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이면 을유세계문학전집 122
씨부라파 지음, 신근혜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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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타이밍이라는 말, 참 흔하디흔한 말이다. 그럼에도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그 타이밍이 서로 맞아떨어져야지만 사랑이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누구나 알듯이 꽃은 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사랑도 영원하지 않다. 어딘가에는 영원한 사랑이 있다고 항변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당신은 참 젊다. 젊기에 아직 영원한 사랑을 믿을 수 있는 것이리라. 여기 <그림의 이면> 의 주인공 ‘놉펀’처럼.

<그림의 이면>은 태국 작가 씨부라파의 대표작으로 스테디셀러라고 한다. 아름다운 문체와 서정적인 내용, 거기에 최루성 멜로라는 점 때문에 태국은 물론 동남아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단다. 최루성 멜로라는 점 때문에 약간 주저하면서도 태국 작품이라는 말에 솔깃해서 읽기 시작했다. 작품은 한 남녀의 평범한 대화로 시작한다. 남편이 어디선가 그림을 가져왔는데, 아내가 의아한 듯, 그림의 출처를 묻는다. 썩 잘 그린 그림도 아니고 특별히 아름답지도 않다. 더군다나 남편의 취향도 아닌데, 그런 그림이 남편의 서재에 걸려 있는 게 이상하다. 남자도 아내의 의견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스스로 결코 돈을 주고 살 것 같은 그림이 아니다. 그렇게 잘 그리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는 이 그림에 관해 아내가 질문하는 순간부터 ‘움찔’하며 짐짓 무대 위에서 조심스럽게 말하는 배우처럼 ‘친구가 그려준 그림’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그렇게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는 이 그림을 책상에 앉아서 일할 때는 등 뒤에 둔다. 처음 마음먹은 대로 정면에 두었다면 아마도 그림에 몹시 신경이 쓰일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너무나 평범한, 아내뿐만 아니라 모두가 관심을 두지 않는 이 그림을 두고 그는 생각한다. ‘그 그림의 이면에는 인생이 있고 그 인생이 자신의 마음에 새겨져 있음’을 잘 안다고.  그림 하단 한 모서리에 ‘미타케’라고 조그맣게 쓰인 글씨와 6년 전의 어느 한 때를 기록한 날짜가 보인다. 이 그림에는 어떤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 것일까. 그림은 그를 과거로, 추억으로 이끌어간다.

이 서장(序章)만 읽고도, 대부분의 독자는 이 그림이 남자의 지나간 시절과 관련 있으며 그림을 그려준 이와 그가 평범한 사이가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윽고 이 그림을 그려 준 사람이 여성, 그것도 그와는 신분 차이가 꽤 나는 여성이 그려준 것임이 곧 드러난다. 남자의 이름은 ‘놉펀’- 스물두 살인 그는 일본에 유학 와 있다.  어느 날 아버지의 친구인 아티깐버디 공(公)이 일본으로 신혼여행을 오는데, 그는 그 부부가 일본에 머무는 동안 가이드 역할을 해줄 것을 부탁 받는다. 공항으로 마중 나간 놉펀은 공의 곁을 따르는 두 여인 중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은 쪽(중년에 가까운 나이의)을 공의 아내로 생각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훨씬 젊은 쪽이 공이 새로 결혼한 아내가 아닌가. 왕족 출신의 ‘끼라띠 여사’- 그녀가 바로 공의 아내이다.  놉펀은 그녀의 눈부신 미모에 자기도 모르게 깜짝 놀라고 만다.

일본 유학 중인 스물두 살의 남자, 오십 대의 남자와 갓 결혼한 이십대 중반의 아름다운 여성. 일본이라는 공간에서 두 달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체류 기간, 그 시간 내내 그들 부부의 가이드 역할을 해야 하는 남자…. 아, 이 남자 ‘놉펀’과 ‘끼라띠 여사’가 결국 사랑하는 사이가 되겠구나. 그러나 끝내 헤어질 수밖에 없어서 서로 마음을 정리하고 남자는 이제 여자가 그려준 그림을 들여다보며 6년 전의 일을 회상하는 것이구나…. 초반 몇 장만 읽어도 이야기의 밑그림이  그려진다. 실제로 이 예상은 거의 맞아떨어진다. 그런데 이 흔하디흔한 불륜, 금지된 사랑 이야기가 남다르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작품에서는 간혹 반전(?) 아닌 반전이 등장하는데 첫째로 ‘끼라띠 여사’의 나이가 그렇다. 놉펀은 끼라띠가 자신보다 고작 서너 살 위일 거라고 짐작하고는 친구처럼 가까워진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녀의 나이는 서른다섯. 자신보다 무려 열세 살이나 연상이다. 놉펀은 이 사실을 알고 당황하지만 이미 그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그녀에게 빠져버린 뒤이다. 놉펀을 비롯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과 끼라띠의 결혼을 순수하게 ‘사랑’ 때문에 이뤄진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이토록 젊은 미인과 다 늙은 남자가 서로 사랑할 수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개 결혼과 사랑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놉펀은 끼라띠가 돈의 위력이나, 이런저런 압박 때문에 마지못해 늙은 남자와 결혼한 것이라고는 쉽사리 생각하지 못한다. 그녀는 꽤 결혼에 만족해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왕족인 끼라띠가 왜 이 늙은 남자와 결혼한 것일까? 어떤 면에서는 독특한 캐릭터라고 볼 수 있는 끼라띠의 베일에 쌓인 듯한 성장 과정과 결혼하게 된 사연을 조금씩 알아가는 재미도 이 작품을 흥미롭게 만든다.


“제가 계속 온 마음을 기울여 여사님을 사랑해도 됩니까?”
“그것은 자네의 정당한 권리야. 그렇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네는 자신의 듯으로 그 권리를 포기할 테지.”
“저는 여사님을 향한 저의 사랑이 결코 사그라지지 않을 거라 확신합니다.”
“자네처럼 어린 나이에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매우 자신감을 갖지. 하지만 우리는 계속 결정을 기다려야 하는 존재야. 자네의 자신감에 축복을 비네.” (98쪽)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 이 장면에서 탄식하고 말았다. 스물 둘 이제 처음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남자는 영원한 사랑을 말한다.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은 결코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그보다 십여 년은 더 산 여자는 그 남자가 그 정당한 권리를 그 스스로 포기하게 되는 순간이 올 것이라고 답한다. 그러면서 그렇게 확신에 차서 말할 수 있는 그의 젊음에, 자신감에 축복을 빈다. 내가 만일 놉펀과 비슷한 나이에 이 책을 읽었다면 영원한 사랑을 말하는 그의 편에 서서 이 금기의 사랑이 꺼지지 않기를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서른다섯의 여자는 이 세상에 사그라지지 않는 것은 없다고, 언젠가 당신은 스스로 그 마음을 포기하게 되리라고 달관하듯이 말한다. 인생의 덧없음, 사랑의 덧없음을 말하는 끼라띠의 말에 나는 마음이 무너지고 만다.

처음에 놉펀은 끼라띠와 공(公)의 나이 차이를 생각하면서 그들이 결코 사랑으로 맺어진 사이는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자신이 자기보다 열세 살 연상인 여성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끼라띠는 또 어떤가, 남편과의 결혼 생활을 설명할 때 그녀 또한 많은 나이 차이를 들면서 “그건 마치 우리의 사랑 사이를 막는 큰 산과 같아서 우리의 사랑이 만나지 못하게” 만든다고 고백한다.  그녀는 나이 든 남자와 젊은 여자 사이의 사랑을 믿지 않는다. 그런 사랑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다고 믿지”(62쪽) 않는다. 그렇다면 그 반대는 어떨까? 열세 살 연하의 남자와의 사랑을 그녀는 믿을까? 가능하다고, 존재한다고 생각할까? 사랑은 이런 기존의 믿음을 뒤흔든다. 그러나 그런 사랑조차 또 그렇게 쉽게 지기도 한다.

인간은 종종 타인을 사랑할 때 당신을 향한 마음은 결코 변하지 않으리라고 맹세하고 다짐하고 확신한다. 어떤 이들은 그 사랑이, 그 맹세가 결코 변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또 어떤 이들은 그러한 맹세와 사랑의 덧없음을 알면서도 믿는 척한다. 그러다가도 어느 틈엔 남들의 사랑은 그렇지 않더라도 나의 사랑만큼은 그럴 것이라 섣불리 확신하거나 희망하기도 한다. 현실에서는 영원한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기에 문학이나 영화, 드라마를 통해 그런 이야기를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고자 한다.

끼라띠는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이 행복의 어머니라고 믿지. 내 생각엔 그게 항상 진짜는 아니야. 사랑은 인생에 고통 또는 온갖 상처가 생겨나게 할 수도 있어.”(62쪽) 그녀는 사랑이 행복의 원천이라고 믿지도 않고, 사랑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차라리 그것이 “행복 없는 사랑을 갈망하고 근심하는 것보다 나을”(63쪽)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림에는 이면이 깃들어 있듯이 이렇게 확신했던 끼라띠도, 놉펀도 자기의 생각, 믿음, 바람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아니, 그러지 못한다. 마음은, 인생은 그들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영원히 사랑하리라 숭배하던 대상도 시간이 흐르면 여느 친구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느껴지고, 그 사람이 아니면 죽을 것만 같던 열정도 그리움도 낯설게 다가온다. 처음 만날 때 입었던 하얀 꽃송이 가득한 남색 옷이 더는 특별하게 다가오지 않을 때 우리는 그 사랑이 이미 끝났음을, 저버렸음, 그렇게 한 시기가 지나갔음을 안다. 인간 모두의 사랑이 그렇게 되리라는 것도 안다.

끼라띠는 아름다움을 사랑한다. 모든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녀에게 “아름다움은 결점과 시듦이 없는 상쾌한 감정”(48쪽)을 주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녀는 아름다운 것들은 결국 시들고 말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 아름다움이 가장 빛나는 순간에 더 집착했던 것은 아닐까. 내게 <그림의 이면>이 가르쳐 준 생의 비밀은 결국, 무상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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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10-11 17: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거 참 작가의 이름이
발음하기 거시키하네요.

coolcat329 2022-10-11 17:38   좋아요 0 | URL
아 저도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2-10-11 22:22   좋아요 0 | URL
씨부라파! ㅋㅋㅋ

그레이스 2022-10-12 22:40   좋아요 0 | URL
레삭메냐님때문에 자각했습니다.^^;;
요즘 동남아 문학이 조금씩 알려지는 듯요.
내용으로 봐서는 우리나라 1970년대 작품으로 느껴지네요^^

coolcat329 2022-10-11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기에 미스터리 요소가 있는 거 같아요. 제목도 미스터리하고요.

잠자냥 2022-10-11 22:23   좋아요 1 | URL
미스터리라면 미스터리일까요? ㅎㅎㅎ 미스터리에 너무 기대는 하지 마세요!

Falstaff 2022-10-11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일찌감치 보관함에 모셔놨는데요, 아후, 작가 이름 발음하기가... 어려운 건 아닌데 자꾸 입에서 이상하게 나와 그게 한 가지 흠이더라고요. 흑흑흑..... 꼭 아파트 이름 리젠씨빌 같아요. ㅠㅠ

잠자냥 2022-10-11 22:23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씨부라파 리젠씨빌 ㅋㅋㅋㅋㅋ

다락방 2022-10-12 07: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그러고보니 태국 소설을 안읽어본 것 같은데 이 책 읽어봐야겠어요. 조만간 땡투 들어오면 또 우리 다락방이 경제적 도움을 주었구나,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 그러고보니 태국 갔을 때 무슨 전시 보고 그 전시에 해당하는 책을 사놓긴 했었거든요. 그 책은 어디있나 모르겠네요. 흠흠. (지금 제 서재 가서 검색해보니 <쿤창과 쿤팬의 이야기> 였네요. 태국의 고전문학 이라네요. ㅋㅋ 별 걸 다 사둔 사람..)

잠자냥 2022-10-12 08:40   좋아요 0 | URL
ㅋㅋㅋ 다부장님이 경제에 큰 도움 주고 계십니다. 저도 태국 문학은 처음이었어요. 근데 다부장님은 진짜 별걸 다 사두네요?!

2022-10-12 1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12 14: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12 14: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파랑 2022-10-12 15: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림에 대한 사연이 있는 이야기네요 ^^ 왠지 흥미가 땡깁니다. 게다가 최루성 멜로라니 제가 좋아하는건 다 들어있는 작품이군요~!!

잠자냥 2022-10-12 15:47   좋아요 1 | URL
네, 새파랑 님은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를 좋아하셨으므로 이 책도 좋아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바람돌이 2022-10-12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국문학은 진짜 소개된것도 처음 보는듯하네요. 동남아시아쪽의 문학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쪽에서는 아프리카 문학보다 더 모르는듯요. 저도 찜해갑니다

잠자냥 2022-10-13 09:52   좋아요 0 | URL
네, 바람돌이 님 말씀처럼 아프리카문학보다도 더 덜 알려진 것 같습니다. 바람돌이 님도 태국 문학 꼭 한번 만나보세요~

다락방 2022-10-14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일 아침에 땡투 들어올겁니다, 잠자냥 님 ㅋㅋㅋ 잘 받으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2-10-14 16:07   좋아요 0 | URL
다부장님도 낼 아침에 땡투~ 들어갈걸요? 그걸로 정답 찾으세요! 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2-11-09 16: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이 리뷰 이제 읽었는데, 무상함! 흔한 소재를 특별하게 그려냈다니 좋은 소설일 듯 합니다.
외국 작가 이름 보고 웃으면 실례인데..그래도 씨부라파 ㅋㅋㅋ

잠자냥 2022-11-09 17:21   좋아요 1 | URL
앗 씨부라파 ㅋ 오랜만(?)에 다시 그 이름 들으니 저도 웃음이… ㅋ 괭님도 추카추카~

은오 2023-02-23 0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0년만 더 일찍 알라딘 올걸.... 테니스를 배울걸....

잠자냥 2023-02-23 00:30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 중딩 때?!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