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자평 백일장 이벤트 도서를 다 읽고 나니 숙제를 마친 기분이다. 이벤트 해당 도서는 28권인 것 같은데 그중 나는 예전에 읽은 책 2권, 이번 달에 읽은 책 10권을 포함해서 모두 12권의 100자평을 남겼다. 그중 몇 개나 뽑힐지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많이 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하면서 그제부터는 읽고 싶은 책을 읽기 시작했다. 물론 100자평을 남기기 위해 책들도 궁금했고 읽고 싶던 책이긴 했지만 뭔가 의무감에 읽은 감도 없잖아 있었다.......; 지금 나는 기말 시험 끝난 뒤 읽고 싶던 소설책 잔뜩 싸놓은 기분이랄까.
뭘 읽을까 하다가 전에 사두었던 현대문학 세계단편선, 리처드 매시슨 <2만 피트 상공의 악몽 외 32편 >을 꺼내들었다. 리처드 매시슨은 스티븐 킹과 더불어 현대 호러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작가이다. 사실 나는 공포물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고, 공포영화도 즐기는 사람이 아닌데도 이렇게 더운 날에는 호러 소설에 손이 가곤 한다. 아무래도 날이 몹시 더우면 집중력이 떨어져서 어려운 책 읽기는 좀 버겁다. 그래서 몰입이 잘 되거나 흥미 위주의 책에 손이 가는 것 같다.
단편이라 하루에 몇 편씩 읽고 있는데, 어젯밤에 읽은 단편 <사막 카페>는 소름이 쫙 끼쳤다. 600쪽이 넘는 페이지, 33편의 단편 중 내가 읽은 것은 이제 고작 6분의 1에 해당하는 100쪽 남짓, 8편에 그칠 뿐이지만 리처드 매시슨의 작품은 환상적인 요소도 간혹 있으나 주로 일상적인 현실에 기반한 인간의 이상 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하는 것 같다. 그래서 더 무서운 느낌이 든다. 사실 귀신이나 유령이 튀어나오고, 말도 안 될 정도로 비현실적인 작품은 무섭다기보다는 약간 실소가 나오는데, 리처드 매시슨 작품은 아직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특히 이 <사막 카페>는 실제로 있을 법한 이야기라 더 소름끼친다.
자동차를 타고 사막을 여행 중인 부부- 배도 고프고 목도 마르던 참에 한 카페를 발견한 그들은 잠시 쉬면서 요기나 할 겸 그곳에 들어간다. 카페 안에는 손님으로 보이는 남자 몇 명이 앉아 있는데, 그들은 제대로 씻지도 않고 이 더위에 녹아내린 듯한 자세로 다들 멍청히 앉아만 있다. 카페 주인도 장사할 의욕이 없는지 그들과 거의 마찬가지이다. 메뉴판을 보고 부부는 이런저런 음식을 주문하지만 카페 주인은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며 타박만 한다. 그럼 일단 시원한 물이라도 한 잔 가져다 달라니까, 제대로 씻지도 않은 듯한 유리컵에 싱크대에서 수돗물 받아서 가져다준다. 그걸 지켜보던 부부는 불쾌하기 짝이 없지만, 목이 몹시 마르던 터라 컵에 입을 가져간다. 그러나 미지근하고 이상한 냄새까지 나는 물은 삼키는 것 자체가 고역이다. 남편은 일단 대충 주문을 마치고, 아내가 주문하는 동안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면서 자리를 뜬다. 물맛도 시원찮으니 세수라도 하고 오면 정신 좀 날 것 같다는 그. 남편이 화장실을 간 동안 결국 남편과 같은 메뉴를 주문한 아내는 무료한 터에 카페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자기를 쳐다보는 남자들과 눈이 마주친다.
카페 주인이 이윽고 주문한 음식을 가져오는데, 이상하다. 남편은 왜 이렇게 오지 않는 걸까? 게다가 또 다른 남자가 화장실을 들어갔다 나오는데도 남편은 나올 줄을 모른다. 간단히 세수만 하고 오겠다더니 변비에라도 걸렸는지 이 사람은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아내는 초초해진다. 그리고 왠지 카페 안 남자들이 자신을 더 집요하게 쳐다보는 것 같다.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생각한 아내는 화장실을 들어갔다 나오는 한 남자에게 “화장실 안에서 내 남편을 보지 못했느냐” 묻는데, 남자는 화장실 안에 아무도 없다고 말한다. 아무도 없다니! 아무도! 믿을 수가 없는 아내는 이제 너무나 불안해서 카페 주인에게 화장실 안에 좀 들어가 봐달라고 부탁한다. 주인은 투덜대면서 화장실을 들어가는데, 어라?! 정말 아무도 없는 게 아닌가. 대체 이 남편은 어디로 갔을까, 아내의 불안과 초조함은 극에 달한다. 카페 안 손님 중 여자라고는 자기 밖에 없었고, 이제 남자들은 자기를 더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것 같다. 여자는 본인이 직접 화장실에 들어가 보겠다고 하면서도 뒤에서 ‘이 남자들이 나를 덮치면 어떡하지’하는 생각으로 공포에 떤다. 화장실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남편과 카페 안에 낯선 남자들과 자기 혼자만 남은 여자. 밖은 인적이 드문 사막이다. 진짜 무섭지 않은가?
어제 밤 11시 30분쯤 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이 여자의 공포가 생생하게 전해지는 듯해 졸음이 밀려오던 참에 잠이 확 달아났다. 낯설고 인적 드문 곳을 여행하다가 들어간 카페에는 불량해 보이는 남자들만 있다. 동행한 남자는 갑자기 사라지고, 여자 혼자만 남는다. 이런 상황이라면 대부분의 여자들은 이 아내와 같은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남편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어서 막막한데, 저 기분 나쁜 남자들이 나를 덮치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하는 공포. 그런 데다가 이 남자들은 남편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고는 “당신을 버리고 달아났나 보다”하면서 낄낄거리기 시작한다. 여자 곁에 남편이 있을 때는 흘낏 쳐다만 보며 아무 말도 못하더니 남편이 사라지자 노골적으로 조롱을 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공포는 저 사막이 아니라, 저 사막의 카페가 아니더라도 이 도시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 특히 인적이 드물거나 그런 시각이라면 더. 며칠 전 본 기사에서도 아침 7시쯤 지하철 1호선에서 오십대 남자가 젊은 여성을 흉기로 위협하면서 성추행한 사건이 있었다. 늦은 밤도 아니었고, 황량한 사막에서 일어난 사건도 아니다. 도심의 한 지하철, 그 시간 그 칸에는 피해 여성과 그 범죄자만 있었을 뿐이었다. 이런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기에, <사막 카페>에서 그려지는 상황은 더 소름끼치게 다가온다. 어떤 유령이 나오는 호러물보다 더 무서운 상황이지 않은가? 남편이 사라진 상황과 그래서 아내는 어떻게 되었을지는 이 책을 읽을 사람들을 위해 비밀.
그밖에도 <사냥감>이라는 작품도 인상 깊다. 이 작품은 한 여성이 특이한 인형을 사놓고는 남자친구를 만나러 가려고 한껏 멋을 부리며 시작한다. 오늘은 남자친구의 생일. 오래전부터 기다렸고 그 인형은 연인을 위해 그녀가 마련한 선물이다. 창을 들고 있는 고대 인형인데, 남자친구가 그런 쪽에 관심이 많아서 여자가 특별히 준비한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억압적인 엄마 밑에서 과보호를 받으며 자란 듯하다. 오늘도 엄마에게 가지 않으면 엄마가 분명 몹시 상심해 하면서 자신을 들볶으리란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오늘은 남자친구의 생일인데, 약속까지 했으니 취소할 수는 없어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양해를 구한다. 하지만 엄마는 강경하기만 하다. 남자친구와의 약속과 엄마 사이에서 압박을 받으며 갈등하던 여자는 우울해하며 일단 전화를 끊는데……. 그러고 돌아섰더니…… 인형이…… 인형이……!!!! 이것도 비밀. 아무튼 이 작품은 억압받는 여성의 이상심리를 잘 표현하고 있다.
이 책은 뒤로 갈수록 리처드 매시슨의 대표작이 실려 있는 것 같아 좀 더 기대가 크다. 현대문학 단편선 중에 또 다른 호러/공포물로는 러브크래프트의 <크툴루의 부름 외 12편>과 몬터규 로즈 제임스의 <호각을 불면 내가 찾아가겠네, 그대여 외 32편>이 있다. 둘 다 이 여름에 읽기 제격이다. 러브크래프트 작품집은 흐물흐물 형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것’으로 공포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탁월한 작품들이 실려 있고, 몬터큐 로즈 제임스 단편집에는 유령이나 초자연 현상을 다룬 작품이 많다. <호각을 불면 내가 찾아가겠네, 그대여> 이 작품집은 아직 다 읽지 못했는데, 리처드 매시슨 다 읽고 나면 이 작품집도 마저 읽어야겠다. 리처드 매시슨, 러브크래프트, 몬터규 로즈 제임스 세 작가의 작품을 비교해서 읽는 것도 이 여름을 시원하게 보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아닐까. 소름이 으스스! 37도에서 2도쯤은 낮출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