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헤리치의 말>을 읽고 연달아 <마르타 아르헤리치>를 읽었다. 늦은 밤에 몇 쪽 남은 것을 다 읽은 후 스마트폰을 열었는데, 공교롭게도 한국의 한 남성 피아니스트의 사생활에 관한 좋지 않은 기사를 읽게 되었다.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쇼팽 콩쿠르, 쇼팽의 음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피아니스트이다. 그러다 보니 올리비에 벨라미의 평전 <마르타 아르헤리치>에도 쇼팽 콩쿠르와 관련한 일화들이 소개된다. 이 쇼팽 콩쿠르는 몇몇 한국 피아니스트와도 인연이 깊다. 앞서 언급한 문제의 그 피아니스트 이름을 이 책에서(2005년 쇼팽 콩쿠르에서 3등상을 수상한 그는 심사결과에 불복해서 상금도 수상도 거부했다. 딱히 좋은 인상이 들 만한 일화는 아니어서 성깔이 좀 그렇네....하고 넘겼는데) 본 후, 책을 덮자마자 또 그 피아니스트의 이름과 그와 관련한 좋지 않은 기사들을 읽으니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나는 그 피아니스트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 당시 3등상을 받은 후 국내에서 치켜세우기 바빴을 때도 글쎄 그닥..... 지금까지도 그다지 내겐 인상 깊은 피아니스트는 아니었는데, 사생활과 얽힌 이런 나쁜 이야기들을 읽으니, 역시 영혼이 썩어서 연주가 그랬던 거라는 생각과 함께 전에도 잘 듣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더더욱 그의 연주를 들을 일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르헤리치의 말>과 그녀의 전기를 읽고 나서 하필이면 왜 저 쓰레기 같은 한국 남성 피아니스트 이야기를 구구절절하고 있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다. 나는 책 영화 음악 등을 좋아하고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먹고살고 먹고살아가기 위한 준비를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을 이런 것들을 소비하면서 지낸다. 이 덧없고 지루하고 흥미 없는 세상에서, 오직 그것들만이 유용하고 큰 즐거움과 의미를 준다. 그러나 인간은 어떠한가? 그런 문학, 사상, 사고, 음악, 영화, 미술 등 그러한 온갖 예술을 창작하고 또 구현하고 있는 인간이란 존재는 어떠한가? 인간에게는 그다지 흥미가 없다. 인간은 그들이 빚어낸 예술 작품처럼 완벽하지 않고 여기저기 결점투성이에 대개 가까이 알면 알수록 실망하기 마련이다. 때문에 그것을 만들고 예술로 구현하고 있는 이들에 대해서는 알고 싶지 않다. 알고 나면 좋아하는 예술 작품에 대한 감상이나 감동 면에서 마이너스면 마이너스의 영향을 끼치지 플러스가 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예술가의 사생활에는 관심이 없고 차라리 모르기를 바란다. 이런 까닭으로 한국의 문화보다 저 먼나라의 문학이나 음악, 영화에 더 열광하는지도 모른다. 멀리 있기에 더 쉽게 눈감고 모른 체할 수 있는 그들의 사생활이랄까...
마르타 아르헤리치- 수식어가 필요 없는 이 시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그녀도 내겐 그런 존재였다. 그의 에너지 넘치고 강건하면서도 때로는 이 세상의 모든 규칙이나 관습을 깨버리는 듯한 자유분방한 연주를 들으며 전신에 소름이 돋으면서도 그녀의 사생활에는 관심이 없었다. 알고 싶지 않았다. 자유로운 그녀의 성격을 칭송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약속했던 연주를 취소하고 무대에 올라서는 것을 기피한다고, 그런 태도를 비난하는 평가도 분명 존재했다. 천재이지만 길들여지지 않는, 길들일 수 없는 너무나 자유로운 영혼- 그런 점 때문에 팬도 많지만 또 그래서 비난도 받는 피아니스트.
그런데 나는 이 두 권의 책, <아르헤리치의 말>과 <마르타 아르헤리치>를 읽고 나서 음악가, 연주자, 예술인으로서의 아르헤리치 그 이상으로 인간 아르헤리치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가 이런 성정의 사람이었기에 이런 놀라운 연주를 할 수 있었구나 이해하게 되었다. 1941년 생으로 이제 여든이 넘은 이 고령의 연주자가 얼마나 더 무대 위에서 피아노를 앞에 두고 관객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녀가 세상을 떠난다면 어쩐지 무언가 한 세기가 끝난 것 같은 섭섭한 느낌이 들 정도로 이 두 권의 책은 피아니스트 아르헤리치, 인간 마르타 아르헤리치를 사랑하게 만든다.
유일하게 아르헤리치의 평전을 썼고 2004~2019년 사이 네 번의 인터뷰를 진행해 이 책 <아르헤리치의 말>이 세상에 선보일 수 있도록 한 올리비에 벨라미는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실제 이름은 ‘마리아 마르타’를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루가의 복음서」에서 상냥한 마리아는 그리스도의말씀을 귀 기울여 듣지만 언니 마르타는 그리스도를 대접하느라 분주하다. 마리아는 어떤 재능, 신이 주신 사명에 인도받은 자다. 마르타는 인간적이다. 많은 일로 정신이 산란하고, 삶을 희구하는 자다.’(<마르타 아르헤리치>, 13쪽)
아르헤리치에 관한 이 두 권의 책을 관통하는 가장 큰 줄기는 피아니스트로서의 마르타와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마르타 두 개의 삶, 그 극명히 다른 두 개의 삶 속에서 갈등하고 방황한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고뇌랄까 고민이라고 할 수 있다. 뛰어난 기술과 재능으로 어릴 때부터 돋보였고, 웬만한 콩쿠르에서는 우승을 차지했던 그녀- 그런데 그녀가 피아노 치기를 끔찍이 싫어할 때도 있었고 무대공포증 때문에 스스로 제 손가락에 피가 나도록 상처를 입히기도 했다는 것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이 책들을 읽다 보면 아르헤리치만큼이나 강인했던 그녀의 어머니가 오늘날의 아르헤리치를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런 어머니와의 갈등도 사뭇 이해가 된다. 너무나 사랑하지만 딸이 강압적이리만치 피아노 앞에 앉아있기를 원했던 아르헤리치의 어머니. 그 어머니가 없었다면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아르헤리치는 1986년 아르헨티나 신문 《라 나시온 La Nación》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나는 피아노를 치는 기계가 되고 싶지 않아요. 독주자는 홀로 살아가고, 홀로 연주하고, 홀로 잠들지요. 나한테는 정말 맞지 않는 일이에요.”(<마르타 아르헤리치>, 227쪽) 피아노를 좋아했고, 누구보다 잘 쳤으며 음악을 사랑했지만 피아니스트로서만 살아가는 일에는 때때로 반감을 느꼈던 아르헤리치. 그의 이런 마음은 <아르헤리치의 말>에서도 종종 드러난다.
남들은 영화도 보러 가고 좋아 보인다. 우리는 그럴 수 없다. 사람들은 우리가 무대에서 행복하다고, 그 순간을 기다린다고, 착착 준비를 한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렇지 않다. 우리는 준비되어 있지 않다. 하고 싶지도 않다. (<아르헤리치의 말>, 252쪽)
나는 재즈, 플라멩코 같은 음악 장르에도 열려 있다. 라디오를 자주 듣는다. 그냥 틀어놓고 음악이 나오면 나오는 대로 듣는다. 피아노를 치는 건 아주 좋아하지만 피아니스트로 사는 건 별로다. 이 직업에는 진짜 음악과는 상관도 없는 것들이 꽤 많다. 나는 좀 재미있지만 너무 우스꽝스럽지는 않은 할머니가 되고 싶다. (<아르헤리치의 말>, 257쪽)
이런 이야기만 소개하면 아르헤리치가 피아니스트로서의 삶에 불만만 가득했던 것은 아닌가 하고 오해할 수도 있는데 그럴 리가. 피아노를 못 칠 거라 도발했던 어린이집 남자아이 때문에 피아노를 치게 된 그 순간부터 그녀는 음악을 사랑했고 피아노를 즐겼으며 누구보다 거기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리고 그녀 자신이 말했듯이 “할 수 있는 이상으로 잘하고”(<아르헤리치의 말>,165쪽)싶어 했다. 도리어 자신의 분야에서 완벽하고 싶었기 때문에 가끔은 스스로 슬럼프에 빠졌던 게 아닐까. 그녀 자신도 그 점을 인정한다는 듯이 “완벽에 가까워지고 싶은 욕망과 해내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이 공존”한다고 고백한다. 그런 자기에게는 “까다로운 면도 있으며” 자신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의 힘을 믿”는다고, “노력은 재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란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내 생각은 그 반대”라고(<아르헤리치의 말>, 138쪽) 그녀는 말한다. 이런 말들을 지켜보노라면 그녀가 타고난 재능만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누구보다 노력했고, “혁명을 좋아하지 않고 진화를 선호”하기에 “기존의 것으로 끊임없이 변화를 도모”(같은 책, 121쪽)한 결과, 그 엄정함 속에서 청중을 휘어잡는 자유분방한 빛나는 연주가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한편 이 두 권의 책은 꼭 아르헤리치이 팬이 아니더라도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아주 흥미롭게 읽을 만한 이야기들이 풍요롭게 담겨 있다. “쇼팽이 에로틱하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던데 난 쇼팽이 그렇게 느껴지지 않거든요. 독살당한 꽃 같아요.”(<아르헤리치의 말>, 74쪽)라는 그녀의 말에는 정말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슈만은 상상력으로 여러 지평을 열어요. 그에게는 자기만의 언어, 결코 다른 사람과 헷갈릴 리 없는 그만의 고유한 언어가 있어요. 영혼의 친구, 그래요, 그 수준에서의 친구라면 동의해요.”(같은 책, 61쪽) 라며 슈만을 향한 애정을 서슴없이 고백하는 그녀. 그에 비해 브람스는 별로이며(아르헤리치의 절친인 넬손 프레이레는 브람스를 아주 사랑했으니 그 점도 참 재미나다), 엄정함 속에서 자유로움을 추구한 연주자들, 예컨대 프리드리히 굴다, 호로비츠 같은 피아니스트를 특히 사랑했다는 것도 남다르게 다가온다. 사실 나는 그녀가 그토록 흠모한 이 피아니스트들을 딱히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좀 다른 마음으로 들어볼까 싶어지기도 한다. 넬손 프레이레의 연주도 내겐 좀 밋밋하게 들렸었는데, 마르타가 그토록 칭찬한 그의 연주도 더 귀를 열고 들어봐야겠다.
올리비에 벨라미는 예술가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마르타에게 질문한다. 거기에 마르타는 “아름다움을 찾는 사람, 시대정신을 표현하려고 하는 사람, 자기 시대를 좀 앞서가는 사람, 예술적 수단으로써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사람.”(같은 책, 90쪽)이라고 말한다. 또 그녀는 “대중이 추앙하는 예술가와 대중이 가깝게 느끼는 예술가”가 있다면서 “전자는 불타는 얼음장 같고, 후자는 따뜻한 물을 받아놓은 욕조 같다. 나는 그 둘의 중간이었으면 좋겠다.”(같은 책, 173쪽) 말하는데, 그녀가 말한 예술가이자, 그녀가 소망했던 예술가의 모습이 바로 지금 마르타 아르헤리치 자신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다가오는 3월 알라딘 수입음반 할인전에서는 그녀의 앨범 몇 장을 더 살 것 같다...(응?!)
이 앨범은 이미 갖고 있는 것인데 아르헤리치, 아바도 두 사람의 리즈 시절을 담은 앨범 재킷이 넘나 아름다워서 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