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스 꾸바스의 사후 회고록 창비세계문학 20
마샤두 지 아시스 지음, 박원복 옮김 / 창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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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 세계문학전집에서 꽤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브라스 꾸바스의 사후 회고록>- 제목만 보면 딱히 관심이 가지는 않는다. ‘브라스 꾸바스’라는 이름도 그렇지만 ‘사후 회고록’이라는, 지루해 보이는 제목이 고개를 돌리게 한다. 그리하여 나는 이 작품을 관심 밖에 두었다가 이제야 읽었다. 이 책은 한마디로 웃픈 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설탕을 잔뜩 넣은 에스프레소를 마신 느낌이라고나 해야 할까? 웃기고 슬프면서도 쓰고 달다. 형식부터 독특한 책으로 맨 앞의 ‘독자에게’를 제외하고 모두 160장(章)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부터 160장까지 이야기가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것 같다가도 옆길로 새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그러면서 화자인 ‘브라스 꾸바스’는  넉살 좋게 말한다. 아, 내가 아까 20장에서 말했듯이 말이지……. 아니, 아까 84장에서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았던가? 기억이 안 난다면 다시 가보라…….

브라스 꾸바스가 내 앞에서 자기의 지난 인생을 줄줄이, 두서없이 이야기하는 느낌이다. 그런데 참 재미나게도 이 화자는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점이다. ‘사후 회고록’이다. 회고록이라 하면 죽음을 앞두었거나, 죽기 직전이거나 아무튼 노년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쓰기 마련인데, 이 브라스 꾸바스는 이미 죽어서 자기 삶을 이야기한다. 심지어 이 작품은 “나의 차가운 시신을 가장 먼저 갉아먹은 벌레에게 그리움이 가득한 기념품으로 이 사후 회고록을 헌정한다.”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이 작품도 국내 초역이다), <브라스 꾸바스의 사후 회고록>을 쓴 ‘마샤두 지 아시스’는 브라질 소설가 가운데 최고봉으로 꼽힌다고 한다. 이 작품은 19세기 작품임에도 그 남다른 형식과 그 안에 담고 있는 생각 때문에 꽤 현대적으로 느껴진다. 이런 독특한 경험 때문에 이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이 우리말로 옮겨진다면 또 읽어 볼 것 같다.

‘삶을 두루 여행한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브라스 꾸바스는 세상을 떠날 당시를 이렇게 설명한다. “어쨌든 나는 1869년 8월의 어느 금요일 오후 2시에 나의 아름다운 까뚱비 별장에서 숨을 거두었다. 당시 나는 64세로 그 세월은 험난하면서도 화려했다. 나는 결혼하지 않은 독신이었고 약 300꽁뚜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으며 열한 명의 친구들이 나의 무덤까지 따라왔었다.”(17∼18쪽). 내가 죽을 땐 몇 명의 친구들이나 무덤, 아니 화장터까지 따라올까? 문득 그런 생각도 든다. 그런데 이어지는 문장에서 그들 가운데에는 세 명의 여성이 있었음을 독자는 알게 되는데, 그중 두 사람은 브라스 꾸바스의 여동생과 그 딸, 그러니까 화자에게는 조카가 되는 여성이다. 여기까지는 특별할 게 없다. 그런데 화자는 말을 조금 더듬더니, “그리고한 여인”이 있었음을 밝히는데, 이 여인에 대해서는 선뜻 자세히 말하지 못하고 나중에 알게 될 것이라면서 모호하게 처리한다. 독자는 이때부터 이 여성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리라 유추할 수 있는데,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이 여성은 브라스 꾸바스가 죽기 전까지 사랑했던 사람임을 알게 된다.

그런데 그는 왜 그 여인과 결혼하지 않은 채 평생 독신으로 살다 죽었을까? <브라스 꾸바스의 사후 회고록>은 단순하게만 보면 이제는 남의 아내가 된 20대 시절의 첫사랑을 훗날 다시 만나 죽기까지 사랑하는 이야기다. 주위 시선을 피해 남편을 바보로 만드는 불륜 이야기라고나 할까. 그러나 이 작품의 매력은 그런 큰 줄기 가운데 매 장마다 펼쳐지는 브라스 꾸바스의 평범한 듯하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독특한 세계관, 가벼운 장난기로 가득한 것 같지만 조롱과 풍자, 비판처럼 냉담하고 염세적인 시선으로 삶을 돌아보는 데 있다. 게다가 꾸바스의 철학자 친구 ‘낑까스 보르바’라는 인물까지 등장해서 장광설을 쏟아내는데, 그의 이야기가 자못 논리적이고 말이 되는 듯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브라스 꾸바스 자신도 ‘이 책은 냉담함으로 세월의 무상함에서 이제 해방된 사람의 냉담함으로 씌어졌고 불평등 철학을 다룬 작품으로 이제 꾸밈없고 장난기 가득한 게으른 철학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나는 이 책의 처음 몇 장(章)을 읽고 뜻밖의 발견을 한 것 같아서 만족스러웠다. 이 회고록 곳곳에 염세적 투정이 담겨 있을 거라는 꾸바스의 말도, 이 작품은 ‘우울의 잉크를 묻힌 소란스럽고 밝은 펜대로 쓴’ 산만한 작품으로 독자 열 명은커녕 기껏해야 다섯 명일 것이라는 냉소적이면서도 은근히 웃음이 터지는 표현들에 반했기 때문이다. 그런 데다가 평범한 것 같은 이야기 속에서 평범하지 않은 진리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꾸바스는 브라질 히우지자네이루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강요로 포르투갈로 유학을 떠나고, 대학 졸업 후 유럽을 돌아다니던 중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결혼, 연방하원의원 출마 권유 등등의 과정을 경험하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 이러한 여정을 통해 꾸바스 그 자신은 물론 그가 사랑했던 가족, 마르셀라, 비르질리아 등 연인들의 심리 묘사를 보여주면서 인간의 이중성뿐만 아니라 인생의 모순과 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중 ‘장화 이야기’는 생의 속성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꽉 끼는 장화를 벗으러 갔다. 안심이 되자 난 큰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침대에 곧장 길게 누웠다. 장화에 끌려 다니던 나와 발이 상대적인 행복에 빠져들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꽉 끼는 장화가 지구의 가장 큰 행운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장화는 불쌍한 발을 아프게 하면서도 그것을 벗을 기쁨의 기회를 주기도 때문이다. 화가 날 정도로 발을 아프게 하면서도 나중에는 그 발을 편안하게 해주기에 당신은 제화공들과 에피쿠로스의 취향에 따라 값싼 행복감을 느낀다. (....) 나는 내 마음이 장화를 벗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거라고 느꼈다. 실제로 쾌락이 그 장화를 벗겨버렸다. 그로부터 네댓새 뒤 나는 쓰라린 고통과 근심, 불편한 마음에 이어 빠르고 형언할 수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행복감을 맛보았다. 나는 여기서 인생은 각종 현상들 가운데 가장 기발한 것이라는 추론을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배고픔은 먹을 기회가 다가온다는 설정이 있어야만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굳은살도 그것이 지상에서의 행복을 완벽하게 해주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일 뿐이다. 사실 여러분에게 말하노니 인간의 모든 지혜는 목 짧은 장화만큼의 가치도 없다. (36장 ‘장화에 대하여’, 113~114쪽)


브라스 꾸바스는 명성을 얻지도, 장관 자리에 오르지도 못했고, 결혼이 어떤 것인지도 알지 못한 채 저세상으로 갔다. 물론 그는 자신의 ‘이러한 실패’의 곁에는 이마에 땀을 흘리지 않고도 빵을 구할 수 있는 행운이 있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그의 인생은 행복했을까 아니면 불행했을까? 그는 인생에게 승리했을까 패배했을까? 그는 이 부정적인 것들로 가득한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부정적인 것들, ‘자식도 남기지 않았고, 어떤 피조물에게도 내 불행을 유산으로 물려주지 않았다’ 말한다. 그러므로 그의 생각대로라면 그의 삶은 승리도 패배도 아닌, 태어날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 돌아간 것은 아닐까. 염세적으로 세상을 바라보았고, 명성도 사랑도 얻지 못한 채 조촐한 친구들의 배웅을 받으며 쓸쓸히 죽어갔지만 사랑했고, 살아갔기에 그 삶은 그대로 의미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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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07-15 10:3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브라스 꾸바스가 죽을 때 마지막으로 운명을 지키던 여자가 비르질리아, 단테와 함께 지옥 여행을 했던 베르길리우스의 여성형인 건 왜 그랬을까? 우연아니었을까? 잠시 고민했던 적이 있습지요. ㅋㅋㅋㅋ

잠자냥 2021-07-15 11:01   좋아요 5 | URL
오, 그것 참 말이 되는 소리 같습니다! 일부러 그런 거 아닐까요? *찰싹* 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7-15 11:37   좋아요 3 | URL
ㅋㅋㅋ 어차피 오늘은 하루 종일 줘 터지기로 작정했습니다. ㅋㅋㅋㅋ

새파랑 2021-07-15 10:4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장화 이야기는 와우 하게 되네요. 창비 세계문학전집 앞자리라니 더 읽고싶어지네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 이책의 인생이야기가 궁금해지네요. 중간과정이 궁금해지는 리뷰라니 😐

잠자냥 2021-07-15 11:03   좋아요 4 | URL
장화 이야기는 저도 정말 으아, 했습니다. 이 책은 중간 과정도 꽤 흥미롭습니다. 체호프 다 읽으시면 언제고 한 번 읽어보세요. 사실 별 넷을 주었습니다만 별 다섯과 별 넷 그 사이 어디 즈음입니다.

미미 2021-07-15 11: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오 얼마전에 이 책 보고 제목에 솔깃했었는데 역시 예상대로 본인이 회고를 하는 거군요! 조롱과 풍자,염세적인 시선,장광설 다 제가 완전 좋아하는것ㅋㅋㅋㅋ저도 독자 5명중 한명이 되고픕니다. 퐁당!

잠자냥 2021-07-15 11:04   좋아요 4 | URL
ㅋㅋㅋㅋㅋ 브라스 꾸바스가 기뻐하겠습니다. 이 한국에서만 독자 5명을 넘어설 것 같네요.ㅋㅋㅋ

레삭매냐 2021-07-15 11: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어디선가 보고서는 올해 1월에 쟁여
둔 책인데 여적 안 읽고 뻐탱기고
있습니다.

궈궈씽.

잠자냥 2021-07-15 11:10   좋아요 3 | URL
요즘 읽을 책 많으시죠? 다 읽고 궈궈씽 ㅋㅋㅋ

독서괭 2021-07-15 11: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이제 <고독의우물> 읽기 시작했는데요 이제 잠자냥님 글 읽기 무섭습니다. 한동안 문학을 멀리하던 제게 좋은 소설을 마구 던져주고 계심… 아니 그래도 계속 던져주세요. 감당은 제가 해야죠 ㅋㅋ

잠자냥 2021-07-15 12:20   좋아요 2 | URL
<고독의 우물> 2권짜리! ㅎㅎ 힘내서 쭉쭉 읽으세요-
제 글 읽기 무섭지만 계속 읽으시겠다면 계속 좋은 소설 툭툭 던져드리겠습니다! ㅎㅎㅎ

다락방 2021-07-15 11: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오 저도 읽어볼게요. 저는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이 몹시도 궁금합니다!!

잠자냥 2021-07-15 12:21   좋아요 2 | URL
ㅎㅎ 이 사랑은 속이고 시작하지 않아요- ㅋㅋㅋㅋ

mini74 2021-07-15 18: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죽어서 쓰는 회고록에 설탕 잔뜩 넣은 에스프레소 같은 책이라니 ㅎㅎㅎ 장화 비유. 너무 멋집니다 *^^*

잠자냥 2021-07-15 20:23   좋아요 2 | URL
오오 역시 척하면 착하고 알아들으시는군요! ㅎㅎㅎ

붕붕툐툐 2021-07-15 20: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브라스 꾸바스는 참 입에 안 붙는 이름인데, 이렇게 페이퍼를 작성하시면 안 읽기가 어렵잖아요~ㅋㅋ
브라스 꾸바스는 왠지 장난꾸러기일 것만 같습니다~ㅋㅋㅋ

잠자냥 2021-07-15 23:05   좋아요 0 | URL
일단 방학 리스트부터….. ㅋㅋㅋㅋㅋ

공쟝쟝 2021-07-16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저도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메이저(?)급 출판사 세계문학 전집에서는 창비가 유난히 손이 안가게 생겼더라고요 ㅋㅋㅋ 왤까 ㅋㅋㅋ

잠자냥 2021-07-16 22:07   좋아요 1 | URL
에이 거짓말한다 문학에는 손 다 안 가면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1-07-17 09:02   좋아요 1 | URL
맞아 ㅋㅋㅋ 수능볼때도 비문학 지문을 좋아했던 나 ㅋㅋㅋ 하지만 이거 읽고 싶은 제마음은 진심이예요 😫

coolcat329 2024-03-15 08: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저는 이 책 40페이지까지 읽다가 포기합니다. 산만한 글이 이해가 안가고 무엇보다 소설이 너무 재미가 없네요. 빛소굴에서 나온 <정신과 의사>를 읽고 작가에게 관심이 가서 이어서 읽는 건데 사뒀던 책이라 중도포기가 그저 마음 아픕니다. ㅠㅠ

잠자냥 2024-03-15 09:00   좋아요 1 | URL
ㅎㅎㅎ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맞지 않는 책도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세상에 재미난 책이 많으니 꾸역꾸역 읽지 마시고 다른 책으로 어서 가세요!! ㅎㅎ