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런 홀링허스트, <아름다움의 선>으로 처음 만났을 때 와, 이 사람 뭐야? 문장이 정말 유려한데 하고 놀랐다. 나는 길고 화려한 문장보다는 담백하고 건조한, 수식이 많지 않은 문장을 좋아하는 편이다. 묘사를 극도로 세밀하게 해서 진저리가 나게 하는 글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이를테면 발자크와 헨리 제임스 같은). 이런 작가들 글을 읽노라면 아, 그만! 그만 주변 상황 좀 묘사하고 본 내용을 말하라고! 나도 모르게 속으로 소리치고 있다. 그런데 헨리 제임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 앨런 홀링허스트의 작품을 읽으며 문장이(심지어 번역본이면서) 아름답다고 느끼다니 참으로 신기했다. 그 이후로 나는 앨런 홀링허스트 이름을 새겨두고 그의 작품이 출간되면 반가운 마음으로 덥석 사고는 했다. 그러나 서재 친구들이 잘 알다시피, 두 번째로 번역된 그의 작품 <수영장 도서관>을 읽었을 때만 하더라도 지나치다 싶을 만큼 과한 게이 섹스 묘사에 질려 버려서 이 작가 책은 그만 읽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더랬다.
그런데 최근 민음사에서 <스파숄트 어페어>와 <이방인의 아이>가 잇달아 나오자 나는 또 귀신에 홀린 듯 그의 책을 장바구니에 담고 있었다. 각권 640쪽, 880쪽에 10% 할인해서도 18,000원, 19,800원. 결코 만만한 두께와 가격이 아니다. 그런데도 반가운 마음으로 샀다. 뭐야 이 지경으로 그의 문장에 매료당한 거야?(게이 섹스에 매료당한 거 절대 아닙니다. 저는 BL물 좋아하지 않습니다. 안 읽습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전 <스파숄트 어페어>부터 읽었는데 640쪽, 이 두꺼운 책(본문만 그 정도 분량이다. 이 책은 해설은 물론 옮긴이 글도 없다)을 휴일 이틀 동안 내리 읽어버렸다. 그만큼 흥미진진하고 ‘와, 역시’ 할 정도로 그 섬세하고 아름다운(그래서 때로는 허영이 느껴질 정도의) 문장을 굶주린 듯 탐욕스럽게 빨아들였다. 게다가 지금까지 읽은 그의 작품(<아름다움의 선>, <수영장 도서관>, <스파숄트 어페어>) 중 게이 섹스 묘사가 가장 덜 노골적이어서 심적으로 읽기 편했던 것 같기도 하다.
<스파숄트 어페어 The Sparsholt Affair>라니, 무슨 뜻일까? 궁금했다. 책을 몇 장 읽고는 ‘스파숄트(Sparsholt)’가 사람 이름, 정확히는 ‘데이비드 스파숄트’의 성(姓)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책 제목은 스파숄트 사건? 스파숄트 불륜? 스파숄트 정사(情事), 스파숄트 스캔들 뭐 이런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김 씨 사건, 김 씨 불륜, 김 씨 스캔들 뭐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 김 씨는 너무 흔한 성이니 흔치 않은 성을 붙여야 할 것 같기는 하다. 이 책에서도 스파숄트라는 마치 “무슨 엔진 부품이나 총 같은 이름”, 그 특별한 성(姓) 때문에 데이비드 스파숄트가(또는 그 집안 식구들이) 겪어야만 하는 지난한 고통이 묘사되기 때문이다.
이 데이비드 스파숄트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름 뒤에 ‘Affair’가 붙어 스파숄트 어페어, 스파숄트 스캔들이라는 하나의 사건이 되었을까? 사실 그의 잘못(?)이란 너무나 아름답다는 죄뿐이다. 조각상을 떠올리게 할 만큼 눈부신 육체와 미모의 소유자라는 점 그뿐이다. 그런데 자신의 눈부신 미모가 하나의 거대한 스캔들이 되리라고는 열일곱 살의 그는 전혀 알지 못했으리라. 때는 1940년, 2차 세계 대전이 한창 진행 중인 그 불안한 소용돌이 속에 옥스퍼드 교정에 숭고할 정도로 아름다운 청년, 데이비드 스파숄트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다. 모두의 눈을 사로잡는 완벽한 육체와 아름다운 얼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그의 등장은 옥스퍼드 교정에 거대한 폭풍을 불러온다.
옥스퍼드의 게이들은 데이비드를 보자마자 모두가 그를 향한 애끓는 마음을 제어하지 못한다. ‘에버트 닥스’와 ‘피터 코일’도 그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두 사람의 친구인 ‘프레디 그린’은 에버트, 피터와는 달리 동성애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데이비드 스파숄트를 줄곧 주시한다. 분명히 프레디는 그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러나 자신과는 너무도 다른 세상의 사람이기에 관찰해 두면 언젠가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에 그를 지켜본다. 그럼에도 프레디의 눈에조차 그에게는 어떤 특별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프레디는 에버트나 피터처럼 데이비드를 향한 노골적인 관심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오히려 그와 가장 먼저 가까워진다. 그리고 피터나 에버트가 알고 싶지만 알 수 없었던 데이비드의 사생활의 면면을 알아간다. 예를 들면 그 눈부신 육체의 소유자가 2년 전까지만 해도 ‘약골’에 ‘힘없는 말라깽이’였다는 것, 그렇기에 항상 괴롭힘을 당했고 유일하게 잘하는 운동이 달리기, 아니 도망치기였다는 것, 그러던 어느 날 강해지기로 결심해서 운동에 매달린 결과 그런 몸매를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아름다운 청년에게는 이미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 등등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에버트나 피터의 바람과 달리 데이비드 스파숄트는 엄연히 약혼녀가 있는 이성애자인 셈이다.
그런데 어느 날 에버트가 들떠서 털어놓는 이야기에 프레디는 깜짝 놀란다. 에버트는 말한다. 어젯밤 그, 그러니까 데이비드를 “가졌다”는 것이다. 에버트의 환상일까? 꿈은 아닐까? 부풀린 말은 아닐까 의아한기만 한데, 이어지는 에버트의 이야기를 듣자니 데이비드 스파숄트와 에버트 그 둘 사이에 있을 법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부유한 집안 출신인 에버트는 전쟁 중에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지 않았는데, 데이비드는 어느 날 원치 않는 사건에 휘말려 급하게 돈이 필요해진다. 에버트에게 20파운드를 손쉽게 얻은 데이비드. 그리고 그날 그 두 사람은 침대에서 뜨거운 시간을 보낸 것이다. 프레디는 데이비드가 20파운드에 굴욕적으로 자신의 몸을 팔은 게 아닐까 의심하지만, 사랑에 빠진 에버트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다가 얼마 뒤 데이비드는 에버트에게 엽서를 보낸다. 거기에는 쉽사리 그 뜻을 짐작할 수 없는 기호, 알파(Α)와 오메가(Ω) 단 두 글자만 쓰여 있다. 이 두 기호를 보고 에버트는 생각한다. 그는 그것이 “내가 그 무엇보다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뜻”이 아닐까 추측하는데, 프레디는 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뜻”(126쪽)일지도 모른다고 자신의 친구가 헛된 망상을 하지 않기를, 그리고 그 망상으로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조심스레 덧붙인다.
이 알파와 오메가는 정말 어떤 의미일까? 프레디의 추측처럼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뜻일까? 아니면 한눈에 데이비드에게 반하고 그를 사랑하게 된 에버트의 바람대로 그 자신이 데이비드 스파숄트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는 뜻일까? 여기까지는 이 책의 초반인 100여 쪽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그 이후 500쪽 가까이에서 이 엽서 속 두 글자 ‘알파와 오메가’에 관한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이 펼쳐진다. 2부부터는 생각지 못한 인물들이 속속 등장하고 그들은 씨줄과 날줄처럼 얽히면서 켜켜이 이야기 타래를 만들어 나간다. 그러다가 그 이야기들이 하나로 모아져 어느 한순간 폭발하면서 독자는 카타르시스를 만끽하게 된다. 그리고 앨런 홀링허스트는 그 개개인의 이야기 속에 1940년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영국 사회, 더 나아가 이 세계의 변화를 섬세하게 포착해 그려나간다. 이 기나긴 과정을 지켜보노라면 결국 ‘스파솔트 사건’은 ‘스캔들’, 그러니까 추문이 아니라 하나의 ‘사랑’이야기, 그러니까 ‘어페어’였음을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