 과정적 주체”이다. 유목적인 주체. 멈춰 있으면 고정되어 있으면 미친다!
그러니까 이번 강의는.... 나란 존재는 이분법으로 구성되지 않은 존재이므로 나를 직시하는 행위부터가 나의 가장 절실한 읽기 쓰기와 맞닿는다는 것. 인간은 사회적 산물이므로 이런저런 나쁜 것들(유혹)도 뒤섞일 수밖에 없는데 그나마 그것들이 스며들지 않도록 또는 덜 스며들도록 내부에서 투쟁하는 것이 진보라는 것. 이분법에 갇힌 시선이 아닌 포스트모던/탈식민적 사고의 훈련을 해야 좋은 사유=글을 쓸 수 있다는!
헥.... 힘들다. 이틀째 요약인데도 이렇게 힘들어요. 맞춤법 4일차 열강 중인 우리 은오 강의 많이 들어주시고 열렬한 응원 부탁드립니다. ㅋㅋㅋㅋㅋㅋ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